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전진 또 전진 (2)
“오빠가 추천하는 건 이거랑 이거죠?”
“응.”
대본이 온 건 꽤 됐지만, 그중 내가 신희진에게 추천한 드라마는 두 개였다.
하나는 로맨틱 코미디물에 더해 판타지를 섞은 장르였고 또 다른 하나는 역시 마찬가지로 로맨틱 코미디물에 청춘극을 섞은 장르였다.
둘 다 장점이 있었다.
판타지 장르의 배역은 색다른 시도를 할 수 있었고, 학생 배역으로 나오는 청춘극은 대중들에게 익숙하며 기존 영화의 캐릭터와 꽤 비슷했다.
새로운 시도냐, 기존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가냐였다.
“끌리는 건 있어?”
“둘 다 좋은 거 같아서요. 선택하기가 어려워요.”
“음…”
요물 그리고 당신의 시대로.
요물의 ‘미호’ 캐릭터는 999년 묵은 구미호로 애교 만점의 발랄한 캐릭터였고, 당신의 시대로의 ‘지수’는 청순가련한 20살의 새내기 대학생인 캐릭터였다.
“오빠는 둘 중 어느 캐릭터한테 빠질 것 같으세요?”
“빠진다니? 어떤 캐릭터에 매력을 느낄 것 같냐는 소리야?”
“네.”
신희진의 이미지상으로는 지수를 선택하는 게 맞다.
이미 비슷한 캐릭터도 했으니 안전하게 가려면 말이다.
그러나 나는 재미와 매력적인 배역을 고르자면 미호였다.
“나는 미호.”
“오빠는 이런 성격이 좋아요?”
“응? 좋다기보다는… 이런 캐릭터는 모두가 봐도 싫어하기 힘들지 않을까 해서.”
“아하.”
구미호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을 홀리는 요괴다.
그리고 ‘미호’의 캐릭터는 남자든 여자든 완전히 홀릴 수밖에 없는 캐릭터였다.
“그럼 전 미호로 할래요.”
“그래? 괜찮겠어? 안전하게 지수 선택하는 게 낫지 않을까?”
“재밌어 보이잖아요. 그리고 오빠가 추천해준 거니까요.”
신희진이 똘망똘망한 눈빛을 보내며 강하게 말했다.
“나를 그렇게 믿어주니 좋긴 한데… 이거 하려면 배역을 따내야 해.”
“아….”
우리가 고른다고 바로 냉큼 되는 게 아니었다.
요물의 경우 오디션 날짜로 공문이 들어왔다.
신희진의 급이 조금만 더 높았어도 이렇게 오지는 않았을 텐데.
주연 배역이 이렇게 오디션 공문이 도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드라마가 도전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했고 20대 여배우 풀이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지수 배역은 프리 패스일 거 같은데, 미호는 아마 감독이랑 작가 마음에 들어야 할 거야.”
“마음에 들게 하면 되죠.”
“그런 자신감 좋아. 좋은데….”
“히. 좋은데 뭐요? 왜 말을 하다 말아요?”
떨떠름하게 말하는 내가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내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었다.
걸리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미호 캐릭터는 좀 뒤죽박죽 성격이 왔다 갔다 하잖아. 괜찮겠어?”
“음…. 괜찮을 거 같은데요.”
“그래?”
예전 마녀의 이예진처럼 미호 캐릭터의 성격은 때에 따라 중구난방이었다.
냉정하기도 했고 때론 장난꾸러기 같았고 어떨 때는 사랑스러웠다.
“미호 캐릭터 보면서 아, 그냥 우리 멤버들 참고하면 되겠구나 싶었어요. 특히 제일 비슷한 캐릭터도 있고요.”
비슷한 캐릭터가 있나?
아무리 떠올려도 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없는데.
그러다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 생각났다.
“설마, 지영이 말하는 건 아니지?”
“맞는데요?”
“비슷하다는 말을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내가 아는 서지영과 신희진이 아는 서지영은 다른가 보다.
신희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오빠랑 혜연이 한정이죠. 지영이가 우리한테 얼마나 애교 많고 싹싹한데요.”
“나랑 혜연이는 왜?”
내 질문에 신희진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 놀려먹기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좀… 짓궂은 면이 있죠.”
“뭐?”
신희진이 뻘쭘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나랑 혜연이가 반응을 잘해줘서 그런가 다른 애들에게는 그렇게 장난을 많이 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또 신희진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서지영은 곧잘 다른 애들에게는 애교도 잘했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미호 캐릭터와 흡사한 면이 있기도 했다.
정말 밤톨만큼이지만.
“아무튼! 저는 요물의 미호를 1순위로 하겠습니다!”
“알았어. 제작진이랑 미팅 한번 해보고 한번 보자고 하면 다시 알려줄게. 후순위는 당신의 시대로인 거지?”
“네.”
좋아, 이야기는 대충 끝난 거 같으니 나도 이제 일하러 가볼까.
근데 요물 드라마 제작진에 조금 의아한 점도 있었다.
비공개 오디션 보러 오라면서 그전에 사전 미팅도 한번 해야 한다니, 도대체 뭘까. 그냥 시간에 맞춰 오디션 보면 되는 거 아닌가?
* * *
“안녕하세요. 요물의 이정수 PD입니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신희진 담당인 김현진 팀장입니다. 반갑습니다.”
이정수 PD와 서로 명함을 교환하고 악수했다.
“오시는 데 힘들지는 않으셨죠?”
“하하. 힘들다뇨. 당연히 와야죠.”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네.”
이정수 PD의 첫인상은 젠틀했다.
미팅 나오기 전에 남진수가 진상을 만날 수도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고 가라고 하길래 조금 긴장했는데 그건 남진수의 기우였던 듯했다.
“제가 탐색전은 별로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서요. 시간도 없고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죠?”
“네, 물론이죠.”
“오디션 보라는데 미팅하자니 당황하셨죠?”
“아… 네.”
하하 호호 웃는 미팅 자리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진도가 좀 빨랐다.
어찌 됐든 갑은 저쪽이니 맞추는 수밖에.
“다른 게 아니라 희진 씨 연기를 직접 보고 싶어서요. 사실 미호 역에는 물망에 올려둔 배우가 몇 명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내 추임새에 이정수 PD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어 말했다.
“그리고 희진 씨에게 공문을 보낸 건 저보다는 작가님의 입김이 많이 들어간 거긴 합니다.”
“작가님이요?”
“네. 김지선 작가님이요.”
“아하.”
드라마의 캐스팅 보트는 감독만 쥐고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드라마는 작가의 입김이 더 강했다.
그러나 요물의 경우에는 작가는 신인이었고, 이정수 PD는 히트작 두어 개를 찍어낸 노련한 PD였다.
“저는 개인적으로 반대했었거든요. 단순히 마스크만 믿고 쓰자니 연기 경력이 없으니까요.”
신인에 불과한 신희진에게 왜 이런 조건의 제안이 왔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저는 직접 연기를 보고 판단하겠다고 작가님에게 말씀드려서 이 자리가 만들어진 겁니다.”
“음… 그 말씀은 희진이가 PD님 마음에만 들면 오케이라는 겁니까?”
“아니요. 주연 자리를 걸고 비공개 오디션을 할 생각입니다. 거기서 뽑을 거고요.”
“그럼 이 자리는 무의미한 거 아닙니까?”
날 선 내 어조에 이정수 PD가 피식 웃었다.
나도 모르게 날이 서버렸다.
그럴 거면 왜 부른 것인지 이해가 안 됐다.
서로 잘해보자고 으쌰으쌰 하는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무의미하지는 않죠. 준비만 잘하면 주연 자리를 따내는 거니까요. 기대만큼 해달라고 말씀드리려고 했던 겁니다. 그 기대만큼 못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갈 거고요.”
젠틀하기는 개뿔.
그러니까 연기를 못 믿겠으니 잘 준비해서 만족시켜 달라 이거지?
PD들은 하나같이 꼬였다고 하는 남진수의 말이 이제는 슬슬 이해가 갔다.
직접 대하면 대할수록 PD들은 상대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말이 안 통하는 상대는 아닌 것 같으니 그건 다행인가.
꽉 막힌 PD도 여럿 있었다.
나는 이정수 PD에게 비즈니스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해보라고 격려 차 부르신 거군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전화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전화로 오디션 준비 잘해오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이해가 안 되긴 했지만 웃으며 이정수 PD의 장단에 맞췄다.
“전화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긴 하죠. 알겠습니다. 열심히 준비해서 오디션 날에 뵙겠습니다.”
“그럼, 그날 뵙죠. 잘 준비해서 와주셨으면 합니다.”
이정수 PD가 나에게 다시 악수하자는 의미로 손을 건넸다.
그 손을 잡고는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갈 뻔했지만, 꾹 참았다.
괜히 무시 받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보여준 게 없긴 했으니까.
인지도가 있는 배우가 아닌 이상 철저하게 을이다.
그래도 신희진에게 부정적인 시선을 가진 이정수 PD의 코는 납작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 마음을 이정수 PD에게 환한 웃음을 지어 표현했다.
믿는다, 희진아.
* * *
“그러니까… PD님은 저를 좋게 보고 있지 않는다는 이야기네요?”
“좋게 보지 않는다기보다는 연기력에 대한 의심? 그런 거 같아.”
“개봉한 거 안 보셨대요?”
신희진이 어떻게 감히 안 봤냐는 듯 엄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건 안 물어봤는데… 아마 작가가 본 거 같아. 작가는 널 원한다고 했거든.”
“그럼 제가 선택해야 하는 거죠? 미호 캐릭터를 준비해서 오디션을 볼 건지, 아니면 지수 캐릭터를 오디션 없이 승낙해서 할지?”
“응.”
원래는 요물을 준비하면서 요물 오디션에 떨어지면 당신의 시대로를 택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조금 변해버렸다.
당신의 시대로에서 요물 오디션 전에 답변을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드라마를 찾자니, 그 외에 신희진에게 들어온 대본은 썩 내키는 게 없었다.
“그럼 못 먹어도 고죠. 조연보다는 주연이 더 좋잖아요.”
“그럼 오디션 준비하는 거로?”
“네.”
“이거 떨어지면 올해 드라마 활동은 나가리야. 괜찮겠어?”
“오빠. 우리 솔직해지자구요. 제가 뭐 했으면 좋겠어요?”
신희진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대답하려다 잠깐 멈칫했다.
“회사 차원에서는 지수.”
“회사 말고 오빠 입장은요.”
그럼 당연히 정해져 있지 않나.
“난 미호. 난 네가 충분히 오디션에서 다른 사람들을 찍어 누를 거라 생각하거든.”
“그쵸?”
신희진이 내 대답에 기분이 좋았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못 들어본 멜로딘데.
“무슨 노래야?”
“아, 혜연이가 작곡한 거예요. 노래 괜찮죠?”
“그래? 멜로디가 좋네. 혜연이도 작곡해?”
“네. 지영이랑 같이 경쟁 붙어서 요즘 작곡하고 있어요.”
박혜연도 작곡을 공부한 지는 꽤 됐다.
결과물을 한 번도 안 보여줘서 얼마나 작업물이 나왔는지는 몰랐는데 이번에 들을 수 있을 듯했다.
문제는 그렇게 작곡해도 앨범에 실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래봤자 이번 앨범은 미니 앨범이라 끽해야 한 곡 들어갈 텐데.”
“그 한 자리 때문이죠. 지영이가 작곡한 거 앨범에 실으니까 혜연이도 부러웠나 봐요. 이번엔 양보 못 해! 소리치면서 싸우는데 얼마나 웃기던지.”
“혜연이가?”
“네, 그 혜연이가요.”
신희진이 그 모습을 떠올리는지 킥킥 웃었다.
박혜연이 소리 지르며 서지영과 투닥거리는 건 상상이 안 되는데.
그 조용하고 얌전했던 박혜연이 그러는걸 보면 서지영한테 물들긴 많이 물들었나 보다.
“이번에도 대본 저랑 맞춰 주시는 거죠?”
“이번에는 좀 힘들 것 같은데.”
“왜요!”
신희진이 얼굴을 찌푸리며 강하게 반발했다.
나도 같이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현실적인 조건도 있었고 둘이 같이 있는 횟수가 늘어나면 내가 너무 흔들릴 것 같았다.
“아니, 그때는 내가 일이 많지 않았잖아.”
“시간 내면 되잖아요!”
목소리 높여 투덜대는 신희진에게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보다 재성이가 낫지 않을까? 재성이한테 부탁하려고 하는데.”
“재성 오빠 안 바빠요?”
“휴식기니까. Finder 끝나고 당분간 쉬고 싶다고 하더라. 아직 배운 게 소화가 안 됐다나.”
“재성 오빠가 안 되면요?”
“그때는 내가 하든가 해야지.”
안재성과는 이미 이야기를 끝내놨기에 안 될 리는 없었다.
“나중에 둘이 연습할 때 어떤지 보러 가기는 할게.”
“알았어요.”
신희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내게 말했다.
나는 신희진의 대답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는 언제까지일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