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257화 (258/314)

환관의 요리사 257화 외전 51화

“골치 아픈 일입니다. 차라리 예전처럼 대놓고 ‘나 어디 사는 누구다. 얼굴 좀 보자 개자식아.’ 하고 뒤집어엎을 수 있으면 속 시원하겠는데.”

“전에는 그랬느냐?”

“김승조로 살 때야 뭐, 거칠 게 없었지요. 나이도 젊겠다, 몸도 튼튼하겠다. 제 나라도 아닌 외국이라 친인척 한 명 주위에 없겠다. 가진 거라곤 맨몸뚱이 하난데 무서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보통 그러면 더 위축되지 않나? 잘못되었을 때 널 도와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 아니냐.”

“잘못되었을 때 주위에 폐를 끼칠 사람이 없다는 거지요.”

행여나 일이 수틀렸을 때 인질 잡힐 걱정이 없으니, 마음 놓고 깽판 칠 수 있었지요.

아련한 눈으로 옛 무용담을 수줍게 이야기하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편두통에 시달리는 듯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너 정말 요리사였던 것 맞느냐?”

“요리사 맞습니다. 다만 근무지가 조금 험악하고 거친 곳이었을 뿐이지.”

상하이의 뒷골목. 세상 모든 검은돈이 통하는 뒷세계의 금융허브에서 세계 각지의 마피아, 삼합회, 야쿠자, 갱 등 조직의 보스들을 대접했던 살벌하고도 짜릿했던 나날들을 떠올린 소년은 등허리를 기어오르는 오싹한 한기에 몸을 떨었다.

무용담이 길어질 것을 직감한 태감은 헛기침하고는 이야기를 진전시켰다.

“아무튼, 이제 어찌할 생각이냐.”

“어설프게 낌새를 흘렸다가는 바로 이부상서에게 보고가 들어갈 테니. 뒤탈이 없게 하려면 그쪽에서 저를 찾아오게 하는 편이 깔끔하겠지요.”

“그래, 그럴 테지.”

물론 암시장주의 지척에 이부상서의 감시인이 붙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암시장주가 이부상서에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하수인과 같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면 숙친왕의 이름을 흘려 암시장주를 꾀어낸다는 당초의 계획을 세울 수 없었을 테니.

소년이 그런 계획을 세운 것은 암시장주와 이부상서의 관계가 어디까지나 동업자, 서로 상부상조하지만 필요하다면 언제든 돌아설 수 있는 관계일 것이라는 동창의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부상서가 자신의 급소나 다름없는 암시장 측에 감시인 하나 붙이지 않았을 리가 없지요.”

“분명 감시의 시선이 있을 것이다. 암시장주를 밀착 감시하지는 못해도, 그 주변에서 동태를 살피는 시선이.”

“어디까지나 숙친왕이 아닌 무역상 승조로서, 감시인에게 우연이라고 생각될 수 있도록 자연스러운 만남을 연출해야 하겠지요. 이것 참, 까다롭군요.”

뭔가 복안이 있으시면 지금 말씀해 주십시오.

뻔뻔하기 그지없는 소년의 낯짝을 보며 태감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혹시 맡겨놓았느냐?”

“원래 머리 쓰는 일은 태감님께서 하실 일 아닙니까.”

“내가 벌인 일도 아닌데, 답을 내놓아라?”

“아랫사람이 일을 벌이면 윗사람이 책임지는 법입니다.”

참나, 이게 말만 아랫사람이지 아주 상전이야 상전.

입술을 비죽 내민 태감은 투덜거리며 자신의 배를 가리켰다.

“머슴도 일을 시킬 땐 밥부터 먹이는 법이다. 부려먹을 거라면 밥부터 다오.”

“허, 세상에 밥값을 하는지 못하는지도 알아보지 않고 덜컥 밥부터 내주는 마음씨 좋은 주인이 어디 있습니까? 밥값 먼저 하시면 상을 차려드리지요.”

“협상은 없다, 배가 비어서 일을 못 하겠구나.”

뾰로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팩 돌리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고민에 빠졌다.

이 비협조적인 양반을 어떻게 요리해야 할까. 고민하던 소년은 답을 내리고는 음산한 웃음을 입에 건 채 태감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밥 먼저 내드리지요.”

“뭘 내줄 생각이냐?”

“일전에, 쏘가리구이를 내며 공부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드린 적 있지요? 기억하십니까?”

“기억하다마다.”

“이번에 만들 요리는 그 명망 높은 공부가에서도 최고급으로 대접받는 식재료를 아낌없이 이용한 요리입니다.”

최고급으로 대접받는 식재료를 아낌없이. 미식가의 군침을 쥐어 짜내는 매혹적인 단어를 열거하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 * *

“이것이 정녕 명가의 식탁에서도 최고급으로 대접받는 식재료란 말이냐.”

멀건 표정으로 접시를 내려다보던 태감은 떨리는 목소리로 소년에게 되물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아니, 믿고 싶지 않다는 듯한 태감의 물기 어린 시선을 받으며 소년은 담담하게 그의 의문에 답해주었다.

“예. 이것이 바로 공부가가 자랑하는 최고급 요리, 숙주나물 볶음인 소초은아(素炒銀芽)입니다.”

그 흔하디흔한, 굳이 돈 주고 살 필요도 없이 집집이 시루에 길러 먹을 만큼 흔한 숙주나물이 어째서 명가의 연회에서 대접받는 최고급 요리가 된단 말이냐.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목도한 의문과 소년의 장난에 속아 넘어갔다는 억울함이 뒤섞인 태감의 질문에 소년은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전하는데 의하면 어느 해 여름 청나라 건륭제가 산동에 위치한 공자 공부가를 방문했는데 혹서기의 무더위에 지쳐 입맛을 잃게 되었다 합니다. 공부가의 요리사가 아무리 정성스럽게 산해진미로 온갖 음식을 만들어도 건륭제의 입맛은 돌아올 줄을 몰랐다는군요.”

그런데 때마침, 공부가에 식솔들 식사 거리로 배달된 숙주나물을 본 요리사가 기막힌 묘수를 생각해 냈다 합니다.

귀하고 값진 산해진미는 이미 물릴 만큼 즐기셨을 테니, 반대로 저잣거리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숙주나물을 이용해 본다면 어떨까.

발상을 떠올린 요리사는 숙주나물의 흙내가 나는 머리와 꼬리를 떼어내고는 육류나 다른 재료를 넣지 않고 파란 파 한 줌만을 넣어 숙주나물 볶음을 만들었다 합니다.

“그렇게 완성된 숙주나물 볶음이 상에 오르자 건륭제는 처음 보는 음식이라 신기하게 생각하고 맛을 보더니 게눈 감추듯 접시를 비워냈다 합니다. 그리고는 한 접시를 다 비우고도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는군요. 그 뒤로 공부가에서는 황제의 입맛을 되살린 숙주나물을 귀하게 여겨 연회가 있을 때면 빼놓지 않고 상에 올렸다 합니다.”

은빛의 싹을 볶은 요리라는 의미로 소초은아라는 고상한 이름을 선물 받은 숙주 볶음은 그 명성과는 달리 무척이나 만들기 쉽고 간편한 요리였다.

재료로는 신선한 숙주와 파가 전부였고 양념으로는 산초와 식초, 소금, 설탕과 녹말이 전부였다.

“우선은 숙주의 머리와 꼬리를 떼어내고는 깨끗하게 씻어 끓는 물에 살짝 데쳐줍니다. 데친 다음에는 재빨리 찬물에 담가 아삭한 식감이 죽지 않도록 해줘야 하지요.”

그다음에는 철과에 기름을 두르고 산초를 볶아 향을 내둔 다음, 산초 향이 기름에 우러나면 산초를 버리고 파와 숙주를 넣고 녹말을 제외한 양념을 넣고 골고루 저어주다가 식초의 신맛이 날아갈 때쯤 녹말로 마감해 주면 끝.

아삭아삭한 식감에 담백하고 고소한 숙주나물 볶음이 완성된다.

“실력 없는 요리사들은 치킨 스톡 같은 조미료로 감칠맛을 주려 하는데, 싱싱하고 좋은 숙주를 고르기만 했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요. 인위적으로 맛을 내지 않아도 충분히 감칠맛이 나니. 그렇지 않습니까?”

“치킨 스톡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다만…….”

“맛있지요?”

“맛은 있는데…….”

시원한 식감에 자극적이지 않은 담백한 맛으로 입맛을 돋우는 소초은아는 과연 더위에 지친 황제의 입맛을 사로잡을 만한 요리였다. 하지만…….

차마 대놓고 불평을 늘어놓지는 못하고 데친 숙주나물처럼 시들시들한 얼굴로 볶음을 먹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그 어떤 혹평이라도 수용하겠다는 겸허함이 돋보이는 얼굴로 질문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양이 좀 부족하시지요?”

하지만 전채요리로 배를 채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제 곧 다음 요리가 나오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소년의 말에 묵묵히 숙주나물을 씹던 태감의 눈동자에 일순간 희망이 빛이 맺혔다.

하지만 짧은 순간 반짝인 희망은 이내 짙은 의혹의 시선으로 변하였다.

“이번엔 먹기 전에 미리 설명을 듣고 싶구나. 가능하면 들어가는 재료를 하나하나 알려줬으면 좋겠는데.”

“어렵지 않은 일이지요. 이번에 나올 요리는 당조일품과(當朝一品鍋)라 하는 찜 요리로, 공부가에서 베푸는 연회인 공부연에서 매번 식탁의 상석인 정중앙을 차지하는 요리입니다.”

“당조일품과라?”

“일품과란 벼슬의 품계를 나누듯 그릇 중 최고의 그릇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공부가에서는 은으로 만든 대접에 찜을 담아 상에 올렸다 합니다.”

그 훌륭한 그릇만큼이나 들어가는 재료도 호사스럽기 그지없는데…….

잠시 말을 멈춘 소년은 미리 따라둔 식은 찻물로 목을 축이고는 말을 이었다.

“우선은 그릇의 맨 밑바닥에 참마와 당면, 배추를 깔고 그 위에 삶은 돼지족과 살집이 잘 오른 씨암탉 한 마리, 오리를 두 마리 올려 빈틈없이 대접을 채워줍니다. 그다음에 해삼과 민어의 부레, 전복과 목련꽃을 담고 닭 육수를 부어 쪄내면 완성되지요.”

“하나하나 맛좋을 뿐만 아니라 약효가 좋은 재료로만 채워놓았구나.”

“부레는 신장을 보호하고 부기를 빼주며 지혈 작용이 있어 산모나 치질이 있는 이들에게 좋고, 오리는 노쇠를 막아주지요. 해삼은 뼈를 튼튼하게 하기로는 으뜸이고, 참마는 위장을 달래주지요. 이런 좋은 재료에 향기로운 목련향을 더했으니 입안에서 얼마나 달겠습니까. 다만.”

애석하게도 이 요리에 딱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센 불에서 두 시간 이상은 쪄내야 질긴 해삼이나 전복 따위가 부드럽게 익어 먹기 좋아진다는 거지요.

그리하여 식전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숙주나물 볶음을 낸 것입니다.

소년이 구구절절 사연을 이야기하고 나서야 그 깊은 뜻을 헤아린 태감은 무릎을 치며 탄복했다.

“내 당장의 허기를 면하는 데 급급하여 너의 배려를 깨닫지 못하고 식사가 빈궁하다 타박하였구나.”

“설마, 제가 태감님의 식성을 모르지 않는데 숙주나물 볶음 한 접시로 상을 차리겠습니까.”

어디, 이만하면 일할 기운이 좀 나시겠습니까?

소년의 질문에 열렬한 주억거림으로 답한 후, 태감은 마치 머슴 밥을 먹듯이 호쾌한 동작으로 접시를 비웠다.

아삭아삭, 사각사각. 산뜻한 식감의 숙주나물은 금세 동이 났다. 그리고 소년은 경청할 준비를 끝냈다.

태감은 더운 김을 뿜어내는 커다란 대나무 찜기를 한번 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작은 장석의 이야기였다.

“장석 그 친구 말입니까?”

“그래, 네가 잠깐 즐거운 시간을 가진 후 헌신짝처럼 내버린 그 친구 말이다.”

어쩐지 대단히 악의적으로 들리는 태감의 말에 소년은 몹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법 익살스러운 그 얼굴에 피식 실소를 흘린 후, 태감은 말을 이었다.

“네가 즐거운 시간을 가진 후, 나 또한 그 친구와 잠깐 시간을 보냈다. 몹시 유익하고 뜻깊은 시간이었지. 기대하지 않았던 유용한 정보들을 제법 많이 알고 있더구나.”

“허어, 저한테는 꼭꼭 숨긴 채 태감께만 귀띔해 주었다고요? 이거 아주 몹쓸 친구였군요. 사람 가려 사귀는 친구일 줄은 몰랐는데.”

나중에 따로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눠봐야겠군요.

심각하게 말하는 소년을 보며 어깨를 으쓱거린 태감은 장석의 입에서 전해 들은 유용한 정보를 설명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암시장주는 암시장 외에도 동정호에 많은 사업체를 가지고 있다는구나. 개중에는 합법적인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불법적인 사업이겠지요. 폭력과 돈 외에는 하소연할 곳이 없는.”

“대부분 문제는 그 두 가지로 해결이 되지만, 유감스럽게도 세상엔 늘 예외라는 것이 존재하지.”

태감은 배시시 웃고는 오른손을 들어 소년에게 펴 보였다. 곧게 펴진 손에선 단 하나의 손가락만이 접혀 있었다.

“암시장주의 이목을 끌 가장 쉽고 즐거운 방법은 그의 사업체를 뒤엎어 놓는 것이지.”

“아마 저흰 열이 바싹 오른 암시장주와 대면하게 될 것 같군요.”

“그의 사업 중 은밀하게 작업하기 좋은 곳은 총 네 개다. 기루, 도박장, 아편굴. 그리고 투기장.”

세상에 이런 후레자식을 봤나. 어쩜 이렇게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나쁜 것만 골라서 차려놨지?

어처구니가 없어 하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새끼손가락을 접었다.

“개중 아편굴은 애초에 논외고, 도박은, 혹시 할 줄 아는 도박이 있느냐?”

“마작이나 화투는 좀 칠 줄 아는데, 꾼 소리 들을 정도는 아닙니다. 태감님은 할 줄 아시는 도박 있으십니까?”

“바둑이라면 좀 둘 줄 안다만, 기껏해야 기교를 좀 부릴 줄 아는 정도다.”

기교를 좀 부릴 줄 안다면 4단을 뜻하는 소교(小巧)의 경지였다.

형편없다 폄훼할 실력은 아니지만 뒷세계에서 진검승부를 벌이며 실력을 쌓았을 내기바둑꾼들을 어찌할 실력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 나이를 먹고 기루에서 행패를 부리기도 민망한 일이고. 남은 것은.”

“투기장이지.”

“하지만 악 대주님이나 배 단주님은 경사에 계시는지라 청하기가…….”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 있느냐?”

그야 그렇지만.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던 소년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태감을 바라보았다.

“태감님. 그래도 저희는 공직자 아닙니까.”

최소한, 인명을 존중하려는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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