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눈 감고 눈 뜨면 내일 (1)
“어떻게 생각해요?”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셔도….”
민서희 팀장이 태평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냥 편하게 말해요. 궁금해서 그런 거니까.”
“음….”
여덟 명의 시선은 꽤 부담됐다.
게다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는 민서희 팀장과 대조적인 애들의 표정을 보니 간단한 질문은 아닌 것 같았다.
“솔직하게?”
“당연히 솔직하게죠.”
“컨셉 자체는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제가 봤을 때는 조금 밋밋한 거 같아요.”
“어떤 점이요?”
민서희 팀장이 얼굴을 굳히며 내게 물었다.
“훅 들어갈 때의 안무랑 가사가요. 멜로디는 괜찮은 거 같은데 뭔가 세 개가 따로 뜨는 느낌이에요. 노래가 안 좋다는 건 아닌데 이거저거 많이 섞은 것 같아요.”
“음….”
내 말에 민서희 팀장과 서지영, 유미소, 유코, 박혜연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주축으로 의견을 낸 게 이들인 것 같았다.
“그리고 중간에 브레이크 댄스는 왜 있는지 모르겠어요. 정신 산만하달까.”
그리고 내 말이 끝나자 이번엔 이나라가 움찔했다.
브레이크 댄스는 이나라가 넣었구만.
이나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한지연 쌤은 괜찮대?”
“별말 없으셨는데….”
“그래?”
“네.”
내가 예민한 건가. 아니, 그건 아닌 것 같다.
나는 다시 민서희 팀장을 바라봤다.
“솔직히 말하면 사공이 많아서 배가 산으로 간 느낌이에요.”
“아….”
내 말에 애들이 탄식했다.
나는 이번 앨범에 한 발짝 물러서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했다.
물론 사람의 생각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객관적인 건 아니지만 참여한 사람들보다는 더욱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의견 받아서 짜자고 한 게 누구였는데요?”
“중심은 잡아야죠.”
민서희 팀장이 얼굴을 찌푸리더니 이내 얼굴을 풀고는 내게 말했다.
“좋아요. 그럼 김현진 팀장이 잡아줘요.”
“제가요?”
“네.”
“제가 뭐라고 잡아요.”
“저번에도 잘했잖아요?”
저번은 저번이고 이번은 이번이다.
솔직히 저번 앨범의 성적은 정말 복합적인 결과다.
이전의 앨범은 내가 어느 정도 트렌드를 알고 있기도 했고, 한창 성장세였기 때문에 속된 말로 망할 수가 없었다.
“그냥 딱 이거 쳐내고 이거 해! 라고 말하면 되잖아요. 우리가 왜 이런 자리 만들어서 물어봤겠어요? 다 당신 감이 좋았으니까 물어보는 거지.”
“음….”
스타즈의 연령층은 생각보다 높은 편이었다.
내가 삼촌 팬이라면 애들 노래와 무대에 뭘 바랄까.
일단 그것보다 시간이 문제다.
“컴백까지 한 달 조금 더 남았는데 지금 바꾸는 게 되겠어요?”
“안 바꾸고 망하는 것보단 낫죠.”
“망한다고 누가 그래요.”
“오빠가요.”
“무슨 소리야.”
나와 민서희 팀장의 대화에 유미소가 끼어들었다.
“이대로 내면 망한다고 말하고 있으면서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유미소가 귀엽게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화낸다기보다는 투덜댄다는 쪽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민서희 팀장이 피식 웃었다.
“멜로디는 괜찮다고 했죠?”
“네.”
“그럼 아까 짚어주셨던 게… 가사, 안무, 브레이크 댄스?”
“브레이크 댄스는 굳이 강조해서 넣을 필요가 없을 거 같아요. 노래가 갑자기 붕 뜨는 느낌이에요. 가사도 멜로디랑 좀 잘 안 맞는 것 같고요. 특히 훅이요. 들었을 때 편안해야 하는데 편안하기보다는 산만해요. 안무는… 괜찮은 거 같기도 한데 이 부분은 잘 모르겠네요.”
내 말을 들은 민서희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지영을 바라봤다.
“들었지, 지영아?”
“언니도 괜찮은 거 같다면서요!”
“내가? 언제?”
“언니!”
“작사를 지영이가 했어요?”
“네.”
내가 서지영을 쳐다보자 서지영이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감성적인 작사는 잘하더니 이런 부분에서는 단점이 보이네.
아무래도 서지영은 본인이 공감해야 작사가 잘 나오는 타입인 듯했다.
민서희 팀장이 웃으며 내게 다시 말했다.
“브레이크 댄스 부분은 나라랑 같이 한지연 안무가님이랑 이야기해 볼게요.”
“네.”
“너희도 김현진 팀장님 의견에 동의해?”
민서희 팀장이 애들을 바라보며 말하자 그 말을 들은 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우리도 조금 흔들리고 있었잖아요. 오빠 말 들어서 손해 본 적 없었으니까 다시 손 봐요.”
나를 믿어주는 건 고맙긴 한데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왜 내가 절벽에 끄트머리에 선 것 같은 기분일까.
“오늘 자리는 이만 파하죠. 당분간 더 바빠지겠어요.”
민서희 팀장이 말하고는 조용히 일어났다.
그에 맞춰 애들도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들과 민서희 팀장이 나간 후, 회의실을 정리하고 나가니 민서희 팀장이 애들을 불러 모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얘들아, 일단 연습실에서 기존 안무는 그대로 외우고 있어. 바뀌는 부분은 많지는 않을 거 같으니까.”
“네!”
애들은 민서희 팀장에게 대답하고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런 애들의 모습 사이로 민서희 팀장이 내게 다가왔다.
“이제 어디 가세요?”
“저요? 이제 영업하러 가야죠. 영업.”
“영업이요?”
“네. 방송국 가서 스케줄 따와야 하거든요.”
“스타즈는 섭외 전화 많이 오지 않아요?”
“애들 말고 재성이 스케줄이요.”
“아….”
민서희 팀장이 깜빡했다는 듯 탄식했다.
회사 사람들은 종종 내가 배우를 맡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고생하세요.”
“네, 민서희 팀장님도요.”
그렇게 민서희 팀장과 헤어져 사무실로 돌아와 나는 외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 *
팀장을 달고 방송국을 누비며 영업을 시작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진수와 이진성 실장이 얼마나 잘 따왔는지 여실히 체감되었다.
스타즈의 방송 스케줄은 문제없었으나, 문제는 안재성이었다.
예전에 애들 프로그램 따온 건, 정말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춰져서 따온 거라는 생각이 요즘 뼈저리게 느껴졌다.
S사, K사, M사, J사 다 물먹고 남은 건 우리 본진인 K.net 케이블 채널뿐이었다.
예능국 복도에 도착해서 프로그램명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 중 과연 몇 곳이나 프로필을 받아 줄까.
정신을 차릴 요량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가장 가까운 회의실로 향했다.
그리고 회의실을 문을 두드리고 밝은 미소를 자동으로 탑재한 후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프로필 드리러 찾아 왔습니다!”
“거기 두고 가세요.”
“네, 알겠습니다.”
문 가까이 있던 남자가 건조한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프로필을 받아주는 거 보니 일단은 반은 성공했다.
프로필을 아예 안 받는 곳도 많았다.
그럼 다음 단계로 가보자.
“날씨가 상당히 춥죠? 목이라도 축이시라고 약소하지만 음료수 좀 사 왔습니다. 이것도 같이 놓고 가겠습니다.”
내 말에 문에서 가장 멀리에 있는 남성이 나를 쳐다봤다.
“가져가세요. 사내 규칙상 받는 건 금지 되어 있어서요. 다들 잘 알고 있어서 이런 물건 가지고 오는 사람이 없었는데… 누구 매니저예요?”
여기까지가 2단계다.
나도 방송국 측에서 공식적으로는 물건을 잘 안 받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말이라도 걸어야 하지 않겠나.
프로필만 두고 가면 다시 연락 올 가능성? 백번 중에 한 번 있을까 말까다.
“안재성 매니저입니다. 데뷔작으로는 이번에 개봉한 영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가을’의 주연배우입니다.”
내 말에 남성의 표정이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하는 표정이었다.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것 같다.
“안재성? 막내야. 프로필 좀 가져와라.”
막내라고 불린 인물이 내가 놔둔 프로필을 가지러 책상에서 몸을 빼길래 내가 냉큼 움직였다.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놔둔 프로필을 가지고 남성에게 가 프로필을 건넸다.
내게 프로필을 받아든 남성이 천천히 프로필을 읽기 시작했다.
“헥사곤… 어비스랑 스타즈 있는 데죠?”
“네.”
이내 프로필을 다 읽은 남성이 프로필 자료를 내려놓고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요즘 스타즈 애들 앨범 준비한다고 섭외 잘 안 받는다던데?”
“앨범 준비하느라 시일이 조금 촉박해서요.”
“컴백이 언제죠?”
“3월로 잡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 많이 찍어둬야 하는 거 아니에요? 컴백이랑 맞춰서 방송 타려면?”
“아, 그건….”
내가 머뭇거리자 남성이 손을 들었다.
“아, 미안합니다. 스타즈 담당이 아니었지.”
“제가 스타즈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사인회 일정이 조금 줄어서 컴백하면서 방송 스케줄 잡으려고 하고 있어요.”
“아, 그래요?”
“네.”
남성의 얼굴이 흥미가 생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남성의 몸이 내 쪽으로 향하면서 그의 목에 걸려 있는 사원증이 보였다.
서상현 PD.
“그럼 스타즈 애 중에 한 명만 빼서 안재성 씨랑 같이 묶어서 나오시죠?”
“네?”
“그 정도면 괜찮을 거 같은데.”
서상현 PD가 은근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한창 앨범 준비에 바쁘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다.
이것저것 새로운 시도도 해보고 있기에 시간이 애들 시간이 안 나왔다.
안무에, 노래 가이드까지 나온 타이틀곡만 안 엎었어도 방송 스케줄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재성 씨 나온 영화 신희진 씨도 나온 거 아니에요?”
“아, 네. 맞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작가로 보이는 여성이 우리 대화를 듣고는 대화에 끼어들었다.
여성의 이야기를 들은 서상현 PD가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잘됐네. 그럼. 둘이 같이 2주 뒤에 나오는 거 어때요? 시간 안 돼요? 하연아, 2주 뒤에 스케줄 펑크 난 거 있지? 2주 뒤에 녹화 어때요?”
“어….”
머뭇거리는 나를 보며 서상현 PD가 의아한 얼굴을 지었다.
“확답해줄 권한도 없어요?”
“아뇨. 가능할 거 같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희진이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사전 인터뷰는 해야 하니까 명함 하나 줘봐요.”
“네.”
품에서 명함을 꺼내 서상현 PD에게 건넸다.
이내 서상현 PD가 내가 건넨 명함을 보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김현진 팀장님이었군요. 그러고 보니 서로 통성명도 안 했네요. 서상현 PD입니다.”
서상현 PD가 손을 내밀었다.
“스타즈랑 안재성을 맡고 있는 김현진 팀장입니다.”
나도 그에 맞춰 손을 건네 악수를 했다.
“사전 미팅은 전화 인터뷰로 끝낼 수도 있고, 오라고 할 수도 있어요.”
“알겠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서상현 PD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때 봅시다.”
“감사합니다!”
서상현 PD에게 인사를 하고 안에 있던 스태프들에게도 인사를 한 후 회의실을 나왔다.
나오자마자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어어,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스케줄을 잡아버렸다.
슬쩍 프로그램명과 회의실을 다시 바라봤다.
금요일 - 영화에 빠져 버렸다.
금요일 저녁에 방영되는 프로그램인 ‘영화에 빠져 버렸다’는 영화 속에 나온 대사를 출연진과 게스트들이 맞추는 간단한 프로그램이었다.
출연하는 게스트를 고려해 난이도가 쉬울 때도, 어려울 때도 있었는데 아마 배우 두 명으로 나가는 거니 난이도가 높겠지.
프로그램을 생각하다 다시 회의실을 봤다.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음료수가 눈에 띄었다.
가져가라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두고 왔네.
이 정도는 상관없겠지.
시작부터 느낌이 좋았다.
다섯 개의 방송국에서 물먹었는데 본진이라고 생각한 K.net에 오자마자 바로 잡히다니.
이게 본진의 힘인지, 아니면 운이 좋은 건지.
어쨌든 스케줄 하나는 잡았으니 한결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여기서도 물먹었다면 안재성 볼 낯이 없었다.
자, 다시 또 가볼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