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홍룡표국(紅龍鏢局)(5)
객잔 내부는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자객들로 보이는 시체들이 늘어져 있었고, 곳곳에 피풍의(披風衣)를 입은 검사들이 서 있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내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자객들을 몰살한 건 이자들의 솜씨가 분명했다.
“네놈들은 누구냐.”
남량의 물음에, 검사들이 일제히 포권을 취했다.
“낭인회(浪人會) 파마대(破魔隊)가 백매화 남량 대협께 인사 올립니다.”
검을 슬쩍 들어 올리던 동작이 멈추었다.
“낭인회라고? 그럼 너희들은 설마 그분이…….”
남량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이었다.
낭인들 가운데 죽립을 쓴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죽립을 벗으며 남량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이네. 남량 도장. 이런 곳에서 마주하니 반갑군.”
“역시 은왕이셨군요.”
사내의 정체는 바로 남북 십성의 은왕, 유서휘였다.
남량은 경계심을 풀고 은왕에게 다가갔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자네가 홍룡표국의 표행을 돕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네.”
은왕은 나직이 덧붙였다.
“꽤나 고생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고. 그래서 도움이 필요할까 싶어 왔다네. 도착해서 보니 내가 때를 잘 맞춘 것 같더군.”
“네. 정말 다행입니다.”
“홍룡표국 분들은 이제 나오셔도 됩니다.”
주방 안에 숨어있던 홍룡표국 일행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들은 남량을 발견하고 반색하며 달려왔다.
“남량 도장! 무사하셨군요!”
“도장님! 정말 다행입니다.”
남량은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다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그보다 죄송합니다. 방해하는 자들이 있어 처리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역시 무리를 해서라도 오늘 국경을 넘었어야 했는데……. 제 불찰입니다. 여기 낭인회 분들이 적절한 때에 오셔서 구해 주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요.”
고담은 은왕과 낭인들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덕분에 저희 사람들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일행을 대표해 감사를 드립니다.”
진표와 표사들, 쟁자수들도 똑같이 고개를 숙였다.
은왕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저었다.
“저희 낭인들은 본래 위험에 처한 이들을 구하기 위해 검을 잡은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과연 의협이시군요.”
고담은 은왕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대협. 저희와 동행하시지요. 사막은 위험한 곳이라 건널 때에는 반드시 사막에 대해 잘 아는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은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담은 크게 기뻐하며 일행들에게 말했다.
“곧 날이 밝으니 조금만 쉬었다가 진시(辰時:07∼09시)에 출발하도록 합시다. 국경을 넘으면 적들의 습격도 더는 없을 것입니다.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네. 행수님!”
일행들이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량과 은왕은 탁자에 마주 앉아 차를 마셨다.
남량은 주변에 보초를 서고 있는 낭인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회주님의 새로운 호위대인가요?”
은왕은 차를 한 모금 넘기며 대답했다.
“파마대라고 하네. 마교의 간부들을 상대하기 위해 내가 직접 선발하고 조직한 부대일세.”
“과연 뛰어난 검사들이군요.”
“급조한 부대라 아직은 미숙한 점이 많다네.”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은왕이 남량을 바라보았다.
“그보다 자네가 알아야 할 것이 있네.”
심각한 표정으로, 은왕이 말했다.
“실은 우리처럼 북해 조사의 임무를 맡은 자들이 한 달 전에 먼저 북해에 도착했다네. 그중에는 나와 같은 낭인회 출신 무인도 포함되어 있었지. 보름 전까지 서신을 주고받았고.”
“마교의 흔적을 발견했다던가요?”
“마지막으로 보내온 서신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네. 그런데…….”
잠시 침묵하던 은왕이 말을 이었다.
“며칠 전부터 서신이 끊겼네.”
남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의 신변에 무언가 문제가 생긴 거로군요.”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겠지.”
“그동안 보내온 서신의 내용을 알 수 있을까요?”
“빙궁은 감시가 철저해 조사가 불가능하니 한동안 머무르며 수상한 점이 있는지 살펴보겠다는 내용이 전부일세.”
말하던 은왕이 눈을 깜빡였다.
“한 가지, 걸리는 내용이 있긴 하군.”
은왕은 서신 하나를 남량에게 건네주었다.
“스무 날 전에 온 서신일세.”
남량은 서신을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은왕의 말대로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빙궁의 문이 며칠째 열리지 않고 있다’라…….”
“그 전까지는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사람들이 왕래했다고 하더군.”
“석연치 않군요. 빙궁은 필수적으로 조사를 해야 할 듯합니다. 가능하다면 몰래 숨어들어서라도.”
남량의 불길한 예감은 조금씩 커져 가고 있었다.
***
다음 날, 표행은 국경에 다다랐다. 홍룡표국이 가지고 있는 통행증 덕분에 국경을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만약 통행증이 없었다면 조사를 받느라 시간을 지체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사막입니다.”
고담의 말에 진표가 대답했다.
“외지(外地)는 처음이라 긴장되는군요.”
“저는 국주님을 따라 서역(西域)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모래바람이 아니라 폭설 때문에 죽을 뻔했지요. 하하.”
일행은 천으로 얼굴을 감싼 채 거친 바람을 뚫고 나아갔다.
밤이 되자 사막 한가운데서 진을 치고 야영을 했다.
쟁자수들은 불가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더 이상 망할 습격이 없는 건 좋은데, 사막은 일교차가 너무 심해서 못 견디겠군. 낮에는 찌는 듯 덥고 밤에는 얼어붙을 듯 추우니…….”
“그러게 말이야.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마누라가 해 주는 따뜻한 밥이 그립다, 그리워…….”
“이제 곧 끝일세. 행수님 말씀대로 조금만 더 힘을 내자고.”
“소설 같은 걸 보면 자네같이 말한 자들이 꼭 사고로 죽더군. 조심하게.”
“저 새끼가 불길하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은왕은 낭인들과 같은 막사에 있다 고담의 막사로 다가왔다.
“유 대협. 무슨 일이십니까?”
“남량 도장은 어디 있습니까?”
은왕의 물음에 진표가 웃으며 말했다.
“도장님은 매일 이 시간에 홀로 수련을 하십니다. 아마 근처에 계실 겁니다.”
사막 한가운데서도 남량은 수련을 했다.
새하얀 백발을 흩날리며 달빛 아래 홀로 검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정령처럼 보였다. 검의 정령.
‘좀처럼 잡히지 않는군. 비기에 대한 단서가.’
남량은 수련 내내 마음속에서 칠령귀와 대련을 했다.
그들의 무공과 특징 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련은 항상 남량의 패배였다.
전략을 바꿔 가며 계속 싸워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싸운다고 해도 결과가 달라지는 법은 없을 것이다.
결국 비기를 터득하는 것만이 놈들을 이길 방법이었다.
‘해야만 한다. 아니, 반드시 해내고 말 것이다.’
남량은 이를 악물며 엄청난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파파팟! 허공을 가르던 검이 어느 순간 멈추었다.
검을 내린 남량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직 안 주무셨군요.”
남량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은왕 유서휘가 서 있었다.
“밤하늘이 너무 아름다워서. 하하.”
은왕은 미소를 지으며 남량의 곁으로 다가왔다.
“자네의 수련을 멋대로 훔쳐본 것은 미안하네.”
“아닙니다.”
무림에서 남의 수련을 훔쳐보는 것은 금기에 해당했다.
허나 남북 십성 정도 되는 고수라면 타인의 검술을 훔친다고 해서 딱히 도움이 될 것은 없었다.
“헌데 칼끝이 좀 격렬하더군. 마음이 다급한가?”
남량은 한숨을 내쉬며 매화천수검의 비기, 연화세계에 대해 말했다.
“아무리 수련을 해도 단서가 잡히지 않으니 그저 답답합니다. 그래서 은왕께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천마 위광은 무공에 통달한 현경의 고수였지만 그가 사용한 무기는 검이 아니었다.
검학(劍學)에 관해서라면 검을 다루는 은왕이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음……. 매화천수검의 초식을 하나로 합치란 말인가.”
잠시 고민하던 은왕이 말했다.
“초식을 합치라는 것은, 어쩌면 기의 운용을 뜻하는 것일 수 있네.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저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허나 매화천수검의 기 운행법은 하나하나가 극히 다릅니다. 헌데 그걸 어떻게 합친단 말입니까?”
“합치다(合)는 다시 말해 여럿이 모여 하나가 된다는 뜻이지. 만류귀종(灣流歸宗)이라, 여러 갈래로 뻗은 물줄기도 결국 하나가 되는 법일세. 이는 무도(武道)의 극의와도 일맥상통한다네.”
“가는 곳은 다르나 결국 하나로 모이게 된다?”
중얼거리던 남량이 일순 눈을 부릅떴다.
그의 머릿속에서 매화천수검의 구결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운들이 교차하는 한 지점을 찾을 수 있었다.
‘낙영용섬의 쾌(快). 옥녀유영의 유(流). 매농낙화의 경(勁). 뇌전포화의 폭(暴). 상청도월의 예(銳). 화운용무의 강(强). 유성추월과 단천열화의 발(發). 그리고 천류신화의 환(幻). 화산의 모든 정수가 한곳에서 만나게 된다.’
남량은 마침내 매화천수검 비기, 연화세계의 깨달음을 얻었다.
“해답을 찾은 모양이군.”
은왕의 말에 남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해 봐야겠습니다.”
은왕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나고 남량이 자세를 잡았다.
‘초식을 합치는 것은 그저 빠르게 연계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구결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운행법을 만들어 내라는 뜻이었다!’
쇄액! 쇄애애액!
남량은 검을 빼 들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내력을 운행하며 검을 휘둘렀다.
후우웅.
매화천수검의 비기, 연화세계의 초식이 끝났다.
검을 내린 남량이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바닥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내력의 소모가 크다. 몸에 가해지는 충격도…….’
남량은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마침내 터득했다. 연화세계.’
이 힘이라면 칠령귀와도 맞설 수 있을 것이다.
남량은 크게 기뻐하며 은왕에게 말했다.
“회주님의 조언 덕분에 비기를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멍하니 서 있던 은왕은 남량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내가 방금 무엇을 본 거지?’
한순간이었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틀림없어. 분명 그건 검술 최고 경지의…….’
그것을 이 어린 나이에 이루어 냈단 말인가?
은왕은 침을 꿀꺽 삼키며 남량을 응시했다.
‘정말 대단하군. 이 사내는.’
마침 날이 밝아 오르고 있었다. 남량과 은왕은 막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며칠을 더 가자 드디어 북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웃으며 표행을 반겼다.
“홍룡표국의 표행이 성공했다. 성공했다고!”
“정말 믿기지 않는군. 으하하.”
“빌어먹을. 돌아가면 당분간은 일 안 할 거야.”
표행을 마친 표사와 쟁자수들은 감격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고담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국주님. 저희가 해냈습니다.’
진표는 표사들 한 명 한 명을 안으며 수고했다 칭찬했다.
일행들은 남량을 향해 예를 표하며 말했다.
“저희 표국은 화산의 도움을, 남량 도장님의 도움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고담이 눈물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장님! 언제 홍룡표국으로 놀러 오십시오!”
“저희가 제대로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남량은 표사들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요. 돌아가면 언제 한번 봅시다.”
홍룡표국의 여정은 여기까지였지만, 남량의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이만 출발하지. 남량 도장.”
“네.”
홍룡표국과 헤어진 남량과 은왕, 그리고 파마대는 말을 타고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빙궁으로 향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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