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운휘의 각성. 금강불괴(金剛不壞)(2)
“벽이라…….”
팽자엽은 허허로운 웃음을 흘렸다.
“운휘 도장. 이제 알겠소.”
팽자엽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지금 도장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구려.”
팽자엽은 운휘에게 있어 그저 넘어야 할 하나의 벽에 불과했다.
그의 눈은 더욱 멀리 있는 곳을 향하고 있었다.
“후우.”
팽자엽은 호흡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그리고 천천히 자세를 취했다.
팽가를 상징하는 도법인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의 자세를.
“그럼 알려 드려야지.”
우우웅.
팽자엽이 기세를 끌어올리자 전신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맹수와 같이 날카로운 눈으로 말했다.
“그 벽이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터엉-.
팽자엽은 건장한 체격과 어울리지 않는 날렵한 동작으로 솟구쳐 올랐다.
수직으로 치켜든 그의 도가 반듯한 일(一)자를 그리며 운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의 도를 응시하던 운휘는 마치 태산이 떨어지는 듯한 중압감을 받았다.
정면으로 받으면 부서진다. 운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후웅!
운휘는 몸을 뒤로 빼며 팽자엽의 일도(一刀)를 피해 냈다.
팽자엽은 이미 예상한 듯 도를 휘두르며 초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오호단문도.’
아직 운휘는 오호단문도의 진짜 힘을 알지 못한다.
팽자엽은 이 비무대에서 그 진정한 힘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파파팟!
거대한 도신(刀身)이 서늘한 기세를 번득이며 날아들었다.
채채챙!
운휘의 검이 빠르게 움직이며 팽자엽의 공격을 밀쳐 냈다.
그러나 튕겨 나간 도신은 금세 방향을 돌려서 재차 달려들었다.
아무리 부딪히고 밀려나도 물러서지 않는 불굴의 도법.
팽가의 의지 자체가 담긴 도법. 그것이 바로 오호단문도였다.
‘벽을 넘어서겠다고?’
넘을 수 있다면 넘어 봐라.
부술 수 있다면 부숴 봐라.
‘나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팽자엽은 기합을 내지르며 한층 더 압박을 가했다.
그 압박감이 누각 위에 있는 남량 일행에게 전해질 정도였다.
찬야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상대가 너무 까다로워.”
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성향의 무공을 쓰는 상대. 이렇게 될 경우, 차이를 가르는 것은 내력. 팽자엽의 내력 수위는 운휘를 한참 웃돈다.”
위지혁은 이를 악물었다.
“엄청난 압박이야. 벗어날 방법이 없는 건가?”
남량은 차가운 표정으로 비무대 위를 응시했다.
삼백 번이 넘는 비무를 치르는 동안 운휘는 팽자엽의 도법을 몸으로 직접 겪었다.
분명 이에 대항할 방법을 연구했을 터.
지금은 반격의 기회를 노리며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 운휘.’
남량의 말에 화답하듯, 운휘가 반격을 시작했다.
콰아앙!
운휘의 검과 팽자엽의 도가 맞닿은 채 서로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유라가 말했다.
“멍청한. 정면으로 덤비면 필패(必敗)다.”
바로 그 순간, 운휘의 기세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뇌정벽력(雷霆霹靂)!”
콰르릉!
우렁찬 뇌성(雷聲)과 함께 운휘의 검기가 번쩍였다.
직후, 팽자엽은 큰 충격을 받으며 뒤로 밀려났다.
‘크윽!’
간신히 중심을 잡은 팽자엽은 저린 손을 바라보았다.
‘분명 내력은 내가 우세했는데 어디서 저런 힘이…….’
남량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운휘의 칠절매화검은 매화천수검의 4초식, ‘뇌전포화’와 같다. 일검(一劍)에 힘을 모아 적을 참살하는 일격필살의 검술이지. 비록 내력은 팽자엽 쪽이 우세할지 몰라도, 일격의 폭발력과 기세는 운휘 쪽이 한 수 위다.”
어쨌거나, 흐름은 운휘 쪽으로 넘어갔다.
“지금이야.”
남량의 말이 끝난 직후, 운휘가 바닥을 박차고 유성과 같은 기세로 팽자엽을 향해 쇄도했다.
“크아아!”
채채채채챙!
맹렬한 기세로 날아드는 운휘의 검격을, 팽자엽은 이를 악물고 막아 냈다. 그의 어깨며 옆구리, 가슴, 허벅지 등에 자잘한 검상이 새겨졌다.
‘이건 정말 내 실책이다.’
상대가 열어 둔 함정을 예측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멍청하게 달려드는 꼴이라니.
진지하게 임하겠다고 말해 놓고서는, 스스로 상대를 가볍게 보았음을 실토한 셈이었다.
‘부끄럽다.’
팽자엽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상대를 먼저 인정하고 진심으로 임해야 한다.
흔들리던 팽자엽의 도끝이 차분해진 것을 본 남량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상대가 더 흔들려 준다면 고맙겠지만……. 아무래도 포훈 같은 바보는 아닌 모양이군.’
정신을 차리고 전력으로 임한다면 두 사람 간의 기량 차이는 명확하다.
“뇌봉전별(雷逢電別)!”
운휘는 간신히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 강력한 초식을 꺼내 들었다.
콰르릉!
벼락과 함께 강렬한 일격이 팽자엽을 향해 날아들었다.
바로 그 순간, 팽자엽의 도가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백호도간(白虎跳澗).”
도가 순간적으로 가속하며 팽자엽의 신형이 금세 운휘의 코앞으로 이동했다. 운휘가 날린 초식은 아슬아슬하게 팽자엽을 스쳐 지나갔다.
“크윽!”
운휘는 다급히 검을 회수해 방어했다. 그러나 자세가 제대로 잡히지 않아 팽자엽의 도를 막아 낼 수 없었다.
쩌엉!
한 번의 격돌로 운휘의 중심이 완전히 무너졌다.
팽자엽은 도를 빙글 돌리며 다음 초식을 날렸다.
“일도풍사(一刀風師)!”
돌풍을 휘감고 날아드는 도(刀). 운휘는 막아 낼 수 없음을 직감했지만 괴성을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 순간-.
운휘의 전신에서 희미한 금빛 기운이 흘러나와 그의 몸을 은은하게 감싸는 것이 보였다.
‘저건…….’
남량의 눈이 크게 뜨였다.
쩌엉!
팽자엽의 일도를 막지 못한 운휘가 비명을 지르며 수 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
한 차례 비무대 위에 정적이 흘렀다.
팽자엽은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입을 열었다.
“운휘 도장.”
운휘는 격돌의 충격으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팽자엽은 그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백호도간과 일도풍사는 오호단문도의 초식 중 가장 강력한 초식들 중 하나였소.”
운휘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팽자엽은 손을 뻗어 운휘를 일으켜 세웠다.
“도장은 이걸로 한층 더 성장했구려.”
팽자엽은 도를 도집에 넣은 뒤 포권을 취했다.
“좋은 비무였소.”
가볍게 한숨을 내뱉은 운휘가 검을 내렸다.
“좋은 비무였어.”
운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비무대를 내려갔다.
팽자엽은 그를 불러 세우려다 쓴웃음을 흘렸다.
“이것 참. 화산의 동문들이 왔다는 말을 전하려 했는데…….”
***
남량 일행은 곧장 운휘가 있는 객청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동료들을 만난 운휘는 반가움을 금치 못했다.
“찬야! 너 정말 찬야 맞아?”
“그래! 이렇게 잘생긴 얼굴이 또 어디 있겠어!”
“재수 없는 말투가 정말 찬야 맞구나!”
“얼굴이 아니라 말투로 확신을 하는 거냐? 으하하.”
찬야와 운휘. 둘은 여전히 형제처럼 친근했다.
유라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팽자엽과의 대련은 잘 봤다. 꾸준히 정진했더군.”
“하하. 그래? 그런데 왜 네 주변이 이렇게 뜨겁지? 꼭 불덩이 옆에 있는 것 같네.”
위지혁은 운휘의 더러운 몰골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훈련하느라 고생했다만 수염이랑 머리는 좀 단정히 해라. 도인은 자고로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
“너야말로 며칠을 안 씻은 거야! 네 몸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운휘가 버럭 소리치자 위지혁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매일 빠짐없이 목욕하는 게 습관이 된 사람이다! 너랑 같은 줄 알아?”
“웃기고 있네. 그럼 이 냄새는 어떻게 설명할 건데?”
“그, 그건…….”
남량은 떠드느라 정신이 없는 일행을 보며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매화오절이 한자리에 모였다.
더욱 강해지자는 그때의 약속대로, 그동안 유라는 삼매진화, 찬야는 신검합일, 위지혁은 만독불침의 경지에 이르며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어냈다.
그리고 어쩌면.
운휘도 새로운 경지에 발을 들일 수 있을지 모른다.
***
똑똑.
한밤중에 누군가 운휘의 객방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지?’
잘 준비를 마치고 불을 끄려던 운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남량이 홀로 서 있었다.
“형님? 여긴 어쩐 일로…….”
“잠시 너와 할 말이 있어서.”
“들어오세요.”
방으로 들어온 남량이 자리에 앉자 운휘가 차를 따라 주었다.
남량은 따뜻한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동안 네 음식 맛이 참 그리웠다. 운휘.”
“낙양으로 가는 길에 해 드릴게요. 우육면.”
“오호.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인데?”
남량은 운휘와 마주 본 채 잠시 앉아 있다 말을 꺼냈다.
“운휘.”
“네.”
“넌 네 몸에 생긴 변화를 눈치채고 있어?”
운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형님.”
남량이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제어할 수 있어?”
“아뇨. 아직까지는…….”
“음. 아직은 절반 정도인가.”
고개를 끄덕인 남량이 말했다.
“네가 익힌 내공심법에 대해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지. 기억해?”
“건원청심법 말인가요?”
“그래. 도가 최상승의 심법.”
남량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도가 최상승의 심법과 선천적인 무골(武骨)을 동시에 지니는 경우는 그리 흔한 경우가 아니야. 거기다 너는 뼈를 깎는 수련을 통해 자신의 육체를 단련해 왔어. 그 결과, 네 몸은 이미 지고의 경지에 들어갈 준비를 마치게 된 거야.”
“지고의 경지라니요?”
“세상 모든 무인이 꿈꾸는, 어떤 보검과 명검도 침범하지 못하는 전설상의 경지…….”
잠시 말을 멈춘 남량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금강불괴(金剛不壞)의 경지에 말이야.”
금강불괴.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운휘의 눈이 부릅떠졌다.
“제가 금강불괴의 경지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요?”
남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네가 그 경지에 다다를 것이라 예상했지만, 팽자엽과의 대련을 보고 깨달았어.”
남량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이미 경지를 넘어설 준비가 되었다는 걸.”
운휘는 전설상의 경지에 들 수 있다는 흥분과 놀라움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만약 금강불괴의 경지에 들 수만 있다면 팽자엽의 그 강렬한 도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 낼 수 있으리라. 그뿐인가? 검기는 물론이고 강(罡)마저도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더 강해질 수 있다!’
생각만 해도 심장이 터져 나가는 듯했다.
운휘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어떻게 하면 더 빨리 경지에 들 수 있는 거죠? 가르쳐 주세요. 형님!”
남량은 차를 마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 연무장으로 간다.”
적어도 이틀 뒤에는 팽가를 떠나 낙양으로 가야 한다.
남량은 그 전까지, 어떻게든 운휘를 금강불괴로 만들 생각이었다.
방을 나서며, 운휘가 열정에 찬 눈으로 물었다.
“그런데 형님. 어떤 방식으로 수련하는 건가요?”
“으음.”
남량은 의미 모를 신음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직접 가서 보면 알게 될 거야.”
***
그 시각, 찬야와 유라, 위지혁은 미리 연무장에 도착해 있었다.
모두 손에 목봉(木棒)을 하나씩 쥔 채였다.
“그러니까…….”
찬야가 목봉을 붕붕 휘두르며 말했다.
“이걸로 운휘를 죽기 직전까지 패라는 말이지?”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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