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명탐정 찬야(3)
경매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남량은 도둑맞은 맹의 귀물들이 나올 때까지 팔짱을 낀 채 가만히 기다렸다.
‘목록에 적힌 것들은 대충 다섯 개인가. 명검, 그림, 유물……. 진귀한 물건일수록 나중에 나오나 보군.’
찬야는 백상을 비롯한 청성파 제자들의 기척을 유심히 살피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긴장했는지 덜덜 떠는데? 불쌍해라.”
백상은 아마 귀물이 나오는 순간 은신을 풀고 달려 나와 물건을 가로채 도망갈 생각일 것이다.
남량 일행보다 빨리 움직여야 하고, 경매장 주변의 호위들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테니 조급할 터였다.
그 앞에서 남량과 찬야는 보란 듯 느긋하게 다과를 즐겼다. 백상이 이를 부드득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략 반 시진(1시간) 뒤, 드디어 남량이 찾던 맹의 귀물들이 경매로 나왔다.
경매가 시작되자마자 몇몇 고객들이 값을 부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값이 크게 뛰어올랐다.
남량은 고개를 힐끗 돌려 백상을 응시했다.
백상은 검을 뽑으며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기세였다.
그 순간, 그와 남량의 시선이 마주쳤다.
남량은 백상을 향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백상은 눈살을 찌푸리며 ‘뭘 처웃고 있냐.’라는 표정으로 남량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남량은 보란 듯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금자 열 냥.”
“……!!!”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과 놀라움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금자 열 냥은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었다.
백상은 금방이라도 턱이 떨어질 듯 입을 벌린 채였다.
경매를 주관하는 경매사가 주변을 향해 말했다.
“금자 열 냥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
“아무도 없으시다면…….”
결국 맹의 귀물은 남량의 손에 낙찰되었다.
남량은 찬야에게서 건네받은 금자 열 냥짜리 전표를 건네고 당당히 물건들을 넘겨받았다.
찬야가 끌끌 웃으며 속삭였다.
“백상이 단단히 충격을 받은 모양인데? 저놈도 설마 돈으로 물건들을 사 버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겠지.”
남량은 말이 끄는 수레에 물건들을 실은 다음, 고삐를 잡아당기며 유유히 경매장을 벗어났다.
경매장 건물의 문턱을 넘던 남량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백상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뭐 하러 서 있냐? 돈도 없을 텐데.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그만 나오지 그래?』
남량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아, 그리고 벌칙은 잘 기억하고 있겠지? 기대할게. 최선을 다해 보라고. 청성파 나리들. 하하!』
백상과 제자들의 표정을 보니 당장이라도 울혈이 터져 죽을 것 같은 표정이다.
***
맹으로 돌아온 남량은 보란 듯 도둑맞은 물건들을 돌려놓으며 의뢰를 훌륭하게 완수했다.
총관을 비롯한 맹의 인사들은 크게 기뻐하며 남량을 칭찬했다.
그 일로 화산파와 남량, 찬야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반면, 백상을 비롯한 청성파의 위신은 크게 떨어졌다.
일부 사람들은 ‘화산파가 해낸 일을 청성파는 못했으니 다음 대 문파 서열은 불 보듯 뻔한 일이겠군.’, ‘흑점의 경매장 위치를 알아낸 것도, 사실 화산파 제자들의 공이니 청성파는 도움이 전혀 안 된 것이나 다름없지요.’라고 떠들었다.
무엇보다 남량이 내건 내기의 내용이 맹에 알려지면서 이목이 집중되었다.
누군가는 ‘설마 맹의 연무장에서 속옷 차림으로 춤추는 수치스러운 일을 청성파 제자들이 하겠어?’라고 말했으나, 다른 누군가는 ‘해야지! 사내가 한번 내건 약속을 안 지키면 온 무림인들의 웃음거리가 될걸?’이라고 은근히 부추겼다.
벌칙을 지키면 평생 수치스러운 흑역사를 만드는 것이고, 지키지 않으면 자존심도 없는 소인배로 기억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두고두고 치욕을 받는다는 사실은 같았다.
남량은 느긋하게 백상의 선택을 기다렸다.
그리고 사흘 뒤, 백상은 벌칙대로 연무장에 사람이 몰린 대낮에 속옷 차림으로 남량의 앞에 섰다.
“자, 이거면 충분하겠지?”
백상의 뒤에 선 청성파 제자들은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팔로 가슴께와 아랫도리를 필사적으로 가리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백상 또한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진 채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어이구……. 우리가 좀 심했나?”
찬야가 손으로 눈가를 가리는 시늉을 하며 중얼거렸다.
남량이 덤덤하게 말했다.
“춤은?”
“그만해! 이 악독한 자식! 어디까지 모욕을 줄 셈이야!”
한 젊은 제자가 버럭 소리쳤다.
“적당히 해 줬으면 좋겠군. 이미 충분히 치욕을 맛보았다.”
백상의 말에 남량이 싸늘히 대꾸했다.
“내가 고작 네놈들 망신 주려고 이러는 걸로 보여? 수치심과 함께 머릿속에 똑똑히 새겨라. 내가 있는 한, 네놈들이 화산을 욕보이고 무시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어야 할 것이다.”
“…….”
청성파 제자들은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다물었다.
“뭐, 그래도 이 정도면 교훈이 되었으려나…….”
“그, 그럼?”
어린 제자들이 눈을 반짝이며 남량을 쳐다보았다.
“이대로 연무장 밖까지 걸어서 나간다.”
“이대로? 옷은 입어야지!”
“아니. 그.대.로. 나간다.”
남량이 연무장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뭐 해? 하루 종일 이러고 있을래?”
“…….”
제자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 도망치듯 연무장을 벗어났다.
“하하하!”
구경하던 무사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백상은 두 주먹을 부르르 떨며 나직이 말했다.
“이 모욕……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남량이 냉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열심히 노력해서 설욕하면 그땐 웃으며 칭찬해 주마. 네가 그만큼 기백이 있는 놈인지는 모르겠다만.”
“두고 보자.”
백상은 입을 꽉 다문 채 몸을 돌려 연무장을 벗어났다.
“눈빛 봐라……. 저러다 오늘 밤 기습해 오는 거 아니야?”
찬야가 농담조로 중얼거렸다.
***
“분명 농담으로 한 말인데, 딱 들어맞을 줄이야. 하하…….”
찬야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눈앞에 선 백상을 응시했다.
낙양 저자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오던 중, 인적이 드문 오솔길에서 백상이 길을 막아섰다.
손에 든 장검을 보니 작정하고 기다린 듯했다.
남량이 한심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두고 보자는 게 이런 말이었나?”
“닥쳐라!”
백상이 눈을 번득이며 이를 갈았다.
“네까짓 것들이 감히……. 내게 수치를 주고도 무사할 줄 알았느냐! 이 모욕은 네놈들의 피로 씻을 것이다! 각오해라!”
찬야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 위험한 놈 보게……. 구파 간에 전쟁이라도 일으킬 셈이냐? 우릴 죽이기라도 하면 뒷감당을 할 수 있겠어?”
백상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전쟁? 허. 고작 제자 한두 명의 죽음으로 전쟁이 일어날 것 같더냐? 화산이 과연 전쟁을 일으킬 자신이나 있고? 기껏해야 천마에게 패배해 남북 십성에서 은퇴한 퇴물이나 있을 뿐…….”
그때, 남량의 손에서 철전 하나가 파공음을 내며 백상의 입으로 날아갔다.
“헉!”
검을 들어 철전을 막아 낸 백상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남량이 손가락을 구부린 채 싸늘히 말했다.
“어디 하찮은 새끼가 그 이름을 입에 올려?”
그놈 욕을 해도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남량은 가볍게 주먹을 풀며 걸음을 내딛었다.
“모욕을 입었다고 밤중에 찾아와 기습이라니. 이거야 원, 최소한의 자존심도 없는 찌질이가 아닌가. 네놈에게 더는 볼일 없다. 다시는 눈앞에 나타날 엄두도 나지 못하게 두들겨 패 주마.”
찬야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살살 해. 남 사제.”
백상이 남량의 검을 가리키며 외쳤다.
“왜 검을 뽑지 않는 거냐!”
“뭐? 하하하!”
남량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뭐 하러 검을 뽑는단 말이냐? 너 따위, 손가락 하나로도 충분한 것을.”
“……!!!”
백상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는 참지 못하고 남량에게 달려들었다.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백상은 화려한 동작으로 남량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남량은 가볍게 검을 피하며 손등으로 공격을 흘려보냈다.
백상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매섭게 연격을 가했다.
남량은 여전히 잔잔한 표정으로 날아드는 검격을 모조리 흘려 내거나 쳐 냈다.
남량의 동작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고, 손바닥에도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백상은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어, 어떻게?”
“동작만 화려하고 실속은 없다. 겉보기에만 치중한 허접한 검술이로군.”
백상은 터져 나갈 듯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네놈! 대체 어디까지 청성을 모욕할 셈이냐! 지금 청성의 검이 화산보다 못하다는 건가!”
그때, 남량의 옷깃이 펄럭이며 그의 신형이 한순간 백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백상은 당황하며 외마디 신음을 내뱉었다.
백상이 내지른 검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품으로 파고든 남량이 가슴팍에 지풍(指風)을 날렸다.
쩌엉!
“크허억!”
백상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피를 울컥 내뱉은 걸로 보아 내상을 입은 듯했다.
“진짜 손가락으로 이겼네?”
찬야가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남량은 비틀거리는 백상을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착각하지 마라! 나는 지금 청성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라 네놈을 모욕하는 것이다. 청성의 검은 결코 화산에 뒤진다 말할 수 없다. 지금 누가 청성을 욕보이는지 아느냐? 바로 네놈 새끼다! 그렇게 모욕을 받는 게 싫으면 당장 주제에 안 맞는 도복을 벗어 던지고 꺼져 버려! 네놈 성정을 보아하니 녹림도나 사파 무리가 어울리겠다.”
“닥쳐라! 닥치란 말이다!”
백상은 절규하듯 부르짖으며 남량에게 재차 달려들었다.
남량은 눈살을 찡그리며 검을 뽑아 휘둘렀다.
채챙!
한 차례 빛이 번쩍이며 백상의 검이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챙. 남량은 검을 검집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팔을 뻗어 백상의 목을 붙잡고 바닥에 내다 꽂았다.
콰득!
몸이 부서질 듯한 충격에 백상이 비명을 질렀다.
“크억!”
남량은 손을 탈탈 털며 말했다.
“남북 십성, 청성의 용제(龍帝)는 대협이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은 진정한 무인인데, 제자 보는 눈 하나는 형편없군.”
남량은 소매를 펄럭이며 백상을 지나쳤다.
“가자.”
“응.”
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
“백상 말이야. 며칠째 아무 일도 없네.”
한산한 정자 위에서 당과를 씹던 찬야가 말했다.
“살심(殺心)을 품고 덤벼들었으니 무슨 자격으로 말을 하겠어?”
남량이 차를 마시며 대꾸했다.
“하긴, 그건 그렇네.”
찬야는 방긋 웃으며 당과를 하나 더 꺼내 들었다.
“의뢰를 무사히 완수해서 화산의 명성을 높인 데다가 청성파가 더는 우리 화산을 무시할 일이 없어졌으니 이거야말로 일석이조네. 하하!”
남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전에 못 한 걸 해야지?”
“응? 그게 무슨…….”
고개를 갸웃거리던 찬야의 얼굴이 금방 새파랗게 질렸다.
“서, 설마…….”
“그래. 정신개조술.”
찬야는 손에 든 당과를 떨어뜨리며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아, 아니지? 남 사제. 나 이번에 잘했잖아. 응? 한 번만 봐줘.”
“잘했어. 상으로 사흘에서 이틀로 줄여 줄게. 고맙지? 가자.”
남량은 찬야를 한 손으로 가볍게 들쳐 업고 정자를 내려왔다.
“싫어! 싫다고!”
찬야의 외마디 절규(?)가 한가로운 무림맹에 울려 퍼졌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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