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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4화 (4/314)

환관의 요리사 4화

소년은 허름한 오두막에서 연좌궁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다 낡아 빠진 가재도구나 허름한 옷 따윈 전부 버리고 맨몸으로 덜렁 옮겨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가진 게 없으니 편하구먼. 올 때도 맨몸으로, 갈 때도 맨몸이겠지.”

인생 한 번 살다 가는 길에 가져갈 것은 입을 삼베옷 한 벌뿐이니, 너무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성현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왜소한 체격의 소년이 혼자 눕기엔 너무 큰 게 아닌가 싶은 넉넉한 침대에 식재료와 서양의학에 관련된 책이 가득 찬 책장이 두 개.

남향으로 크게 창이 있어 햇볕이 잘 들고 창문을 열면 앞에 연꽃이 핀 작은 연못이 있어 운치가 있었다.

질 좋은 목재로 만들어진 탁자에 의자. 찬장엔 고급스러운 찻잔과 백호 은침, 철관음 같은 값비싼 차들이 가득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찻잎은커녕 깨끗한 물 한 잔 마시기도 힘든 처지였는데, 사람의 말 한마디에 이렇게 처지가 바뀔 수 있다니. 놀라움을 넘어 허탈함마저 느껴졌다.

소년은 창을 활짝 열고 의자에 걸터앉아 숨을 내쉬었다. 살가운 봄바람을 타고 나비 한 마리가 날아 들어와 침대 기둥에 앉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후궁의 비정한 장기 말이 되겠다며 태감과 차가운 계약을 나눈 소년은 자신이 비정한 후궁의 정치판과 경사의 뒷 세계를 활보하며 어둡고 음습한 일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업무 공간은 주방이었고 그의 일은 태감의 전속 요리사였으며 쥐게 된 것은 차가운 비수가 아닌 직사각형의 식칼이었다.

결론적으로. 완전히 헛다리 짚었다. 요 몇 일간 태감의 식사를 차리며 소년은 자신에게 이렇게나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고 자조했다.

소년이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서류를 보고 있던 태감이 십년지기 친구를 맞이하듯이 반갑게 그를 맞았다.

“오, 잘 잤느냐? 베개는 불편하지 않았고?”

“예, 잘 잤습니다. 덕분에.”

“그거 다행이구나.”

과연 정치가 다운 안면 두께였다. 심장을 녹여 버릴 만큼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소년에게 손짓한 태감은 소년을 위해 친히 의자를 빼줄 정도였다.

“어떠냐. 일은 좀 손에 익었느냐?”

“뭐, 늘 하던 일이니 익숙해지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소년이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며 비아냥거리자 태감은 소년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뭉근한 연기 너머로 태감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이제 새로운 일을 배워볼까?”

태감은 소년이 차를 마시는 동안 다섯 개의 패를 꺼내 상에 늘어놓았다.

다섯 개의 패에는 여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황후 후보자의 패였다.

“현재 후궁에서 황후의 자격이 있는 후보자는 총 다섯. 네가 해줬으면 하는 일은 이들 중 황후에 어울리는 후보자의 취향을 파악하고 정치적인 활동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뭐, 다과회라든지, 연회라든지. 그런 자리에서 실력을 발휘하라는 이야기다.”

연회준비야 전생에 늘 하던 일이니 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년은 태감의 말에서 숨겨진 함정을 눈치챘다.

“다섯 분 중…… 황후에 ‘어울리시는’ 분입니까?”

소년의 말에 태감은 길게 입꼬리를 찢으며 미소 지었다. 역시나, 소년의 쓴웃음이 기꺼웠는지 소년에게 손수 차를 내주며 태감은 부연 설명을 더 했다.

“그래. 황후에 ‘어울리시는’ 분 말이다. 비와는 달라. 후의 자리는 본격적으로 이 황실에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다. 이 후궁 안에서만, 그리고 침실에서만 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비와는 차원이 다르지.”

그 말은 다섯 분의 비중에선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손에 권력을 쥐면 폭군이 될 비가 있다는 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황후의 외척이 권력을 쥐고 나라를 휘두르는 무시무시한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다고 생각하며 소년은 한숨지었다.

“뭐, 너무 긴장하지는 마라. 어차피 황후의 재목을 고르는 것은 하늘이 선택할 일이니. 네가 할 일은 어디까지나 요리가 전부다. 머리로 할 일은 내가 하고, 무력이 필요한 일은 저 친구들이 할 테니.”

그리고.

“실수할 것을 두려워 마라. 책임은 나와 내 윗분이 책임져 주실 테니까.”

태감의 손가락은 저 멀리, 후궁의 중심을 가리키고 있었다. 반룡궁. 황제께서 거하시는 궁을 가리키는 태감의 말뜻에 소년은 식은땀을 흘렸다.

“도대체 양 태감님께서는…… 어떤 지위에 계신 겁니까?”

단순히 황제의 심복일 리는 없었다. 그렇다 하기엔 배정된 궁과 부리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으니까.

“우선은, 대외적으로는 사례 태감 자리에 있지. 하지만…… 흠. 넌 혹시 동창이라는 조직을 알고 있느냐?”

“그…… 환관으로 이루어진 첩보조직이 아니온지요.”

“그래. 정보라면 저잣거리 시장물가부터 음모와 반란의 조짐까지. 관료들을 감시하고 꼬투리를 잡는 게 바로 동창이라는 집단이 하는 일이지.”

무협지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이름이었다. 동창 제독이 황제의 명을 받아 무림을 전복시킬 음모를 꾸미는 것은 흔한 클리셰가 아닌가?

하지만 그 이름을 눈앞에서 직접 듣게 되니 그 압박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올려다보는 소년의 시선에 태감은 상위에 놓아둔 가면을 쓰는 척하며 폼을 잡았다. 유치한 동작인데도 묘하게 잘 어울렸다.

“그래. 그 동창의 제독이 바로 나다. 황제 폐하의 심복이며 현 후궁의 제 일 권력자. 어떠냐? 네가 줄을 댄 인물의 배경이.”

예상보다 훨씬 더 어마어마한 이름이 나왔기 때문에 자신이 잡은 줄이 썩은 동아줄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소년은 안도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제가 탄 배가 침몰하는 난파선은 아니니.”

그렇게 말하면서도 소년은 문득 소름이 끼쳤다.

보기에는 선녀처럼 아름다운 저 환관이 실은 밤이면 밤마다 의심스러운 종자들을 묶어놓고 고신하여 정보를 뽑아내는 고문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선량해 보이기만 하는 그 미소가 음흉하게 느껴졌다.

이 무슨 무시무시한 감시사회란 말인가. 냉전 시대 소련도 아니고.

아무튼, 아직 황후의 재목으로 결정된 비가 없으니 실제로 그의 일은 양 태감의 삼시 세끼와 간식을 책임지는 것이 전부였다.

다른 잡일이 없으니 본래 소년이 하던 일보다도 더 편했다.

서류 뭉치가 뭉텅이로 쌓여 있는 집무실. 오후의 간식 시간에 뭉근한 차 향기가 피어올랐다.

오후의 티타임의 메인 간식은 나미권(糯米卷, 찹쌀떡 말이).

찰밥을 밥알이 너무 뭉그러지지 않도록 적당히 으깨 참기름을 바른 도마에 얇게 펴고 그 위에 달콤한 팥소를 펴 바른다.

그다음에는 살살 솜씨 좋게 말아낸 다음 녹두 고물이나 콩고물 위에 굴리며 조금 더 길게 늘인다.

먹기 좋게 한입 크기로 썰면 완성.

만들기도 쉽고 맛도 좋은 간식이지만 태감의 관심은 이 고풍스러운 간식보다는 소년이 자신의 간식으로 할 겸 재미 삼아 만든 사옹(沙滃)에 쏠려 있었다.

중국식. 정확히는 홍콩에서 즐겨 먹는 이 아이 주먹만 한 크기의 도넛은 뜨거운 물과 계란이 듬뿍 들어가 고소하고 쫄깃하며 설탕을 한껏 뿌려 달콤했다.

물론 이 시대에선 정제되어 눈가루처럼 하얀 백설탕은 없으니 누런 황설탕을 곱게 갈아 뿌린 것이지만 아마 현대였다면 이 비정제 설탕을 더 높게 쳤을 것이다.

거기에 오늘은 태감이 여러모로 운이 좋은 날이었다. 흔치 않게 신선한 우유가 들어와 내차(奶茶, 밀크티)를 맛볼 수 있는 날이었으니까.

보수적인 태감은 처음에는 무슨 소리냐며 질겁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깊고 그윽한 맛에 빠지고 말았다.

북부와 서부 유목민족 덕분에 유제품에 대한 거부감이 크지 않은 것도 한몫했으리라.

앞으로도 정기적으로 우유를 구해주면 비장의 디저트인 에그타르트(蛋塔)를 구워줄 용의도 있다. 중국식 에그타르트인 ‘단다’라면 라드로 구워도 맛이 좋으니까.

버터를 조금 넉넉하게 쓸 수 있다면 케이크나 파이류를 만들 수도 있을 텐데.

전생에 당이 무서워 함부로 접하지 못했던 달콤한 간식들을 생각하니 군침이 돌았다.

‘젤라틴은 못 구할 테니 젤리 같은 냉과류는 힘들겠지?”

하지만 생각해 보면 푸딩이라면 설탕을 졸인 캐러멜에 젤라틴 없이도 만들 수 있는 계란 디저트이니 어찌 궁리만 잘 해보면 만들 수 있을지도? 골똘히 고민하는 소년을 보던 태감은 어느새 텅 빈 접시를 보고는 애석한 듯 한숨을 쉬었다.

“뭘 그리 골몰하고 있던 게냐?”

“아뇨, 그냥 참 잘 드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냐? 오늘은 좀 절제한 편인데.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 사옹 이라는 걸 한 접시 더 먹고 싶구나.”

원래 마른 사람들이 더 잘 먹는다고 하지만 어지간한 여자보다 허리가 가는 태감의 그 야리야리한 허리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이 들어가는 걸까?

물론 거세를 하면 성욕보다 식욕이 증가한다는 말은 듣기는 했지만…….

“그러다가 저녁을 못 드십니다.”

“그래? 오늘 저녁은 무어냐?”

“일단은 아주 신선한 새우가 들어와 활창하(活滄蝦, 살아 있는 새우를 양념에 찍어 먹는 요리)를 올리고 괜찮은 잉어가 있어 잉어로 경단을 만들어 탕도 한가지 올리고, 또 좋은 오리가 들어와 찜 요리를 할까 하는데…….”

“활창하? 그거 좋지. 산지가 아니면 신선한 것이 들어오지 않아 귀환 음식인데 어찌 들어왔을까?”

새우는 오늘 막 강남지방에서 손가락만 한 굵고 통통한 민물새우가 새벽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고대 중국이 그러했듯 이곳도 생식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신선한 날 새우의 달콤함만은 버릴 수 없었는지 새우가 제철일 때면 이 황궁에도 살아 있는 새우가 들어오곤 했다.

양 태감은 술을 좋아하는지 벌써 집무실 찬장을 열어 활창하엔 무슨 술이 어울릴까 노래를 부르며 술을 엄선했다.

노래 가사는 너무했지만, 미인의 목소리는 그것만으로도 천상의 옥구슬 같아서 집무실 안을 즐거운 활기로 가득 채웠다.

새우, 새우 노래를 부르던 태감이 무엇을 보았는지 어느 순간 가사가 새우에서 돼지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마치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얼굴로 물만두(水饺)를 주문했다.

“이왕이면 고추기름을 넉넉하게 올려서 칼칼하게 만들어주렴.”

“……그럼 밥은 빼고 올릴까요?”

“무슨 소리냐. 밥은 당연히 올려야지. 애초에 밥을 빼고 어떻게 저녁을 먹겠느냐?”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반박할 수 없는 완벽한 논리였다.

“……그렇게 드시고도 괜찮으십니까??”

“뭘, 용의 아들께서는 쌀을 서 말 고기를 서 말 술을 서 말 드셔도 밤에 야식까지 드시는데. 난 소식하는 편이지.”

그건 황제의 핏줄 아닙니까? 태감님아.

전생엔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없다고 하지만 이 세계에는 진짜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었다.

황가의 핏줄인 금룡 진 씨는 대대로 핏줄에 용혈이 흐른다 하며 황제의 자리는 대대로 사람이 아닌 황가를 수호하는 용이 꿈으로 점지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나라의 황제를 용의 아들이라 부르며 신성시하는 것이다.

수호룡은 대대로 중요한 민간신앙으로 가뭄이 들거나 하면 가장 먼저 제를 올리는 신앙의 대상이었다.

그 피가 직접적으로 이어졌기 때문인지 황제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대부분 무병장수하며 그 대가로 원체 기가 센 핏줄이라 그런지 손이 귀하다고 한다.

태감은 그 일이 골치인지 차를 들이켜며 투덜거렸다.

“하여간, 이 후궁 때문에 폐하께서 얼마나 골치를 썩으시는지 넌 모를 거다.”

“폐하께서요? 후궁은 황제 폐하를 위한 화원이 아닙니까.”

소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자 태감은 코웃음 쳤다.

“넌 이 후궁이라는 곳이 순전히 황제 폐하의 향락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느냐?”

밑바닥으로 깔리는, 늘어지는 숨을 몰아쉬며 태감은 소년에게 불편한 진실을 알려주기로 결심했다. 결코, 듣고 싶지 않을 이야기.

“넌 어째서 이 후궁의 규모가 방대해졌다고 생각하느냐?”

“예? 그야 나라의 대를 이을 황자를 얻어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함이 아니온지요.”

참 속 편하시겠군, 누구는 장가를 가고 싶어도 못 갔는데, 누구는 아예 등을 떠밀어 주니. 전생과 현생 통틀어 여자 손이라고는 어머니의 손밖에 없는 소년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태감이 알려준 불편한 진실은 소년의 가치관에 못을 박았다.

황제란 것도 못 할 직업이구나. 라는.

태감은 마치 먼 옛날을 그리듯이 아득한 목소리로 후궁의 역사를 이야기했다.

“금룡 진씨가 세운 이 나라는 수많은 소수민족을 힘으로 누르고 복속시켜 성립된 나라다. 처음에는 창칼로 눌렀으나 영원히 그럴 수는 없으니 방도가 필요했지.”

“……정략혼이군요.”

“그래, 세력가들의 딸들을 볼모로 데려왔던 것이 이 후궁의 시작이다.”

후궁은 황실의 권력의 척도나 다름없었다. 황권이 강력하고 황제의 치세가 제국 곳곳에 미칠 때면 후궁은 규모가 축소되었다.

굳이 정략혼을 통해 황후와 황후의 외척이라는 황실의 권력을 분할시키는 위험을 지지 않아도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황권의 반석이 약할 때면 후궁의 규모가 커졌다.

후궁은 황실의 권력을 분할시킬 수 있는 위험인 동시에 황제의 정치적 아군을 만드는 정치적 결합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현 제국의 후궁의 규모는. 역대 손을 꼽을 정도였다.

태감은 그 이유로 지난 내전과 현 황제의 젊은 나이를 꼽았다.

“지난 내전을 승리로 이끈 선황 깨서는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셨다. 그것은 이권과 정치에서 나온 것이 아닌 순수한 무력으로 일궈진 힘이었지. 하지만 창칼로 일궈진 권력이었기에 그 위세가 길지 못했다. 지난 내전에서의 참상에 심병을 앓으시던 선황 깨서 젊은 황자셨던 현 황제 폐하께 너무 일찍 황권을 선양하셨다.”

피 흘리는 제국, 고통에 신음하는 제국민들을 앞에 두고 불안한 권력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황제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후궁의 규모를 키우고 각지의 유력자들의 딸들을 비로 맞이해 자신의 지지기반을 다진 것이다.

“넌 혹시 화비(花妃)와 봉비(鳳妃), 그리고 오상비(五祥妃)의 차이를 알고 있느냐?”

“……품계의 차이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상비는…….”

“황후 후보자로 뽑힌 비를 달리 부르는 말이지.”

화비(花妃)는 정식으로 품계를 허락받지 못한 비였다. 대부분이 외모가 아름다울 뿐인 시녀들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그에 비해 봉비(鳳妃)는 품계를 허락받은 비이지. 이들이야말로 후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황제의 권력 기반이 바로 그녀들의 친정이였다. 그렇기에 원하든 원치 않든 그녀들을 비라는 이름을 주어 후궁에 묶어두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비는 어찌하여 그러는가?

화비는 후궁에서 어정쩡한 존재였다. 품계가 없으니 대접도 박했고 봉비들과는 달리 집안도 천하여 권력 기반이 없었다.

황제의 기반이 될 수 없는 그녀들을 어째서 품고 있는가?

소년의 물음에 태감은 차가운 대답을 내놓았다.

“말했다시피 권세 높은 집안의 여식인 봉비(鳳妃)는 잘못을 저질러도 쉽사리 처벌할 수 없고 내쫓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대신 매를 맞을 이가 필요하겠지?”

죄를 저지른 봉비를 처벌할 수는 없으니 그 죄를 화비에게 덮어씌워 내쫓는다. 지극히 합리적인 이야기였다.

역겨운 이야기였다. 오히려 구더기로 살았던 자신의 처지가 속 편했다고 위로할 수 있을 정도로. 소년은 울렁거리는 속을 뜨거운 차로 넘기며 한숨지었다.

“……듣지 말 걸 그랬습니다.”

“이것이 정치이고, 이것이 권력이다. 뭐, 아직 어린 너한테는 너무 당혹스러운 이야기였겠구나.”

소년은 혐오감을 느끼며 사옹 접시를 집어 들었다.

어느새 설탕 가루까지 깨끗하게 먹어치워 반들반들한 접시를 들자 태감은 소년에게 사옹 한 접시를 더 가져오라 청했다.

그러다 저녁 못 드신다니까요. 아 괜찮다니까. 한동안 실랑이 끝에 결국 승리한 것은 태감이었다.

소년이 빈 그릇을 들고 집무실을 나가자 벽에 서 있던 네 명의 환관 중 위정이 태감에게 다가왔다.

“너무 많은 것을 알려주신 것 아닙니까?”

“뭐 어때서 그래. 실제로 오늘 말한 건 문무관이라면 몰라도 후궁의 환관들이라면 대부분은 알고 있는 것 아니냐.”

“그래도…….”

“그래? 다음에 말해 줄 비밀들을 알면 아주 날 잡아 죽이려고 들겠구나?”

“태감님!”

위정의 충언에도 태감의 마음은 변함이 없는지 싱글싱글 미소 짓는 입과는 다르게 눈매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소년을 이용해 이 후궁의 판도를 어떻게 바꿀지는 오직 그만이 알고 있었다.

차가운 가면을 덮어쓰며, 가면의 그늘에서 태감의 눈동자는 부드럽게 휘었다.

“녀석을 써먹을 날이 오기 전까지, 잘 갈고 닦아 준비해 둬야지.”

그래야 필요할 때 써먹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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