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똑같은 시작을 세 번째 겪고서야, 나는 이 삶이 기회가 아닌 저주임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내겐 일말의 희망이란 게 남아 있었다. 세상에 죽으려고 사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나는 지난 삶에서 나의 죽음 포인트를 피해 보기로 했다. 일단 첫 번째는 의문의 <뿌리치시겠습니까?>이고 두 번째는 갑자기 내게 유현재? 라는 물음과 함께 칼빵을 놓은 그 미친놈이었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차수현에게 목이 졸리던 때가 떠올랐고, 힘을 풀면 칼을 맞았던 배에 환상통이 느껴졌다. 나는 참았다. 처음부터 유현재의 손을 잡지 않으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유현재를 철저히 무시했다. 내가 무시한다고 더 이상 내 근처에 오지 않고 멀찍이서만 나를 바라보는 바보 같은 유현재가 마음 아팠지만, 그럭저럭 시간은 갔다.
나는 유현재와 엮이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철저히 준비했다. 나의 존재가 그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적대감을 드러내지도, 호감을 드러내지도 않은 채 밍숭맹숭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건 어느 정도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이전 생에서 죽었던 그 기점을 나는 무사히 넘겼으니까. 다행이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던 하루를 겨우 보내고 나는 침대에 누웠다. 옆방에서 무능력자 판정을 받은 유현재가 살짝 흐느끼는 소리가 났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렇다고, 가슴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아니, 감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눈앞엔 다시 그 끔찍한 글씨가 깜빡이고 있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Y/N>
뭘? 도대체? 나는 그 모호한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친절하지 못한 그 물음에 나는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도살을 앞둔 짐승처럼 멍청하게 눈물이 났다. 이 질문의 대답에 따라 나는 죽을 수 있다. 두 번, 아니 세 번이나 죽은 몸이었지만 죽음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글씨가 점점 빠르게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살고 싶어.”
나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너무나도 평범하고 절박한 소망이었다. 내 말을 듣기라도 한 듯 글자가 돌연 멈췄다.
“제발 살게 해 줘.”
글자가 사라졌다. 나는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누군가가 방으로 들어와 나를 죽여버리면 어떡하지? 살고 싶다고 했으니까 살게 해 줄까? 같은 극단적인 절망과 희망이 머릿속을 오갔다. 긴 시간이 흐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몸에 점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적어도 오늘은 넘어간 모양이었다. 오늘은. 나는 천천히 잠들었다. 매일 꾸던 악몽도 꾸지 않고, 아주 깊이. 다시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나는 다시 그때로 돌아가 눈을 떴다.
네 번째 시작이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뭐가 잘못된 건지 고민해 볼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나는 이제 징그러울 정도로 끔찍한, 어린 유현재를 두고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유현재의 목소리가 등 뒤로 울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살게 해 달라 하니 죽였다.
이 세상은 나를 살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그 뜻대로 해 주기로 했다. 나는 정신없이 집 밖으로 나가 골목을 뛰었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였다. 곧 발바닥에서 조금씩 피가 나기 시작했다. 아픔을 느낄 수 없었다. 가까이 있는 낡은 건물로 뛰어 올라갔다. 옥상 문을 열고 바로 난간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때였다. 누군가 내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안 돼!”
절박하게 소리 지르는 건 유현재였다. 어느샌가 내 뒤를 따라온 모양이었다. 유현재의 발도, 나와 마찬가지로 피칠갑이 되어 있었다. 나는 몸을 뒤틀었다.
“놔!”
“왜 그래, 왜 그래….”
유현재가 울기 시작했다. 찬희야, 제발, 안 돼…. 나는 유현재의 양손을 천천히 풀었다. 어린아이의 서러운 울음은 계속되었다. 유현재는 미약한 힘으로 다시 내 옷자락을 쥔 채 엉엉 울었다.
“미안해, 현재야.”
나는 유현재의 눈물을 천천히 닦아 주었다. 유현재는 여전히 설움을 참을 수 없는지, 끅끅대며 내 손길을 그대로 받아냈다. 차분해진 내 목소리 때문인지 울음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찬희….”
내 이름을 부르려던 유현재의 동공이 일순 커졌다. 유현재가 재빠르게 손을 뻗었지만 우리는 점점 멀어졌다. 나는 허공을 가르며 천천히 떨어졌다. 아주 잔인하게도, 의식을 잃을 때까지 나는 유현재와 계속해서 눈을 맞추고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죽음도, 세계가 원하는 건 아닌 듯했다.
*
지겨운 삶을 알리는 유현재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두드렸을 때, 그리고 다시 천천히 눈을 떴을 때, 그를 마주 보았을 때, 걱정스러운 눈을 마주쳤을 때.
나는 문득 유현재가 원망스러워졌다. 이곳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이니 내 불행의 원천은 모두 유현재에게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눈을 뜨자마자 나는 유현재의 뺨을 세게 쳤다. 분풀이였다. 그대로 맞은 유현재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나는 유현재의 위로 올라타 그를 무차별적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유현재는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미안해, 미안해 찬희야.”
“닥쳐!”
“잘못했어, 찬희야….”
이유도 모른 채 그냥 내게 사과를 해대는 유현재가, 나는 더더욱 미웠다. 그래서 엄마가 달려와 우리를 떼어놓을 때까지 유현재를 죽도록 때렸다. 엄마로 인해 강제로 격리당한 나는 하루 종일 펑펑 울었다. 내 울음소리에 가족들 모두가 달려와 나를 달랬지만 소용없었다.
나를 괴롭게 하는 건 한 가지가 아니었다. 눈을 감을 땐 내 목을 조르던 차수현이 생각났고, 귀를 막을 땐 몸을 관통하던 그 고통이 느껴졌으며, 입을 다물 땐 바닥에 떨어져 고통스러워하던 그 짧은 시간이 떠올랐다.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잠이 들면 또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있을까 봐. 누군가가 내게 와서 칼을 찔러 넣을까 봐.
나는 멀쩡히 살아가고 싶었으며, 동시에 편안히 안식하고 싶었다. 나는 급기야 허공을 향해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요….”
나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나타나지 않는 그 글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저 좀 살려 주세요….”
내 목소리를 들은 엄마와 아빠가 방으로 들어왔다. 엄마가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허공에 대고 말을 걸었다.
“대답해 주세요…”
“찬희야, 제발! 왜 이래!”
엄마의 울음 섞인 비명이 끊임없이 들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부모님이 보기에 그건 제법 괴이한 장면이었을 터였다. 열린 문틈 사이로,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유현재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여러 번의 삶을 살면서 처음으로 본 표정이었다. 나는 눈을 번득이며 유현재에게 달려갔다. 무언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우물쭈물거리던 유현재의 목덜미를 세게 잡아챘다.
내 판단으로, 이 세계는 유현재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유현재가 죽으면 모든 것이 사라질 확률이 높았다. 아무 능력도, 힘도 없는 지금의 유현재라면 나라도 바로 죽일 수 있을 것이었다. 반쯤 정신을 놓고 내린 판단이었기 때문에 내게 도덕의식이나 양심 같은 것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나는 있는 힘껏 유현재의 목을 졸랐다. 유현재가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아버지가 나를 강하게 잡아챘다. 어쩔 수 없이 떨어진 나는 계속해서 엄마에게 말했다.
“죽여 주세요!”
“찬희야…!”
“쟬 죽여 주세요! 제발요! 제발….”
내가 다시 양손을 모으고 빌었다. 부모님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감추려고 했지만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잡고 있는 아버지의 다리를 붙잡고 계속 말했다. 현재만 죽여 주시면 뭐든지 다 할게요. 제발요. 제발…. 나는 결국 억지로 잡혀 방 안에 가두어졌다. 엄마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방문을 쾅쾅 두드리며 소리쳤다. 내용은, 대부분 유현재를 죽여야만 한다는 미친 소리였다. 나는 방언처럼 계속 되뇌었다. 유현재를 죽여야 해요. 유현재가 사라져야 내가 살아요. 유현재가…….
나는 밤이 새도록 소리 지르며 부모님과 유현재를 찾았다. 잠을 잘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잠이 들려 할 때마다 내 뺨을 내리쳤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몸은 쉽게 지쳐갔다. 동이 틀 때쯤, 나는 결국 벽에 기대어 쭈그려 앉았다. 대신 몸을 옹송그리고 유현재를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을지 골몰하기 시작했다. 아마 이것은 집착에 가까웠다. 바로 이 벽만 넘으면 유현재가 있다. 나는 일단 기회를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엄마가 방으로 들어와 내 앞에 앉았다.
“찬희야,”
“엄마….”
나는 느릿하게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엄마 역시 한숨도 못 잔 모양이었다. 엄마는 천천히 나를 끌어안고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칠게 나오던 숨이 점점 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공포가 주위를 도사리고 있었지만, 나는 최대한 티 내지 않고 엄마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었다. 내가 조용해지자, 엄마는 내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찬희야.”
“…….”
“엄마 아빠가 다 해 줄 테니까.”
엄마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핏줄이 선 눈을 부릅뜨며 엄마에게 재차 물었다. 진짜에요? 제 말 들어주실 거예요? 엄마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계속해서 나를 토닥여 주었다. 억눌려 있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자 지금의 나 못지않게, 부모님이 유현재를 미워한다는 걸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찬희는 방에서 나오지 말고 가만히 있어, 알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몰골이 아닐 제 자식을 소중히 끌어안으며 엄마는 계속해서 따뜻한 말을 해댔다. 누군가를 죽일 것이라는 말을, 자식에게 자장가처럼 해 준다는 건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 나는 어떻든 상관없이 그저 이 모든 게 편안하게 끝나길 바랐다. 그것뿐이었다.
그때였다.
엄마의 등 뒤로, 빨간 글씨가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질문이 아니었다. 그건 경고였다.
분열하는 것처럼 글씨는 빽빽하게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주변이 삽시간에 경고 표시로 가득 찼다. 뭔가의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동시에 이명이 들려왔다. 기분 나쁜 소리가 끊이지 않고 머리를 관통했다. 나는 귀를 막았다. 그리고 소리 질렀다. 하지만 이명으로 인해 그 무엇도 들을 수 없었다. 속이 울렁거리더니, 곧 구토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꽉 감았다. 어느 순간부터 정신을 놓은 것 같았다. 수 초간 지속되던 이명이, 천천히 멎었다.
“짜니야.”
아, 이 목소리.
나는 마음속의 무언가가 탁 풀리는 느낌을 받으며,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호기심 어린 유현재의 얼굴이, 다시 내 앞에 있었다.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제야 어렴풋이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모든 건 짜여진 대로 움직이며, 그것만이 세계가 허용한 나의 결말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