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58화 외전 52화
인명 존중. 소년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실소를 흘렸다.
인명 존중이라니. 상하이 뒷골목 미친개 김승조도 정말 갈 데까지 갔구나.
자신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꼽아본다면 적어도 세 손가락 안에는 들 단어였다.
하지만 소년은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태감은 짐짓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인명 존중이라. 설마 네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저도 몰랐습니다.”
“드디어 인류애가 싹튼 것이냐?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남자는 죽어야 철든다더니, 옛말이 하나 틀린 게 없더군요. 이번 기회에 태감님도 한번 경험해 보시지요.”
이 좋은 경험을 어찌 혼자만 누리겠습니까.
좋은 것을 나누고자 하는 순수한 선의에서 우러나온 권유에 태감은 수십 년쯤 후에 고려해 보겠다는 유보적인 답을 내놓았다.
소년은 샐쭉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단 호위님께 출전을 부탁드리는 건 반댑니다. 어차피 투기장에 올라오는 놈들이라고 해봐야 반은 푼돈에 제 모가지 팔러 나온 얼간이 들이고, 나머지 반은 팍팍한 세상살이에 등 떠밀려 억지로 올라온 불쌍한 친구들일 게 뻔하지 않습니까.”
“그게 죽을죄는 아니지.”
하지만 꼭 죽는다는 보장도 없지 않느냐. 단 호위 정도로 수양을 쌓은 무인이 힘 조절을 못 할 리도 없고.
의아함에 물든 태감을 보며 소년은 손사래 쳤다.
“힘 조절도 힘 조절 나름이지요. 사자나 호랑이가 힘 조절한다고 사람 안 다칠 것 같습니까?. 맹수에겐 장난이어도 사람한텐 치명상인 법입니다.”
“그 정도란 말이냐?”
“단 호위님과 어울려 본 제가 보증하지요.”
멋모르고 단 호위님 출전시켰다 애먼 사람 줄초상을 치르느니 차라리 제가 출전하겠습니다.
단호하기 그지없는 소년의 태도에 태감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심통이 난 듯한 여인의 목소리가 소년의 귓바퀴를 건드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소년은 자신의 뒤편을 바라보며 창백하게 질린 태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단 호위님. 오셨습니까.”
“설마 이런 곳에서 내 험담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험담이라니요. 저흰 그저 암시장주를 꿰어낼 모략을 꾸미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 내가 듣기로는 틀림없이 험담이었던 것 같은데.”
내 실력이 못 미더워 출전시킬 수 없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았나.
속내를 떠보는 듯한 단혜림의 은근한 시선에 소년은 함께 험담한 태감조차 뻔뻔하단 말이 절로 튀어나올 만큼 순진무구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마치 험담을 비롯해 사람이 빚어낸 오물 따윈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는 듯한 천진난만한 얼굴은 후궁이라는 복마전의 정점을 기어오르며 의심이라는 고질병에 찌든 태감과 단혜림 조차 무심코 속아 넘어갈 정도였다.
후궁에서의 소년을 몰랐다면 틀림없이 오해였다고 생각하고 넘어갔으리라.
하지만 단혜림은 후궁에서의 소년을 알았다.
수차례 그녀를 곤경에 빠뜨렸던. 교활한 매부리코 아래로 음산한 웃음을 머금은 채 그녀에게 칼을 겨누었던. 독이 바싹 오른 독사와도 같았던 모습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연기에 속기엔 그간 나눠온 교분이 너무 깊군.”
결국, 소년은 파리의 겸손함을 본받을 수밖에 없었다.
겸손해진 태도 만큼 그녀를 출전시키느니 차라리 스스로 출전하겠다던 소년의 완고한 주장 또한 상당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전하께서 염려하신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네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다른 적임자가 있을 것 같지는 않군.”
“으음,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시는 것에 감사를 표하고 싶지만, 그래도 역시 닭 잡는 일에 소 잡는 칼을 쓰는 것은.”
“닭이 아니라 벌레 한 마리를 눌러 죽이는 일이라도 다른 대안이 없다면 별수 없지 않은가. 칼을 써야지.”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시게. 내 그들의 사정을 모르지 않는데 어찌 손을 과하게 쓰겠나.
그녀의 호언장담에 소년은 결국 출전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반색하는 단혜림을 보며 쓴웃음을 지은 소년은 간곡한 어조로 부탁을 남겼다.
“부디, 후유증은 남지 않게 부탁드립니다.”
* * *
과격한 다혈질의 행동파답게 소년은 이미 결정 난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여 일행을 피곤하게 하는 대신 곧바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그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의욕적인 호위무사뿐만이 아니었다.
소년이 혐오스럽다는 시선으로 흘겨보는 탁자 위에는 온갖 거죽이 널려 있었다.
돼지의 가죽을 물들이고 모양을 잡아 약품 처리하여 사람의 거죽과 흡사하게 만든 것. 동창이 자랑하는 인피면구(人皮面具)였다.
“정말, 이걸 쓸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옛날 얼굴이 그리워 죽을 것 같습니다. 전에는 본바탕이 좋아서 이렇게까지 잡다한 걸 덧붙일 필요가 없었는데.”
“확실히, 음흉하고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졸부 늙은이로 분장하는데 그만한 얼굴이 없었지.”
그저 주름살만 조금 추가해 줘도 추레하게 늙은 옹졸한 졸부의 모습을 완벽하게 소화해 냈던 전 얼굴을 추억하며 소년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비해 지금의 얼굴은 얼마나 번거롭고 귀찮은가.
지나치게 뽀송뽀송한 피부와 오뚝한 코, 봉숭아 물을 들인 듯한 발그레한 뺨과 물앵두처럼 촉촉한 입술이 비치는 동경을 신경질적으로 치운 소년은 붓과 연고를 들고 대기 중인 동창의 요원들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슬슬 시작합시다.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회한과 체념으로 얼룩진 소년의 얼굴 위로 동창 요원들의 섬세한 손길이 내려앉았다.
가장 먼저 손길이 닿은 곳은 앙증맞은 콧방울과 시원하게 뻗은 콧대였다.
‘하, 진짜 가짜 코 붙이는 게 제일 싫어.’
거죽을 고정하는 접착 연고를 덕지덕지 칠하고 나면 조심스럽게 코 위에 가짜 매부리코를 덧씌운다.
한번 붙이고 나면 수정이 어렵기에 동장 요원의 손길은 신중하기 그지없었다.
코 다음에는 눈가. 그다음에는 이마와 뺨. 가죽을 팽팽하게 늘여 붙이면 뺨에 착 달라붙으며 자연스러운 주름살을 형성했다.
마지막으로 목덜미 쪽까지 가죽을 붙이면 늙은 무역상인 승조의 얼굴이 완성되었다.
분장을 마친 소년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호기심 가득한 단혜림의 시선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신기하십니까?”
“신기하군. 이건 분장이라기보다는 거의 변신에 가깝지 않은가.”
“원리는 저기 동창 요원들에게 물어보십쇼. 저 친구들이 전문가이니.”
“인피면구를 만드는 원리 또한 궁금하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전하의 그 놀라운 연기력에 대해서 더 묻고 싶군.”
소년은 거추장스럽게 늘어진 목 거죽을 정돈하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하지만 잠시 후, 소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흠, 저도 비결을 말씀드리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제 연기력은 타고난 겁니다. 단 호위님.”
“연기란 연기자가 배역의 인물, 성격, 행동 따위를 표현해 내는 일을 말하는 것이지. 그리고 표현의 기반은 이해이고, 이해의 기반은 경험이지. 그런데 신기하게도, 노인은커녕 청년의 삶도 경험해 보셨을 리 없을 전하께선 늙은 무역상 승조의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해 내시더군.”
지나칠 정도로. 말끝을 흐린 단혜림은 가만히 소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검버섯 피고 주름진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그 안에 존재하는 것은 분명히 지학도 넘지 않은 어린아이의 얼굴이었다.
흐르는 물과 함께 흘려보낸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남은 삶을 정리해야 할 나이가 아니라, 이제 막 어미의 치마폭에서 나와 세상을 보아야 할 나이의 어린아이.
하지만 그간 단혜림이 소년에게 받아온 느낌은.
“오히려, 전하께선 노인의 모습이 더 익숙하신 것 같더군.”
마치 본래 노인이었던 이가 어려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일세.
말을 끝맺은 단혜림은 이미 답이 훤히 드러나 있는 소년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풋풋한 유년기의 싱그러움마저 가려주는 인피면구로도 채 숨기지 못한 동요. 침묵하는 입을 대신하여 당혹스러움에 흔들리는 소년의 눈이 답을 토설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빙그레 미소 지을 뿐 자신의 심증을 확증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언젠가는, 서로를 마주 보며 허심탄회하게 숨겨온 복심을 털어놓을 날이 올 것이다.
그녀는 소년의 호위무사였고, 그는 단혜림의 왕이었다. 그리고 둘 다 의식적으로 무시하려 애써온 관계였지만, 둘은 한때…….
상념을 멈춘 단혜림은 허리춤에 검을 비껴차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을 읽으려 애쓰던 소년 또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젠 암시장의 주인과 대면할 시간이었다.
* * *
화사하고, 유쾌하고, 낭만적이었던 관광지의 하루가 저물고, 문인들이 사랑한 호수에 밤이 찾아온다. 밤은 짙은 어둠 속에 비릿하고 불쾌하고 음습하고 천박한 것들을 숨겨와서는 인적 드문 골목에 그것들을 풀어놓았다.
골목길에 하나둘 홍등이 걸린다. 그리고 골목의 그늘 아래서 불순하고 불온한 것들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었다.
서로의 손님을 뺏기 위해 경쟁적으로 호객행위를 하는 퇴기들. 신묘한 손놀림으로 구경꾼의 혼을 쏙 빼놓는 야바위꾼과 판을 키우는 바람잡이.
골목의 가장 구석진 곳에서 자신의 품을 슬쩍 열어 보이는 아편쟁이.
새로 들어온 거야. 한번 피워봐. 처음이니 돈 안 받을게.
도덕성이라는 가치가, 주정뱅이가 길바닥에 싸지른 배설물만큼도 존중받지 못하는 곳.
낮에는 잘 차려입고 젠체하던 고상한 이들이 저열한 본 모습을 드러내는 곳. 동정호의 뒷골목엔 오늘도 욕망의 열꽃이 폈다.
골목에는 독특한 냄새가 깔려 있었다. 아편쟁이들이 뿜어내는 매캐한 탄내, 흥분에 젖은 노름꾼들이 쥐어 짜낸 분비물의 시큼한 냄새.
교태로운 웃음을 짓는 기녀들이 얼굴에 칠한 분에서 올라오는 기묘한 단내. 갈고리처럼 휜 칼을 차고 날아오른 투계와 가시 박힌 목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덜미를 물어뜯는 투견들이 흘린 피비린내.
그것들이 뒤섞인 기묘한 악취는 바람에 실려 떠나지도 않고 뒷골목에 고여 있었다. 호수의 습기가 뒤섞여 무거워진 탓일까.
아니면 이 불결하고 불쾌한 뒷골목엔 바람마저 찾아오지 않는 걸까.
악취에 찌든 뒷골목엔 오늘도 사람이 모여들었다.
“비린내가 나는군.”
돈독이 잔뜩 올라서 눈이 벌게진 놈들의 비린내가. 이것 참 오랜만에 맡아보는구나.
낄낄거리며 골목길을 둘러본 노인은 골목의 입구에서 골패짝을 만지작거리는 남루한 차림의 사내에게 다가갔다.
보아하니 꾼 돈을 전부 날리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길바닥에 주저앉은 노름꾼인 듯했다.
“이보게, 말 좀 묻겠네.”
“시부럴, 뭔데 귀찮게 하는…… 겁니까.”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삐딱하게 고개를 쳐든 사내는 겉보기에도 부가 철철 넘쳐 흐르는 노인의 복장에 기가 죽은 듯 말투를 바꾸었다.
도대체 무슨 용건으로 말을 건 것인지. 혹시 비유만 잘 맞추면 몇 푼 건질 수 있을지, 갈팡질팡하는 사내의 눈을 들여다보며 노인이 히죽 웃었다.
“보아하니 이 바닥 사정에 꽤나 훤해 보이는데, 괜찮다면 이 늙은이 길 안내 좀 해주지 않겠나?”
그럼 내 섭섭지 않게 사례하겠네.
일부러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낀 반지가 까드득 소리를 내도록 손을 비비는 노인을 보며 사내는 마치 뒤꽁무니에 용수철이라도 달아놓은 것처럼 튀어 올랐다.
“아이고, 그런 일이라면 맡겨주십시오. 제가 이래 보여도 여기 이 바닥에선 좀 통합니다.”
“그래? 그거 기대되는구먼. 잘 부탁하네.”
“그런데 그, 어르신께선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뭐하러 왔겠나. 돈 쓰러 왔지.”
돈 쓰러 왔다. 범상치 않은 노인의 한마디에 현기증을 느낀 사내는 고개를 부르르 털고는 되물었다.
“아니, 그, 돈을 쓰는 법도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잠시 입을 다물고는 말없이 사내를 위아래로 훑어본 끝에 노인은 자신의 요구조건을 이야기했다.
“단시간에 큰돈을 탕진할 수 있는 곳이 좋겠네.”
“탕진……. 하고 싶으시다고요?”
“그래. 자잘하게 한푼 두푼 거는 게 아니라 금으로 백 전 이백 전씩 턱턱 걸고 시원하게 날릴 수 있는 곳이면 좋겠군.”
금 백 전?
사내는 평생 만져보기는커녕 구경도 못 한 돈을 주머니에서 푼돈 꺼내듯 이야기하는 노인의 배포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
삶에 회의감이라도 든 걸까. 인생이 무료해서 견딜 수가 없어졌나?
어쩌면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의원의 진단을 받고는 낙심하여 평생 착실하게 모은 재산을 탕진하려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런 것이리라.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된다. 제멋대로 판단하고 납득 하는 사내를 보며 입꼬리를 길게 찢어 올린 노인은 희망을 속삭이는 듯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 이곳에서 가장 큰 도박장으로 나를 안내해 주겠나?”
한탕 시원하게 날릴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