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내 짐작을 확신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삶을 희생해야 했다.
그리고 여덟 번째 삶에서 나는 1년간 완벽하게 유찬희의 족적을 따라가는 것에 성공했다.
나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차분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원작의 유찬희도 늘 듣던 평가였다. 유현재는 항상 내게 말을 건넬 기회를 노렸지만 그것도 육 개월 정도 지나니 잠잠해졌다. 언젠가는 유현재에게 미움받는 것이 가슴 아프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지나치게 아득한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나는 기본적으로 부모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며 학교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친구들을 사귀었다. 어린아이들을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중요한 건,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이었다. 끔찍하게 죽어가는 과거의 유찬희들을 무시하는 건 익숙했지만, 잠들기 전의 그 공포는 도무지 이겨낼 수 없었다.
나는 밤마다 선잠을 자고 깨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깰 때마다 다시 여덟 살의 그 때로 돌아갔는지, 내 눈 앞에 유현재가 서 있는지를 병적으로 확인했다. 도저히 몸이 견딜 수 없어 가끔 깊이 잠이 들더라도, 항상 끝은 잔인한 악몽으로 끝났다.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스물일곱의 차수현이 나오는 꿈을 꾸고서 나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다. 물이라도 한 잔 마시기 위해서였다.
문을 열고 나는 발걸음을 주춤했다. 유현재가 동시에 방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유현재를 무시하고 부엌으로 향했다. 유현재가 잠깐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내 뒤를 따라왔다.
나는 컵을 꺼내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마신 뒤, 유현재를 스쳐 지나갔다.
“찬희야.”
생각지도 못한 부름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걸음이 멈췄다. 다행히 뒤돌아보진 않은 상태였다. 나는 못 들은 척 다시 방으로 향했다.
“생일 축하해.”
유현재가 달려와 내 손에 편지를 쥐여 주었다. 리본으로 어설프게 묶은 꽃도 함께였다. 나는 언젠가의 여덟 살 때, 유현재가 내게 만들어 주었던 작은 꽃다발이 떠올랐다. 꽃과 편지를 꽉 쥔 채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편지를 전해 준 유현재가, 제 방으로 도도도 달아났다. 나는 결국 그걸 들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시계를 보니 딱 열두 시가 넘어 있었다.
편지는 읽지 않고 침대에 다시 누웠다. 어쩐지 조금 눈물이 났다. 아주 오래 전, 유현재와 함께 고등학교를 가고, 여행을 가기로 약속했던 그때가 떠올라서. 쓸모없는 회상을 떨쳐내고 나는 눈을 감았다.
날이 밝았다. 핸드폰에는 생일을 축하한다는 문자가 쏟아졌다. 대충 확인하고 식사를 하기 위해 문 밖으로 나갔다. 미역국 냄새가 났다. 생일 축하한다는 엄마의 말에 희미하게 웃으며, 나는 고맙다고 대꾸했다. 유현재가 내게 할 말이 있는 듯 얼쩡거렸다. 나는 무심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유현재가 조그만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편지… 읽어 봤어?”
나는 아니, 하고 대답했다. 유현재는 크게 실망한 듯했다.
“그렇구나….”
식사를 하고 내가 먼저 일어섰다. 유현재와 나는 따로 등교했다. 어차피 반도 달랐고, 학교에선 아는 척을 하지 말자고 먼저 얘기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원작 유찬희와 똑같은 행동이었다. 유현재는 내 말에 충실히 따라 주었다. 나는 아이들과 선생님에게 하루 종일 생일 축하를 받고, 자신의 집에 초대하려는 꼬맹이들을 뒤로한 채 겨우 교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저만치 앞에서 유현재가 걸어가고 있었다. 유현재는 내가 작년에 쓰던 가방을 메고 있었다. 평소라면 일부러 유현재가 가는 길을 피했었겠지만, 나는 오늘만은 아주 멀찍이서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유현재는 천천히 걸었다. ‘내’가 개입하지 않은 원작의 유현재는, 초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이렇게 살아왔을 것이었다. 나란히 걸어 주는 사람 없이 늘 바닥만 보고 천천히 걷는 삶. 충분히 사랑받고 자라야 했을 나이임에도 그 누구의 환영도 받지 못하는 우울한 나날. 유년 시절로만 따지면 유찬희 못지않게 서러운 인생이었다. 다른 점이라 하면, 유현재는 버텨낼 수 있는 힘이 있고, 나에겐 없는 거겠지.
유현재가 돌연 발걸음을 멈췄다. 근처엔 관리가 전혀 되고 있지 않은 공원이 보였다. 노끈으로 대충 막아놓은 입구 아래로 기어들어간 유현재가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멀찍이서 유현재를 쳐다보았다.
“찬희야!”
나는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같은 반 꼬맹이들이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괜히 유현재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이 영악한 꼬마들에게 들키기 싫었기에, 나는 황급히 그들 쪽으로 뛰어갔다. 일행에 합류하고 슬쩍 뒤를 돌아보니, 유현재는 어느새 멀거니 일어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이후 나는 유현재의 삶이 변하지 않는 선에서 항상 그의 행동을 관찰했다. 볼 때마다 썩 좋지 않은, 복합적인 감정이 치밀어 올랐지만 시선은 자꾸만 그 조그만 뒤통수에 가 꽂혔다. 유현재는 부모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매일 똑같은 생활을 했다.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학교에 간 뒤, 30분 정도 되는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온다. 그다음 방으로 들어가 공부를 하다가 밥을 먹고, 방에서 여가 시간을 보내다 잠이 든다.
이 재미없는 패턴을 반복하면서도 유현재는 지치지 않고 삶을 살아갔다. 나는 침대에 쭈그려 앉아 책상 아래에 있는 서랍장을 쳐다보았다. 유현재가 주었던 편지와 꽃은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다. 큰맘 먹고 쓰레기통에 버린 적도 있었지만, 그날 밤 결국 다시 찾아왔다. 내용을 읽을까 말까 수없이 고민했지만 혹시 모를 두려움에 종이를 펴지도 못했다. 어차피 생일 축하한다는 몇 글자만 쓰여 있을 게 뻔했는데도 도저히 볼 수 없었다.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무릎에 파묻었다.
이제 1년이다. 고작 1년이 지난 거다.
하지만 십 년에 가까운 시간이 남아 있었음에도 나는 도저히 나의 삶이 궁금하지가 않았다.
*
랭커의 삶을 살지 않는 이상 힘의 등급은 삶과 전혀 무관했다. 하지만 미성숙한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이 힘, 즉 잠재력에 대한 경외는 실로 거대했다. 국민들은 14세부터 정식으로 랭커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 나라의 조기 교육열은 알다시피 상상을 능가했다. 몰래 과외를 받던 아이들이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남을 다치게 하는 일은 공공연하게 생기곤 했다. 국가는 이를 막기 위해 법적 나이 이하의 능력 수련을 엄벌한다 말했지만 실질적인 처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높은 등급의 잠재력을 가진 아이가 소년원이나 감옥에서 썩어버리는 건 국가적, 나아가 세계적 손실이기 때문이었다. 그걸 알아챌 나이가 되면, 그때부터 정말로 모든 것은 대부분 ‘힘’으로 가치가 매겨졌다.
1급을 받은 나는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학교 내에서 유명 인사로 취급받았다. 정말이지 전혀 달갑지 않았지만, (꼬맹이들 사이에서 짱이라고 소문나 봤자 그저 유치한 싸움에나 휘말릴 뿐이었다) 나는 착실하게 그 자리를 지키며 적당히 오만한 생활을 지속했다.
반면 무능력자였던 유현재는 말하지 않아도 알만했다. 게다가 누구의 소행인지 유현재가 우리 집에 얹혀산다는 소문까지 퍼져서 그에 대한 무시는 더더욱 심해졌다. 유현재는 원래도 그렇게 냉정한 성격이 되지 못했다. 그는 슬픈 영화를 보면 울어야 하는 사람이었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타입이었다. 소설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진 않았지만 유현재의 어린 시절이 고독과 외로움뿐이었다고 한 걸 보면 앞으로도 그에겐 변변찮은 친구 하나 없을 것 같았다. 오죽하면 자길 죽이려 하는 유찬희에게 우정 비스무리한 걸 느꼈겠냐고. 인간관계가 협소하기 짝이 없으니까 그런 것도 친구라고 여긴 거지.
소설을 읽을 땐 흔하고 유치한 설정이라 생각했지만 직접 겪는 걸 지켜보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어린아이를 무시하고, 거절하고, 미래를 알면서도 그의 삶을 괴롭혀야 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나는 본인의 몸에 안 맞는 작은 옷을 입고 혼자 급식실 구석에 앉아 밥을 먹는, 아직도 의자에 앉으면 바닥에 다리가 닿지 않을 정도로 어린 그 아이가 눈에 걸렸다. 그리고 그 아이를 위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나를 더더욱 무력한 우울에 빠지게 했다.
그래서인지 선잠을 자면 꿈에선 항상 열일곱의 유현재가 나왔다. 나는 그 꿈을 꿀 때마다 양심 없게도 그에게 달려가 깊이 안기곤 했다. 그럴 때면 다른 악몽에선 느낄 수 없었던 아늑한 감정이 온몸을 감싸왔다. 유현재는 나를 안고 속삭이듯 말했다.
-괜찮아. 찬희야.
괜찮아. 나는 그 꿈을 꾸는 날엔, 그 어떤 악몽에서 깰 때보다도 많이 울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차수현에게서 빨리 도망칠 수 있었다면.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현재가 올 때까지, 단 몇 초라도 살아 있을 수 있었다면.
모두 부질없는 후회였다.
나는 눈을 부비고 방문을 열었다. 발치에 무언가 채였다. 들꽃을 엮은 소박한 꽃다발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유현재의 방 쪽을 쳐다보았다. 이미 나간 모양인지 문이 열려 있었다. 나는 꽃을 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 바로 버려야 맞았지만 역시나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죽어가고도 배운 것이 없는지, 나는 또 유현재와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