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찬희야!”
아직 추운데 벌써 외투를 벗고 교복만 입은 유현재가 재빠르게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주인공 아니랄까 봐 신체 능력이 거의 탈인간 급이다. 나는 유현재와 충돌을 막기 위해 슬쩍 뒷걸음질쳤다.
“부딪힐 뻔했거든.”
내 볼멘소리에도 하하 웃으며 유현재가 들고 있던 종이를 내게 건넸다. 조심성 없이 쥐고 있었던 터라 종이는 잔뜩 구겨진 채였다. 종이 한가운데엔 정확히, 1급, 이라는 글씨가 인쇄되어 있었다.
“역시 유현재.”
“나 잘했지?”
“잘한 수준이 아니잖아.”
유현재가 간식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체술을 마스터하더니 덩치만 커져선 징그러운 짓을 잘도 해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유현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너무 친해져서 생긴 부작용이었다.
열일곱. 곧 이 소설의 터닝포인트가 시작된다. 나는 내 앞에서 순한 얼굴을 하고 있는 유현재를 쳐다보았다. 원작의 시니컬하고 조금은 잔악한 유현재가 아닌, 자기가 소형견인 줄 아는 대형견 같은 유현재가 이제는 더 익숙했다.
“너 잊어버린 거 아니지?”
“뭘?”
“2차 때 1급 받으면 소원 들어준다고 한 거.”
“아.”
내가 영 건조하게 대답하자 유현재는 김 샌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소원이라고 해봤자 뭐 매점 쏘기 그런 거 아니겠냐고.
“뭐 필요한 거 있어?”
“없어.”
“그럼 무슨 소원인데?”
“음.”
유현재가 불현듯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장난스러운 표정을 보아하니 또 뭔가를 꾸미는 모양이었다.
“나랑 여행 가자.”
많이 친해져서 생긴 부작용 두 번째. 너무 부담스러워졌다. 나는 뚫릴 듯 직설적인 눈빛을 애써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려운 것도 아니고.”
왁! 유현재가 신난다는 듯이 나를 끌어안았다. 그래. 사이가 안 좋은 것보단 조금 지나치게 좋은 게 나을지도 모른다. 이 정도면 빙의자로서 제법 성공한 삶 아닐까? 대충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유현재에게 반쯤 안기듯이 질질 끌려갔다.
*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마나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마나는 대부분 정제되지 않은 채 그저 있을 뿐, 있다고 해서 마구 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무협물의 내공 같은 존재라 해야 하나.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랭커로 훈련받고 자라기 위해선 별도의 교육 과정을 따라 수련을 거쳐야 했다.
나는 1차 선별전에서 가볍게 1급을 차지했다. 그 유도현의 동생이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유현재는 예상대로 무능력이 나왔고 며칠간 자기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았다. 소심한 새끼. 어차피 10년 뒤에 넘사벽 먼치킨이 되는데 한 치 앞도 모르긴. 나는 유현재를 어르고 달래 방 밖으로 나오게 했다.
수련 과정은 선택이었다. 물론 나는… 하지 않았다. 마나는 사람마다 크기가 달랐고, 보통 마나가 적은 사람들은 따로 단련하지 않고 일반적인 삶을 살았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더럽게 궁금하긴 했다. 판타지 세계에서, 판타지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제대로 사용해 볼 수 없단 건 얼마나 슬픈 일인가. 하지만 나는 단 1%라도 소설대로 진행될 확률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에 반해 유현재는 원작의 모습 그대로 착실하게 체술을 익혔다. 악착같이 배운 체술은 우습게도 주로 나의 ‘경호’에 써먹었다. 형인 유도현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제법 주목받고 있었던 우리는,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별명이 하나 붙여졌다.
‘반 불구 천재와 무능력 사냥개.’
어감이 개 같지만 뭐라 발끈할 정도로 나는 열성적이진 못했다. 유현재도 따로 별말이 없는 걸 보면 나랑 같은 마음일 것이었다.
나는 내 옆에 나란히 걷고 있는 유현재를 슬쩍 쳐다보았다. 체술로만 1급을 차지한단 건 어마무시한 일이었다. 같이 살아오며 (라기 보단 소설에서 이미 알고 있던) 녀석의 괴물 같은 피지컬을 알고 있던 나야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아마 이 세상은 이미 그의 비상함을 기이하게 여기기 시작했을 것이었다.
“바다 가고 싶어.”
“아직 추워 뒤지겠는데 바다라고?”
내 차가운 대답에 유현재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래봤자 넌 곧 미디어의 주목을 받게 되고 놀러 갈 시간도 없어질 거거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다음 스토리는, 열등감에 못 이겨 미쳐 가는 유찬희에게 크러시의 모체, 그러니까 한성 길드의 길드장이 제안을 걸어오는 거였던가.
세계 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탐구하는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현재의 어깨는 아주 바닥을 뚫을 기세였다. 기죽었다고 온 동네방네 광고하는 것처럼 아주 내 심기를 계속 거슬렀다.
“아, 알겠어. 가면 되잖아.”
“아냐. 찬희 네가 안 가고 싶음 안 가도 돼.”
아. 약해지는 표정.
“찬희 너 추운 거 싫어하잖아. 그럼 나도 안 갈래.”
나는 괜스레 유현재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존나 실망한 표정 하고 그딴 말 하면 퍽이나 믿겠다.”
“티 났어?”
주인공 앞에서 너무 나댔나. 아무리 내 입맛대로 길렀다지만 이젠 나보다 힘도 센데. 어디까지 얠 막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머리 부서지기 전에 오늘치 세계 평화 생각은 그만두자. 몰두하던 생각을 멈추자 찌푸리고 있던 미간도 천천히 펴졌다.
“표정 풀렸다.”
유현재가 내 미간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어?”
“찬희 생각 끝나는 시간.”
뭐라는 거야. 하지만 유현재는 다행이라는 듯 손을 내려 다시 내 팔을 잡았다. 유현재는 책과 달라졌지만, 10년을 함께해온 나는 지금의 유현재가 너무나도 익숙했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이 뻔하디뻔한 빙의물의 끝이 해피엔딩이 될 확률이 높아지고 있었다.
유현재는 늘 다니던 도장으로 향했고, 나는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라는 형식적인 말을 하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1층 거실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아직 가정부 아주머니가 퇴근하지 않으신 건가? 하지만 곧 모습을 드러낸 건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아버지.”
나는 뭐라 인사를 드리기도 전에 강하게 뺨을 강타당했다. 덕분에 현관문 복도에서 뒹구는 추한 꼴을 보여야 했다. 나는 실시간으로 부어오르는 뺨을 느끼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못난 놈.”
아마 오늘 나온 2차 선별식 결과 때문일 것이다. 전투부 보안국장이라는 높은 직위의 인간이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평일에 집에 오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아마 한심한 아들 참교육이나 하려고 행차하신 거겠지.
“5급? 이게 지금 말이 되는 숫자라고 생각하는 거냐?”
“소식 한번 되게 빠르시네요….”
“시끄러워!”
다시 같은 곳을 강타당하자, 이번엔 귀 안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달팽이관, 고막 뭐 이런 거라도 건드려진 건가. 게다가 똑같은 데를 때리다니. 아버지는 여전히 유치한 인간이었다.
“네 형만큼 하란 것도 아냐. 유현재 그놈보단 더…!”
“못해요.”
나는 부어오른 볼 안쪽 때문에 말이 짓눌리는 걸 느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버지는 제대로 열이 받은 건지 나를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3개월 만인가. 나는 무자비하게 얻어맞으면서, 복도 끝에 가만히 서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긴 했지만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쓸모없는 놈이라도, 쓸모없는 놈이라는 말을 계속 들으면 조금 울컥하기 마련이었다. 나는 어느샌가 터진 코피를 닦으며 아버지를 향해 진심으로 충고했다.
“현재를 아들로 삼는 건 어때요? 늦지 않았거든요.”
아버지가 거칠게 내쉬던 숨을 골랐다.
“랭킹 1위 원하시잖아요. 그건 현재가 할 거니까.”
“그놈의 유현재!”
아버지는 소리를 버럭 지르고는 결국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3개월 전보단 좀 짧게 끝난 편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2층으로 향했다. 다리는 멀쩡했지만 벽에 부딪힌 탓인지 어깨가 얼얼했다. 며칠 학교에 못 가겠단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침울해졌다. 집구석에 박혀 있는 건 영 취향이 아니라서. 침대에 쓰러지듯 눕자마자 나는 눈을 감았다.
선잠에서 깬 건 문이 열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익숙한 바지를 입은 다리가 시야에 먼저 들어왔다. 유현재가 돌아온 것이었다. 유현재는 가방을 내팽개치고 비틀거리며 내게 달려왔다. 나는 조금 오버를 보태 온몸에 힘이 빠진 상태였다. 세계 평화를 위해 내가 이렇게 이바지한다고.
유현재는 아무 말 없이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나는 유현재가 엄청나게 떨고 있음을 알아챘다. 부은 볼 위로 축축한 액체가 떨어졌다. 우는 거야? 괜히 뭔가 트라우마를 만들어 준 걸까? 그러고 보니 유현재가 학대당하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만 했지, 간접적으로 그놈한테 들어갈 정신적 데미지는 크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세상이 잿빛으로 변하기 시작하더니, 누군가 입력한 것처럼 선명한 붉은 글자가 눈앞에 빠르게 떠올랐다.
<세계가 뒤틀리고 있습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Y/N>
몸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에 잠겨 움직일 수도 없었다. 책 속 세상에 빙의된 그 순간부터, 내게 세상이란 존재는 어쩐지 픽션에 가까웠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유현재는 여전히 내 앞에서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뭐가 뒤틀리고 있단 거지? 뭘 계속 하라는 거야? 나는 알 수 없어 그저 눈만 굴렸다.
<계속하시겠습니까?>
글자가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뭔가를 멈출 생각은 없었으므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글자는 사라지고 세상이 재빠르게 제 색을 찾았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유현재를 바라보았다.
유현재는 여전히 눈물이 가득 고인 얼굴로, 하지만 어딘가 잔뜩 울분에 찬 표정을 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함께 지낸 9년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