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나는 함께 온 차수현을 부모님께 인사시킬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곧장 방으로 올라갔다. 아까부터 온몸에 도는 오한 때문이었다. 한재민은 약 기운이 온몸에 퍼져, 토해 내도 문제가 없을 때까지 나를 붙잡아 두었다. 덕분에 나는 한재민과 차수현 앞에서 먹히지도 않을 체력쇼를 선보여야 했다.
“너 많이 게을러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래층에서 부모님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을 차수현이 방문 앞에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뜩이나 몸도 안 좋은데, 아무렇지 않은 표정의 차수현까지 보니 더 불쾌한 기분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상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니까, 불쾌를 넘어선 괴로운 기분. 작은 벌레들이 몸을 타고 올라와 목 주변을 감싸더니 압박하는… 그런 기분.
“바빴던 것뿐이야.”
나는 애써 그 기분을 무시한 채 대답했다. 목에 잔뜩 힘을 줬음에도 말끝이 떨렸다.
“잊어버렸단 건 어디까지인 건데?”
“…군데군데 잊어버린 거라 애매해.”
“그럼 유현재에 대해서는?”
“뭐?”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나도 모르게 날카로운 대답이 나왔다. 아까의 불쾌한 기분이 합쳐져 나온 짜증스러움이었다.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어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자, 차수현은 더 강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와 동시에 좀 더 목이 조여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나는 문득 이 기분의 근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 장소. 이 인물. 이 분위기. 이 표정. 나와 차수현의 관계만 달라졌을 뿐, 첫 죽음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나는 불안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입 안쪽을 짓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차수현은 평소 같은 얼굴로 높낮이 없이 말했다.
“매일같이 걜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했던 것도 잊었겠네?”
“그건….”
“어쩐지 좀 이상하긴 했어.”
“그러니까 대체 뭘….”
나는 더욱더 몸을 웅크렸다. 세차게 떨리는 모습을 차수현에게 보이지 않으려 나는 필사적으로 손을 감췄다.
“뭐가 이상하긴.”
등 뒤에서 차수현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오싹했다.
“분명 내가 아는 유찬희는 유현재 이름만 나와도 죽일 듯이 굴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
“아니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왜 이렇게 겁먹은 개새끼처럼 굴지.”
“저리 가….”
“이러다 걔가 아니라 네가 물려 죽겠어.”
나는 이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헉헉 소리를 내며 내뱉는 뜨거운 숨 사이로, 끝까지 진실을 숨겨야 한다는 강박이 흩어졌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형에 대한 복수랍시고 설칠 땐 언제고.”
차수현의 말에 몸이 힘든 와중에도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내가 차수현에게, 형을 잃은 복수를 하고 싶다 했다고? 오히려 복수를 하고 싶어 하는 쪽은 차수현일 거였다. 당연했다. 차수현은, 유도현을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이건 거짓말이다. 나는 가쁜 숨을 억누르고 천천히 대답했다.
“그럼 네가 날 돕는 건 단순한 재미야? 너도 목적이 있으니 나랑 이 짓 하는 거잖아.”
“말했지. 이유 같은 거 알 필요 없다고. 그게 조건이라고.”
“아하.”
나는 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 작위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사실은… 네가 형의 복수를 하고 싶은 거잖아?”
무어라 대응을 하기도 전에 쾅 소리와 함께 몸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폭력까지 더해지자 죽음의 기억은 더더욱 짙게 내 의식을 잡아먹었다. 차수현이 머리끝까지 시뻘게진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이제 거의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그냥, 차수현을 거부하기 위한 어떤 방법이든 동원하고 있는 거였다.
“뭐야. 네가 어떻게….”
“몰라.”
“말해놓고 뭘 모른단 거야.”
“네가 비겁하단 생각은 안 해봤어?”
“네가 뭘 알아.”
“형의 복수는 네가 하고 싶은 거면서,”
“닥쳐!”
“왜 나한테 설친다 만다야.”
차수현이 무어라 더 말을 하려 했지만, 1층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때문에 강제로 대화가 멈췄다. 나는 빠르게 올라오는 엄마와, 그 뒤에 서 있는 유현재를 발견하고는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힘겹게 내쉬었다. 이제 적어도 죽을 일은 없었다.
“찬희야!”
엄마가 내 쪽으로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천천히 가라앉는 심장을 느끼며 조소했다. 가짜 엄마임에도 진정하는 내 꼴이 우스웠다. 엄마에게 안긴 채로 나는 계단 앞에 서 있는 유현재를 바라보았다. 유현재는 그저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소리를 내지 않은 채, 입만 벌려 뻐끔거렸다. 어차피 내 말을 읽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이번엔 왔네.’
다행히 죽지 않고, 현재를 지켜냈다.
*
아버지는 이대로라면 내가 랭킹 선별전에서 제대로 된 기량을 펼칠 수 없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나는 과거의 기억에 얽매여 숨을 쉬지 못했던 그날 이후로도 점점 고통을 호소하는 날이 많아졌다. 모두 과거 때문이었다.
<중급 기술 ‘강령술의 기초’를 익혔습니다. 최초의 소환까지 약 60%>
책을 덮은 나는 침대 위로 천천히 무너졌다. 알 수 없는 마나의 흐름이 드디어 잠잠해졌다. 한재민이 내게 준 약은 마나의 한계치를 최대까지 끌어올리는, 랭커들 사이에서도 금기 중의 금기인 불법 약물이었다. 한재민이 계속해서 공부를 해야 한다 했던 이유 또한 마나의 안정적인 파장을 위해서였다. 마나량이 많이 필요한 스킬일수록 오히려 몸속에 잠재된 마나를 안정시킨다는 기본적인 공식에 따라 나는 계속해서 스킬을 체득해야 했다.
나는 소설에 맞추어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는 이번 삶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거겠지. 분명히 순응하고 있었는데도 죽음에 대한 공포는 문득문득 내 주변을 찾아와 얼쩡거렸다.
핸드폰을 들어 문자를 확인해 보니 반 아이들의 연락이 쏟아져 있었다. 나는 그제야 내일이 졸업식임을 깨달았다. 방 한쪽에 곱게 걸려 있는 교복을 본 나는 손을 들어 천천히 눈을 가렸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세이브 하시겠습니까? (2/3)>
그때 기계음과 함께 시스템 창이 허공에 나타났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떠 방을 배경으로 발랄하게 떠 있는 글자들을 쳐다보았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터라 놀랄 틈도 없이 대답했다.
“하면 뭐가 좋은데?”
<세이브를 생활화하세요! 안전하게 데이터를 지켜 줍니다.>
“돌려줘.”
나는 누가 본다면 미친 사람이라 생각할 만큼 어둡게 중얼거렸다.
“다시 그때로 돌려줘.”
그리고 또 혼자 깨달았다. 그때가 언제지? 이 미친 소설에 빙의한 시점? 혹은, 유현재와 아무런 근심 없이 떠들었던 첫 번째 삶? 내겐 돌아갈 만한 행복한 시기가 없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도 죽음은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유현재는 나를 떠날 준비를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시스템은 아무 말이 없었다. 세이브를 하겠냐며 물어온 것치곤 밍숭맹숭한 상황이었다. 나는 일부러 다시 물었다.
“넌 다 알고 있잖아?”
…….
“근데 모른 척하는 거잖아?”
…….
“재밌어서 이래? 내가 무슨 잘못을 했어? 왜 이러는 건데?”
<세이브 하시겠습니까? (2/3)>
“안 한다니까.”
그때였다. 문 밖에서 작지만 분명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용수철처럼 벌떡 몸을 일으켜 달려가 방문을 열었다.
“…뭐야?”
방 밖에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유현재가 서 있었다.
“왜 여기 있어, 네가.”
“…전화하고 있었어?”
“왜 있냐고!”
나는 유현재가 시스템과 대화하는 소리를 모두 들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살면서 이런 식으로 유현재에게 시스템에 관련된 상황을 발각될 거라 생각한 적이 없어 당황스러웠다. 그와 동시에, 계속해서 세이브를 독촉했던 시스템의 뻔한 행각이 우습기도 했다.
“네가.”
유현재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어제 그렇게 말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유현재는 그대로 내 앞에 있었다.
“네가 이상해졌다는 건 알고 있어.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런 식으로.”
“…….”
“헷갈리게 하는지 너무 궁금해서. 그래서 물어보러 온 거야.”
나는 유현재의 말에 최대한 친절하게 답변해 주었다.
“내가 헷갈리게 했다고.”
“…….”
“난 한 번도 너 헷갈리라고 행동한 적 없어. 똑같지. 너무 소름 끼칠 정도로.”
“아니.”
“내 말 들어줄래? 내가 먼저 물어볼게. 왜 헷갈리는데?”
유현재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남들 앞에서 가증스럽게 너 위한 척한 것도 여전했고. 너 하나 죽여 보려고 칼까지 든 것도 그냥 난데.”
“…….”
“넌 대체 어디가 헷갈렸니.”
유현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건, 오랜 삶을 유현재와 함께 살아온 내가 확실히 증명할 수 있었다. 유현재가 헷갈렸다면 내가 헷갈리게 행동한 것이 맞았다. 하지만 나는 차라리 유현재가 일관되게 나를 미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애매한 태도로 기억이 난 듯 어색하게 구는 것이 더 힘들었고 괴로웠다. 아홉 번을 죽었으면서 유현재가 다시 날 기억해 줄 것이고, 다시 찾아 줄 것이고, 반드시 함께해 줄 것이라 생각하는 내 자신이 너무나도 미련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이 지긋지긋한 악순환을 끊어내야만 했다. 오로지 하나의 결말로.
“전부 다 네 착각이니까 좀 가 줄래.”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유현재의 얼굴이 늘 그렇듯 익숙하게 사라져 갔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악력에 닫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유현재가 강제로 문을 당겼기 때문이었다. 잡고 있던 문고리를 따라 자연스레 몸이 앞으로 끌려 나갔다.
“진짜야?”
순식간에 유현재의 품에 안긴 꼴이 되었다. 유현재가 피하지도, 도망가지도 않은 채 또렷하게 말하고 있었다. 진짜냐고.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유찬희 맞아?”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숨조차 멈춘 상태로, 나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찬희, 아닌 것 같아.”
“내가 유찬희가 아니면.”
“…….”
“유도현이라도 되니.”
유현재가 내 팔뚝을 꽉 잡았다. 그에게선 더 이상 익숙한 향이 나지 않았다. 당연했다.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우리의 몸이 천천히 떨어졌다. 유현재는, 이전의 삶보다도 좀 더 큰 것 같았다. 그땐 너무 고생했으니까. 그러니까 크지 못했던 걸까.
“아니.”
“…….”
“넌, 달라.”
“아냐.”
“찬희야.”
“그만해.”
나는 이제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대화가 더 발전했다가 또다시 궤도를 이탈할까 봐 두려웠다.
“진짜 마지막으로 묻는 거야.”
유현재가 곧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 줄 자신이 없었다. 고개를 돌리니, 유현재는 익숙한 일이었던 양 내 얼굴을 잡아 앞으로 고정시켰다.
“내가 필요해?”
다시금 오한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그럴 리는 없지만 등 뒤에 아직도 시스템이 있을까 불안했다. 만약 지금을 저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럼 또다시 멍청한 행동을 반복해도 이 순간으로 돌아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알아야 하는 게 있어?”
나는 알고 있었다.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오답을 선택하고서 다시 돌아온다 한들, 나는 유현재의 불행만 더 보게 될 것이다.
“아니.”
내 얼굴을 감싸고 있던 유현재의 손이 느슨해졌다. 나는 툭 고개를 떨구고, 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