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체육 대회의 종목은 뻔한 것이었다. 이어 달리기, 미션 계주, 이인삼각 같은 시시하지만 10대 아이들이 금방 열의를 불태울 수 있을 만한 것들. 줄다리기만 참가하고 슬쩍 빠지려 했던 계획과는 달리, 나는 이인삼각이라는 흔한 종목에 참여하게 되었다.
“보통 이런 건 여자 남자 이렇게 섞어서 하는데.”
“어쩌라고.”
“너네 둘은 진짜 떼려야 뗄 수가 없구나.”
고한결이 놀리듯 말했다. 나는 이인삼각이라는 단어 옆에 나와 유현재의 이름이 당당하게 쓰여 있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반에서 너네만큼 붙어 다니는 애들이 없다, 야. 반장이 합심해 함께 장단을 맞추기 시작했다.
“꼭 해야 해?”
“유현재는 한다던데?”
“뭐라고?”
유현재는 이쪽을 보다 급하게 교과서를 보는 척하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신청한 게 저 놈이겠구나. 나는 습관적으로 나오려는 잔소리 같은 것을 꾹 참고 이마를 짚었다.
“뭐, 그냥 한 번 하면 되는 거지?”
“엉. 학년별로 하는 거라 단판 승부야.”
“남남은 너네밖에 없대.”
“어쩌라고, 라고 했다.”
고한결이 깔깔 웃더니 수업 종소리를 듣고 부리나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모르게 고한결과 티격대며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단 생각이 뒤늦게 들자,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앞에 앉아 있던 반장이 내게 단단히 당부하기 시작했다.
“야, 너네들 연습해야 돼. 진짜 능력 믿고 안 하고 그럼 안 된다.”
“꼭 이겨야 돼? 이해가 안 되네.”
“상금이 존나 커. 그리고 9반 새끼들이랑 자존심 싸움이야.”
“9반이 이주현 있는 곳이던가.”
“엉. 걔 완전 괴물인 거 알지.”
“야. 걘 마나 없이 힘으로도 여자애들 세 명을 든대.”
“그건 또 어떻게 아냐. 걔가 해봤대?”
“했다던데?”
“멀쩡한 앤 줄 알았는데 이상하네, 걔도. 그딴 걸 왜 해.”
“그게 중요하냐?”
나는 앞문을 열고 들어온 선생님을 보고도 계속해서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제법 아니꼬왔는지 반장은 선생님이 나서서 지적을 할 때까지도 내게 잔소리를 계속했다.
*
“뭐야?”
유현재가 정체가 모호한 흰 끈을 들고 내 앞에 서 있었다. 집으로 바로 귀가할 생각이었던 나는 문을 떡하니 가로막은 커다란 덩치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연습해야지, 찬희야.”
“너까지 이래?”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해야지.”
“우리 같은 애들이 빠져 줘야 일반반 애들이 활약하지.”
“어차피 이인삼각은 아무도 신경 안 쓰는 종목이야.”
“그럼 더더욱 연습 안 해도 되잖아.”
“종목별로 2등 안에 못 들어오면 돈 내래.”
“뭐 그런 게 다 있어?”
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가방을 챙기고 있던 반장을 쳐다보았다. 반장은 다소 야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찬희 너, 설마 갈 생각은 아니었겠지?”
반장의 의미심장한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유현재가 대신 잽싸게 대답해 주었다.
“지금 연습하러 가려고.”
“그래. 그래야지. 우리도 다 연습할 거거든.”
한쪽에는 반장이, 다른 한쪽에는 유현재가 팔짱을 끼고 나를 잡아당겼다. 나는 속절없이 그들에게 끌려가 운동장으로 향했다. 운동장 한쪽에 자리 잡은 유현재가 내게 끈을 내밀며 말했다.
“묶자. 발 내밀어 봐.”
“아니, 잠시만…….”
유현재가 몸을 숙여 내 왼발과 자신의 오른발을 동여매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반쯤 포기한 채로 유현재의 신난 발걸음에 나를 맞추어 주기 시작했다.
“찬희야, 허리에 손 올려 봐.”
“어?”
예상치 못한 유현재의 말에 채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당황해 버렸다. 유현재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내 팔을 잡아 자신의 허리에 얹었다. 야, 남남 커플 보기 좋은데? 장난 섞인 야유에 나는 녀석들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었다. 유현재가 속삭였다.
“우리 보기 좋대.”
“야, 딱 봐도 놀리는 거잖아.”
“뭐 어때.”
“바보 아냐?”
“신경 쓰면 너만 피곤해.”
유현재가 웃으면서 발을 가리켰다. 속도를 맞춰 움직여 보자는 뜻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유현재가 시키는 대로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치할 줄만 알았던 연습은 은근히 승부욕을 자극했다. 발을 내딛는 속도라던가 박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던 도중 뒤에서 족구 연습을 하던 다른 녀석과 등을 부딪혔다. 몸이 앞으로 기울고, 유현재가 황급히 내 허리를 잡았지만 이미 무게 중심은 쏠린 뒤였다. 나와 유현재가 뒤엉켜 넘어지자 족구를 하던 녀석들이 멀뚱히 우리를 쳐다보았다.
“괜찮냐?”
나를 친 녀석은 미안하단 소리도 하지 않고 공에 눈을 떼지 않은 채 손만 흔들었다. 미안하다는 뜻인 것 같았다. 짜증 날 정도로 아팠던 건 아니라 나는 몸을 일으키기 위해 땅에 손을 짚었다.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유현재가 먼저 몸에 힘을 주고 내 양팔 안쪽으로 손을 넣어 빠르게 일으켜 주었다. 순식간에 짐짝 취급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170이 넘는 남자를 무슨 빈 상자 들듯 들어 올리는 게 어딨냐고.
“다쳤다, 너.”
“어?”
유현재의 말에 나는 흐리멍덩한 표정을 지으며 그제야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체육복 바지에 피가 조금 묻어 있었다.
“이 정도면 뭐, 그냥 하자.”
“보건실 가자.”
“아니 이런 걸로 왜 가냐?”
“가자.”
“필요 없다니까?”
유현재가 갑자기 묶인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속절없이 유현재의 무게에 실려 질질 끌려갔다. 이런 굴욕적인 일이 있을 수가. 녀석이 나보다 많이 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힘까지 이 정도로 셀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야, 야!”
“괜히 힘주지 마, 찬희야, 다쳐.”
“아니 이거 풀고 가면 되잖아.”
“풀면 너 보건실 안 갈 거잖아.”
“갈게, 그러니까 일단 풀자.”
“안 갈 거 같은데.”
유현재는 쓸데없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여러 번 유현재를 설득하고 나서야 겨우 발목에 묶인 줄을 풀 수 있었다. 이미 운동장에서 한참 멀어진 뒤였다. 유현재가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황당한 마음이 들다가 별안간 웃음이 터졌다. 웃는 나를 보고 유현재의 얼굴에 덩달아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너 표정 진짜 웃겨.”
“그렇게 웃겨?”
“어. 개웃겨.”
“……못생겼어?”
“엥.”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반박했다.
“네가 못생겼으면 난 무슨 밟아 문드러진 망개떡이냐?”
“……나 잘생겼어?”
“당연한 걸 물으니까 대답도 잘 안 나온다.”
유현재가 그제야 다시 웃었다.
“다행이다.”
“진짜 실없네, 너.”
“찬희 너한테 잘생겨 보여서 진짜 다행이다.”
훅 들어온 멘트에 나는 순간 하려던 말을 잊어버렸다.
“아니, 꼭 내가 아니더라도 다 그렇게 생각할… 걸?”
“그런가?”
유현재가 귀엽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유현재의 그런 모습이 아직 아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유현재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더니 툭 말을 던졌다.
“너도 잘생겼어.”
“어?”
“너도 귀여워, 찬희야.”
“아, 진짜 뭐래.”
서로의 외모에 대해 말하는 이런 분위기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성큼성큼 유현재를 앞서 걷기 시작했다. 유현재가 내 뒤를 쪼르르 따라왔다.
“찬희, 얼굴 빨개졌다.”
“조용히 해라.”
“민망해?”
“조용히 하라 했다.”
유현재가 웃으며 내 어깨에 팔을 올려 감쌌다. 학교 건물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막 퇴근하려는 보건 선생님과 마주쳤다. 잔소리를 한바탕 들으며 무릎의 상처를 치료하고 나서야, 우리는 1층 복도에 단둘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가서 다시 연습해?”
“그냥 집에 가자. 너도 다쳤고.”
“누가 보면 다리라도 부러진 줄 알겠네.”
내가 툴툴대자 유현재가 웃으며 내 등을 가볍게 밀었다. 얼른 옷 갈아입고 가자. 체육복을 입고 바로 하교하면 벌점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다시 교실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노을의 붉은빛으로 가득 메워진 교실 안은 생각보다 더 미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막 단추를 풀려는 순간,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단둘이 있는데 옷을 갈아입는다고?
분명 아까 다른 녀석들과 단체로 갈아입었을 땐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순간적으로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유현재를 흘끗 보니 아무 생각 없이 단추를 풀어 내리고 있었다. 혼자만 신경 썼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민망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상의를 갈아입은 후, 바지를 내리려는데 유현재가 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찬희야!”
“왜.”
“그, 그…….”
“뭐.”
“바지… 는 우리 뒤돌아서 따로 갈아입으면 안 될까…….”
살짝 벙찐 얼굴로 유현재를 쳐다보니 녀석의 귀가 시뻘게져 있었다. 나는 뭐라 대답하려다 결국 응, 한 글자밖에 대답하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교복으로 갈아입고 가방까지 메고서야 나는 유현재를 겨우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유현재의 얼굴은 빨갛다기보다 노을빛을 그대로 맞은 듯해 보였다. 아직 해가 짧아 빨리 날이 저물고 있다는 걸 다행으로 여기며 나는 유현재에게 작게 손짓했다.
“가자.”
교실 뒷문 쪽으로 걸어가려던 찰나, 유현재가 머뭇거리다 내 이름을 불렀다.
“찬희야.”
“어?”
반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유현재가 어느새 내 코앞에 다가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