# 7-희망을 위한 찬가 - 읽지 않을 수 없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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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결은 눈을 떴다. 눈 주변이 눈물로 차가웠다. 베개도 눈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어스름도 없는 어둠이 적막과 더불어 공간을 감싸는 가운데, 젖은 베게의 차가움은 한층 선명했다. 그는 소매로 얼굴을 닦고 베개 맡에 놓아둔 안경을 쓰고 손목에 찬 시계를 살폈다. 4시였다. 은결은 상체를 일으키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난 이유는 간단했다. 은결은 악몽을 꿨다.
꿈에서, 그는 거인이 쓰러지는 것을 봤다. 빛나는, 그리고 온화한 거인이었다. 그 거인은 거대한 악과 대항해 싸웠고, 언제나 이겼다. 거인의 노력을 통해 세상은 밝았다. 은결은 그의 승리가 영원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어둠의 공격은 끊이지 않았다. 그것들은 몰려오고 몰려왔다. 한 순간, 그 어둠은 아주 크고 강해졌다. 거인은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잠차 밀렸다. 결국 빛나는 거인은 무너지고 말았다. 슬프고 슬펐다.
거기서 은결은 깨어났다. 얼마만이더라? 은결은 지난번에 이 꿈을 꾸었던 것이 언제인지 곰곰이 따져봤다. 기억나지 않았다. 적어도 반년이상은 된 듯 했다. 꽤 오랜만이었다. 예전에는 이 꿈을 꽤 자주 꿨다. 그때는 잠을 자는 것이 두려웠다. 꿈속에서,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서, 언제나 가슴이 아팠다. 꿈이란 꿈꾸는 자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라 하던데, 그때 은결에게 꿈은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다행히,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가슴 한 구석이 싸늘하게 아리긴 해도 그뿐이었다. 금세 감정은 정리 됐다.
‘다행이라고?’
은결은 스스로를 조소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의 냉장고로 향했다. 물을 한잔 따라 들이켰다. 식도를 따라 내려가는 차가운 물의 흐름이 전신을 깨웠다. 그는 왼손으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는 도중 아버지의 방이 보였다. 여전히 방문 틈 사이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은결은 다시 시계를 바라봤다. 4시를 약간 넘은 시각이었다. 갑자기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던 빛이 사라졌다. 은결은 한숨을 쉬고 방으로 들어갔다.
주말 아침, 봄날의 산은 드물지 않은 사람의 행렬로 소란스러웠다. 도천시 사방구 형천동에 위치한 만개산이다. 해발은 400m정도로 높은 산은 아니지만 느긋하게 이어지는 등산로와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광의 아름다움은 일품이다. 봄철이 되면 그 풍광은 한결 절경이 되는데, 산의 입구에서부터 중턱까지 이어지는 긴 등산로를 가득 메우는 벚꽃의 아름다움 덕분이다. 덕분에 전국적인 명소까지는 아니더라도 도천시의 주민들은 물론 근교 다른 도시의 시민들도 여가를 보내러 이곳을 찾곤 한다.
은결의 할아버지도 그 행렬 가운데 있었다. 그의 표정과 움직임은 평지를 걷는 듯 편안했지만 묘하게 빨라서 그는 성큼성큼 앞사람을 헤치고 위로 올라갔다. 도저히 노인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몸놀림이었다. 곧 그는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은 막막한 하늘이 시원하게 트여 있었고, 그 아래로 도천시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래도록 사람들이 찾을만한 풍광이었다.
하지만 은결의 할아버지는 그 모습에 큰 흥미를 느끼지 않는 듯 잠깐 바라보고 발걸음을 이었다. 한데 그가 향하는 곳으로는 길이 없었다. 그는 풀숲 사이로 훌쩍 뛰었다. 노인이 보일 수 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높은 점프였다. 풀숲이 흔들렸고 이내 그의 모습은 수풀과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하지만 산의 정상에 앉아있던 많은 사람들 중 누구도 그의 모습에 주의를 기울이던 사람은 없었다.
은결의 할아버지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바위와 나무 사이에 둘러싸여 들어오거나 나갈 길이 없는 가운데 생겨난 자연적인 공터였다. 사람의 손길로 다듬어지지 않은 바닥은 바위와 자갈로 가득해서, 공터라고는 해도 별로 움직이기 편한 장소는 아니었다. 그곳에 은결이 먼저와 몸을 움직이고 했었다.
격렬하고도 복잡한 움직임이 마치 권법을 수련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일반적인 무술 수련과 결정적으로 틀린 점은 마치 특수영화의 한 장면 같은 모습이 동작 하나하나마다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주먹을 내지를 때, 발로 땅바닥을 박찰 때, 언제나 그 밑으로 빛으로 구성된 결계가 발생해 그 동작들을 받아냈다. 공격과 결계를 자연스럽게 연결해 주변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연습하고 있는 것이다.
“열심이구나.”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은결의 할아버지는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 오셨어요.”
“보아하니, 오늘 아침에 방송된 뉴스와 무관하진 않으렸다?”
훈련을 중지하고 자신을 향해 인사하는 은결을 향해 은결의 할아버지는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은결의 표정으로 짙은 당혹감이 떠올랐다.
“으, 음- 역시 뉴스에 났어요?”
예상은 했지만 아침 뉴스에 벌써 뜬 걸 보면 꽤 화제가 된 모양이다. 하기야. 어제의 참상을 되새겨 보건데 뉴스에 날만도 하다. 과장 좀 보태서 길바닥을 향해 120mm 포라도 쏘아 날리면 그 꼴이 될까 싶은 광경이었다. 힘을 지면 안쪽에서 폭발시켜서 거기서 그쳤지 그렇게 안 했으면 파편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광경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 어제는 평소보다 한결 성대했던 모양이던데, 특별히 곤란한 상대라도 있었느냐?”
“그게, ‘나’라고 자기를 지칭하는 녀석을 만났어요.”
할아버지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수염을 부드럽게 쓸며 말했다.
“호- 그렇다면 그럴 만도 했군. 자아를 가진 요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빠르게 성장하니, 큰 우환이 되기 전에 어서 싹을 잘라야지.”
나쁜 짓하다 들킨 어린아이처럼 은결의 표정으로 뜨끔, 하는 기색이 보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물론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표정이 왜 그러냐?”
은결은 동방예의지국의 착한 학생이라 웃어른에게 거짓말을 안 한다. 양 검지를 톡톡 부딪히며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 그게 무력화까지는 성공했는데 없애지는 못했어요.”
그리고 은결은 심각하게 이맛살을 찌푸린 할아버지에게 당시의 자세한 정황을 전했다.
“흠, 좀 껄끄럽긴 해도 네 힘을 생각하면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 사람을 해칠 수 있을 만큼의 물질화를 이룰만한 힘은 도저히 충당할 수 없을 테니.”
“그런데 요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요? 한 달 만에 셋이나 상대한 것 자체가 드문 일인데 하나는 그세 사람을 죽일 수준이 됐고, 하나는 자아구성 직전까지 가다니, 이건 좀 이상한데요. 마치-”
할아버지가 은결의 말을 막듯이 서둘러 답했다.
“아아, 그건 그 녀석들이 이곳 출신이 아니라서 그렇다는 구나.”
“예?”
“어제 땡중한테 연락이 왔다. 그 녀석도 요즘 네가 상대한 것들과 비슷한 것들과 싸우느라 등골이 다 휠 지경이라고 하더군. 그리고 사념 분석을 해 봤더니 지나(支那)와 우리나라의 것이 뒤섞여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그 안개 같은 몸은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먼지같이 미세한 입자였고.”
은결의 할아버지는 중국을 중국이라 부르지 않는다. 중국(中國)이란 표현에서 읽어지는 오만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은결은 ‘중국’이라 천번만번 불러봐야 중국을 숭상하는 마음이 생길 리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별로 신경 안 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쳐 민족을 중요한 화두로 삼았던 세대인 할아버지로선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동북공정이니 뭐니 해서 시끄러웠던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하기야 은결의 아버지도 ‘광주 항쟁’과 ‘광주 사태’라는 두 표현을 엄격하게 분리해서 사용한다. 실수로라도 ‘광주 사태’라고 말하면 잔소리가 15분짜리다.
“그럼-”
어쨌거나, 그 말에 은결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래. 올 봄 황사를 타고 건너온 것들이지. 아니, 황사의 일부일까? 어느 쪽이든 지나의 인구와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변혁을 생각하면 지금 그것들 가운데 자아가 구성이 완료 단계에 이른 것들이 있어 이상할 것은 없지. 쯧쯧.”
할아버지의 혀 차는 소리가 강했다.
“아아, 그랬군요.”
은결은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할아버지는 은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달래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그때 같은 일은 그렇게 쉽게 생기는 게 아니니까.”
위안을 위한 말이었지만 위안이 되지 못한 모양이다. 은결의 눈동자로 자그마한 우울함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그 기색을 지우고 은결은 입을 열었다.
“예. 그런데 만일 그렇다고 하면 그것들이 발생한지 지난 시간이 제 예상보다 꽤 앞선 것이란 이야기가 되는데, 그러면 혹시 제가 처리하지 못한 녀석이 다시 위험해질 가능성은 없을까요?”
“글쎄다, 시간은 그런 요물들의 위험성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요소이긴 하다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니 뭐라 말할 수는 없구나. 자아형성 후라면 워낙 완만해서 적어도 수십년 단위가 아니라면 별 차이가 없고... 만일 약화된 상태로도 교감 가능할 만큼 영체에 대한 민감도가 높은 인간을 만나 그 감정과 에너지를 흡수한다면- 음, 그러면 혹여 모르겠다만, 그런 인간은 극히 드물기 마련이고, 이 문제는 일주일 먼저 생겼느니 아니니 하는 문제로 어찌될 것은 아니니 네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보이는구나.”
“그렇다면 혹시 미래가 위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은결이 신중하게 말했다. 그 지적에 할아버지의 표정이 조금 진중해졌다.
“낮지만, 배제할 수는 없겠지. 그러나 그에 대한 대비는 상시 해 두지 않았더냐.”
“예...”
그러나 은결의 대답은 우울했다. 짙어진 얼굴의 그늘로 역시 없앴어야 하는데, 라는 자책의 기운이 물씬 풍겨났다. 할아버지의 손이 다시금 은결의 어깨로 올라섰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느냐?”
“그런! 저는 최선을 다 했어요! 다만 더 나은 판단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고-”
은결은 펄쩍 뛰며 답했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맡게 된 일이고, 여러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이 일에 대해 성실하게 임하지 않은 적은 없다. 할아버지가 웃었다.
“그렇다면 괜찮다.”
“하지만-”
“괜찮다. 최선을 다한 결과는 받아들여야 하는 거란다. 할 수 있는 한의 것을 하고 난 결과인 것을 어쩌겠니? 거기에 대해 걱정하거나 후회하는 것은 네 손에 닿는 것이 아니란다. 그러니 반성은 하되 얽매이진 말거라.”
“...예.”
할아버지의 말에 은결은 가슴 한 구석으로 차오르는 따스함을 느끼며 느릿하게 답했다. 할아버지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한 손을 등 뒤로 하고 왼발과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떤 무술의 기수식 같았다.
“그럼 오랜만에 이 할애비가 네 수련에 동참해 보도록 할까?”
“안 봐드릴 겁니다.”
은결은 웃으며 자세를 잡았다. 적막이 오래 머문 호수의 고요한 수면 같은 침착함이 그의 자세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길로는 짙은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껄껄. 누가 할 소릴!”
그리고 두 사람은 움직였다. 보통사람의 시각으로는 디테일한 동작은커녕 움직임의 궤적을 잡아내는 것조차 어려운 신속함이었다. 에너지와 에너지의 충돌이 웅웅거리며 자아내는 파동의 물결로 공터는 가득했다. 그러나 대기는 한 점도 흔들리지 않았다. 고요 가운데 격렬한 공방이 이어졌다.
*기념할만한 첫 추천을 받았습니다. 12345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분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올린 것은, 게다가 양도 많은 것은 아마도 분발의 증거-_-;)
*‘앗기다’는 ‘빼앗기다’의 준말로 틀린 말이 아닙니다.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클라우스 연재 당시에도 같은 지적이 있었는데, 의외로 익숙하지 못한 표현인 듯합니다.
*황사로 전국이 시끄럽습니다. 여러분도 마스크 상비하시고 몸조심하시길.
*성원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저는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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