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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검황-100화 (100/164)

<100화>

낙양혈사(落陽血史)(3)

“내가 위광이다.”

남량이 말을 마친 직후였다.

낭연청이 입술을 비틀며 냉소를 뱉어 냈다.

“참으로 추하구나 백매화. 목숨이 그리도 소중하더냐?”

그녀는 남량을 조롱하듯 덧붙였다.

“너를 천하의 영웅으로 받드는 무림인들이 과연 이 모습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구나.”

“나는 오직 진실만을 말할 뿐이다.”

남량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천마, 위광이다.”

낭연청의 입가에 웃음기가 사라지고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제법 인정할 만한 사내인 줄 알았는데……. 네놈도 결국 많고 많은 쓰레기들 중 하나일 뿐이었군. 더는 말할 가치도 없다. 죽어라.”

촤아앙!

낭연청의 검이 움직이며 무형검이 쏘아져 나왔다.

남량은 남은 내력을 모조리 끌어모아 사자금강을 펼쳤다.

쩌엉! 낭연청의 검기가 사자금강을 부수며 남량의 가슴팍을 베었다. 남량이 입에서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남량의 앞으로 다가온 낭연청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한 방어막 때문에 검기가 약해진 건가. 목숨은 건졌구나. 허나 의미 없는 발악에 불과하다.”

낭연청은 검을 높이 치켜들며 말했다.

“네놈이 이 자리에서 죽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남량은 서슬 퍼런 칼날을 응시하며 이를 악물었다.

낭연청의 검이 떨어지기 바로 직전!

남량은 낭연청을 똑바로 응시하며 그녀를 향해 외쳤다.

“절강성 항주(杭州) 명월루(明月樓)!”

“……!”

낭연청의 눈이 부릅떠졌다. 동시에 검이 허공에 멈췄다.

명월루라는 단어 하나에 낭연청은 심히 동요하고 있었다.

‘이자가 내 과거에 대해 알고 있어?’

그럴 리가 없다. 과거에 대해서는 이미 전부 지워 버렸을 텐데.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천하에 단 한 명뿐이었다.

낭연청은 떨리는 목소리로 남량에게 물었다.

“너, 너 대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

낭연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푸욱! 차가운 칼날이 낭연청의 등을 찔러 들어왔다.

방심하고 있던 그녀는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남량의 검, 화양검이 허리에 반쯤 박혀 있었다.

낭연청은 입에서 피를 토하며 남량을 노려보았다.

“네놈이 설마 이기어검을…….”

이기어검(以氣馭劍).

내공을 실어 멀리 떨어져 있는 검을 조종할 수 있는 검술 최고의 경지 중 하나.

남량은 일부러 명월루를 언급해 낭연청의 심기를 어지럽힌 다음 몰래 떨어져 있던 검을 조종해 뒤를 노린 것이다.

‘반쯤 도박이었는데 다행히 성공했구나.’

치명상을 입었으니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 터였다.

남량은 낭연청이 뒷걸음질치는 틈을 타 몸을 일으켰다.

“크윽…….”

낭연청은 떨리는 손으로 허리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고강한 내력 덕분에 죽음은 면했지만 상처가 심각했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당장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내 실책이다. 놈의 숨통을 끊는 순간까지 방심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명월루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낭연청은 죽일 듯한 눈으로 남량을 노려보며 말했다.

“말해. 대체 명월루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남량은 복잡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하다 나직이 대답했다.

“흑영대의 정보를 들었을 뿐이다.”

잠시 멍해져 있던 낭연청이 이를 부득 갈았다.

“흑영대의 정보가 설마 거기까지 갔을 줄이야.”

낭연청은 입에 고인 핏물을 뱉어 내며 말했다.

“인정하마. 내가 네놈의 격장지계(激獎之計)에 당했다는 걸. 이 수치는 결코 잊지 않겠다. 기억해라. 네놈의 목은 반드시 내 손으로 가져가마.”

낭연청은 상처를 부여잡은 채 날아가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다행히도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들지는 않았다.

‘시간이 없어.’

남량은 떨어진 화양검을 주워 들고 비틀거리며 비석 앞으로 걸어갔다.

‘효초아. 네놈의 간악한 계략도 이걸로 끝이다.’

콰앙!

남량은 검을 휘둘러 비석을 박살 내 버렸다.

***

효초아는 낙양의 가장 높은 곳에서 무림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후기지수들을 상대하고 있는 태광에게 향했다.

효초아는 처음부터 칠령귀를 투입시킬 생각이 없었다.

낙양의 시체들만으로도 충분히 전멸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놈들의 저력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남북 십성의 후계자들과 화산파의 제자들.

그들이 보여 준 무위는 솔직히 놀라울 정도였다.

시체들이 땅을 파고 나와 움직이는 악몽과도 같은 상황 속에서 침착하게 그것들을 물리쳤다.

방어진을 구축한 이후에도 선봉에 나서서 파도처럼 밀려드는 시체들을 상대로 분투했다.

거기에 무림맹 대원들의 보조, 총대주 양악의 탁월한 지휘가 더해진 결과, 시체들이 좀처럼 방어진을 부수지 못하고 쓰러져 나갔다.

결국 효초아는 흑귀 태광을 전선에 투입시켰다.

백귀 유회는 만약을 대비해 진법의 핵을 지키도록 했다.

명령을 받은 태광은 압도적인 무력으로 당호를 죽였다.

나머지 후계자들이 일제히 달려들었지만 그들도 얼마 버티지 못할 터였다.

태광이 후계자들을 상대하는 동안, 방어진은 조금씩 무너졌다.

효초아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해가 뜨기 전에 끝을 낼 수 있겠군.’

그는 붉은 하늘을 바라보며 조롱하듯 말했다.

“잘 보고 있거라. 위광. 네놈이 이루지 못했던 무림 제패를 이 효초아가 이루는 모습을. 지월도, 탄영도 아니야. 바로 내가! 내가 이룰 것이다.”

그 순간, 효초아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들어왔다.

퍼어엉!

진법을 형성하는 붉은 기둥이 폭음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기둥이 사라지자 낙양을 뒤덮은 장막도 풀리기 시작했다.

하늘이 점차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자 효초아는 당황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진법을 해체하는 건 무림맹 놈들을 모조리 전멸시킨 후란 말이다! 지금 해제하면 안 된다고! 유회! 낭연청! 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유회와 낭연청이 누군가의 손에 당했을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그였다.

혈천마화대법이 풀리자 거리를 활보하던 시체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바닥에 쓰러졌다.

“이런 빌어먹을…….”

효초아는 분노했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진법이 빨리 해제되긴 했지만, 본래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후기지수들을 몰살하는 것.

여기서 자신이 합세한다면 눈 깜빡할 새 저기 있는 모두를 몰살할 수 있었다.

또 다른 변수가 등장한 것은 그때였다.

낙양의 입구로 고개를 돌린 효초아는 이를 부득 갈았다.

‘이 거대한 투기(鬪氣)……. 결국 온 것인가.’

먹구름을 동반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운.

신에 필적하는 힘을 가졌다고 알려진 현경(玄境)의 경지. 그에 다다른 최강의 무인이 지금 낙양에 도착한 것이다.

‘조금만 늦게 왔으면 좋았을 것을.’

효초아는 혀를 차며 태광에게 전음을 보냈다.

-지금 이곳에 고경홍이 오고 있다. 내가 어느 정도 시간을 벌 테니 그동안 후기지수들을 전부 몰살하도록. 알겠나?

-존명(尊命).

효초아는 곧장 고경홍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낙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두 사람은 마주쳤다.

거대한 언월도를 들고 있던 고경홍이 말했다.

“누군가 했더니 위광의 옆에 붙어 다니던 요상한 놈이로군.”

효초아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가 대꾸했다.

“개처럼 헐레벌떡 달려온 것치고는 제법 여유만만하네. 지금 안쪽 상황이 어떤 줄은 알고 있어?”

“뭐가 되었든, 하나는 확실하군.”

고경홍이 차분하게 말했다.

“안의 녀석들이 잘해 주고 있다는 것.”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보지도 못했으면서.”

“그건 네놈이 내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효초아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고경홍이 계속 말했다.

“네놈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했다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지.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나를 막아섰다는 것은, 아직 네놈이 계획한 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과 같다.”

“…….”

“또한 내가 보았던 낙양을 감싸고 있던 불길한 붉은 장막이 더는 보이지 않는군. 네놈이 해제했을 리는 없으니 누군가에게 방해를 받은 것이야. 그렇지 않나?”

“무식하게 싸움만 할 줄 알지, 머리 굴리는 쪽과는 거리가 먼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 하하.”

효초아가 웃음을 흘렸다.

“계획은 곧 완성될 거야. 나는 아주 잠깐만 너를 막고 있다가 도망치면 그만이고.”

“아주 잠깐만 나를 막겠다고? 하하하.”

고경홍이 껄껄 폭소를 터뜨렸다.

“호가호위(狐假虎威)라, 범이 없으면 여우가 왕이라더니, 천마가 물러나자 그 뒤에 있던 여우가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군.”

고경의 입가에 웃음이 가시며 묵직한 기운이 흘러 나왔다.

“까불지 마라. 애송이 놈아.”

콰직! 그가 딛고 있던 지면이 움푹 파였다.

“네놈 따위는 잠깐도 나를 막지 못해.”

효초아의 미간에 핏줄이 솟았다. 그가 차갑게 웃었다.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지. 후후.”

직후, 두 사내는 동시에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

한편, 남북 십성의 후계자들과 매화오절은 칠령귀의 흑귀, 태광을 상대로 힘겨운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끈질긴 것들. 이제 그만 죽어라!”

태광은 조금 전부터 매우 화가 나 있었다.

한 놈을 죽이려고 하면 다른 한 놈이 나타나 방해했다.

그놈을 죽이려고 하면 또 다른 한 놈이 나타나 방해했다.

그 탓에 당호를 죽인 이후로 한 놈도 죽이지 못하고 있었다.

‘효초아 님이 시간을 벌기 위해 고경홍과 싸우러 가셨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내가 모시는 주인이 위험에 처하실 것이다. 이런 애송이들을 상대로 전력을 다하기는 싫지만, 어쩔 수 없지.’

태광은 한 손에 내력을 집중해 일권(一拳)을 내질렀다.

무형의 권기가 팽자엽과 진공을 향해 날아갔다.

두 사람은 간신히 몸을 날려 권기를 피해 냈다.

그사이 찬야와 남궁월, 유라가 동시에 그를 공격했다.

“이십사수매화검법 17초식, 근화일일-.”

“창궁비연검 5초식, 일의대수-.”

“매화홍주검 18초식, 비두출화-.”

태광은 곧바로 등을 돌리며 주먹을 내질렀다.

쩌엉! 찬야, 유라, 남궁월의 검기와 태광의 주먹이 충돌했다.

허공에 충격파가 터지며 세 사람이 뒤로 튕겨 날아갔다.

“힘도 제대로 실리지 않은 검기는 맨손으로 충분하다.”

이번에는 포훈과 청랑이 각자 양쪽에서 기습을 걸어왔다.

카앙! 두 사람이 휘두른 검이 태광의 호신강기에 가로막혔다.

태광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모기가 물어도 이것보단 간지럽겠구나.”

태광은 주먹을 휘둘러 두 사람을 향해 권기를 쏘아 보냈다.

퍼퍼퍽! 피떡이 되어 날아간 청랑과 포훈이 바닥에 쓰러졌다.

위지혁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끝이다. 이제 더는 버티지 못해.’

상대는 무려 마교의 간부였다. 이길 가능성은 애초에 없었다.

버티고 버텨서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는 한계였다.

그때, 당룡이 남은 비수를 양손에 들고 달려 나갔다.

“개자식! 내 동생을 죽인 대가를 받아 내고 말겠다!”

“당 공자! 안 됩니다!”

위지혁이 손을 뻗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태광은 달려드는 당룡을 발견하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알아서 수고를 덜어 주면 나야 고맙지.”

태광은 당룡을 향해 거대한 주먹을 내질렀다.

저걸 맞으면 당룡은 죽는다. 그러나 아무도 움직일 수 없었다.

모두가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쩌엉! 폭음이 울리며 충격파가 터졌다.

태광의 주먹이 당룡의 코앞에서 멈췄다.

정확히는 당룡의 뒤에서 튀어나온 검이 태광의 주먹을 찔러 막은 것이다.

“아슬아슬했구나.”

등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룡은 코피를 주룩 흘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푸른 도포를 입은 노도인이 검을 찌른 채 서 있었다.

허연 수염과 머리카락이 마치 신선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누, 누구…….”

당룡이 더듬거리며 입을 여는 때였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진공이 반색하며 외쳤다.

“스승님!”

진공의 외침을 들은 후계자들, 매화오절은 눈을 크게 떴다.

진공에게 스승 소리를 들을 인물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남북 십성의 검제(劍帝). 태화 진인이 지금 이곳에 온 것이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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