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양녀(養女), 유라(1)
매년 무림맹에서 약관이 안 된 후기지수들을 상대로 개최하는 투연회(鬪宴會)가 낙양 백운산(白云山)에서 열렸다.
정파 세력 간 친선과 교류를 목표로 한 이 대회에는 매해 그렇듯 수많은 인원이 참가했다.
대회 규칙은 간단했다.
참가자는 각 문파와 세가에서 두 명씩 내보낸다.
참가자들은 이마에 띠를 두르고 백운산에 올라 일정한 시간 동안 상대 참가자를 찾아 띠를 풀어야 한다.
당연히 자신의 띠를 지켜야 하고 띠가 풀리면 탈락이다.
이 과정에서 참가자들은 서로의 실력을 겨루게 된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참가자가 투연회의 최종 우승자가 되었다.
당연하지만 일신의 무력이 고강할수록 대회에서 우승할 확률이 높았다.
웅성웅성.
백운산 초입에는 이른 아침부터 투연회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운이 좋으면 강호에 이름을 알린 기린아(麒麟兒)를 눈앞에서 볼 기회이기도 했다.
심사관의 호명에 따라 가문의 무복을 입은 청년들이 하나둘씩 입장하기 시작했다.
명문(名門) 출신의 청년들은 가문의 색이 뚜렷해 알아보기 쉬웠다.
예를 들어 사천의 당가(唐家)는 산다화(山茶花:동백꽃) 문양이 들어간 자줏빛 무복, 안휘의 남궁가(南宮家)는 목단화(牧丹花:모란) 문양이 들어간 푸른빛 무복이었다.
화산의 대표로 참석한 남량은 매화 문양이 들어간 하얀색 무복을 입었다.
함께 참가한 유라 역시 마찬가지로 하얀색 무복을 입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입장 호명과 함께 천천히 사람들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관중들 사이에서 열광에 찬 환호성이 쏟아져 내렸다.
남량은 근래 맹에서 골치를 썩고 있던 은영단 사건을 해결하는 데 큰 공헌을 해 자신의 이름을 알렸고, 유라는 쉼 없이 협행을 돌며 사람들을 구하고 수많은 악인들을 처단해 명성이 높았다.
사람들은 새롭게 떠오른 신성(新星) 남량을 향해 ‘백매화(白梅花)’라는 별호를 붙였으며, 유라를 가리켜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몸을 바친다 하여 ‘불사검협(不辭劍俠)’이라는 별호를 붙였다.
인기가 날로 치솟자, 자연히 두 사람의 외모도 주목을 받았다.
남량은 외모가 수려하고 아름다워 마치 봄철에 흩날리는 꽃잎과 같았고.
유라는 7척(171cm)에 달할 정도로 큰 키에 허리가 꼿꼿하고 걸음걸이가 당당해 여장부와 같은 위엄이 느껴졌다.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자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남 소협! 무복이 잘 어울리세요!”
“불사검협. 부디 우승을 기원하겠소!”
열띤 응원이 쏟아지는 가운데, 남량과 유라는 말없이 그곳을 지나쳤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유독 싸늘했다.
***
사흘 전날 밤, 무림맹 별채.
남량이 하루 수련을 마치고 막 잠에 들려는 때, 누군가 기별 없이 방문을 해 왔다.
그는 바로 화산파의 장문인, 구양중이었다.
구양중은 의회전(議會殿)에서 열리는 무림회의(武林回議)로 낙양에 온 김에 잠시 들렀다며 남량에게 말했다.
“잠깐 걷자꾸나.”
구양중은 함께 온 젊은 도사들을 뒤로 물리고 남량과 함께 마당을 걸었다.
터벅터벅.
밤이라 아무도 없는 마당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흘리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른 잎이 부서지며 사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구양중은 뒷짐을 진 채 나직이 입을 열었다.
“요양 중이라던데, 몸은 좀 어떠하냐?”
“괜찮습니다.”
“지하미궁에 들어갔다던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아무 일 없었습니다.”
구양중이 허! 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아주 생긴 것만 아니라 성격도 제 스승을 빼닮았구나! 표정 하나 안 바꾸고 거짓말을 술술 내뱉다니! 우화 그놈도 그랬었지. 일을 저지르고 잡아떼는 데 도가 튼 놈이었다. 지금이야 나이 먹고 좀 얌전해졌다지만……. 그놈도 참, 어디서 저 같은 걸 잘도 데려와 가지고는. 허허.”
남량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늙은이, 생각보다 감이 좋은데?
구양중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놀랐느냐?”
“조금은……. 예.”
“다 네놈 스승 때문이다. 일대제자였던 시절, 내가 그때 네놈 스승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구양중은 혀를 쯧쯧 차며 말끝을 흐렸다.
남량도 따라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유우화, 그놈도 젊었을 적에는 말썽 꽤나 일으킨 모양이군.
구양중은 호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냐! 내 아무것도 묻지 않으마. 본래 무림인이란 가슴 속에 아무에게도 말 못 할 비밀 한 가지씩은 품고 사는 법이니…….”
남량이 슬쩍 물었다.
“칭찬입니까?”
“이놈아! 이게 칭찬으로 들렸느냐? 이런 뻔뻔한 놈 같으니!”
구양중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남량은 그의 웃음이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구양중은 고개를 돌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작금의 중원은 빙판길을 걷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어둠 속에 암약하며 조금씩 제 발톱을 드러내고 있으니, 중원이 혼란에 빠지는 건 시간문제다. 그러니 곧 다가올 폭풍을 맞아 우리도 대비를 해야만 한다.”
남량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들’이란, 혹 마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구양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필시 큰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어쩌면 남북 십성의 힘으로도 어찌하지 못할 정도의 큰 전쟁이……. 너는 검선의 모든 것을 이어받은 그의 계승자다. 그러니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고 앞으로 강해지는 데 더욱 힘쓰라. 그리고 곧 있을 투연회에서도 당부할 것이 하나 있다.”
“네? 무슨 연회 말씀이신지…….”
“투연회 말이다. 매년 무림맹에서 주관하는 행사로, 후기지수들이 모여 서로 자신의 기량을 뽐내는 행사다. 당연히 구파와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들이 모두 참여하는 자리다. 그곳에는 너 말고도 남북 십성의 후계자들이 있을 터이니, 그들과 실력을 겨루며 서로 화합을 도모하도록 하거라. 훗날, 네 가장 믿음직한 동료가 될 아이들이니…….”
구양중은 손을 들어 남량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힘내거라. 항상 응원하고 있으마.”
남량은 웃으며 대답했다.
“말로만 응원하지 마시고…… 뭐 영약이라든지, 그런 건 가져온 거 없습니까?”
“나 먹을 것도 없다 이놈아! 허허.”
구양중은 흐뭇한 표정으로 남량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훈훈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때, 누군가 거친 걸음걸이로 마당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자 매화오절의 홍일점인 유라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유라는 싸늘한 눈으로 남량을 한 번 쳐다본 다음, 구양중을 향해 말했다.
“오셨다는 말씀, 못 들었는데…….”
“금방 돌아갈 것이니 신경 쓸 것 없다.”
구양중은 남량을 대할 때와 다르게, 사뭇 냉정한 어투로 대답했다.
유라가 입술을 깨물며 잠시 침묵하다 힘겹게 말을 꺼냈다.
“남 사제는 찾아오시면서, 저는 왜 안 보고 가십니까?”
“남량에게는 따로 당부할 말이 있어서 들른 것이다.”
구양중의 말에, 유라가 헛웃음을 흘렸다.
“검선의 제자라 특별 대우라도 해 주시는 겁니까?”
“…….”
“예. 안 봐도 뻔합니다. 항상 그러셨지요. 지금도 그렇고요. ‘힘내라.’, ‘항상 응원하고 있으마.’ 저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말들을, 남 사제한테는 참 잘해 주시더군요. 장문인이 직접 찾아와 격려까지 하고……. 참 눈물 나는 애정입니다. 재능이 없는 사람들은 평생 가도 얻지 못할 애정…….”
“이만 가 보마.”
구양중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유라가 주먹을 쥐며 소리쳤다.
“저도! 저도 화산의 명예를 위해 미친 듯이 뛰었습니다! 하루 이상 쉬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협행을 나가 싸우고, 다쳐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얼마나 더 해야 합니까? 아직 당신의 기대에 못 미칩니까? 대체 언제 저를 인정해 주실 겁니까? 언제!”
“유라! 그만하지 못하겠느냐!”
구양중이 참지 못하고 매섭게 일갈했다. 그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유라도 분노로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뒤에 선 도사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서로 속닥거렸다.
두 사람 사이의 상황을 모르는 남량은 일단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런 그릇된 마음으로 협행을 하고, 수련을 한다면 평생 걸려도 진정한 도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사념(邪念)이 섞여 기가 정순하지 못해 내력을 상하게 만들 것이야!”
구양중은 한숨을 내쉬며 분노를 잠재웠다.
그리고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그래도 너를 믿었건만, 오늘 보여 준 모습은 참으로 실망스럽구나. 투연회까지 남은 기간은 명상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도록 하거라.”
“장문인!”
“더 이상 할 말 없다. 이만 가겠다.”
“아뇨! 저는 할 말을 해야겠습니다.”
“정녕 호되게 야단을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사제가 보고 있는데 부끄럽지도 않은 것이냐!”
유라는 얼굴을 크게 한 방 맞은 것처럼 충격받은 표정을 했다.
구양중은 옷깃을 펄럭이며 돌아서서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유라가 멍한 표정 사이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참으로……. 참으로 너무하십니다.”
구양중은 유라의 말을 무시하고 마당을 벗어났다.
유라도 넋이 나간 표정으로 한참 구양중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더니, 이내 비틀거리며 마당을 나갔다.
남은 도사들은 저마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구양중이 사라진 곳을 따라가려 했다.
그때, 남량이 그들 중 한 도사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백준 사형. 뭐 하나 물어봅시다.”
탁.
백준 도사를 방으로 데려온 남량이 문을 닫으며 그를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차를 한 잔 따라서 건네주며 창가에 걸터앉았다.
“사형, 사형은 알고 있지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으응? 응……. 알고 있기는 한데…….”
백준이 곤란한 표정으로 찻잔을 어루만졌다. 남량은 팔짱을 낀 채 눈살을 찡그렸다.
“비밀로 할 테니 말해 봐요.”
“그래도 그건 좀…….”
“뜸들이지 말고 빨리!”
“아, 알았어! 보채기는…….”
백준은 남량이 화산에 있을 당시, 친분을 쌓은 몇 안 되는 도사들 중 한 명이었다.
친분이라고 해 봐야 유우화가 먹을 밥을 지을 때 백준이 식재료 조달을 하며 몇 번 마주친 거지만…….
백준은 짧게 한숨을 쉬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유라는, 그러니까 장문인의 양녀(養女:수양딸)야. 십여 년 전에, 그러니까 너희가 완전 애기였을 때 장문인이 데리고 왔어. 어디서 데려왔는지는 아무도 몰라. 그저 산적한테 목숨을 잃을 뻔한 어린 유라를 장문인이 구해서 데려왔다고 다들 예상하지. 아무튼, 그렇게 수양딸로 삼았지만 이상하게 장문인은 유라한테 양부로서의 애정을 전혀 보이지 않으셨어. 훈련도 다른 도장에게 맡기고, 철저히 방관했다고 봐야지. 말만 수양딸이지 거의 남이야 남.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
“그래서?”
“유라는 어떡해서든 장문인한테 인정받고 싶어 하고, 자신이 화산의 제자로서 강해져야만 인정해 줄 거라고 생각하나 봐. 그런데 도통 마음을 열지 않으시니……. 유라만 불쌍하지. 매화천수검을 익히려고 도전까지 했는데 실패하고 나서 둘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냉전 상태야.”
“흐음…….”
백준은 말을 많이 꺼내 목이 탔는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남량에게 당부했다.
“너, 조심해라. 자기도 익히지 못한 매화천수검을 익힌 너를 유라가 곱게 볼 리 없어. 오히려 질투로 적개심을 활활 불태울걸? 방금 전에 장문인이 수양딸인 자신보다 너한테 더 관심을 쏟는 걸 직접 목격했으니까. 괜히 성질 긁지 말라고. 안 그래도 한껏 예민해져 있을 텐데…….”
남량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투연회에서 그녀가 내 등에 칼이라도 박을까 봐? 알겠으니 걱정 말고 이만 가 보세요.”
“이 새끼가 걱정을 해 줘도…….”
“얼른 가요. 밤길 조심하고.”
“넌 사형 알기를 아주 개똥으로 알지? 아직 차도 다 안 마셨어 새끼야! 망할, 간다!”
백준이 투덜거리며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남량은 고개를 돌려 반쯤 열린 창문 밖으로 떠오른 달을 응시했다.
‘투연회가 앞으로 사흘 뒤였지, 아마?’
***
그리고 시간을 돌려 투연회 당일.
두 사람이 백운산으로 들어서자, 유라가 빠른 속도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딘가 매우 다급해 보였다.
‘내 등에 칼을 꽂을 생각은 없어 보이는데……어딜 저렇게 바삐 가는 걸까?’
남량은 멀어지는 유라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기척을 숨긴 채 천천히 그녀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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