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3화
소년은 뜬눈으로 밤을 보내야 했다. 마치 육군 훈련소 첫날밤처럼 긴장한 소년은 어슴푸레 저물어 가는 새벽달을 보며 거적때기를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습도 높은 새벽공기가 서늘해 옷깃을 여미면서 소년은 오두막을 나섰다.
후궁의 중심부에 가까운 연좌궁은 후궁의 북쪽 끝자락 담벼락에 있는 소년의 오두막에선 꽤 먼 거리였다.
후궁의 잡일거리를 하는 소년은 본래대로였다면 평생 들어갈 일 없는 곳이었을 것이다.
궁내 나인들이 하나둘 잠에 깰 시간이었기에 사람 하나 없이 한산했지만, 소년은 습관적으로 그늘진 곳만을 찾아 걸었다.
연좌궁(蓮坐宮).
후궁 중앙의 황제 폐하께서 거하시는 반룡궁(蟠龍宮)을 중심으로 배치된 황후 후보 비들의 사방궁(四方宮)의 사이에 있는 궁은 규모는 작지만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연꽃이 흐드러지게 핀 연못과 수로에 둘러싸인 연좌궁은 연꽃이 앉은 자리라는 이름답게 어슴푸레한 새벽빛 아래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음습한 곳을 기어야 하는 구더기는 평생 올 일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장소이니 새벽이나마 그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는 것에 기꺼워해야 하겠지만, 태감 놈의 그 반질반질한 가면과 그 아래로 뺀질뺀질한 웃음을 봐야 한다는 것에 마음이 거북해진 탓 인지 수려한 광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오느냐.”
말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소년은 바닥에 꿇어 엎드렸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이루어진 습관이었다.
하지만 소년을 불러 세운 위정 이라는 이름의 환관은 손수 소년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투박하게 일그러진 손은 고된 수련 끝에 만들어진 것이었음을 소년은 알 수 있었다.
손바닥 안쪽으로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는 그 손은 틀림없이 병장기를 쥐는 사람의 손이었다.
“이제 무릎을 꿇을 필요 없다.”
“예? 어찌 그럴 수가…….”
“넌 이제 후궁 밑바닥을 기는 자가 아니다. 당당한 후궁의 정식 궁인임을 명심하도록.”
소년은 고개를 들어 위정을 올려다보았다. 단단하게 단련되어 있었지만, 세월만큼은 비껴가지 못한 그의 머리카락과 잔주름을 보며 소년은 그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적어도 전생의 자신만큼은 먹었으리라. 그렇다면 이런 이를 부리는 태감이라는 자는 도대체 어떤 자리에 있는 걸까?
말을 마친 그는 더 이상의 설명은 없다는 듯이 소년에게 손짓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그에게 익숙한 주방의 풍경이었다.
두툼한 나무를 둥글게 잘라 만든 큼직한 도마에 화덕이 다섯 개나 되고 기름을 먹여 반질반질한 조리도구들이 새것처럼 빛나는 멋진 곳이었다.
“오늘 태감님께선 죽으로 아침 식사를 하시겠다 하셨으니, 그리 알고 준비하도록.”
“예? 잠시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환관은 칼 같은 태도로 등을 돌려 사라졌다. 넓은 주방 안에 혼자 남겨진 소년이 혹시나 다시 돌아와 뭔갈 더 설명해 주지 않을까 기대해 봤지만, 환관이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넓은 주방에서 오직 소년 혼자서만 요리를 준비해야 했다.
죽을 먹고 싶다고는 했지만, 정확히 어떤 죽을 먹고 싶은지, 다른 어떤 요리를 곁들일지는 조금도 알려주지 않고 모든 것을 소년의 주관으로만 정해야 했다.
“돌겠네, 진짜…….”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몸에 밴 익숙한 기술은 능숙한 솜씨로 조리를 시작했다. 조리법은 죽 중 가장 맛이 좋다고 생각하는 광동죽의 조리 방식.
물을 많이 넣고 만들어 미음처럼 묽은 것이 특징인 광동죽은 부드럽고 속이 편한 음식이다.
잘 씻은 쌀을 거칠게 부숴준 다음 한 티스푼 정도의 참기름을 둘러 비벼준 후 열네 배의 물을 넣고 끓인다.
다진 돼지고기를 넣고 내가기 전에 거칠게 으깬 피단을 올리고 채 썬 생강, 곱게 다진 파를 고명으로 내면 된다.
피단수육죽(皮蛋瘦肉粥).
개인적으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고 평소라면 이거 한 그릇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상대는 온갖 산해진미를 즐겼을 권력자였다.
마침 준비되어 있었던 물에 불린 콩을 곱게 갈아 끓여 체에 거른 중국식 콩물 두장(豆漿)에 중국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아침 식사 중 하나라는 유작귀(油炸鬼, 유타오) 등을 만들었지만 화려함이라고 해야 할지, 무언가가 2% 부족한 느낌이 든다.
“……밀가루를 얇게 부쳐서 계란을 끼얹고 전병 이라도 만들까, 아냐 그럼 탄수화물이 겹쳐. 채소가 부족하니 볶음 요리를…… 아냐. 아침부터 기름진 볶음은 조금 그래. 일단 절인 채소를 낸다고 쳐도 뭔가 한가지 정도는 더…… 하지만 탕이나 찜을 하기엔 시간이 부족하고…….”
입으로는 그렇게 욕을 하면서도 요리사의 본능인지 태감에게 올릴 음식을 고민하던 소년은 주방의 창고를 뒤졌다.
오이, 배추는 물론 민간에선 드문 서방의 식재료인 토마토(西红柿) 같은 것도 있는 걸 보니 과연 황궁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토마토?”
토마토라면 어떨까?
의문보다 먼저 손이 움직였다.
서홍시초계단(西红柿炒鸡蛋).
철과에 기름을 둘러 계란을 스크램블하고 덜어낸 뒤 유채 기름을 두르고 다진 토마토를 넣어 볶기 시작했다.
토마토의 신맛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소량의 설탕과 소금으로 간을 하고 다 볶아졌다 싶으면 녹말을 약간 풀어 걸쭉하게 한 다음 계란을 넣는다.
붉은색과 노란색의 색 배합이 아름답고 다른 볶음 요리처럼 기름을 과하게 쓰지 않아 빈속에도 부드러우며 영양적으로도 우수하다.
거기에 아직 이 나라에서 익숙하지 않은 식재료이니 어쩌면 그 태감 놈의 얼굴 반쪽이 일그러지는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년은 보기 드문 기분 좋은 얼굴로 음식을 날랐다.
사실 토마토는 건강에도 좋고 익숙해지면 맛있지만 처음 입에 담는 사람은 그 신맛이 썩 유쾌하게 느껴지지 않는 식재료다.
그걸 현대에서 요리사를 하며 배운 영양학적 지식으로 찍어 눌러주마!! 덤벼라! 양 태감!!!
자신의 처지도 잊고 억지로 강권할 생각에 희희낙락하는 소년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태감님.”
“음? 잠시 기다리거라. 곧 나가마.”
집무실 안쪽에서는 부산스럽게 무언가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가면을 쓴 태감이 나오자 소년은 쓰게 웃으며 물었다.
“평소에는 가면을 쓰지 않으시나 봅니다.”
“그래. 평소에 교분이 두터운 이들 앞에서만 벗거든. 너도 나와 우정을 쌓아 볼 테냐?”
“……어찌 이 천한 것이 태감님과. 사양하겠습니다.”
점잖지만 단호하게 거절하는 소년이 우스웠는지 가면 아래로 조소를 띄운 태감은 성큼성큼 걸어 식당으로 향했다.
피단과 돼지고기를 띄운 고소한 죽과 다양한 반찬들, 그중 가장 압권은 붉고 노란 기이한 볶음 요리였다.
상에 내자마자 신기하다는 얼굴로 접시를 들어 올려 코앞으로 가져간 양 태감은 한입 먹자마자 게눈 감추듯이 접시를 비워냈다.
“맛있구나. 서홍시(西紅枾, 토마토)는 서방에서 들어온 귀한 것이라 놔두었던 것인데 이렇게 새콤하고 감칠맛 나는 것일 줄이야…….”
기분 좋은 고양감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로 칭찬을 아끼지 않는 양 태감에 비해 떫은 감이라도 씹은 것 같은 소년의 표정은 분명하게 대비되었다.
“맛은 정말 좋은데……. 혹시 몸에도 좋으냐?”
“예? 예 뭐…… 서홍시는 생으로 먹으면 괴혈병과 가벼운 감기를 예방하고 익혀 먹으면 혈관을 깨끗하게 한다고…….”
“뭐? 괴혈병을 예방한다고?!”
현대인에게 괴혈병이 비타민 C가 부족해 생기는 병이라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었다.
하지만 소년의 실수는 이곳이 고대의 중국과 유사한 시대라는 것을 망각한 것이었다.
현대에서도 이 개념이 최종적으로 확립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였고 그 이전에는 뱃사람들에게 해적보다도 더 두려운 공포의 대상이었다.
명나라에선 환관 정화가 선내에서 콩나물을 길러 괴혈병을 예방했다곤 하지만 콩나물은 자랄 때 대량의 물을 소비하기 때문에 사람 마실 물도 부족한 배에서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그런 만큼 이 시대의 권력자들에게 괴혈병은 장거리 항해를 방해하는 주적 중 하나로 손꼽히는 무서운 병이었다.
그런 것을 깜빡하고 되는대로 이야기를 풀어놓은 주둥이가 원망스러워졌다.
“아아 그래, 이것도 채소류였지. 확실히 괴혈병은 생채소를 먹으면 완화가 되는 병이니…….”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나라에는 최소한 생채소류를 먹으면 괴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상식은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소년이 아직 안도하기에는 일렀다. 죽에 간장을 조금 친 양 태감이 가면 안쪽에서 눈을 빛내며 질문을 시작했다.
“너는 어찌 그런 것을 알았느냐?”
“이 천것이 어디서 제대로 배우진 못하였고 그저 궁에서 버려지는 책들을 주워 읽거나 오며 가며 주워들은 것이옵니다.”
“호오…… 버려지는 책들? 주로 어떤 책을 읽었느냐? 그리고 글은 어디서 배웠고?”
“그, 그것이…….”
움츠러든 소년에게 호기심의 눈빛을 빛내는 태감은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하여간 입이 방정이라고 스스로 욕하면서도 소년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을 지어냈다.
“그…… 주로 양의학에 관련된 것을…… 그리고 글은 제가 어린 시절 절 보살피며 일을 알려준 환관에게 배웠습니다.”
아무리 천한 일만 시키더라도 후궁에서 일하려면 최소한의 글은 알아야 하니까.
소년은 떠듬떠듬 대답하며 자신에게 글을 가르친 환관이 누구인지를 떠올리려 했다.
호된 질책으로 엄하게 가르침 받은 것은 기억이 났지만, 도저히 그가 누구였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나이가 많은 환관이었다는 것인데…….
소년이 상념에 빠져 기억을 되새기는 동안 태감은 고운 턱 끝을 검지로 쓸며 혀를 찼다.
“양의학? 아아 그래, 확실히 태의전(太醫殿)과 생약전(生藥殿)의 의원과 약사들은 서방의 의학을 배척했으니 그렇게 버려지는 책들에 보배로운 지식이 숨어 있었군…….”
이 변명은 소년이 생각하기에 완벽했다. 서방에서 들어온 지식이라고 하면 검증할 방법도 없고 책을 가져와 보라고 해도 날이 너무 추워 땔감으로 썼다고 변명하면 증거를 찾을 수도 없다.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
하지만 태감은 소년을 쉽게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가 돋는다는 듯한 얼굴로 소년을 내려다보며 입가엔 위험스러운 미소를 더 하자 소년은 그 소름이 등골을 타고 기어오르는 듯한 감각을 맛보았다.
“아니, 질문이 좋지 않았군. 만약에 간이 안 좋은 사람이라면 넌 어떤 음식을 먹이겠느냐? 빈혈이 있는 사람이라면? 야맹증에 걸린 사람은 무엇을 먹어야 하지?”
질문이 마치 송곳으로 손톱 밑을 쑤시는 것처럼 날카롭고 섬뜩했다.
섬뜩한 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그 질문에 대답했을 때 자신의 미래가 섬뜩하고 두려운 것이었다.
아무리 궁내 정치에 문외한이라 하여도 소년의 본능은 어떻게 대답을 하던 지금 이 평온한 현상 유지는 불가능하다는 경종을 울렸다.
소년에겐 정치판에 발을 담글 용기가 없었다. 비록 지금처럼 궁의 노비 노릇을 하는 것이 몸은 힘들지언정 속은 편하지 않은가?
최소한 저잣거리 장대 위에 목이 걸릴 일은 없지 않은가.
소년은 저번보다 더 납작 엎드려 거의 오체투지에 가까운 모습으로 태감에게 빌었다.
“이 천것이 어찌 그런 것을 알겠습니까. 조금 전 말한 것도 그저 우연히 아는 것이었기에 말이 튀어나왔을 뿐입니다.”
부드럽지만 완강한 거부의 표시였다. 요리라면 얼마든지 해줄 테니 그 이상 수렁에 발 담그지 않게 해달라는 소년의 의사 표현이었다.
소년은 그래도 태감이 일말의 자비심을 보여주길 기도했다. 실제로, 자신의 모습은 범인이라면 퍽 동정심이 들 만한 몰골이 아닌가?
몸마저 완전하지 않다. 왼 다리를 절고 등은 굽었다. 신체 건강한 청년도 아니다.
독사굴에 들어가 스스로 독기를 품을만한 배짱 따윈 없다. 그러니 부디 눈감아다오.
태감은 가면 안쪽으로 차가운 비웃음을 끄집어내 입가에 내걸었다. 초승달처럼 길게 휘어진 눈동자로 소년을 굽어보며 그는 소년의 가치를 재단했다.
사람을 재는 눈이었다. 사람의 가치를 수치로 환산하는 위정자의 눈으로 태감은 소년을 굽어보고 있었다.
“평생 그리 살 테냐?”
태감의 한마디에도 소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니, 고개를 들지 않았다. 태감이 아무리 찬란한 미래를, 금은보화를 약속한다 해도 고개를 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하지만 태감은 소년에게 찬란한 미래를 약속하지 않았다.
그저, 내일부터 반복될 어두침침한 미래를 친절한 태도로 설명해 주었다.
“네가 이 궁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똑같은 삶일 텐데. 그리 늙어갈 테냐? 네 그 오두막에서 비참한 꼴로 늙어갈 테냐? 늙어 허리가 휘고 거동조차 불가능해지면 누가 널 살펴주지? 넌 이 궁에서 고독사할 거야. 하루에도 몇천몇만 명이 드나드는 이 궁에서. 너 혼자만 고독사할 것이야.”
그것이 네가 원하는 미래더냐?
고개를 숙인 소년의 입에서 어금니가 으깨지는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이를 갈고 손톱이 파고들어 새빨간 피가 바닥을 적시면서도 소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었으니까.
어째서 거세한 환관도 아닌 자신이 이 후궁에서 허드렛일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유를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상황을 뒤집을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다.
남은 것은 타협과 체념뿐이었다.
하루를 더 살기 위해 소년은 이 후궁과 타협해야 했다. 사람이 아닌 구더기로서 살아남기로.
“그래도 암투에 희생양이 되어 목이 잘리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태감은 천천히 소년에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소년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소년 역시 이 숨 막히는 복마전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중 하나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어제는 서로 웃던 이들이 다음 날 독을 타고 조그마한 말실수에 트집이 잡혀 나락으로 떨어지는, 없던 것도 있게 되고 있던 것도 없었던 일이 되는 곳이 이 황궁이라는 곳이었다.
그것이 속인들에게 동경과 꿈의 이상향이라는 황궁의 실체였다.
그 가장 밑바닥을 기며 살아온 소년은 어떤 것을 보며 자라났을까? 무엇을 보며 살았을까?
움푹 들어간 소년의 눈이 그 삶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므로 소년은 이 궁과 타협한 것이다.
찬란한 미래보다 구더기로라도 사는 것을. 본래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진 뜨거운 청춘과 즐거운 꿈, 인간의 존엄성 따위를 모조리 저당 잡혀 목숨 하나만을 지켜온 것이리라.
양단은 이 소년이 마음에 들었다. 같은 시대, 같은 장소를 다른 위치에서 보아온 소년에게서 그는 기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게 걱정되느냐? 그래서 사람이 아니라 구더기로 그늘을 기겠다고?”
“양 태감님, 이 천것은 그저…….”
“그럼 절대적인 뒷배가 널 봐준다면 어떠냐?”
태감은 천천히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무늬 없는 검은 가면을 한 차례 매만지던 그는 결심한 듯 손을 가면의 끝 테두리로 가져갔다.
딸칵-
그 순간 태감이 가면을 벗어 민얼굴을 드러냈다. 소년을 잠 못 이루게 하던 궁금증을, 그와 동시에 공포심에 외면하고 싶어 했던 그의 얼굴을.
그 순간, 그를 중심으로 세상 모든 불화와 근심이 녹아내렸다. 어둠을 밝히는 여명처럼 어두운 방 안을 밝히는 태감의 미모에 소년은 넋을 잃었다.
떠오르는 태양처럼 웃으며 태감은 소년에게 다짐했다.
“그래. 황제 폐하라는 이 나라 최고의 뒷배 말이다.”
“태감님!!!”
칠 척 장신의 거구를 날리며 위정이 태감의 말을 가로막았다. 굳게 그러 쥔 주먹은 필요하다면 즉시 소년의 가냘픈 모가지를 비틀어서라도 이 일을 무마시키겠다는 굳센 의지가 엿보였다.
“위정. 내 앞을 가로막지 마. 자, 선택해. 사람으로서 살겠느냐? 구더기로서 죽겠느냐.”
그 순간, 소년은 가슴 속에서 오래전 메말라 고사한 희망이라는 감정을 얼핏 느꼈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기엔 이미 너무 오랜 세월 눈물샘이 메말라 버렸다.
눈물 대신 소년은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소년은 처음으로 곧게 서서 태감의 눈을 마주했다.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