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8화 (8/300)

#   8-희망을 위한 찬가 - 읽지 않을 수 없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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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마지막 돌계단을 오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맞이하듯, 정상의 광활함이 소녀의 시야로 쏟아졌다. 멀게 펼쳐지는 풍경에 그녀는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리는 것 같은 시원함을 느꼈다. 소녀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의 땀을 닦고, 정상 여기저기에 있는 바위 중 한 곳으로 향해 그 곳에 앉았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끌리듯이 그녀를 향했다가 감탄의 기색을 그네들의 시야로 담고 주저주저 멀어졌다. 센 바람이 불어왔다. 숲과 풀이 스사사- 유쾌하게 울었다. 사람들의 옷깃과 소녀의 긴 머리칼도 기분 좋게 날렸다. 검은 머릿결의 휘날림 위에서 태양빛은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소녀는 부드럽게 웃었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주변으로 그녀의 모습을 휴대폰에 담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몰래.

“하아-”

감탄을 담아 길게 숨을 내쉬는 그녀의 이름은 김세연. 서울의 한 여자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소녀다. 거주지는 물론 서울이지만, 주말을 맞이해 만개산에 올라왔다. 주말이나 휴일, 날이 맑을 때, 그녀가 만개산의 정상에 오르곤 한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그녀는 과거 꼭 이맘때쯤, 가족들과 함께 만개산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이곳을 무척 좋아하게 됐다. 특히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주변으로 산이 없는 덕분에 막힘없이 펼쳐지는 만개산 정상의 풍경이다. 올라오면서 만난 벚꽃나뭇길도 예뻤지만, 그녀는 역시 만개산은 그 정상의 풍광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특히 고민이 있을 때 그녀는 만개산 정상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정상의 너른 풍경은 세상의 넓음을 묵묵하니 이야기했고, 그 말 없는 속삭임을 앞에 두고 세연은 자신의 고민이 사소하다는 것을 느낌으로서 자그마한 해방감을 맛보곤 했기 때문이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지금 한 가지 고민으로 머리가 꽉 들어찬 상태였고, 그 고민을 떨치고자 이렇게 다시 만개산에 올랐다. 그녀의 고민이란 그녀 나이대의 학생들이 흔히 격는 것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성문제’와 같이 발랄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청춘의 활동이지는 않았다. 그녀의 고민은 내주 있을 전국 모의고사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의 성적이 나쁘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의 성적을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래서 문제였다. 이번 새학기가 시작되며 그녀는 계획했던 것만큼 공부하지 못했다. 학년이 오르고 반이 바뀌면서 새로 친구를 사귀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어울려 다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그녀는 혹시 성적이 떨어지지나 않을지, 그걸 걱정하고 있었다. 이번에 성적이 떨어지면 나쁘면 어머니의 잔소리도 심할테고, 아버지도 잔소리야 없겠지만 그녀 자신이 볼 면목이 없다. 어쩌면 용돈이 떨어질 수도 있다. 여러 가지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같이 안 어울렸으면 좋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되지만 그녀의 경우는 그게 또 그럴 수가 없었다. 비교적 내성적인 성격인 그녀로서는 다른 사람의 제의를 물리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가능한 한 피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적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관련해 그녀는 별로 유쾌하지 못한 과거가 있다. 그래서 줄곧 마음이 무거웠다.

“좋구나...”

그 무거웠던 마음이 만개산 정상에 올라 그 풍광을 두 눈동자 가득 담으니 좀 덜어지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불어오는 모든 바람은 자신의 마음 한 곳에 몰려든 골아픈 쓰레기들을 시원하게 쓸어가는 상쾌한 바람인 것처럼 피부에, 그리고 마음에 달라붙었다.

‘응?’

맑은 눈동자 가득 세계를 담던 세연의 표정으로 의아함이 스쳤다. 그녀는 넓게 뜨고 있던 눈망울을 좁혔다. 허공에서 무언가 희끄무레한 것이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세연은 눈을 비볐지만 여전히 그것은 희미하지만 분명히 보였다.

‘뭘까?’

세연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희미한 연기 같은 것은 계속 꾸물럭 꾸물럭 움직였다. 괴이쩍은 광경이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그 광경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또한 괴이쩍은 광경이었다. 희미해서 잘 안보이긴 해도 아주 안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이상한 장면에 대해서 적어도 몇 명 정도는 관심을 가져 마땅했다.

‘혹시, 나만 보이는 걸까?’

세연은 스스로 자문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등줄기로 소름이 오싹 스쳤다. 반사적으로 손이 목으로 향했다. 세연의 표정이 경악에 젖었다. 평소 호신구처럼 달고 다니던 십자가 목걸이가 없었다. 부모님께 받은 이후로 거의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는데, 오늘 옷을 갈아입으면서 놔두고 온 모양이다.

‘어, 어차피 기독교인도 아니잖아.’

그녀는 스스로를 달래며 다시 그 희끄무레하게 검은 연기 같은 것에게 시선을 던졌다. 안 보였다.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눈을 비비고 다시 신중하게 살폈지만 역시 보이지 않았다. 세연은 남들이 안 보이는 게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조금은 안도하면서 안숨을 쉬었다. 두근거리던 심장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기분이 안정되고 나서, 그녀는 피곤해서 헛것이 보인 모양이나 돌아가는 길에 박카스라도 하나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비타500이 더 맛있으니 그 쪽으로 할까, 하고 박카스와 비타 500을 두고 저울질하는 한가한 고민을 시작했다.

대련이 끝나고 두 노소는 땅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어깨로 숨을 쉬고 있었다. 정오의 태양빛을 반사하는 만면의 땀방울과 미소가 두 사람의 수련이 얼마나 만족스러운 것이었던지 조용히 설명했다. 은결은 왼쪽 소매로 이마의 땀방울을 닦으면서 말했다.

“헤헷, 할아버지께선 연세도 있으신데, 무리하신 것 아녜요?”

은결이 장난스레 말했다. 할아버지는 두 눈을 크게 부라렸다.

“덱끼! 내 비록 늙었다 하나 아직 손주 녀석 재롱을 못 받아줄 정도로 쇠하진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제가 날린 정권에 발이 흐트러졌잖아요.”

‘재롱’이라는 말에 은결이 뚱해서 지적했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조금 곤혹스러워졌다.

“그, 그거야-”

뭐라 되돌릴 말이 없었다. 마지막 은결의 주먹은 모든 면에서 그의 예상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것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힘을 담고 날아들었다. 사실 그만큼 철저하게 공격을 읽어내는데 실패하고도 발이 흐트러진데서 그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물론 공격 예측에 실패한데서 이미 창피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는데, 저도 벌써 반 십년이 넘도록 이 일을 했는데 옛날하고 똑같이 보시면 곤란하죠.”

은결은 허리에 손을 두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어울리지 않게 어린 행동에 은결은 되려 귀엽게 보였다. 하지만 은결의 할아버지는 그 말에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안쓰러움이 가슴 한 곳에서 스며 나왔다. 그러나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러면 은결이 슬퍼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날씨가 좋은걸요. 이럴 줄 알았으면 미래도 함께 나올걸 그랬나 봐요. 그렇잖아도 주초에 같이 벚꽃 축제 가자고 했는데, 오늘 수련도 있고 그 놈들을 언제 해결할 수 있을지 몰라 거절했거든요.”

아련한 시선과 목소리로 은결이 말했다.

“미래가? 내가 듣기로 오늘 미래는 시험공부 한다던데.”

“아, 그러고보니 다음 주가 모의고사군요. 음, 그럼 그 녀석 무슨 정신으로 축제에 같이 가자고 한 건지.”

그러는 너는? 이라고 반문해주고 싶어지는 힐난조의 어투였다.

“쯧쯧. 그 녀석도 어서 제 오라비에게서 벗어나야 할텐데.”

“예?”

“아니다. 그 보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품에서 하얀 봉투 하나를 꺼냈다. 태양빛이 흰 봉투를 투과했다. 봉투 속으로 검은색 직사각형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은결은 그것이 무엇인지 직감하고 당황해서 손바닥을 내밀어 허둥지둥 저어보였다.

“아, 아니 괜찮아요.”

“괜찮다 받아둬라. 책값도 부족할텐데.”

“책이야 아버지께 빌리면-”

“네가 아무리 책을 좋아하고 또 많이 읽었어도 그 녀석 책장에 있는 책을 읽는 건 무리지. 받아두거라. 네 책값을 아껴야 할 만큼 궁하지 않다.”

은결 아버지 책장에 있는 책은 한글로 된 걸 보기가 더 힘들다.

“예...”

은결은 조심스럽게 봉투를 받아들었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봉투를 받아드는 은결의 표정은 조금 들뜬 것처럼 보였다. 사양이야 했지만, 역시 ‘컨디션’의 후유증도 아물지 않은 은결의 주머니 사정에 이런 거금이 들어온다는 것은 무척 기쁜 일이다. 밤이면 언제 희한한 것들 때려잡으러 출동해야 할지 모르는 판에 아르바이트도 하기 힘드니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갑자기 두 사람의 표정이 굳었다. 특히 은결의 표정이 불안하게 굳었다.

“이럴 리가-”

갑작스레 전신으로 느껴진 찌르는 듯 예리하고 음습한 기운- 그것은 틀림없이 요 며칠간 쭉 상대해온 사념존재의 기운이었다. 자신의 미숙한 처리가 이런 사태를 불러온 것이 아닌지 은결은 초조했다. 그런 은결을 달래듯 할아버지가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다. 이건 아마도 그 놈이 교감력이 높은 인간을 만난 듯싶다. 백만에 하나를 찾기 힘들 텐데 어찌 이런... 여기서 발견한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겠구나. 그놈 쪽도 대낮에 모습을 드러낼 정도라면 어지간히 안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하여간 늦으면 곤란하니 어서 가자.”

할아버지의 표정이 진중하다. 사념이 응결되어 만들어진 것들의 전투력은 자아가 형성되어도 별게 아니다. 교활해 진다는 것의 진정한 문제점은 그것들이 몸을 사리게 된다는데 있다. 그렇게 되면 그것들은 몇 백년이고 암약함으로서 힘을 키워 차후 감당하기 힘든 존재가 될 가능성이 있다. 때문에 백년을 살지 못하는 인간으로서는 그것들이 약할 때 뿌리부터 제거해야 한다. 압도적인 전투력으로도 은결의 전투가 언제나 초초한 기색을 띄는 것은 그런 이유다.

“예.”

그리고 두 노소는 바닥을 박찼다. 풀잎과 먼지가 높게 치솟았다. 두 사람의 몸이 하늘 높이 올랐다.

*기념할만한 두 번째 추천을 받고 분발해서 써 올립니다. 雨님께 감사의 마음을. 다른 여러분도 성원을!

*저는 박카스를 좋아합니다. 비타500도 맛있지만... ‘컨디션’은 예전에 술 먹고 이러다 죽겠다 싶었던 때를 제외하고는 마셔본 적이 없습니다만 놀라운 가격은 인상 깊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마셔본 가장 비싼 드링크는 인삼드링크 만 원짜리입니다. 사서 마신 건 아니고 약국 아주머니가 선물로 주시더군요. 맛있었습니다.

*지나는 일제시대 널리 퍼진 표현입니다. 그래서 일본인은 도리어 지나라는 표현을 중국인에게 사용하기 힘듭니다. 침략과는 상관없는 한국인이 사용해도 별로 좋아하진 않겠죠. 동북공정 문제와 한글을 중국에서 만들었다고 당당히 주장하는 한 중국인(이건 정말 쇼크였음)을 만난 이후로 중국애들이 얄미워서 살짝 집어넣어 봤다, 정도입니다. 티벳 독립을 응원하는 입장이기도 하고.

*오타지적은 감사합니다. 저는 문장의 의미를 모두 명확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퇴고를 해도 발견하지 못하는 오타가 여럿 있곤 합니다.

*공부할 게 좀 있어서 다음 화는 4일보다 늦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양해를. 그럼 성원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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