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기, 콘스탄츠 왕립 아카데미에 부푼 꿈을 안고 입학한 열여덟 살 소녀가 있다.
장래 희망은 왕실 기사단에 입단하는 것, 당장의 목표는 학년 수석 입학. 좋아하는 것은 검술과 서정시와 로맨스 소설. 싫어하는 것은 날아다니는 벌레.
소녀의 이름은 알렉산드라 린다우로, 콘스탄츠 왕국 동남쪽의 항구도시인 무스에서 이제 막 수도인 빈터투어에 도착했다. 무스에서 왕립 아카데미에 합격한 사람은 40년 만에 나왔기에, 떠나기 전 그녀는 무려 무스의 영주에게서 치하를 받기도 했다.
가족들과 친지들, 그리고 주변의 이웃들과 심지어 잘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다들 말했다. 알렉산드라, 너만큼 재주 있는 아이는 드물 거야. 넌 분명 콘스탄츠 왕립 아카데미에 가서도 1등을 할걸?
알렉사―그녀와 친한 이들은 모두 그렇게 불렀다―는 똑똑했기에 본인의 한계를 잘 알았다. 콘스탄츠 아카데미에는 왕국 전 지역의 난다 긴다 하는 인재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거기에서 수석을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이 태어났으면 욕심도 가지고, 야망도 가지고 그래야 하는 법 아닌가.
반드시라고는 할 수 없어도, 알렉사는 어느 정도 자신 있었다. 이미 아카데미 입학 시험장에서 자신의 실력을 웬만한 아이들이 따라잡지 못한다는 정도는 파악한 상태였으니까. 심사관들 또한 알렉사를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녀에게 직접 이름을 물은 심사관이 둘이나 됐었다.
필기도, 실기도 모두 잘 보았다는 확신이 있었다. 어쩌면, 이 정도라면. 그런 기대를 가슴 한편에 품을 수밖에 없었다.
입학식은 다음 날이었기에 알렉사와 그녀의 부모님은 아카데미에서 조금 떨어진 여관에 짐을 풀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아버지는 잘하지 않는 술도 한잔하셨다. 겨우 세 모금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아버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알렉사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정말이지, 내 딸이지만 장해. 대견해. 어휴, 어떻게 이런 복덩이가 우리 딸로 태어났지!”
그러더니만 금세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것이었다. 근데 우리 딸은 아직 손도 발도 작은데… 하고 속삭이기까지 했다. 아버지 눈에 아직도 그녀는 어리기만 한 모양이었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수도 빈터투어에서 앞으로 5년을 홀로 지내야 하는 게 안쓰럽기 짝이 없는 듯했다.
아버지가 왜 그러는지 알면서도, 알렉사는 일부러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의 팔을 슬쩍 밀어냈다.
“아, 진짜. 왜 그래요? 내가 뭐,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이제 입학하면 또 언제 보겠느냐고….”
“이이도 참! 방학 때마다 올 텐데 뭐가 그렇게 걱정이에요!”
결국 어머니가 아버지의 등을 가볍게 찰싹찰싹 때리고야 말았다. 두 부부가 티격태격하는 걸 보던 알렉사는 곧 고개를 돌리고는 자기 생각에 빠져들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건 당연히 기대되는 일이었다.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친구, 새로운 배움까지. 무스에만 있었다면 결코 알 수 없는 세상과 조우하는 것이다. 이미 그에 대한 기대로 빈터투어에 오기 전부터 가슴이 잔뜩 부푼 채였다. 그런데 그만큼 기대되는 게 한 가지 더 있었다.
이건 부모님께도, 남동생에게도, 친구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아마 그 애도 오겠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괜히 웃음이 흘러나올 것 같아서 알렉사는 입술을 꽉 깨물어야만 했다.
열여덟 알렉사의 눈에 별똥별처럼 똑 떨어진 그 소년은, 마치 왕자님 같았다. 진짜 왕자라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알렉사가 그동안 읽었던 로맨스 소설 속 남자 주인공과 서정시로 쌓아 올린 감수성에 딱 부합하는 남자아이란 뜻이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존재하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검을 휘두르는 소년이. 그녀가 알고 있는 검을 쥔 대부분의 남자 녀석들은 냄새가 나거나, 더럽거나, 못생겼거나, 건들거렸다.
하지만 그 아이는 달랐다. 처음 시험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 소년은 시험장 내의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말이지 세상에 어떻게 저런 사람이, 라고 세 번이나 되뇌었을 정도니까.
햇살을 담아서 실을 짜면 그 아이의 머리카락이 될 것이다. 무더운 한여름, 짙은 초록 이파리로 우거진 숲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 아이의 눈동자 색일 것이다.
바깥 빛을 쬐지 않은 걸까 싶을 정도로 깨끗하고 하얀 피부에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 게다가 동갑내기일 텐데도 다른 아이들보다 월등히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두툼한 몸통, 곧은 자세까지.
다들 그 소년이 시험관 앞에 섰을 때 외양을 보고 수군거렸고, 곧 그가 시험관을 상대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 이후에 또다시 수군거렸다. 검이 그리는 미려한 선을 보며 알렉사는 등줄기에 전율이 흐르는 걸 느꼈다.
그 완벽한 소년은 검마저도 완벽하게 썼다.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시험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날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아카데미 시험에 떨어질 리가 없었다. 당연하겠지. 아니더라도 어쨌든 한 아카데미 안에서 지내게 될 거야. 목소리는 어떨까? 엄청 부드럽고, 낮고, 매력적일까? 알렉사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피었다.
그녀가 어떤 생각에 빠져있는지 모른 채 그녀의 어머니가 그 꼴을 보고 어머어머, 하며 제 남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알렉사가 어지간히 기대되나 봐요. 쟤 웃는 것 좀 봐요.”
“알렉사… 이 아빠한테서 떠나는 게 그렇게 좋아?”
또다시 울먹거리기 시작한 아버지의 말은 알렉사에게 닿지 않았다.
친해질 수 있을까? 친해지고 싶다. 가능하다면 꼭 검을 맞대어 보고 싶다. 어쩌면 아주 좋은 파트너가 되어서 나중에 기사단도 같이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알렉사의 꿈은 점점 더 커져갔다. 상상 속에서 어느새 그녀는 어른이 되어 그 소년과 함께 기사 정복을 입고 있었다.
그나저나 알렉사는 소년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모든 수험자들은 수험 번호로 불렸기 때문에 이름을 알 방법이 없었다.
내일이 되면, 아카데미에 가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 알렉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한 손으로 꾹 눌러보았다.
*
입학식 당일, 아카데미의 광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콘스탄츠 왕립 아카데미는 기숙사 건물과 각종 강의동, 실험동, 수련장 등을 모두 합하면 작은 마을 정도의 크기였다. 정문에서 직진한 곳, 그리고 건물들의 한중간이 되는 자리에 광장이 자리했다. 그 광장이 꽉 찰 정도라 소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입학생들의 부모와 친지들의 자리가 한쪽에, 그 반대편에는 재학생들이, 그 옆으로는 왕국 각 분야에서 활약 중인 졸업생들이 자리 잡았다. 연단 아래에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있었고, 귀빈들도 함께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볼 수 있는 가운데에, 입학생들이 오열을 맞추어 앉아있었다.
검술과 학술, 마법 분야에서 빼어난 실력을 지닌 학생들은 저마다 자부심을 가지고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설레했다. 사실 이 콘스탄츠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만으로도 스스로의 능력을 반은 증명했다고들 하니 말이다. 앞으로 5년 동안의 배움은 쉽진 않겠지만, 졸업 후에는 그들을 위한 자리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알렉사는 내빈석 쪽에서 상기된 얼굴로 손을 흔드는 부모님을 금방 찾아냈다. 그들을 향해 손을 한번 흔들어준 그녀는 곧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그리고 눈을 돌리지 못한 채 무릎 위에 놓인 손만 꼼지락댔다.
왜냐하면, 소년이 그녀의 옆에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입학생들의 입학식 자리 배치는 성적순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소년은 검술부 1등으로 입학했고, 알렉사는 2등이란 뜻과 같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알렉사는 제 볼과 귀와 목덜미가 뜨끈해지는 걸 느꼈다. 이건 어떤 신호 아닐까? 하늘이 나에게 보내는 신호? 이 아이와 친해져 보라는… 그런?
아직 식은 시작하기 전이었다. 알렉사는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고는 조금 삐걱대며 소년 쪽을 돌아보았다.
“저, 음. 저기?”
알렉사의 목소리가 너무 작았던 걸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알렉사는 목소리를 조금 더 크게 내보았다.
“저기, 안녕?”
그제야 소년이 알렉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년의 영롱한 녹색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본 순간, 알렉사는 가슴이 크게 쿵 하고 뛰는 걸 느꼈다. 그녀의 인사에 소년은 답하지 않고 그저 빤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누구 앞에서도 떨고 말을 더듬어본 적 없는 알렉사였지만, 어쩐지 혀가 굳어버린 것만 같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어, 나는 알렉산드라 린다우라고 해. 너랑 같은, 검술부인데…….”
“…그래?”
소년의 목소리가 알렉사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또래들과 달리 이미 변성기가 지나갔는지 부드럽고 낮은, 편안한 목소리였다. 게다가 차분하기까지. 정말 이상적인 ‘남자 주인공’ 같은 느낌이었다.
알렉사는 뭔가 대화가 더 이어지길 원했다. 하지만 소년은 ‘그래?’라고 되물은 이후로 말이 없었다. 과묵한 편인 걸까. 알렉사가 좀 더 말을 이었다.
“음, 만나서 반가워. 너는 이름이 뭐야?”
그녀의 물음에 소년은 답을 하는 대신 빤히 알렉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알렉사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려는 듯했다. 그가 자신을 너무 지그시 바라보자 알렉사는 그만 민망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눈을 피하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얼른 대답해 줄래?’라는 뜻을 담은 눈빛을 보냈을 뿐이다.
소년의 얼굴에는 정말 표정이 너무 적었다. 아주 살짝 찌푸려진 미간을 제외하면 혹시 인형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으니까. 알렉사의 기대하는 눈빛을 이기지 못한 걸까, 드디어 소년이 입을 열었다.
“라인하르트 폰 오덴발트.”
소년의 대답을 듣자마자 처음 든 생각은 ‘이름 참 멋지네.’였다. 그리고 이어 든 생각은 ‘폰 오덴발트?’였다.
이 콘스탄츠 왕국에서 그 성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콘스탄츠 왕국의 건국에서부터 폰 오덴발트가 등장하니 말이다. 그만큼 유서 깊은 이 가문은 왕국에 단둘뿐인 공작 가문이었다. 말이 공작이지, 독립국을 세울 수 있는 대공이나 다름없다고 하는 게 중평이었다.
오덴발트 가문이 가진 영지가 웬만한 공국 크기였고, 자체적으로 세금을 매길 수 있는 권한도 있었으며 사병을 가질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가문에서 왕비가 나온 것도 세 번이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런저런 거 다 합하면, 엄청난 집안의 사람이란 뜻이었다.
웬만한 일로 당황하지 않는 알렉사였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어, 음, 그러니까… 오덴발트 공자…님?”
혹시 그녀의 호칭이 틀린 걸까? 소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알렉사는 괜히 심장이 졸아들었다. 처음 안면을 튼 순간부터 나쁜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알렉사가 높디높은 귀족의 호칭을 제대로 알 리가 없지 않은가! 그녀가 ‘내가 실수했다면 미안하다’고 말하려는 순간, 소년이 말했다.
“그냥 라인하르트면 충분해.”
“그으래…요.”
“같은 학년으로 입학하는데 존대할 이유도 없고.”
알렉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말투가 하대하는 듯하고 그녀에게 딱딱하게 굴긴 하지만, 그래도 권위적이거나 나쁜 아이는 아닌 것 같았다. 기쁜 마음에 생긋 웃는데 어쩐지 라인하르트의 안색은 썩 좋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행사가 시작될 단상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더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만 같아서 알렉사는 더 말을 붙이지 못했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이내 입학식이 시작되는 바람에 알렉사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말 거는 걸 포기해야 했다.
개회 알림과 함께 멋들어진 음악이 흘러나왔다. 하늘에 흩어지는 하얀 꽃잎들은 아마도 마법부 선배들이 작품인 모양이었다. 알렉사는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새파란 하늘 아래 흩날리는 꽃잎 가운데 있는 라인하르트는…….
‘무슨, 그림 같아.’
반짝이는 금발에 떨어진 꽃잎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사람을 만든다면 지금 옆에 있는 이 사람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알렉사 스스로는 잘 모르고 있겠지만, 그녀는 정말 자주 라인하르트를 흘끔거렸다. 앞에서 식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따위 관심조차 없을 만큼.
그러다가 순간, 라인하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덤덤해 보이는 녹색 눈동자와 마주치자마자 알렉사는 얼른 눈을 돌렸다. 마치 한 번도 그를 본 적 없는 것처럼. 가슴이 콩닥거리고 볼이 화끈거렸다.
설마 내가 쳐다본 걸 아는 걸까? 기분 나빴으면 어쩌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데, 갑자기 라인하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렉사는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기는커녕 곧은 시선으로 앞만 보고 있었다.
“…다음은 입학생 대표로 검술부 수석 라인하르트 폰 오덴발트가 입학 선서를 하겠습니다. 라인하르트 폰 오덴발트는 앞으로.”
시원시원한 걸음걸이로 단상 위까지 금세 다다른 라인하르트가 바른 자세로 입학 선서문을 읽어 내려갔다. 절도 있게, 조금 느리지만 또박또박, 힘 있는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런 라인하르트를 바라보면서 알렉사는 이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멋있는데 어떻게 안 반하겠어?’
이름도 모를 때 그를 보자마자 가슴이 두근거렸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건, 그냥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알렉사의 첫사랑이 그렇게 그 자리에서 완연하게 꽃피었다.
입학식이 끝나고 학생들은 가족과 간단히 작별 인사를 하고 나서 기숙사로 안내되었다. 신분과 소속 학부를 따지지 않고 무작위로 배정된 방에는 같은 성별로 두 명씩 들어가게 되었다.
알렉사가 들어간 방에는 이미 먼저 온 룸메이트가 짐을 풀고 있었다. 그녀는 길고 곧은 검은 머리카락을 솜씨 좋게 하나로 틀어 올려 묶고는 이것저것 꺼내어 제 책상에 늘어놓느라 정신이 없었다.
“안녕, 반가워.”
알렉사의 인사에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건지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짙은 남색의 눈동자가 알렉사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만 곧 흠, 하고 콧소리를 냈다. 새침데기 같은 인상의 그녀는 그러니까, 마치 고양이 같았다. 혹시 한 성깔 하는 걸까, 하고 알렉사가 걱정하던 그때였다.
소녀가 손을 탁탁 털었다. 뭐지, 하는 순간 룸메이트가 먼저 척척 다가와서는 알렉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비앙카야.”
“응, 나는 알렉사라고 해.”
“알아.”
“어, 어떻게?”
“아까 오덴발트 소공작 옆에 앉아있었잖아.”
비앙카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제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 손으로는 계속 물건을 정리하면서 그녀는 쉼 없이 입을 움직였다.
“난 마법부 소속이야. 넌 검술부니까 교양 수업 때 말고는 볼 일 별로 없겠다. 나 주변에 검 쓰는 여자애가 하나도 없어서 좀 신기하네. 넌 어디에서 왔어?”
“무스라고, 여기서 동남쪽에 있는 항구도시야.”
“아, 거기. 우리 집에서 별로 안 머네.”
“정말? 집이 어딘데?”
“바이로이트. 무스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있어.”
“어, 나 거기 가봤는데!”
새침한 첫인상과 다르게 비앙카와는 말이 제법 잘 통했다. 그녀는 꽤나 수다스러웠고, 비앙카의 말에 대답하거나 맞장구치는 것만으로도 대화가 끊이질 않았다. 혹시 마법사들은 다 수다스러운 걸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알렉사는 제 옷가지와 무구, 필기구와 책 등을 정리하고는 제 침대로 가 앉았다. 그녀보다 먼저 정리를 시작한 비앙카는 무슨 물건이 그리도 많은지 알렉사가 정리를 마치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겨우 끝낸 듯했다.
“휴, 힘들어. 알렉사, 밥 먹으러 가자.”
“그래, 그래.”
두 사람이 기숙사 옆 건물에 있는 식당에 들어섰을 때, 알렉사는 식당 안에 감도는 묘한 기류를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식당 한쪽에 앉아있는 이 때문이었다.
라인하르트네. 알렉사는 괜히 볼이 달아올라서 손등으로 뺨을 눌렀다.
그런데 불쑥 비앙카가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라인하르트에게서 떨어진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저기 너무 복잡하니까 다른 데에 앉자.”
“그래, 뭐….”
알렉사는 아쉬움에 슬쩍 뒤를 돌아보았지만, 딱히 비앙카에게 ‘라인하르트 쪽에서 먹자’고 말하기도 애매해서 조용히 따라갔다.
두 사람이 앉자 허공에서 식사가 바로 그들 앞에 나왔다. 마법으로 식사를 받아본 건 처음이라 신기해하는 알렉사와 달리, 비앙카는 무심한 얼굴로 잘도 먹어댔다.
“어휴, 진짜 시끄러워.”
“응?”
“아냐, 그냥. 저기 와글와글한 애들 신경 쓰여서.”
비앙카는 소란을 싫어하는 모양인지, 미간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마법사들은 예민하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보네. 알렉사는 딱히 아쉽진 않았다. 비앙카와 내내 붙어 다닐 것도 아니고, 어차피 라인하르트는 수업에서 계속 볼 거였으니까.
소소한 잡담을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는데, 문득 주변이 조금 조용해진 게 느껴졌다. 게다가 비앙카가 제 뒤쪽을 보고 얼굴을 확 찌푸리는 게 아닌가. 알렉사는 의아한 기분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거기에는 아까 식당 반대편에 앉아있었던 라인하르트가 서있었다. 그는 힐끔, 알렉사를 바라보고는 시선을 비앙카에게 돌렸다.
“레이디 바이로이트.”
그의 부름에 알렉사는 놀라서 비앙카를 바라보았고, 비앙카는 왈칵 성을 냈다.
“여기서까지 그렇게 부를 필요가 있어?”
“그럼, 비앙카.”
“그냥 안 부르고 좀 저리 가주면 안 돼?”
두 사람이 티격태격―정확히는 비앙카 혼자서 날 서게 구는 것이었지만―하는 걸 보는 알렉사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하지만 비앙카는 라인하르트에게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느라 그런 걸 눈치채지 못했다.
“하아, 존재 자체가 나한테 민폐니까 앞으로 아는 척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소공작님.”
“…후작 부인께서 걱정하시니까 꼭 한 주에 두 번은 연락을 드리도록 해. 부인께서 내게 꼭 전해달라고 부탁을….”
“네가 내 아빠야? 알 게 뭐야! 좀 꺼지라고!”
결국 비앙카가 소리를 버럭 지른 다음에야 라인하르트는 발길을 돌렸다. 그가 잠시 알렉사를 바라보긴 했지만, 그녀는 그때 자기 접시만을 보고 있었던 터라 그 사실을 몰랐다.
라인하르트가 멀어지고 나서야 비앙카는 조금 아차 하는 얼굴로 알렉사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내가 너무 시끄럽게 굴었지. 저 인간만 만나면 하여간 재수가 없어서….”
“오덴발트 소공작…이랑 친해…요?”
“어우, 뭐야. 왜 그렇게 말해? 아카데미의 교칙 몰라? 아카데미에 소속된 모든 학생은 평등하다! 편하게 말하라고. 그리고 아까 걔도, 그냥 라인하르트라고 부르면 되지.”
입술을 비죽거리는 비앙카를 보며 알렉사는 문득 라인하르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냥 라인하르트면 충분해.’
하지만 사실 알렉사는 그렇게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비앙카도 귀족인 걸 알았다면 그렇게 바로 말을 놓고 쉽게 수다를 떨기 어려웠을 것이다.
알렉사의 집은 항구를 기반으로 작은 상단을 운영하는 정도였고, 그래서 물질적으로 어려움 없이 자라긴 했다. 하지만 귀족은 귀족. 그녀는 무스 영주의 아들이 저보다 한 살 아래인 데다 종종 얼굴을 보는 사이였음에도 단 한 차례도 말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속으로 주저하는 걸 알아차린 건지 비앙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귀족이나 평민이나 어차피 손가락 찌르면 다 빨간 피 나오는 똑같은 인간인데 뭐 그렇게 어려워해?”
“하지만, 그렇게 해본 적이 없는걸.”
“넌 생긴 건 되게 대가 세게 생겼는데 의외로 소심하구나?”
비앙카는 까르르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 말에 알렉사도 그만 배시시 웃었다. 그런 말을 많이 듣긴 했다.
빼죽 올라간 눈꼬리에 붉은 기가 잔뜩 도는 갈색 머리카락, 큰 키만을 보고 사람들은 알렉사의 성격이 드세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제법, ‘소녀’ 같은 구석이 있었다. 다만 검을 겨룰 때만은 승부욕이 남다를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비앙카가 손을 뻗어 알렉사의 왼쪽 눈 아래를 살짝 건드렸다. 거기에는 조그만 점이 콕 박혀있었다.
“눈물도 많은가 보네, 눈물점도 있고.”
“음, 글쎄……. 그런 말이 있어?”
“우리 엄마가 그러시더라고. 눈 아래 점 있으면 눈물 쏟을 일이 많다고.”
무심결에 알렉사는 제 왼쪽 뺨을 쓸었다. 정말 그런 걸까?
하지만 아직까지 그녀는 그렇게 울 일이 많지 않았다. 그건 그저 미신에 불과한 이야기였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알렉사는 첫 검술 수업을 마치자마자 방으로 돌아와서 울고 말았다. 그 이유를 굳이 찾는다면, 그녀의 나약함보다는 순진함 때문이었다.
작은 항구도시 무스에서 콘스탄츠 아카데미에 진학한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심지어 영주의 아들조차도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못했다. 아카데미에 진학한다는 것은 그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다른 조건 하나가 더 있었다.
그건 바로, 남다른 핏줄이었다.
첫 수업에 참석하자마자 알렉사는 저와 함께 수학할 이들 중 자신과 같은 평민 계층이 손에 꼽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한 학년에 고작 스물다섯, 그중에 평민은 알렉사를 포함하여 넷에 지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검술’ 또한 가르침이 중요하기에 스승을 두고 가르침 받기 어려운 평민은 재능이 있어도 꽃피우기 어려웠다. 그렇다 보니 만인에게 문이 열려있다고 선전하는 아카데미라 하더라도 입학자의 대부분은 귀족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넷밖에 되지 않는 평민 가운데 여자라고는 알렉사 하나였다. 아니, 검술부 전체에 여자가 그녀 하나뿐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귀족 여성이 검을 배우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여자 상급생도 전부 다 해서 고작 열 명이었다.
알렉사는 낯선 곳에 홀로 고립되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서 주눅 들어서 목표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왕실 기사단의 일원이 되는 것. 검을 잡은 순간부터 가져온 꿈이었다. 그리고 아카데미는 그 꿈을 이룰 발판이 되어줄 것이었다.
그러니까 쫄지 마, 알렉산드라 린다우. 정신 차리자.
“…알렉산드라 린다우, 앞으로!”
그녀는 반사적으로 제 이름이 불리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날아와 꽂히는 게 느껴졌다. 등줄기에 땀이 나며 움츠러드는 기분이 들었다.
첫 수업은 대련을 통한 실력 체크였다. 원형의 연무장에 1학년부터 5학년 학생들이 모두 둘러앉아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는 담당 교수가 서있었다. 알렉사는 침을 꼴깍 삼키고는 교수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미 먼저 나와 서있던, 라인하르트와 마주 섰다. 그는 일전에 보았던 것처럼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알렉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렉사는 괜히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은 수업 시간이잖아. 바보처럼 헤벌쭉 웃지 마!
교수는 두 사람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번 수석과 차석의 대결이라니, 기대가 크다.”
그 말에 알렉사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라인하르트가 바로 저를 제치고 1등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사람 아닌가. 그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지만, 직접 겨뤄볼 걸 생각하니 새삼스럽게 호승심이 들었다.
그녀의 눈이 반짝이며 라인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지금 제 얼굴이 기대에 차있으리라는 걸, 알렉사는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조금 수줍은 듯한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알렉사의 얼굴이 대번에 활기로 넘치자, 라인하르트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발도!”
교수의 외침에 따라 두 사람이 바로 목검을 정면으로 세워 들었다. 검 끝에 라인하르트의 침착한, 아니 무심한 얼굴이 걸렸다. 알렉사는 그의 얼굴이 놀라움과 기쁨, 난감함으로 물들어 일그러지는 게 보고 싶었다.
하늘로 치켜올려져 있던 교수의 손이 땅으로 휙 내려오자, 두 사람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목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딱, 하고 크게 연무장에 울렸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힘에, 알렉사는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모조리 짜르르하게 아파 왔다.
알렉사는 이를 악물고 상대를 떨쳐내고는 몸을 뺐다. 정면으로 부딪쳐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약점을 찾아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거야.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훅 다가오는 라인하르트의 얼굴이 너무 가깝다고 생각한 순간,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내 목검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조금 전까지 알렉사의 손에 쥐어져 있던, 그 목검이었다.
“와아, 봤어?”
“역시 오덴발트 소공자야.”
“저 평민 여자애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거 같은데?”
“야, 완전 넋 나갔다. 크큭.”
알렉사는 그대로 얼어붙어서는 라인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차분한 얼굴로 서서는, 그녀에게 슬쩍 고갯짓을 했다.
“검, 안 주울 건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지금까지 검을 잡은 이래로 단 한 번도, 알렉사는 검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제대로 붙어볼 새도 없이 허무하게 검을 놓치다니.
어리벙벙한 기분으로 저만치에 떨어진 검을 주우러 갔다. 그리고 허리를 굽히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귀에 와서 콱 박혔다.
“저런 게 차석이라고? 뭐 잘못된 거 아니야?”
“평민 주제에 여기 올 정도면 돈은 썩어 넘치게 많은 집 자식일 텐데, 돈이라도 많이 쓴 모양이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순간 자신을 응원해 준 가족과 친구들, 고향 사람들, 스승님, 모두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죽을힘을 다해서 노력했는데… 고작 첫 대련에서 이런 모욕적인 말을 들을 순 없어.’
알렉사의 눈에 불이 확 붙었다. 그녀는 창백하게 굳어진 얼굴로 검을 쥐고 뒤를 돌아보았다. 뚜벅뚜벅 걸어서 다시 라인하르트의 앞에 선 그녀는 교수에게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하지만 이를 갈며 부탁했다.
“다시 한번 겨루고 싶습니다.”
그녀의 호승심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아니면 오기를 부리는 게 웃겼던 걸까. 교수는 피식 웃으며 그러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다시 알렉사는 라인하르트와 검을 맞댔다.
결과는, 아까보다는 조금 더 검을 부딪쳤지만 또다시 패배였다.
어깨에 닿은 라인하르트의 검은 마치 진검인 것처럼 서늘하게 느껴졌다. 가쁜 숨을 숨기려고 알렉사는 이를 악물었다. 조금 신경질적인 몸짓으로 상대의 검에서 몸을 뺀 알렉사는 분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대련이니까 질 수도 있었다. 라인하르트가 자신보다 뛰어날 수도 있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상처 입히는 건 패배 자체가 아니었다. 오히려 주변에서 수군대는 목소리들이었다. 하나같이 그녀를 깎아내리는 말들뿐이었고, 비웃는 눈빛이 쏟아졌다. 평민에 여자인 차석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었다.
울컥 치밀어오르는 것을 꾹꾹 눌러 참으며 알렉사가 자리로 돌아갈 때였다.
옆에 나란히 걸어 들어가던 라인하르트가 나직하니 말을 건넸다.
“누구에게 검을 사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썩 좋지 못한 습관이 많은데.”
그런 부분은 고쳐 배우는 게 좋을 거 같아.
그 말에 알렉사는 홱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라인하르트의 얼굴은 냉정했다. 아니, 그냥 냉정한 게 아니었다. 그는 알렉사의 검술을 멋대로 ‘평가’했다. 그녀의 지난 노력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함부로 말을 얹었다.
라인하르트가 아무리 그녀보다 검을 잘 다룬다 한들, 같은 입학생일 뿐인데!
“말, 조심해 줘.”
알렉사는 이를 악물고 씹어 뱉듯 말했다. 그녀가 화를 내자 라인하르트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조언은 새겨듣는 편이 좋아.”
“대체 네가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라고 하마터면 버럭 소리쳐 버릴 뻔했지만, 알렉사는 가까스로 참았다. 그녀는 라인하르트를 쏘아보고는 고개를 팩 돌렸다. 그러고는 이를 갈며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런 알렉사를 라인하르트는 잠시 바라보는가 싶더니, 그도 곧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자리에 앉은 알렉사는 분노에 숨을 할딱거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대체, 정말로 자기가 뭐라고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알렉사는 분해서 미칠 것 같았다.
대련 전까지만 해도 멋지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라인하르트의 얼굴은, 이제 그녀의 머릿속에서 재수 없는 반반한 놈의 것으로 변해있었다. 고작 한 번의 대련에서 자신이 졌다고, 그런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동급생에게?
그에게 평가 따위를 들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마구 솟구쳤다.
그러고 보니 아까 검을 날렸을 때나 제 어깨에 검을 들이댔을 때 라인하르트의 표정이 어땠더라.
‘너 같은 게 내 다음이라고?’
하고 비웃는 듯한 얼굴이 아니었던가!
점차 그녀의 마음속에서 라인하르트는 오만한 이가 되어갔다. 주변의 수군거림과 비웃음, 무시에 더해 자신의 검이 처참하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알렉사의 마음은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해졌다. 그리고 그 모든 분함은 그녀를 이긴 라인하르트를 향했다. 그것이 얼마나 비이성적인지 그런 걸 따져볼 여유가 조금도 없었다.
그 뒤의 대련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알렉사는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자신을 비웃는 라인하르트와 검을 다시 몇 번이고 맞댔다. 어디에서 자신이 실수한 건지, 무엇이 문제였는지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리고 어느새, 첫 수업이 모두 끝났다. 교수의 안내 사항 전달이 끝나자 학생들은 그에게 인사를 올리고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자신만의 생각에 골몰한 알렉사는 거의 끝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연무장에서 막 나가려고 할 즈음, 저쪽에 몰려있는 남자 신입생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라인하르트가 있었다. 그를 둘러싼 신입생들은 라인하르트의 검이 대단하다고 칭송하느라 바빠 보였다.
“역시 비스바덴 단장님이 인정할 만해요, 소공자!”
“크, 검을 휘두를 때마다 내 가슴이 막 뛰더라니까.”
“세기의 천재라는 말은 역시 오덴발트 공자에게 어울리지. 아무렴.”
그들의 말을 듣기는 하는지 라인하르트는 눈을 살짝 내리깐 채로 관심 없는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걸 보며 알렉사는 속으로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당연한 소리 너무 들어서 지겹다, 뭐 그런 건가? 세기의 천재라느니 그런 낯부끄러운 수식어를 들으면서도 어쩜 저렇게 뻔뻔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알렉사는 입술을 한번 비죽 내밀고는 그들을 못 본 척하고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그때, 라인하르트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그의 시선이 움직이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소년들이 일제히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똑같이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휘이, 휘파람을 불었다.
“어휴,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 차석 자리 내놓겠어.”
“평민이 차석이라니 요행이지, 요행.”
“여기 들어온 게 사실 기적 아닌가?”
알렉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당장이라도 다 덤비라고, 모두 다 때려눕히고 말겠다고 한바탕 난리 피우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아카데미 수업 첫날부터 말썽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었다. 참자, 참아야 해. 알렉사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때 한 녀석이 라인하르트에게 물었다.
“오덴발트 공자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알렉산드라 린다우의 검, 쓸 만은 해요?”
그리고 라인하르트의 대답이 알렉사의 심장에 비수가 되어 날아와 꽂혔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알렉사는 달음박질쳤다. 저놈들에게 눈물을 줄줄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정신없이 뛰어서 도망가느라, 알렉사는 라인하르트의 말을 미처 다 듣지 못했다.
“훨씬 더 많이 부딪쳐 봐야 할 것 같아. 아니, 그러고 싶군.”
린다우의 검은 정말정말 재미있거든. 그의 입가에 번진 부드러운 미소에 몇몇이 놀라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만큼 라인하르트가 웃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그의 웃음을 알렉사는 볼 수도 없었고, 그 이후로도 영영 알지 못했다.
방으로 돌아온 알렉사는 침대에 엎어져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었다. 피부가 밀가루처럼 새하얀 그녀는 울고 나면 눈과 코가 걷잡을 수 없이 새빨개졌기 때문에 어떻게든 울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눈과 코가 딸기처럼 새빨개지고 짓무를 때까지 울고 나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소설 속 왕자님 같다고, 너무 멋지다고 생각하며 두근거렸던 시간이 아까웠다. 그를 기대하느라 썼던 감정들이 아까웠다. 다른 사람을 그렇게 깔보기나 하는 작자라는 걸 알았으면 절대로, 절대로 좋아하지 않았을 거다.
라인하르트를 향한 조그마한 호감이 수그러들고 나자, 그 자리에 대신 자리 잡은 건 완전 정반대되는 감정뿐이었다. 분노와 원망, 그리고 ‘저 새끼는 내가 꼭 이기고 만다’.
창피당한 것도, 그에게 실망한 것도 모두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더 화가 나는 건 꼼짝도 못 하고 졌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라인하르트는―알렉사는 잘 몰랐지만― 정말 ‘세기의 천재’라고 불리는, 아마도 소드 마스터에 가장 빠른 시일 안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알렉사의 실력이 그렇게까지 모자라진 않았다. 그녀 또한 그녀를 가르친 스승이 놀랄 정도로 어마어마한 재능을 가진 이였으니까.
누군가에게 이렇게 처참하게 져본 일이 없었던 알렉사이기에 충격은 훨씬 컸으리라.
“두고 봐.”
알렉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에서 까득, 하고 무서운 소리가 났다.
자신을 비웃었던 동기들의 얼굴,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다. 그중에 자신을 이길 수 있을 만한 놈은 없을 거라고 자신했다. 전부 작신작신 밟아주리라. 귀족이랍시고, 남자랍시고 저보다 못한 성적으로 들어온 주제에 멋대로 비웃은 걸 후회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는 라인하르트가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머릿속에서 라인하르트는 비열한 웃음을 짓고 있는, 재수 없는 소년이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