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복마전(伏魔殿). 가화어인(嫁禍於人)(4)
양봉이 변복을 마치자 사내는 그를 데리고 보초들의 눈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맹을 빠져나와 조금만 가면 접선 장소가 나옵니다. 그때까지만 버티십시오.”
“알겠네.”
삐이익-!
그때, 날카로운 호각 소리와 함께 ‘탈옥이다!’, ‘양 당주가 빠져나갔다!’라며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양봉이 이를 부득 갈며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벌써 알아차린 건가!”
사내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발자국 소리가 가깝습니다. 서두르시지요.”
운이 좋았는지 한 번도 걸리지 않고 무사히 맹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숲속 길을 걷던 도중, 양봉이 말을 걸어왔다.
“헌데, 어디로 가는 것인가?”
“맹의 추적으로부터 안전한 장소가 있습니다. 잠시 그곳으로 피해 있으시지요.”
“그, 그렇군. 하기야 내가 더 이상 거사에 도움이 될 일은 없을 테니…….”
양봉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렸는지 계속 중얼거렸다.
“그래도 다른 동료들이 의심받지 않아 다행이군. 나보다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가 더 막중하니 말이야.”
“…….”
“그나저나 회주께서 내 충심을 알아주셔서 다행이네. 나는 맹세코 회를 배신한 적이 없었어.”
“물론입니다. 회주께서도 양 당주의 충정을 높이 평하십니다. 그러니 안심하시지요.”
사내의 말에 양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하던 사내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헌데, 이번 일로 회주께서는 거사의 진행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상당히 염려하고 계십니다. 동료들은 지금 어찌하고 있습니까?”
“응? 아아, 그들이야 뭐…….”
자연스레 말을 꺼내려던 양봉이 일순 표정을 굳혔다. 그의 시선이 앞에서 걷고 있는 사내를 향했다.
“지금껏 연락책들은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네만.”
사내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조금 뜸을 들였다.
“상황이 상황이니까요.”
“뭐, 그건 그렇지.”
양봉은 미묘한 표정으로 사내를 응시하며 말했다.
“참, 약당(藥堂)의 궁장문명(弓長門名)께서 흑영대의 의심을 받고 계시니 주의해서 살펴보시게.”
“알겠습니다.”
다음 순간, 양봉이 벼락처럼 몸을 날리며 손을 뻗어 장력을 날렸다. 사내는 재빨리 공중으로 몸을 날려 장력을 피한 뒤, 조금 떨어진 곳에 착지했다.
“……무슨 짓입니까?”
사내의 물음에 양봉이 코웃음을 쳤다.
“무슨 짓이라 했느냐? 회의 명을 받아 왔다는 자가, 궁장문명의 정체를 몰라? 그리고 하나 더, 네놈과 함께 빠져나왔을 때 한 번도 들키지 않았다. 왜일까? 단순히 운이 좋아서? 아니면 보초들이 어디로 올지 미리 알고 있어서?”
“…….”
“네놈, 정체가 무엇이냐.”
가만히 양봉을 응시하던 사내가 천천히 손을 들어 복면을 내리고 두건을 풀었다. 두건에 가려져 있던 새하얀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양봉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는…….”
“당신이 죽이려 했던 자의 얼굴도 모르나?”
양봉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설마, 네가 바로…… 남량?”
사내, 남량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내가 남량이다.”
양봉은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리며 말했다.
“네놈이…… 나를 속인 것이냐?”
“보다시피. 이걸로 네가 마교의 간자라는 확실한 증거가 드러났다. 양봉. 이제 다 끝났어. 포기해라.”
파사삭-.
남량의 말이 끝나자마자 풀숲을 헤치며 무림맹의 무사들이 튀어나와 양봉을 포위했다. 그리고 흑영대주 비설과 총관 건옹과 함께 무림맹주 고경홍이 모습을 드러냈다.
“맹주…….”
고경홍을 마주한 양봉의 표정이 허탈해졌다.
“나는 그대를 마지막까지 믿으려 했다.”
고경홍은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대는 내게 실망만을 안겨 주는군.”
“하, 하하하…….”
양봉은 모든 걸 내던진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이 양봉이, 한낱 후기지수 따위가 세운 함정에 보기 좋게 걸려들었구나.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한 일이야. 하하하…….”
총관 건옹은 싸늘한 눈으로 양봉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로써 양봉의 혐의는 입증되었다. 저자를 붙잡아라.”
명령을 받은 무사들이 양봉을 향해 다가왔다. 바로 그때였다.
“움직이지 마라! 내 입에 독약이 숨겨져 있다! 한 발짝이라도 다가오면 바로 자결할 것이야! 맹주, 당신도 이건 막지 못할 것이오!”
양봉의 협박에 무사들이 당황하며 주춤거렸다. 건옹이 표정을 굳히며 버럭 소리쳤다.
“양봉! 이 지경까지 와서 그따위 협박이 통할 거라 생각한 것이냐! 당장 항복하지 못할까!”
“자신 있으면 날 잡아 보든가. 대신, 네놈들이 얻고자 하는 정보는 죽을 때까지 얻지 못할 테지만.”
양봉은 도발하듯 미소를 지으며 건옹을 응시했다. 건옹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경홍에게 말했다.
“맹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자결을 하려 했다면 벌써 했을 것이네.”
고경홍은 양봉을 노려보며 그에게 물었다.
“양봉.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나는 최선을 다했으며 결과가 이리 된 것에 대해 변명할 생각은 없다. 허나!”
양봉의 일그러진 시선이 남량을 향했다.
“나를 이 지경까지 밀어 넣은 남량, 네놈만큼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내가 죽더라도 네놈만큼은 반드시 저승길 동무로 삼아야 속이 풀릴 것 같구나. 그러니 제안을 하나 하지.”
“무슨 제안?”
고경홍의 물음에, 양봉이 대답했다.
“이 자리에서 나와 남량! 이 둘이 승부를 내게 해 주시오. 누구도 끼어들어서는 안 되오. 내가 진다면 당신들에게 유리한 정보를 하나 알려 주지. 허나! 내가 이긴다면 날 보내 주시오.”
건옹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양봉! 끝까지 뻔뻔하군! 네놈이 지금 그런 제안을 할 수 있는 처지라고 보는 것이냐!”
“선택은 맹주에게 맡길 것이오! 그는 신의가 있는 자이니 한번 정한 약속을 깨지 않겠지. 자, 결정하시오! 마교의 정보와 남량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비설이 고경홍에게 말했다.
“양봉은 비록 고신으로 인해 몸이 성치 못하나, 엄연히 초절정의 고수. 그에 비해 남 소협의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절정이 아닙니까. 이 싸움은 애초에 성립이 불가합니다.”
“흑영대주의 말이 맞습니다.”
건옹 역시 비설의 말에 동의했다.
“…….”
고경홍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남량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남량. 내 너에게 하나 묻겠다.”
“말씀하십시오.”
“양봉을 이길 수 있겠느냐?”
“맹주!”
비설과 건옹이 양쪽에서 소리쳤다. 그러나 고경홍의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남량은 덤덤히 그의 눈빛을 마주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 주시면, 이겨 보이겠습니다.”
“좋다. 이 일은 너에게 맡기마.”
고경홍은 건옹과 비설을 향해 말했다.
“양봉에게 검을 주고 뒤로 물러나라. 이 싸움이 끝나기 전까지, 누구도 난입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맹주. 남량은 뛰어난 인재입니다. 그를 잃는다면…….”
“총관. 나는 확신한다네. 남량이 이길 것이라고.”
고경홍이 타오를 듯한 눈으로 건옹에게 말했다.
건옹은 맹주의 선택을 존중해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맹주는 천하제일의 무인이다. 저분이 그리 생각하셨다면 분명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겠지. 허나 상식적으로 절정이 초절정을 이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지금껏 한 번도 경지의 격차를 뛰어넘은 사례를 들어 본 적이 없다.’
한편, 양봉은 이미 승리에 차 미소를 짓고 있었다.
‘멍청한 작자들 같으니. 이걸로 내게 기회가 주어졌다.’
맹주의 명에 따라 무사들이 뒤로 물러났다.
검을 건네받은 양봉이 가볍게 몸을 풀며 말했다.
“아무래도 맹주는 네놈을 그리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야. 이렇게 죽을 자리를 마련해 주니 말이다.”
“맹주는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다.”
남량은 검을 뽑아 들며 대답했다.
“내가 널 이긴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흥! 이래서 젊은이들의 치기 어린 자신감이란!”
양봉은 내력을 끌어모으며 남량을 향해 쇄도했다.
챙! 채채챙! 채챙!
남량과 양봉의 검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맹주를 비롯한 비설과 건옹, 그리고 맹의 무사들은 손에 땀을 쥐며 두 사람의 결투를 응시했다.
카앙!
양봉이 수직으로 검을 내리쳤다. 남량은 검을 들어 막았으나 충격으로 밀려났다. 비설이 이를 악물었다.
“역시 내력으로는 양봉이 한 수 위야.”
“허나 검속이라면 남량이 한 수 위다.”
고경홍이 진중한 눈빛으로 말을 받았다.
촤라락-!
남량은 자세를 낮추며 극하단으로 검을 휘둘렀다. 양봉이 몸을 띄워 피하려는 순간, 다리를 노려 오던 남량의 검이 급변하며 목을 노려 왔다.
‘검로가 변했어?’
깜짝 놀란 양봉은 이를 악물고 목을 젖혔다. 남량의 검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턱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만으로 양봉의 턱이 찢어지며 피가 흘러내렸다.
남량은 칼끝에 묻은 피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아깝네. 죽일 수 있었는데.”
“무슨 술수를 부린 것이냐.”
양봉의 물음에, 남량이 대답했다.
“매화천수검 2초식, 옥녀유영 초식이다.”
“옥녀유영…….”
양봉은 손등으로 흐르는 피를 닦으며 말했다.
“그래……. 혈삼랑, 도살객, 유령객을 상대로 이긴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군.”
고경홍은 뒷짐을 진 채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무사의 결투는 단순히 경지의 차이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경험과 검술, 냉정함과 운, 그 외에도 다양한 것들이 승패를 좌우하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믿음이다. 상대를 얕잡아보고 방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길 거라는 확실한 믿음이 승패를 좌우하는 가장 큰 열쇠가 된다. 내가 남량을 보고 승리를 확신한 것은, 그의 눈빛에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야.”
남량은 양봉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어때, 이제 좀 진지하게 해볼 마음이 생겼나?”
“그래……. 인정하마. 내가 널 얕보고 있었다는 것을.”
양봉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제대로 전력을 다해 상대해 주마.”
양봉은 자신의 모든 내력을 전부 끌어모아 검에 담았다. 그러자 검기를 넘어서 유형화된 기의 형상이 칼날을 타고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검강…….”
“이것이 바로, 절정이 초절정을 넘어서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다. 넌 절대, 이 검강을 깨뜨릴 수 없어.”
양봉은 히죽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남량은 검을 뒤로 늘어뜨리며 자세를 취했다.
“이게 마지막이 되겠군. 오너라.”
단 한 번의 격돌로, 이 싸움은 끝이 난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숨소리마저 죽인 채 집중했다.
‘정면으로 부딪쳤다간 죽는다. 남량, 어떡할 셈이냐?’
‘남 소협…….’
사위가 고요해지며 침 꿀꺽 삼키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누가 먼저 움직이는가. 아니면 둘 다 동시에?
절그럭.
지켜보던 무사 한 명이 움직이자 허리춤에 찬 검집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남량과 양봉이 동시에 바닥을 박차고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으아아-!”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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