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전진 또 전진 (1)
“드라마?”
“네.”
남진수가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는 듯 내게 말했다.
“갑자기 웬 드라마야?”
“지금 섭외 요청도 꽤 들어오고 있잖아요.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아이돌 활동하면서 드라마 하는 애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음… 희진이?”
“네.”
남진수가 고민이 역력한 표정을 지었다.
신희진은 영화부터 시작했지만 원래 아이돌의 연기자 정석 루트는 드라마를 거친 후 영화였다.
특히 요즘은 웹드라마로 먼저 연기 경험을 쌓고, 정규 드라마로 넘어가고, 그다음 영화로 넘어가는 추세였다.
“나쁘지는 않아. 나쁘지는 않은데… 활동이 겹쳐서 힘들 것 같은데? 지금 당장 들어가면 3월이나 4월에 드라마 시작할 텐데.”
“활동기 피해서 해야죠. 3월에 컴백이니 저는 4월이나 5월쯤에 드라마 들어갈 걸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활동 끝나고 다시 휴식기잖아요. 애들 콘서트 투어만 안 잡히면 가능할 거라 생각해서요.”
남진수가 내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고 보는 모양이었다.
콘서트 투어만 안 잡힌다면 그 휴식기에 드라마를 찍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변수는 콘서트 투어였다.
이번에 콘서트로 재미를 많이 봤기에 회사에서 콘서트 투어 일정을 잡을 수도 있었다.
이제 2년으로 접어드는 그룹이 콘서트 투어라니, 스타즈의 팬덤이 얼마나 큰지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오늘 회의 있었지?”
“네.”
“그럼 회의에서 다시 이야기 해보자. 나도 기획실에서 스타즈를 어떻게 가닥 잡고 있는지 모르거든. 오늘 이야기 들어봐야 해. 시기는 괜찮아 보인다.”
“알겠습니다.”
나는 급하게 콘서트 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회의 때까지 콘서트 이야기가 나오면 어떻게 반론해야 할지 생각 좀 해봐야겠다.
“근데, 너 재성 씨도 커버 되겠냐? 애들만으로도 바쁠 거 같은데.”
“혜지 씨 들어 왔잖아요. 중요 스케줄만 체크하고 아닌 거 넘기면 시간은 좀 생길 거 같은데요?”
내 대답에 남진수가 어이없어했다.
“벌써 짬 때릴 생각부터 하네? 야, 나야 네가 빨리 적응해서 넘긴 거지 보통은 안 그래.”
“힘들면 그때 가서 생각해보죠, 뭐.”
미래의 내가 힘들지 오늘의 내가 힘든 게 아니기 때문에 일단 저지르고 생각하자.
* * *
“자료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기존 노선이랑은 조금 바뀌었습니다. 초기 전략이었던, 이미지 소모를 피하기 위한 노출 최소화에서 이제는 소모를 피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까요.”
기획실에서 준 자료를 살펴보니 향후 올해 스타즈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나와 있었다.
작년보다 활동량이 두 배는 늘었다.
이대로 진행된다면 애들의 입에서 곡소리가 나올 게 분명했다.
바쁜 만큼 그만큼 많이 벌어가겠지만….
그것보다 문제는 미정이라고 적혀있는 콘서트 투어였다.
자료에는 날짜를 조율 중이라고 쓰여 있을 뿐, 언제 시작하는지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
나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김현진 팀장. 할 말이 있으십니까?”
“자료에는 콘서트 일정이 미정이라고 적혀있는데, 구체적으로 기획하고 계신 날짜가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일전에 콘서트로 흑자가 좀 많이 났습니다. 물론 비율을 이것저것 다 떼면 남는 게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만, 이만한 캐시카우를 찾기가 힘들죠. 보통은 적자로 시작해 흑자로 전환하려면 3년은 걸리니까요. 그래서 재정팀에서는 빠르게 콘서트 일정 잡기를 원하는 것 같아 5월이나 6월로 보고 있습니다.”
벌써 회사는 스타즈를 돈줄로 보고 있었다.
물론 회사 차원에서는 그게 맞다.
애들 처지에서도 돈을 왕창 버니 나쁜 건 아니다.
다만, 이렇게 되면 애들의 성장은 막히게 된다.
“5월이나 6월은 너무 빠르지 않나요?”
“빠른 감이 없잖아 있긴 합니다만, 충분히 수용 가능할 거라 예상합니다. 이전 프로젝트 그룹들도 2년 차 때부터는 콘서트 투어만 돌았고요. 김현진 팀장은 따로 생각해둔 날짜가 있습니까?”
기획팀장이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에 맞춰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조금 부담은 됐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스타즈는 지금이 고작 2년 차 그룹입니다. 2년 차 답지 않게 덩치는 특수하긴 하죠. 그러나 일전의 프로젝트 그룹들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스타즈는 연장에 성공했다는 점입니다. 급하게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콘서트도 1월에 했는데, 5월이나 6월에 하는 건 너무 빠르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기획팀의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해서일까.
기획팀장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저도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네, 남진수 실장님. 말씀하시죠.”
남진수의 말에 기획팀장이 대답했다.
기획팀장의 말을 들은 남진수가 나를 한번 쳐다보고 씩 웃더니 말하기 시작했다.
“시기적절한 콘서트는 가수에게 사기 진작이 되지만, 돈을 벌기 위한 무리한 일정의 콘서트 투어는 오히려 독이 됩니다. 그래서 콘서트 투어는 연차가 쌓인 후 도는 것도 그런 이유이고요.”
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인물들도 남진수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김현진 팀장의 말마따나 급하게 콘서트를 잡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길게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위탁이긴 해도 돌아가는 걸 보니 앞으로도 계속 우리가 맡게 될 거 같고요. 어비스도 콘서트 투어는 3년 넘어서 시작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으음….”
남진수가 나를 지원사격에 나섰다.
나는 남진수에게 고마움을 듬뿍 담은 눈빛을 보냈다.
“가수가 즐겁게 활동하지 않으면 티가 납니다. 팬들도 알고요. 벌써 그렇게 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성장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의견 취합해서 대표님에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의견 또 있으십니까?”
남진수의 말을 끝으로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그러자 기획팀장이 다시 재차 의견이 있는지 물었다.
콘서트는 일단 넘어간 듯했고, 내가 궁금했던 걸 물어봐야겠다.
오늘 회의에서 나는 이게 본론이었다.
“아, 그리고… 애들 활동기 끝나고 방송 일정 있잖습니까?”
“네.”
“혹시 그거 드라마도 됩니까?”
“드라마…요?”
“네. 드라마.”
기획팀장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반응했다.
왜 드라마는 고려를 안 한 것인지 모르겠다.
프로그램이랑 행사 몇 번 뛰는 거보다 드라마만큼 몸값 올리기 좋은 게 어디 있다고.
* * *
“어휴. 회사에서 하라고 하면 해야죠.”
“언제 너희 의견 안 묻고 진행한 적 있어?”
“장난도 못 치겠네. 말이 그렇다는 거죠.”
유미소가 향후 스케줄을 듣더니 툴툴댔다.
“그럼 회사에서 저희가 하고 싶은 프로그램은 다잡아 주는 거예요?”
“확정은 아닌데… 일단 4월이나 5월에 런칭되는 프로그램 위주로 몇 명은 고정이 가능할 것 같아. 섭외 온 거 나중에 자료로 정리해서 줄 테니까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줘.”
“네!”
지금 스타즈의 위치에서는 방송국이 갑이 아니었다.
우리가 갑이다.
모셔가려고 하는 프로그램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애들 예능감도 괜찮은 게 첫 번째 이유였고, 그다음으로는 인지도가 있기 때문이었다.
“빨리 말해줄수록 좋고.”
“네.”
애들의 대답에 나는 신희진을 쳐다봤다.
“그리고 희진이는….”
“네? 저는 왜요?”
“너 드라마 한번 찍어볼래?”
“드라마요?”
내 말에 신희진의 눈이 커졌다. 생각지도 못한듯했다.
“저도 드라마 찍을래요!”
“넌 안돼.”
“왜요!”
서지영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서지영이 드라마를?
“연기 못하잖아.”
“그건 아는데! 그래도 그렇게 단호하게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상처 받는다고요!”
서지영이 씩씩거렸다.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뿔이 난듯했다.
“시끄러. 저리가.”
“연기 못하면 드라마 못 찍나! 서럽다 서러워!”
징징대는 서지영을 보며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당연히 못 찍지. 괜히 방해하지 말고 이리와.”
“왁!”
이나라가 서지영의 목덜미를 잡더니 끌고 갔다.
나이스, 이나라.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는데 신희진도 그 광경이 웃긴지 풉하고 웃었다.
“지영이 때문에 이야기가 샜는데, 아무튼 드라마 한번 해볼래?”
“저야 좋죠. 근데 저한테 들어온 게 있어요?”
“응. 이번에 영화 터지면서 연락이 꽤 왔어. 주연은 오디션 제의였고, 조연은 확답만 하면 오케이 인 곳이 몇 개 있어.”
“우와.”
내 이야기를 들은 신희진이 아이처럼 좋아했다.
주연으로 제안 온 게 두 개. 조연으로 제안 온 게 세 개다.
고작 영화 흥행이 조금 잘 됐을 뿐인데 이렇게 섭외가 온 이유?
다른 게 아니었다.
신희진 같은 20대 여배우가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 업계에는 남배우는 넘쳐흐르는데 20대 여배우가 없었다.
그나마 마녀로 20대 여배우로 송민희가 떠올랐는데, 이신형 감독 차기작 찍는다고 날라 버렸으니 애가 탈만도 했다.
“어떻게 할래? 오디션 없이 조연으로 갈래? 아니면 오디션 보고 주연 먹어 볼래?”
내 말에 신희진이 화사하게 웃었다.
“답은 정해진 거 아닌가요?”
“그치?”
“네.”
역시 나랑 잘 통한다니까.
전진, 또 전진이다.
* * *
“이상 오늘 회의에서 나온 내용입니다.”
“콘서트는 회의에서 다룬 것처럼 급할 거 없어. 우리가 돈이 후달리는 게 아니잖아? 천천히 가자고. 스타즈는 어차피 우리 회사 브랜드가 될 테니까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정인수 대표의 말에 기획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드라마 이야기가 나왔다고?”
“네. 활동 끝나고 휴식기로 접어들 때 방송 프로그램으로 드라마는 안 되냐고 묻더군요.”
“드라마라…. 아마 신희진을 생각하고 말한 거겠지?”
“그런 것 같습니다.”
정인수 대표가 흥미로운 듯 눈을 빛냈다.
“신희진에 대한 업계 반응은?”
“굉장히 좋은 편입니다. 아무래도 지금 20대 여배우는 귀하니까요.”
“20대 여배우는 넘쳐흐르지. 연기가 되고 인지도가 있는 배우가 없는 거겠지.”
정인수 대표가 의자 등받이를 푹 젖히며 말했다.
“저는 예능 프로그램 쪽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드라마 이야기는 조금 의외였습니다. 투자 대비 얻는 게 많이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투자 대비 얻기가 힘든 게 사실이긴 해. 아이돌을 연기자로 키우는 건 미래를 보고 투자하는 거니까. 근데 지금 신희진은 흐름을 탔잖아? 연기력도 나쁘지 않다며? 그럼 흐름을 타고 올라가야지. 더 올라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이번에도 맡겨보려고 하십니까?”
기획팀장이 안경을 위로 올리며 말했다.
“당연히 맡겨야지. 손대는 것마다 결과가 좋았는데 안 맡길 이유가 없지. 이번에 무슨 작품 고를지가 기대되는데?”
말을 끝낸 정인수 대표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빠르게 두드리더니 기획팀장에게 물었다.
“영화 예상 수익은 얼마라고 했지?”
“종합해서 회사로 떨어지는 건 약 20억쯤 될 것 같습니다.”
기획팀장의 말에 정인수 대표가 기분이 좋은지 크게 웃었다.
2억을 투자해서 20억.
무려 열 배였다.
“인센티브라도 줘야겠는걸. 팀장도 달았고, 신희진을 드라마로 돌린다고 치면, 배우를 두 명이나 맡게 되니까… 회사 명의로 차 한 대 뽑아줘. 근사한 거로.”
“알겠습니다.”
정인수 대표가 나가보라며 손을 휘적휘적 내저었다.
기획팀장이 나가자 정인수 대표가 자료를 보며 조용히 혼잣말했다.
“과연 이번엔 어떨까. 항상 기대치 이상을 해주니 감을 잡을 수가 없어. 이번에도 괜찮은 성적을 낸다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