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그래요, 바알. 마신의 자리를 두고 베논과 다퉜던 재앙의 신께서 당신과 함께하실 겁니다.”
“…….”
얼음장처럼 표정이 굳은 콘스 교수가 싸늘하게 답한다.
“흑마법사가 바알을 믿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아시죠?”
“너무도 잘 알지요. 흑마법사들이 가장 끔찍하게 여긴다는 생명의 샘으로 끌려간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보고 바알의 손을 잡으라고?”
너무 어이가 없었는지.
콘스 교수는 지팡이를 잡곤 스산하게 읊조린다.
“당장 내 방에서 꺼져.”
“잘 생각해 보시지요. 베논이 당신에게 무얼 줬죠? 부와 명예는 그깟 하인이었던 놈이 챙기고, 당신에게는 무시로 일관한 게 베논입니다. 하지만 바알 님은 다르지요. 그분께서는 당신께 강대한 힘을 허락하실 겁니다.”
상대가 팔을 좌우로 활짝 펴고 말을 이어 간다.
“또한 그분께서는 당신이 갖고 있는 깊은 열망을 이뤄 내 주실 겁니다.”
“내가 원하는 게 뭔 줄 알고?”
“만약 당신이 우리의 손을 잡는다면 당신이 그토록 원했던 고질병을 해결해 드리지요.”
상대의 말에 콘스 교수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거린다.
“…내 고질병이라고?”
“당신의 심장, 문제가 있지 않은가요? 흑마력 소멸병 말이지요.”
흑마력 소멸병.
흑마력을 모으는 서클에 균열이 생겨 모은 흑마력들이 점차적으로 빠져나가는.
흑마법사에게는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은 질병이다.
“그걸 너희가 어떻게…….”
“바알 님께서는 모르시는 게 없으시지요. 하물며 당신이 안고 있는 흑마력 소멸병 또한 전부 알고 계십니다.”
“아니야……. 나는… 병에 걸리지 않았어.”
콘스 교수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아, 그래요? 그럼 왜 흑남에게 인공 심장 실험을 진행한 거지요? 모른 척하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당신에 대해 전부 꿰고 있으니까요.”
상대의 입에서는 연이어 달콤한 속삭임이 흘러나온다.
“그 병이 지속되는 한 당신은 언제고 흑마력을 모두 잃게 될 것이고, 교수의 자리에서도 내려올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기도를 외면하는 마신보다는 당신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 줄 수 있는 바알 님을 따르는 게 맞지 않을까요?”
거절하기엔 너무도 매력적인 제안이었던 걸까.
지팡이를 잡은 콘스 교수의 손이 움찔거린다.
“하지만 왜 흑남이지? 놈을 죽여야 하는 이유가 있나?”
“놈은 바알 님의 원대한 뜻과 이념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지요.”
“너희가 힘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직접 죽여도 될 텐데?”
콘스 교수가 의아하다는 듯 묻자.
상대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맞습니다. 저희가 직접 해도 되는 일이지요. 하지만 저희는 이 흑카데미에 들어오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만 했습니다. 만약 저희가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다면 다시는 기회를 못 잡을지도 모르지요.”
“너희의 정체가 들키는 걸 원치 않는다? 이미 내게 들킨 거나 다름이 없는데?”
“괜찮습니다. 콘스 교수께서 저희와 한배를 타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니까요.”
상대의 말마따나 그들의 제안은 너무나 고혹적이었고.
그녀로선 거부하기 힘든 것이었다.
“꽤나 매혹적인 제안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대가가 부족하다는 말씀이신지요. 그럼 이건 어떨까요?”
상대가 노르스름한 눈동자를 굴리며 툭 한마디를 던진다.
“만약 당신이 흑남을 죽인다면 덤으로 아크 신관장을 죽여 드리도록 하지요.”
“…그것도 알고 있었나.”
“우리 또한 성마전쟁에 참여했었다는 걸 잊었습니까? 바알 님의 앞에 모든 걸 내려놓고 약속하지요. 당신이 흑남을 죽인다면 반드시 방금 말한 조건들을 이행해 드리겠습니다.”
콘스 교수가 쉽사리 답하지 못하자.
상대가 최후통첩을 하듯 단호히 말한다.
“그저 당신이 섬기는 이를 바꾸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어쩌시겠습니까?”
마침내 결단을 내린 건지, 콘스 교수가.
차가운 눈으로 상대를 바라본다.
“…그래. 흑남이라고 해도 아직은 애송이니 죽이는 게 그렇게 어렵진 않겠지.”
“오오! 잘 생각하셨…….”
“하지만 나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갖고 있어야겠어. 내게 숲의 증표를 줘. 너희가 반드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용한다는 숲의 증표를 말이야. 그럼 너희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콘스 교수가 손을 내밀자.
상대의 눈꼬리가 진한 곡선을 그린다.
“숲의 증표를 알고 있다니… 보기보다 우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모양이지요?”
“나도 조사를 좀 해 봤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툭-
상대가 빗방울 모양이 각인된 작은 나무패를 꺼내더니.
손가락을 째어 그 위에 혈흔을 그린다.
“자, 숲의 증표입니다.”
“좋아.”
“좋군요.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하지요.”
이윽고 상대가 방을 나서자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잘한 걸까……. 그래… 잘한 거야……. 내 간절한 소망을 이룰 수만 있다면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어.”
찻잔에 손가락을 얹었다 내려놓았다 하며 혼란스러워하는 콘스 교수.
그녀는 이내 차가운 눈으로 찻잔에 남은 차를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그리고 나에게 치욕을 줬던 그놈… 놈에게도 대가를 받아 내야지. 내게 받아 갔던 걸 모두 토해 내야 할 거야……. 그래… 일단 놈의 심장부터 갈라야겠어…….”
* * *
다음 날, 점심.
‘어디 보자……. 내일 대형 도굴꾼 길드 ‘삽과 곡괭이’ 놈들이 흑탑에 온다고 했었지?’
나도 그에 맞춰 흑탑에 가 봐야 할 터.
‘놈들이 신성력이 있는 물건들을 좀 많이 갖고 왔으면 좋겠는데……. 그러고 보니 어째 그놈들은 코빼기도 보이지를 않냐.’
나에게 운디네의 눈물을 팔기로 했던 도굴꾼 녀석들.
어디 무덤에서 죽기라도 한 건지.
그날 이후로 녀석들은 모습조차 보이질 않았다.
‘도굴꾼이라는 게 결국 그런 거지. 자칫하면 죽기 쉬운 직업이니까.’
내가 고개를 저으며 다음 수업을 위해 복도를 걸어가던 중.
“저것 봐! 흑행 일정이 나왔어!”
“오, 이번 독살 건 때문에 시끌시끌해서 안 할 줄 알았는데, 강행하네? 볼드 학장님도 참 대담하시긴 해.”
“그러게? 그보다 어디… 음… 뭐야, 다 갔었던 곳들이잖아?!”
학생들이 복도의 게시판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양피지들을 보며 대화하는 모습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흑행이라…….’
흑행.
학생들의 고된 학업과 노고를 위로하고자 매년 한 번 하는 일종의 여행 같은 것이었다.
‘말이 흑행이지 그냥 수학여행 같은 거지. 흑마법사들이 여행이라니 내 참……. 근데 여행을 갈 곳이 있긴 한 건가?’
일단 당연히 대륙으로 여행을 가는 건 불가능할 터.
결국 검은 대지 안에서 여행지를 정해야 한다는 건데.
어디로 여행을 간단 말인가?
‘여행지가 적혀 있긴 하네. 오호… 작년에는 두 곳이었는데 이번에는 세 곳이네.’
양피지에 적혀 있는 여행지는 총 세 곳.
서리여왕의 왕궁.
드워프들의 거대 공방.
기랄 군도가 바로 그곳이었다.
‘이 세 곳 중에 한 곳을 선택해서 가는 건가? 근데 어디가 좋은 곳인지 잘 모르겠네.’
그나마 드워프의 거대 공방이야 언뜻 들은 것이 있다고 해도.
나머지 두 곳은 내가 잘 모르는 곳이었다.
‘살짝 물어볼까?’
“흑행이라……. 너는 정했어?”
나는 옆에 있던 레나에게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아직. 서리여왕의 왕궁이랑 드워프의 거대 공방을 두고 고민 중이야. 둘 다 괜찮았었거든.”
“오, 가 봤어? 어때?”
나의 물음에 레나가 웃으며 설명을 시작한다.
“서리여왕의 왕궁도 괜찮아. 과거에 검은 대륙의 패권을 두고 다투던 마물의 왕궁이야. 아, 물론 예전에 흑마법사들에게 토벌당했고 지금은 그냥 추위를 느끼기 좋은 여행지야.”
“추위라……. 그런 곳에서 숙박을 한다고? 얼어 죽는 것 아냐?”
‘그럼 혹한기 훈련이랑 다를 게 뭔데?’
여행이 아니라 개고생하기 딱 좋은 장소이지 않은가?
“그렇지도 않은 게, 그곳에도 주민들이 있으니까. 정확히는 예티들이 왕궁을 관리하고 있어.”
“…예티? 마물 아냐?”
“마물이긴 하지만 마물이라고 취급하기도 뭐한 게, 우리랑 최소한의 의사소통이 되거든.”
‘허… 예티가 관리하는 민박집 같은 느낌인 건가?’
내가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던 중.
레나가 계속 말을 이어 간다.
“아무튼 서리여왕의 왕궁은 그쯤 하고, 다음은 드워프들의 거대 공방에 대해 알려 줄게. 그곳은 원래 아무것도 없었는데, 납치당했던 드워프들이 무기랑 지팡이를 흑탑에 상납하면서 얻어 낸 땅이야.”
“오호… 나름대로 드워프들이 협력하니까 자치권을 줬나 보네.”
“맞아. 여하튼 그렇게 얻은 땅 위에 드워프들이 세운 게 바로 드워프들의 거대 공방인 거지.”
잠시 숨을 고르고는 계속 말을 이어 가는 레나.
“보통 흑마법사들이 마음먹고 지팡이를 장만하려 할 때, 주로 드워프들의 거대 공방을 이용하기도 해.”
“호오…….”
거기다가 거대 공방에 손님들이 많으니.
그 옆으로 마물 조련사들이 은근 슬쩍 조련한 타란튤라를 이용하여 옷 가게를 차리는 등.
어느덧 흑마법사들 최고의 쇼핑지가 됐다고 한다.
“최고의 쇼핑지라……. 그건 좀 끌리네.”
“그렇지? 그래서 나도 드워프들의 거대 공방으로 갈까 생각 중이야. 지팡이를 하나 새로 장만할까 해서. 1학년들은 몰라도 아마 3학년이나 4학년들은 다 거대 공방으로 가지 않을까? 몇 년간 장비를 사용했으니 바꾸려고 할 테니까.”
“하긴… 그보다 기랄 군도는 별로야?”
내 물음에 레나가 얼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거린다.
“거기는 질이 안 좋아.”
“뭐 하는 곳인데?”
“해적들의 본거지 같은 곳인데, 특히 검은 대륙에서 보기 힘든 대륙의 보물들이나 향신료 그리고 다양한 노예들이 많아.”
‘오오… 해적들도 있었어? 하긴… 해적이나 흑마법사나 따지고 보면 비슷한 과긴 하지.’
혈연이라고 보기는 어려워도 이웃사촌 정도는 될 터.
레나가 설명을 끝내자.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흠… 어디로 가야 좋을까……. 솔직히 셋 다 전부 매력이 있긴 한데 말이지.’
선뜻 답이 나오지 않자.
나는 흘낏 레나를 보며 물었다.
“너는 드워프들의 거대 공방으로 간다고 했지?”
“맞아. 왜? 같이 가려고?”
“아니, 그냥 어디가 좋을지 답이 안 나와서.”
그러자 레나가 기랄 군도를 탁 가리키며 말한다.
“일단 이곳은 빼.”
“왜?”
“해적들은 너무 성격이 더러워서 상종하기가 싫더라. 갔다가 눈살만 찌푸리고 왔었어.”
‘흠… 하긴… 해적들 성격이 오죽하겠어? 그것도 그렇긴 해.’
“그럼 서리여왕의 궁전은?”
“거긴 생각보다 괜찮아. 궁전 안도 의외로 따듯하고, 예티들도 답답하긴 한데 기본적으로 애들이 착해. 주변 풍경도 예쁘고. 산마다 흰옷을 두르고 있는 것도 그렇고, 깨끗한 눈에 발자국을 내는 것도 꽤 재밌었어.”
“그래? 그건 꽤 괜찮아 보이네. 단점은 없어?”
그에 레나는 곰곰이 고민하다가.
툭 한마디를 던진다.
“좀 심심한 거? 주변에 할 게 없거든.”
“아아…….”
‘그러니까 겨울이 예쁜 시골 같은 느낌이구나.’
대충 여행지들이 어떤지는 확실히 알았다.
‘한가로운 휴양지냐, 자유분방한 섬이냐, 아니면 최고의 쇼핑지냐인데……. 음…….’
나는 고심에 고심을 하다가.
“좋아. 정했다.”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드워프의 거대 공방으로 가야겠어.”
“왜? 살 게 있어?”
“그냥. 지팡이도 좀 보고 겸사겸사 옷들도 좀 사려고.”
‘휴양지나 자유분방한 섬도 좋지만 쇼핑은 못 참지.’
“드워프들의 물건은 좀 많이 비싼데…….”
레나가 말꼬리를 흐리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돈은 충분하니까 괜찮아.”
‘매점이랑 흑카지노 그리고 흑혼해 듀오로 얼마를 벌었는데, 그깟 물건들 몇 개 못 살까.’
“그럼 같이 돌아다닐래? 지팡이도 좀 보고 장신구들도 좀 보려고 하는데, 옆에 봐 줄 사람이 한 명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래, 그럼. 그러자.”
그녀의 제안에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기왕이면 아는 사람이랑 붙어 다니는 게 편하겠지. 거기다가 레나는 많이 가 본 것 같으니까 안내역으로도 딱이고.’
* * *
이 주 뒤.
덜컹, 덜컹-
‘어우… 지루해 죽겠네…….’
나는 유령마들이 끄는 거대 마차에 탄 채.
허허벌판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틀은 족히 달린 것 같은데…….’
드워프의 거대 공방은 아직도 보이지를 않는다.
‘승차감도 영 마음에 안 들고.’
나는 힐끗 고개를 돌려 유령마들에 타고 있는 데스나이트들을 바라봤다.
‘저놈들은 엉덩이도 안 아프나? 하긴… 죽은 놈들이 뭘 알까.’
혹시나 바알의 세력이 습격할 가능성이 있다며 볼드 학장이 붙인 호위, 데스나이트.
‘확실히 에나 할멈의 공격을 곧잘 받아쳤던 걸 봐선 굉장하다는 건 알겠는데. 흠…….’
죽은 기사보다는 에나 할멈이 왔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으나.
그 할멈이 내 호위를 자처할 정도로 친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에나 할멈이 저년보단 나을 것 같은데.’
나는 학생들의 안위를 위해 흑행에 동참한.
콘스 교수와 새 치료사이자 마녀인 레인, 제인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아크 신관장보다는 저년이 나으려나. 근데 저년은 왜 저렇게 날 노려봐?’
어째선지 콘스 교수의 눈이 평소보다 더 날이 서 있는 듯하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죽이던 그때.
“저기! 거대 공방이 보인다!”
한 학생이 저 멀리 보이는 실루엣을 가리키며 소리친다.
“으으으… 드디어 도착했구나! 진짜 멀긴 하다.”
“드워프 녀석들… 흑탑 옆에 공방을 차리면 좀 좋아?”
‘오오… 드디어 도착했나?’
나는 얼른 고개를 쳐들고 정면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