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56화 외전 50화
지평선 끝자락에서 주춤거리던 해가 결국 고개를 떨구고, 세상엔 밤이 찾아왔다.
부산스럽게 하루를 보낸 이들이 이부자리를 펼 시간.
새도 날개를 접고 둥지에 몸을 누이고 풀벌레도 이파리에 몸을 숨긴 채 잠을 청하는 시간이었지만, 한낮의 여운을 잊지 못한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태양을 태워 밤의 어둠을 몰아내었다.
타오르는 횃불로. 모닥불로. 등불로. 그리고 가열로의 불꽃으로.
늙은 대장장이는 세심하게 가열로의 불꽃을 키웠다.
작업을 도울 이가 없었기에 대장장이는 발로 밟아 쓰는 풍로를 이용하고 있었다.
대장장이의 발이 느릿하게 풍로를 밟을 때마다 가느다란 숨결은 잠든 불씨를 간질이며 속살거렸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란다. 날 좀 도와주렴.
늙은 대장장이의 손길 속에 잠을 깬 불꽃은 투정부리듯 한번 확 타오르고는 천천히 기지개를 켰다.
조용히 불꽃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며 대장장이는 가열로에 땔감을 밀어 넣었다.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며 땔감을 집어삼킨다. 불꽃이 타오른다. 잠에서 깬 불이 대장장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한다.
늙은 대장장이는 불꽃의 품에 철을 맡겼다.
길쭉하고 얇으며 끝은 뾰족하게 다듬어진. 아직은 그저 철에 불과한 것.
불을 먹이고 날을 세우고 자루와 검집을 갖춰야 비로고 검이 될.
아직은 꿈에 잠겨 있는 철은 가열로의 불길 속에서 둔탁한 검보라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철을 가열로 깊은 곳으로 밀어 넣은 대장장이는 그 밖에 해야 할 자질구레한 일들을 모두 마치고 나서야 무겁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는 찾아온 손님을 바라보았다.
“왔냐.”
“어르신. 요깃거리 좀 사 왔습니다.”
찾아온 이는 꼭 속이 꽉 찬 만두 같은 체격의 중년인이었다.
퉁퉁하게 살이 올랐지만, 그 속으로 단단한 심지를 품은.
험난한 세상살이에 굳은살이 단단히 박인 두 손과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웃음기를 잃지 않은 중년인의 불그스름한 얼굴을 올려다본 노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얼굴이 폈구나. 일이 잘되나 보지?”
“이제 막 자리 잡은 정도입니다.”
표단주께 진 신세를 갚으려면 열심히 해야지요.
너털웃음을 지은 주윤은 녹슨 쇠못 따위의 잡동사니가 든 상자를 가져와 그 위에 걸터앉고는 가져온 것을 풀어놓았다.
댓잎과 노끈으로 단단히 포장한 그것은 소금에 절여 삶은 오리였다.
주윤은 오리의 다리 한 짝을 비틀어 뜯어낸 다음 백윤에게 건네었다.
“좀 드시면서 하시지요.”
“그래.”
주윤에게 건성으로 대답하며 백윤은 오리 다리를 받아들었다.
오리를 입으로 가져가면서도 백윤의 눈은 타오르는 가열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윤은 천천히 늙은 대장장이의 시선을 쫓았다.
늙은 대장장이의 시선 속에서 불꽃은 고요히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숨을 고르듯이, 차분하고 부드럽게.
그런 불꽃의 품 안에서 철은 검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백열하는 쇳덩이의 시린 빛에 눈을 찡그린 주윤은 눈두덩이를 주무르며 물었다.
“얼마나 걸리실 것 같습니까?”
“다 됐다. 불을 먹이기만 하면 끝나. 이제 날을 갈고 자루만 맞추면 돼.”
불을 먹인다.
오랜 시간 대장장이와 교분을 나눠온 주윤은 그 말이 어떤 작업을 뜻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이제 뜨임질만 남았다는 뜻이었다. 담금질한 철을 다시 서서히 달구고 공기 중에서 자연스럽게 냉각하는 과정.
담금질로 지나치게 높아진 경도를 감소시키고 철을 질기고 부드럽게 만드는 과정이다.
너무 단단하기만 한 것은 깨지기 쉽다. 날을 갈고. 자루를 달고. 검집을 갖추면. 철은 검이 된다.
철왕의 마지막 후예가 오철로 빚어낸 검이다.
철왕의 마지막 후예와 오철.
무사의 심금을 울리는 단어가 두 개나 모여 있다.
무사라면 한번 쥐어보는 것을 평생의 소망으로 삼을 만한 검이 완성되리라.
하지만 그 검은 휘두를 수 없는 검이었다. 피를 볼 수 없는 검이다. 날을 세우고 자루를 달고 검집을 갖추더라도.
그것은 왕의 권검이었다.
주윤은 등허리를 기어오르는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왕의 권검은 왕의 권한을 증명한다. 백윤은 그런 영광을 허락받은 것이다.
하지만 풍로를 밟는 늙은 대장장이의 얼굴은 무심하기만 했다.
주윤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영광스러운 일 아닙니까.”
“뭐가 말이냐.”
“숙친왕 전하의 권검을 만드는 일 말입니다.”
“영광은 무슨.”
휘두르지도 않을 검을 만드는 일에 무슨 영광.
자칫 불경죄로 해석될 수도 있는 백윤의 말에 주윤은 쓴웃음을 지었다.
주윤은 늙은 대장장이가 부루퉁하게 구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머리를 긁적인 주윤은 백윤의 낯빛을 한번 살피고는 태도를 바꾸었다.
“솔직히, 너무한 일이지요. 검이란 것이 그렇게 주문하면 뚝딱 나오는 것도 아닌데.”
다짜고짜 서신으로 ‘칼 한 자루 보내줘. 최대한 빨리.’라니. 최소한 주문을 했으면 요구사항이나 규격은 정해줘야 하지 않습니까.
늙은 대장장이의 속내를 대변하듯 주윤은 짐짓 화난 척하며 투덜거렸다.
그런 주윤을 힐끔거리던 백윤은 피식 코웃음을 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겠냐. 급히 쓸 일이 있나 보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과일이나 깎아 먹을 과도 한 자루 주문하는 것도 아니고, 왕의 권검 아닙니까. 훗날 역사에 남을 그런 물건을 이렇게 대충대충 하는 것은.”
“됐다. 그놈도 뭔 사정이 있으니 그랬겠지.”
백윤은 기분이 좀 풀어졌다는 듯 부드러운 어조로 소년을 변호했다.
주윤은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찐빵처럼 볼을 푸들푸들 떠는 주윤의 웃음은 상대방에게 더 큰 폭소를 안겨주었다.
둘은 한참 동안 서로를 마주 보며 키득거렸다.
실컷 웃어 허파에 바람기를 뺀 후, 조금 지친 숨을 몰아쉰 주윤은 고개를 들어 백윤과 눈을 마주했다.
웃음기 가득했던 중년인의 눈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도대체 무슨 사정일까요.”
늙은 대장장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윤은 그에게 그저 들려주고 싶다는 듯 혼잣말을 했다.
“유람하러 간 거였잖습니까. 후궁에서 그 고생을 했으니. 뜻하지 않게 왕까지 됐으니.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하자는 의미로 동정호에 간 거였잖습니까.”
권검이란 것이 가벼이 뽑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지 않습니까. 도대체 숙친왕 전하께서는, 어떤 이유로 권검을 청하신 걸까요.
주윤은 여전히 백윤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백윤은 대답 대신 조용히 집게를 들어 가열로 속의 철을 끄집어냈다.
이젠 검을 벼릴 시간이었다.
* * *
“그 양반 솜씨는 제가 잘 알지요. 아마 모레쯤이면 도착할 겁니다.”
“그렇게나 빨리? 주문 넣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 노인네 성격상 못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받지도 않았을 겁니다. 가능하니 받았겠지요. 이것 참, 다 늙어빠진 노인네를 혹사시켰으니, 돌아가면 사례를 톡톡히 해야겠군요.”
이제 남은 것은 검을 받기만 하면 될 일인데.
턱 끝을 매만지던 소년은 미심쩍다는 눈으로 창틀을 바라보았다.
창틀에는 늠름하게 생긴 칠흑의 매가 아이들이 주는 고깃점을 받아먹고 있었다.
이번에 비룡응이 선택한 고기는 기름기 없이 빨간 소의 우둔살이었다.
“서신이라면 모를까, 검을 옮기는 게 가능할까요? 오철이 다른 철보다 가볍다고는 해도, 식칼도 아니고 긴 장검으로 벼렸으니 족히 세 근은 넘게 나갈 텐데.”
“비룡응이라면 가능할 게다.”
전에도 전시 중 공을 세운 장수를 진급시킬 때 임명장과 함께 권검을 비룡응을 통해 하사했다 하니.
태감의 보증에도 소년은 믿기 어렵다는 듯 비룡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비룡응은 그 불신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새카만 부리로 고깃점을 콕콕 쪼아먹고는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그 우아한 퇴장에 아쉬워하는 장소와 이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소년은 태감을 바라보았다.
“어찌 되었든, 이제 권검이 오면…….”
“그래. 왕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지. 공식적으로.”
왕의 권한. 제국 내에서 권검을 쥐고 있다는 가정하에 숙친왕 진연운은 실로 막대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소년은 거북한 표정으로 비룡응이 날아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질문에 대한 답은 조금 늦게 돌아왔다.
잠시 고민하던 태감은 숙친왕에게 내려진 가장 강력한 권한부터 이야기했다.
“금군을 동원할 수 있지. 최대 만 명까지.”
“만 명을 제 마음대로 쓸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 네가 검을 뽑아 든 순간부터 금군 일만 명은 온전히 너의 병사다. 그들로 어떤 일을 행하든 그것은 왕의 자유지.”
만 명을 동원해야 하는 거대한 공사를 할 수도 있고, 만 명에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라 명령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전쟁을 벌일 수도 있지. 만 명을 동원해서.”
“전쟁이라는 단어에 낭만을 품을 나이가 아니라 다행이군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긴장시킨 소년은 진저리치며 말했다.
금군 만 명 치의 책임에 짓눌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태감은 말을 이었다.
“그 외에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다. 필요하다면 관청에 요청해 물자를 징발하거나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할 수도 있지. 그 외에는.”
죄인의 처분을 결정지을 권한 또한 가지고 있다.
앞서 말했던 무수한 권한 중 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소년은 빙긋 웃고는 기지개를 켰다. 뻣뻣하게 굳은 어깨가 억지로 당겨지자 소년의 입에서 괴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끄에엑. 으엑. 윽. 억. 아이고 삭신이야.
다채로운 신음성이 튀어나왔다.
가벼운 미소를 띤 채 소년의 괴성이 멈추기를 기다렸던 태감은 소년이 팔을 축 늘어뜨리고 나서야 연기해 두었던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그 친구는 협조적이었느냐?”
“아아, 장석 그 친구 말입니까?”
입이 무거운 친구는 아니더군요. 하긴, 암시장주도 뱃사공의 감시인으로 붙인 끄나풀에게 그런 충성과 결연한 의지를 기대하진 않았을 겁니다.
소년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치며 태감은 되물었다.
“그렇다면 대답을 들었겠구나. 암시장주가 찾는 것은 누구라더냐.”
숙친왕 진연운이냐. 아니면 무역상 승조냐.
소년은 마치 아는 사람 이야기를 하듯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승조라더군요. 서역에서 활동하던 무역상. 금 오백 전에 새끼 호랑이 가죽을 사려 한 호구.”
“그리고 금 천 전짜리 사기를 친 사기꾼.”
“실질적인 피해는 새끼 호랑이 가죽 한 장뿐이지 않습니까. 암시장의 주인이라는 인간이 대범하질 못하더군요.”
“나 같아도 그런 사기를 당했다면 상대가 누군지 궁금했을 것 같구나. 이런 맹랑한 사기를 친 놈이 누굴까 하고. 얼굴이나 좀 봐야겠다고 생각했겠지.”
“만난 다음에는 어쩌실 것 같습니까?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좋은 말로 타이르고 끝나지는 않겠지요?”
“글쎄? 아마 앉지도 서지도 기지도 못하게 늘씬하게 두들겨 줬겠지?”
그리고, 암시장주가 숙친왕이 아닌 무역상을 찾은 것은.
태감은 놀랍다는 듯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심드렁한 얼굴로 태감의 시선을 받았다.
“암시장주가 무역상을 찾는단 말은, 왕일 그 친구가 신의를 지켰다는 거구나. 그렇지?”
“예. 제법 모진 꼴을 당한 것 같은데, 입도 뻥긋 안 했다는군요.”
“흠, 나도 점점 그 친구를 믿고 싶어지는걸. 그런데, 그 친구는 왜 잡아간 거라고 하더냐?”
“아아. 그 친구, 목돈이 좀 들어왔더니 신나서 여아홍을 시켰다는군요. 탁주 한 동이 값에도 벌벌 떨던 친구가 갑자기 여아홍을 턱 내니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지요.”
“쯧쯧, 선심 좀 쓰려다가 발등을 찍혔군. 그 장석이란 친구도 심보가 고약하구나. 비싼 술을 얻어먹었으면 모른 척 넘어가 줄 것이지.”
돈 들어온 이야기는 마누라에게도 알리지 말아야 하는 법인데.
아직 인생 경험 부족한 젊은이의 실수에 소년은 혀를 끌끌 찼다.
자고로 돈 들어오는 주머니는 불알 옆에 차는…….
왕의 체면에 어울리지 않는 상스러운 이야기를 하며 낄낄거리는 소년을 흘겨본 태감은 엄중한 꾸짖음 대신 대화를 진전시키는 것으로 소년의 말을 막았다.
“아무튼, 이제 어찌할 생각이냐?”
“그 친구 말입니까? 글쎄요. 암시장 관련자기는 하지만 기껏해야 감시인 노릇이나 하는 끄나풀인데 죄를 묻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비싼 술 얻어먹고 뒤통수나 치는 상놈을 그냥 보내주기도 그렇고.”
“그거 말고.”
“암시장주 말입니까?”
소년은 하품을 쩍 하고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자가 제 얼굴이 보고 싶어 애가 닳았다는데, 제가 사는 곳을 몰라 초청장을 보내지 못하고 있다는군요.”
그렇다고 초대받지도 않았는데 성큼 찾아가는 것도 민망한 일이지요.
소년의 말에 태감은 뜻 모를 모호한 미소를 띠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자가 너를 찾아올 수 있도록 해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