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눈을 뜨자마자 처음 본 것은, 나를 향해 밝게 웃고 있는 꼬마 아이의 모습이었다. 어린아이임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투명하고 하얀 피부, 벌써부터 완성된 듯한 완벽한 이목구비. 이질감이 드는 게 있다면 그 아이의 옷이 지나치게 더러웠다는 점이었다.
내가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꼬마 아이는 이내 걱정스러운 듯 작은 손을 들어 내 이마에 얹었다.
“짜니야, 왜 그래?”
나는 그제야 천천히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열일곱 남고생의 손이라기엔 지나치게… 아니, 분명히 다른 어린아이의 손이었다.
“나, 나 왜 이래?”
나는 유언처럼 이 말을 남긴 채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땐 푹신한 침대 위였다. 그래, 좀 생생한 꿈을 꾼 걸 거다. 그러나 눈을 뜬 순간 잠깐의 달콤한 회피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여전히 내 몸은 일고여덟 살짜리 꼬맹이 그대로였으니까. 간이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여자가 내 움직임에 눈을 떴다.
“찬희야, 일어났니?”
나는 말없이 몸을 떨었다. ‘찬희’란 이름은 내 이름이 맞았다. 그렇다고 그게 ‘나’인 것은 아니었다. 태연하게 변화를 받아들이기에, 이 상황은 너무나도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황당해할 틈도 없이, 갑자기 머릿속이 폭발할 듯 울리기 시작했다.
“아악!”
“찬희야!”
이번엔 문을 열고 누군가 내게 달려왔다. 나는 겨우 정신을 붙잡은 채로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분명 아까 정신을 잃기 전 나를 바라보던 꼬마.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을 지으며, 꼬마는 내 손을 잡아왔다. 하지만 그 손을 잡자마자 나는 이불에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너무 울린 탓이었다.
“나가지 못해?”
아까까지만 해도 온화한 표정이던 여자가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잔뜩 주눅이 든 주제에,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못한 채 꼬마가 방을 나갔다. 나는 이제 침대를 뒹굴었다. 여자는 죽을 것처럼 울기 시작했다.
“찬희야, 정신 차려, 찬희야…!”
통증 사이로 정제되지 못한 기억 파편들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찬희. 여덟 살. 부유한 부부의 하나뿐인 아들. 원래의 몸이 가지고 있던 기억이었다. 8년 치의 기억이 모두 정리되자 두통은 점점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나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여자를 바라보았다.
“엄… 마?”
여자가 더 크게 울며 나를 끌어안았다. 내 엄마가 아니라 낯설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이 모든 기억이 ‘나의 것’이 되자 나는 더더욱 침착해졌다. 마치 처음부터, 내가 이 아이였던 것처럼. 그제야 아까 봤던 그 꼬마의 정보가 천천히 기억났다.
“현재.”
유현재.
그리고 유찬희.
그건 내가 ‘방금’ 전까지 읽던 소설 속 인물들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방을 둘러보자, 한쪽 벽엔 가족사진 같은 것들이 기이하리만치 잔뜩 걸려 있었다. 이게 평범한 여덟 살짜리의 방인가? 하지만, 그래, 방금 전까지 읽던 그 글에는 분명히 쓰여 있었다.
「유찬희의 방에는 1차 선별식 이후부터 모아온 각종 무기류들이 깔끔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2세대 최고의 랭커 가문답게 제법 호화로운 규모였다. 하지만 그 방에 들어온 사람들은 그 무기들이 유찬희에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 없었다.」
제법 평화로워 보이는 저 가족사진들은 곧 살벌한 무기들로 교체될 것이다. 고작 여덟 살짜리의 방 주제에 말이다. 얼핏 보면 원래 살던 세계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이곳은 철저히 ‘랭킹’ 위주로 돌아가는 실력주의 사회였다.
대한민국의 경우, 모든 인간들은 여덟 살이 되면 <랭킹 감별>을 받는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의 잠재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다. 1차적으로 선별된 랭킹으로 시작해, 스무 살 성인이 될 때까지 총 3차례의 랭킹 선별식을 치른다. 무척이나 무식하고도 정확한 방법으로.
그 소설은 상위 랭커만큼 드문 ‘무능력자’인 유현재가 열일곱의 어느 날, 잠재된 능력을 각성하며 펼쳐지는 내용이었다. 즉 진짜 내용은 열일곱 살 때부터 시작한다는 건데 이상하게도 지금 ‘유현재’와 ‘유찬희’는 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도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랭킹 감별>을 받기 전 날.
“현재 어디 있어요?”
“찬희….”
“현재 불러와 주세요!”
내가 무턱대고 소리를 지르자 엄마는 한달음으로 문 밖으로 달려나가 현재를 끌고 들어왔다. 잔뜩 겁을 먹은 그 얼굴은 아직 어렸지만 소설에서 묘사한 그대로였다. 차분하게 내린 검은 머리카락, 투명한 피부와 예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정한 눈매. 그러나 아직까지는 ‘유찬희가 입다 버린’ 옷을 주워 입는 기생충 같은 존재인.
그는 정확히 10년 후, 출몰하는 2세대 반정부 길드장의 목을 따며 화려하게 랭커전에 데뷔한다. 그리고 그를 각성하게 하는 존재가 바로 지금의 나, 유찬희.
좋은 역할 아닌가 싶지만, 사실 이 소설의 초반부는 모두 유현재와 유찬희의 대립 구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현재는 유찬희의 큰 형이자 2세대 랭킹 1위의 실력자인 유도현이 어느 날 갑자기 데리고 온 아이였다. 다섯 살이 되도록 이름도 성도 없었던 그에게 유찬희는 직접 ‘유현재’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유현재는 일곱 살까지 유찬희와 함께 행복하게 자란다. 그건 유현재의 근간을 이루는 몇 없는 행복한 순간이었다. 여덟 살의 봄, ‘그’ 유도현이 유현재를 위해 목숨을 내놓기 전까진.
유현재로 인해 유도현이 어이없이 죽고, 졸지에 최강급의 랭커를 잃은 대한민국은 발칵 뒤집혔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아이이길래? 얼마나 강한 잠재 능력을 가졌기에? 하지만 한 달 후 유현재는 ‘무능력자’로 판명받는다. 그건 유도현을 잃은 유현재의 두 번째 불행의 시작이었다.
유찬희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내내 유현재를 동정했다. 받는 입장에서는 지독할 정도로 수치스러운 동정이었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제 형을 죽인 무능력자조차 감싸는 어른스러운 아이’ 유찬희만 보일 뿐이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절망하던 유현재는 비관을 그만두고 끊임없이 체술을 단련했다. 그 덕에 추후 유현재는 피지컬 하나로 유찬희를 허점 없이 손쉽게 넘어버린다.
2차 랭킹 선별전에서 유현재에게 추월당한 유찬희는 소위 말해 흑화하기 시작했다. 그 행동 중 하나가 바로 반란군을 자처하는 비공개 길드 <크러시>와의 내통. 크러시에서 연구하던 불법 행위인 강령술의 제물, 네크로맨서가 된 유찬희는 죽은 제 형인 유도현을 불러내 그의 힘을 흡수한다. 하지만 자신의 그릇보다 큰 힘을 감당할 수 없었던 유찬희는 폭주하고, 타이밍 좋게 학교 내에 열려버린 <게이트>에서 나온 유도현의 시신이 유찬희를 잡아가며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게 유찬희의 마지막이었다. 유현재는 애증으로 섞인 유찬희의 마지막을 보며 각성하여 정확히 1년 후 크러시의 수장을 죽인 후 랭킹 상위권에 데뷔하게 된다.
나는 다시 내 앞에 앉아 있는 어린 유현재를 내려다보았다.
“짜니야, 괜차나…?”
“…응.”
일련의 내용들을 짧은 시간 안에 정리하고도, 나는 차분했다. 이 비정상적인 차분함은, 아마 이곳에 덩그러니 떨어진 나를 위해 신이 만들어 준 능력일지도 몰랐다.
“네 잘못 아니야.”
“…….”
“엄마가 뭐라 하면 네 잘못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해.”
유도현이 죽고 엄마는 유현재를 죽일 듯이 미워했다. 유현재의 잘못이 아니었는데도. 일단 나는 그 상황부터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보통 그러지 않냐고. 세계의 전개와 결말을 알고 있는 빙의자가, 모든 것을 하나하나씩 바꿔 나가는 거. 주인공도 내 곁에 있겠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어린 시절이겠다, 뭐 하나 문제될 것이 없었다. 열폭도 하지 말고, 그냥 주인공이나 살뜰히 보살피며 나중에 얘가 먼치킨이 되면 보호나 받자. 뭐 이게 내 결론이었다.
“알았지?”
“응….”
“약속해.”
나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좀 유치했지만 뭐, 소년 만화 정도의 세계라면 이런 장면 정돈 연출해 줘야 하지 않겠어? 내 얼굴에 미소가 돌자 그제야 안심한 유현재가 제 새끼손가락을 맞걸었다.
“짜니야….”
“응.”
“아푸지 마…”
아직 혀가 짧아 웃긴 발음이었는데도 유현재는 제법 진지했다. 유도현이 눈앞에서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누군가의 부재가 두려울 시기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안 아파.”
“진짜?”
“응. 앞으로도 절대 안 아플 거야.”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
그렇게 내 빙의자로서의 인생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