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9)

2.

비앙카는 턱을 괴고 앉아서는 연무장 한가운데에 서있는 제 친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혀를 찼다.

쯧쯧, 저 바보. 조금 더 말릴 걸 그랬나, 하다가도 그냥 둘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아니다. 주말이라 둘이 시내로 놀러 가려는 걸 붙잡은 놈이니, 알렉사에게 얻어터져도 싸다.

‘알렉사, 이왕이면 많이 때려줘.’

비앙카는 속으로 기원했다.

연무장에 선 알렉사는 견갑골까지 오는 길고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하나로 틀어 올려 묶고 있었다. 붉은 기가 도는 건강한 갈색 머리카락은 그녀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신명 나게 흔들렸는데, 그거야말로 알렉사를 상징하는 모습이었다. 목검을 다리 사이에 기대어둔 채로 싸울 준비를 하는 그녀는, 이 아카데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정말, 대련이 아니었을 텐데.’

아마도 잠시 후 알렉사를 보러 올 녀석은 적잖이 당황할 것이다. 비앙카는 내심 그 꼴이 기대되어서 히죽 웃었다.

콘스탄츠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반년. 그사이에 알렉사는 유명 인사가 되어있었다. 첫 대련에서 라인하르트에서 패배한 이후 알렉사는 정말 죽자 살자 수련을 거듭했다.

차석으로 입학한 실력이 가짜가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는 그 이후로 지는 일이 없었다. 검은 매서웠고, 상대를 봐주는 법이 없었다. 특히 몇몇 귀족 소년들에게는 더 그랬는데, 이후에 알고 보니 그녀를 비웃었던 놈들이라나. 비앙카는 그 이야기를 듣고 배를 잡고 웃었다.

이제는 누구도 알렉사가 능력도 없는데 운으로 차석을 했다느니 그런 소리는 하지 않았다. 일단 다들 돌아가면서 한 대씩 검으로 얻어터졌으니 그런 말을 할 배짱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반년 사이에 알렉사는 라인하르트랑 딱 한 번 더 붙었다. 그리고 졌다. 그날 방에 돌아온 알렉사의 얼굴은 정말이지 무시무시했다.

“아, 왔네.”

비앙카는 연무장으로 들어오는 소년을 발견하고는 중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가진 옷 중에 가장 좋은 것으로 차려입고 나온 모양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돈 바른 티가 났다. 게다가 손에 들린, 작은 꽃다발까지. 비앙카는 웃음을 터트리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정말 세게 깨물어야 했다.

당황한 건 알렉사 쪽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연무장에 모습을 나타낸 동기를 보자마자 목검을 집어 들었는데, 그의 모습은 조금도 검을 휘두를 꼴이 아니었으니까.

“…너, 뭐야?”

알렉사의 입에서 얼빠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상대도 물론 비슷했다.

“아니, 그… 설마 대련이라고 생각한… 거야?”

꽃다발을 쥔 손이 당황으로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는 빠르게 감정을 수습하고는 알렉사의 앞으로 척척 다가왔다. 그러고는 꽃다발을 내밀며 제법 용감하게 소리쳤다.

“나, 나랑 데이트하러 나가지 않을래?”

“으응, 싫어.”

그러나 그의 데이트 신청은 단번에 까였다. 이렇게 일말의 고민도 없이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그는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그 광경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비앙카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오예, 일곱.

여태까지 알렉사에게 데이트든 교제든 신청했다가 거절당한 남학생의 수였다. 아주 착실하게 늘어가는 중이었다.

“혹시, 그럼 다른 사람이랑 이미…….”

“응, 저기서 기다리잖아.”

소년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며 급하게 홱, 돌아갔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서 피식피식 웃으며 손을 흔드는 비앙카를 보고는 더욱 일그러졌다.

“레이디 바이로이트는 네 연인이 아니잖아!”

“오늘 난 비앙카랑 약속이 있어.”

“그럼, 그럼 다른 날에…….”

“싫어.”

“왜?!”

“나는 나보다 약한 남자랑은 안 만나, 다니엘.”

너 대련해서 나 이길 수 있어? 이길 수 있으면 데이트하고.

그 말은 그야말로 깔끔하고 잔혹한 거절이었다. 다니엘은 알렉사의 실력에 비해 아직 발치에서 왔다 갔다 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충격에 망연해진 그의 손에 들려있던 꽃다발이 툭, 바닥에 떨어졌다. 알렉사는 그것을 집어 들어서는 살살 먼지를 떨어내고는 품에 안았다.

“그래도 나 생각해서 가져온 거니까, 이 꽃은 내가 가져간다? 괜찮지?”

“…어? 어어…….”

“미안, 비앙카가 기다려서. 나 먼저 갈게.”

얼빠진 동기, 다니엘을 그 자리에 남겨둔 채 알렉사는 총총 비앙카를 향해 가볍게 달렸다. 비앙카는 그런 그녀의 팔짱을 보란 듯 끼고는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일부러 그러는 게 빤히 보여서 알렉사가 피식 웃었다.

“왜 그래, 쟤 상처받겠다.”

“무슨 소리야. 네가 한 말에 이미 회복 불가능의 충격을 받았는데.”

“나는 나름 배려한 거라고.”

“나보다 약한 놈은 싫다고 한 게?”

“생긴 게 마음에 안 들어서라고 솔직하게 말 안 했잖아.”

와아……. 비앙카는 입을 떡 벌리고는 알렉사를 바라보았다. 알렉사는 코를 찡긋하고는 들고 온 꽃다발을 비앙카에게 넘겼다. 그 꽃을 받아 들고 냄새를 맡은 비앙카가 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알렉산드라 린다우 너, 눈 너무너무 높은 거 아니니? 머리 꼭대기도 아니고 저기 어디 하늘에 묶어놨어?”

“하지만 다니엘 폰 슈베린은, 내 취향으로 잘생기지 않았다고.”

“알렉사…….”

결국 비앙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의 룸메이트이자 절친은 남자의 외모에 정말 엄격했다. 솔직히 오늘 알렉사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 다니엘만 해도 손꼽히는 미남 학우 중 하나였다. 그의 방에 날아드는 고백 편지가 하루에 몇 통은 된다고 들었다. 조금 선이 가느다란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미남은 미남이었다.

그런데도 알렉사는 단호하게 자기 취향이 아니라며 선을 그어버렸다.

“네 눈에 잘생긴 사람이, 이 아카데미에 있긴 하니?”

키득대며 비앙카가 물었다. 그러며 덧붙인 말에 알렉사의 몸이 살짝 굳었다.

“뭐, 오덴발트 소공작 정도는 되어야 눈에 차?”

“…그 인간은, 관심 없어.”

라인하르트에 대한 적개심은 비앙카도 잘 아는 바였다. 처음에 만났을 때만 해도 오히려 관심이 있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금세 그의 이야기만 나오면 파르르 떨며 화를 냈다. 얘기를 들어보니 대련에서 졌다는데, 그게 그렇게나 분했던 걸까?

어쨌든 괜히 그의 이야기를 길게 꺼내어서 친구의 기분을 상하게 할 생각은 없기에 비앙카는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아, 시내에 새로 생긴 해산물 레스토랑이 있대. 거기부터 가자.”

“좋아!”

얼른 기분을 털어낸 알렉사도 목소리를 바꾸어 기분 좋게 답했다. 두 사람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카데미 출입구에서 학생들을 태우기 위해 기다리는 마차들로 향했다.

한편 연무장에 홀로 남은 다니엘은 허탈한 기분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주변에서 말리긴 했다. 알렉산드라는 네 고백 안 받아줄 거다, 지금까지 고백한 녀석들 다 까였다, 선배고 동기고 어쨌든 다 안 받아주더라. 얼굴 믿고 까불다가 분명 저거 차인다.

하지만 다니엘은 제법 자신이 있었다. 제 얼굴에 안 넘어온 여자애들은 없었으니까. 게다가 내심 그는 자신과 알렉사가 그사이 꽤 친해졌다고 느꼈다.

우선 그는 알렉사를 깎아내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그녀에게 점수를 땄다(고 믿었다). 그리고 수업에서 여러 번 파트너가 되어서 대련하는 동안 제법 의미심장한 눈빛도 많이 나누었다(고 믿었다). 지나치며 웃는 얼굴로 서로 인사도 잘 주고받았고, 가벼운 대화도 즐겁게 했고…….

“좋아하는 꽃 물어봤을 때 대답도 잘해줘 놓고…….”

솔직히 남자가 여자에게 ‘무슨 꽃 좋아해?’라는 질문을 할 만한 일이 뭐겠는가. 알렉사가 눈을 반짝이며―물론 그건 다니엘의 착각이었지만― 꽃 이름을 말했을 때, 그는 ‘됐다!’ 싶었다. 그녀가 말한 꽃을 가지고 나가 데이트 신청을 하고 고백하면,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결과는 이렇게나 참담했다. 애초에 알렉사는 다니엘과의 만남에서 무언가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 발생하리라고는 상상도 안 한 모양이었다. 오히려, 그 검에 미친 아가씨는 대련이라도 하자는 건 줄 알고 목검부터 챙겨서 기다리고 있지 않았나!

“하하, 아… 쪽팔려서 어떡하지.”

차인 건, 가슴 아프고 속 쓰리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조금 성급했던 모양이니.

알렉사가 그를 어색하게 대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만약 이 데이트 신청으로 어색해질 거였더라면, 아까 그가 민망하지 않게 꽃을 가져가 주는 그런 배려는 안 했으리라. 다만 저를 말리던 친구 놈들이 놀려댈 걸 생각하니 골이 아프고 볼이 화끈거렸다.

“에휴… 가자, 가. 어?”

여기까지 나온 목적을 잃은 다니엘이 발길을 돌리려던 때였다. 그의 앞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과 마주한 다니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여긴 어쩐 일로……?”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다니엘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그가 주춤 물러났지만, 상대를 피해 도망갈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

어차피 쉬는 날인데 그냥 쭉 쉬자는 비앙카를 방에 남겨둔 채 알렉사는 다시 연무장으로 돌아왔다. 다니엘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한 건 점점 해가 따스함을 더해가던 오전이었지만, 지금은 차가워져 가는 붉은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오후였다. 휴일의 야외 연무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연무장 한쪽에 손에 들고 온 것들을 내려두고는 목검을 들었다. 휙휙 휘두를 때마다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괜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카데미에 온 걸 맨 처음에는 조금 후회도 했지만, 지금은 오길 잘했다는 생각뿐이었다. 과연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을뿐더러 어딘가 막혔던 듯한 부분이 뻥 뚫리며 실력도 한층 도약한 걸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중단세로 검을 겨누고 숨을 고르던 알렉사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의 검이 위로, 아래로, 또 좌우로 곧고 바르게 뻗어나갔다. 정해진 검로에서 새어 나가지 않는 정확한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같은 자세로 검을 휘두르길 수백 차례. 일순간 검이 부드럽게 휘어지듯 움직이더니, 이번에는 변칙적으로 곳곳을 찔러 들어갔다. 앞에 상대를 두었다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모양새였다.

당연하게도 알렉사가 눈앞에 그리는 상대는 라인하르트였다.

그를 떠올리면 알렉사의 얼굴에서는 저절로 웃음이 사라졌다. 어떻게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는 걸까? 처음에는 그의 실력을 잘 몰랐기 때문에 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련을 거듭하고, 그와 검을 맞댈 때마다 알렉사는 그와의 미묘한 간극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상대란 얼마나 약 오르는 존재인지. 이번에야말로, 하고 그를 꺾을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에도 여지없이 결국 라인하르트에게 지곤 했다.

‘완전 짜증 나.’

라인하르트가 검의 천재니 뭐니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인정할 수 없다고 속으로 씩씩대곤 했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이기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들었다. 그래서 오기로 더욱 그에게 덤볐다. 그리고 라인하르트는 알렉사가 대련을 요청할 때마다 항상 응했다.

그리하여 결과는? 패배. 고작 반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알렉사는 이미 열두 번을 졌다.

사실 지는 것만으로는 그렇게까지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녀를 열받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그 고고해 보이는 얼굴! 차라리 비웃는다거나 왜 질 거면서 덤비냐며 짜증이라도 내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그 덤덤해 보이는 얼굴이란! 가끔은 아쉽다는 듯 그녀에게 조언을 하기도 하는데 얼마나 열 받는지 몰랐다.

나 같은 게 백번을 덤벼도 어차피 상대도 안 된다 이거겠지. 재수 없어. 알렉사는 이를 갈았다. 그렇게 항상 초연할 수 있는 건, 라인하르트가 그녀를 동등한 적수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면 뭐겠는가.

“으윽!”

또 열이 뻗치자 검 끝이 흔들렸다. 어느새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알렉사는 신경질적으로 검을 멈추었다. 라인하르트를 생각할 때마다 자꾸만 평정심을 잃어 제대로 수련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잔뜩 주며 중얼거렸다.

“진짜, 재수 없어.”

“알렉산드라?”

어쩌면 저를 욕하는 줄 알고 이렇게 딱 맞춰 나타날까?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란 알렉사는 조금 가빠진 숨을 억누르려고 애쓰며 뒤를 돌아보았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조금 전까지 그녀가 욕하던 그 사람이 서있었다. 흰 셔츠 하나에 검은 바지를 입은 라인하르트는 휴일이라 그런 건지 머리카락도 단정히 올리지 않은 채였다. 눈을 가릴 듯 말 듯 한 반짝이는 금발은 어둠에서도 어쩐지 빛나는 것 같았다.

알렉사는 그런 그를 일별하고는 목검을 거꾸로 쥐고 제 짐을 놓아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대답하는 대신 등을 돌리자, 라인하르트가 알렉사 쪽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다시 말을 걸었다.

“휴일인데 수련하러 나온 건가?”

“그런데, 왜?”

반년의 시간이 지나는 사이에 라인하르트를 대하는 알렉사의 말투도 많이 바뀌어있었다. 입학식 때 그를 보고 존대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는 이제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좀 더 다른 게 있다면, 그를 대하는 말투에 상냥함이나 친절함 따위가 쏙 빠졌다는 점 정도일까?

그녀의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라인하르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속내를 읽을 수 없는 얼굴 따위 보고 싶지 않아서, 알렉사는 그를 돌아보지 않으려 애썼다. 어차피 봐봐야 열통만 터지지. 혼자만 아등바등하는 관계라는 건 정말 싫었다.

돌아보지도 않는 알렉사의 뒤통수에 대고 라인하르트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잠시, 같이 어울려주지 않겠어?”

“뭐?”

생각하지 못한 말에 알렉사가 돌아보자, 라인하르트는 손에 쥔 목검을 들어 보였다. 그제야 알렉사는 아, 하고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하긴 검의 천재니 뭐니 해도 그냥 만들어질 리가 없었다. 아마 이 아카데미 검술부에서 수련을 가장 열심히 하는 사람을 손꼽는다면 알렉사와 라인하르트가 1, 2위를 다툴 것이었다.

대련이야 언제나 환영인 알렉사였다. 다만 조금 의외라면, 그가 먼저 알렉사에게 검을 겨뤄보자고 했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라인하르트는 먼저 그녀에게 대련을 요청한 적이 없었다.

화륵, 호승심에 불이 붙었다. 알렉사는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건 숨기지 못했다. 그녀는 라인하르트를 똑바로 바라보고 섰다. 신나서 웃는 그녀의 얼굴에서는 생기가 넘쳤다.

“좋아.”

“…그래, 고마워.”

어쩐지 라인하르트의 대답이 늦었지만, 알렉사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뒤돌아서더니, 거리를 벌려 섰다. 하지만 곧장 알렉사를 바라보고 서지 못하고 미적거렸다. 입을 가린 손으로 아예 마른세수까지 하고 나서야 그녀를 바라보고 섰다.

알렉사는 그의 얼굴 따위는 제대로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어깨를 돌리고 발목을 풀며 물었다.

“검을 놓치거나 목에 상대의 검이 닿으면 지는 거야.”

“그래.”

“이번에는 안 질 거야.”

승부욕을 잔뜩 불태우며 작게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는지, 라인하르트가 픽 웃었다.

“꼭 이겨봐.”

“…진짜 내가 이기고 만다.”

저 인간은 오래간만에 좀 좋게 봐주려고 했는데! 알렉사는 씩씩거리며 라인하르트를 향해 검을 겨눴다. 저런 밥맛없는 소리를 해서 사람 기분을 상하게 해야 하는 걸까?

나란히 마주 보고 선 둘의 검 끝이 인사처럼 가볍게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그것을 신호로, 두 사람이 곧장 부딪쳤다. 목검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딱, 딱, 하고 연달아 넓은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결과는, 안타깝게도 또 알렉사의 패배였다.

거친 숨을 씩씩 내뱉던 알렉사가 제 목젖 바로 앞에서 멈춘 라인하르트의 검을 한번 흘끗 보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조금 전까지 냉랭한 얼굴로 알렉사를 몰아붙이던 라인하르트가 평소의 덤덤한 얼굴로 돌아와서는 검을 거두었다.

또야. 알렉사는 당장이라도 검을 팽개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완전히 패배자가 되는 행동이었다. 그녀는 분한 마음을 꾹꾹 눌러 참으며 패배 선언을 했다.

“내가… 졌어.”

“좋은 검이었어, 알렉산드라.”

으레 하는 인사에 답하는 대신, 알렉사는 팩 몸을 돌리고는 제 짐 쪽으로 달리듯 향했다. 바닥에 놓인 것들을 집어 드는 손짓이 제법 거칠어서, 그만 손가락이 돌바닥에 긁히고 말았다. 따끔했지만 그걸 살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어째서 라인하르트에게 지면 이토록 여유가 없어지는 걸까? 알렉사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여하튼 그랬다. 지금까지 오직 라인하르트에게만 진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니다. 그렇게 졌던 다른 상대들에게서는 되갚음을 해왔다. 어떻게든 아득바득 이겨서, 이제는 그녀가 웬만해서는 지는 동기는 없었다. 그런데 라인하르트만은, 한 번도 이기질 못했다.

그러니 질 때마다 이렇게 점점 마음이 얹힌 것처럼 몹시 불편해지는 거다.

“바로 돌아가는 건가?”

“어. 그러려고.”

대충 답하는 알렉사의 등 뒤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라인하르트는 어쩐 일인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할 말이 있는데.”

“뭐?”

“너, 좀 더… 너랑 어울릴 법한 사람과 어울리는 게 어때? 알렉산드라.”

“무슨 소리야? 그리고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말아 줄래, 소공작님?”

뜻밖의 대련에 이어진 뜬금없는 훈계에 알렉사는 도끼눈을 뜨고 고개를 홱 돌렸다. 이미 어둠에 먹혔는데도 라인하르트의 금발은 여전히 반짝거렸고, 그놈의 미모도 전혀 가려지지 않았다. 차라리 잘 안 보이면 좋을 텐데! 알렉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다시 물었다.

“근데 대체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다니엘 폰 슈베린이 네게 같이 나가자고 했다며.”

“뭐?”

“그는 너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그 말에 알렉사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졌다.

“그걸 어떻게… 아니, 그보다 소공작님이 뭐라고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사람은, 각자의 격이라는 게 있어. 다니엘은…….”

“격? 겨억?”

지금 이 인간이 나한테 뭐라는 거야? 라인하르트는 그렇지 않아도 그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은 알렉사에게 기름을 붓고 있었다.

처음에 오자마자 신분 문제로 차석임에도 비웃음을 당했던 알렉사는 ‘라인하르트’와 ‘신분’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파르르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두 개의 스위치를 동시에 누르고 만 것이다.

라인하르트가 말하는 그 다니엘 슈베린, 그러니까 오전에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던 이는 귀족 집안의 차남이었다.

저절로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갔다. 알렉사는 이를 으드득 갈면서 라인하르트에게 한 발 다가섰다. 그녀의 표정이 변한 건 그의 눈에도 잘 보인 모양이다. 약간 흠칫, 하는 기색이 보였으니까.

“그래서 귀족 집안의 자식이랑 어울릴 생각일랑 말고, 나랑 ‘급’이 맞는 녀석이나 상대하라 이거야?”

“그렇다기보다…….”

“애초에 소공작님이 참견할 문제도 아니긴 하지만, 안 그래도 거절했거든? 하, 만족스러우시겠어. 격 떨어지는 평민 출신이 힘 빼며 귀족 나리들 옆에서 알짱대는 거 안 봐도 돼서.”

“알렉산드라 린다우, 진정해. 내 말은 그런 게 아니야.”

“아니면? 뭐가 달라지는데?”

알렉사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의 기색에 라인하르트는 당황했는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입을 꾹 다문 채 뭐라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노려보던 알렉사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씹어 뱉듯 말했다. 그녀의 곧은 검지가 라인하르트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정말 자기가 뭐나 된다고.”

“…….”

“그딴 ‘훈계’는 나한테 하지 말고 다니엘 폰 슈베린한테나 해. 나는 애초에 당신들 세계, 관심도 없으니까.”

이글이글 타오르는 파란 눈동자로 한참이나 소공작를 쏘아보던 알렉사가 몸을 팩 돌렸다. 그녀는 바닥에 두었던 제 짐을 거칠게 낚아채고는 쿵쾅거리는 걸음으로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라인하르트가 조금 당혹스러운 낯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너무 급히 움직인 탓일까,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작은 책 하나가 툭 떨어졌다. 알렉사는 몇 걸음이나 더 가서야 그걸 깨달았고, 뒤돌아보았을 때 책은 라인하르트의 손에 들려있었다.

“책, 떨어졌…….”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알렉사가 그의 손에서 잽싸게 책을 낚아챘다. 그녀는 그것을 감추기라도 하듯 가슴에 꽉 끌어안은 채로 라인하르트를 쏘아보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씩씩거리며 돌아가는 알렉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라인하르트의 어깨가 축 처진 듯 보였다.

*

“진짜, 자기가 뭔데!”

땅을 쿵쿵 구르며 걷는 알렉사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하고 억울했다. 대체 계급이 뭐라고, 그리 친하지도 않은―실상 알렉사 입장에서는 심정적으로 아주 거리가 먼― 라인하르트 폰 오덴발트 소공작님에게 인간관계에 대한 훈계를 들어야 한단 말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아카데미에 오기 전까지 귀족 사회에 대한 동경과 선망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녀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이 서정시도, 그 계급 내에서의 낭만과 애정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까.

기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된 것도 사실 그 연장선이긴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알렉사는 귀족 가문의 레이디가 될 수 없으니 차라리 기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게 시초니까.

하지만 지금은 ‘귀족, 그깟 거 개나 주라지.’ 하는 마음이었다.

처음에 무시당한 충격이 너무 컸다. 단단해 보이지만 알렉사는 아직 어리고 여렸다. 쏟아지는 타인의 질시와 무시를 이렇게 직접적으로 온몸으로 받은 건 처음이었다.

“아냐, 잊어. 잊어버려. 그런 말, 마음에 담아두지 말자.”

라인하르트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도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알렉사는 애써 머릿속에서 그의 얼굴과 목소리, 하여튼 모든 것을 지워버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목적했던 장소에 다다랐다.

그곳은 아카데미 도서관이었다. 휴일 저녁이라 그런지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사서 외에는 아무도 없는 데다 그도 곧 정리하고 들어갈 모양이었다.

“책 반납이요.”

사서는 대답 없이 그녀가 내민 책을 받아 들었다. 책을 가져온 이가 누구인지 흘끔 쳐다보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서는 마법으로 작동하는 인형이기 때문이었다.

그 점이 알렉사는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어떤 책을 빌리더라도 소문날 일은 조금도 없을 테니 말이다. 검과 근육, 힘과 무력을 숭앙하는 검술부의 시꺼먼 남자들 사이에서 거의 홀로 고군분투 중인 알렉사는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흠’이 잡힐 만한 건 알리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이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서정시와 로맨스 소설이라니.

사서를 지나친 알렉사의 걸음은 곧장 로맨스와 서정시를 모아놓은 서가로 향했다.

그녀가 살던 무스는 항구는 제법 규모가 있는 편이었지만 서점은 빈약했다. 사실 귀족이 아니고서야 책 읽고 느긋하게 지낼 만한 여유가 없으니 지방 소도시에 큰 서점이 있을 리 없었다.

그 작은 서점에 있는 서정시와 로맨스 소설을 섭렵하다 못해 외울 지경인 알렉사가 아카데미에서 이 도서관을 만났을 때, 가슴이 몽실몽실 부풀다 팡 하고 터지는 기분이었다.

“어디… 아, 찾았다.”

일전에 읽었던 『공작 부인의 방으로』는 생각보다 제법 수위가 있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얼굴이 벌게져서, 같은 방의 비앙카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조심스럽게 읽었는지! 이번에는 좀 더 달달하고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오늘 시내에 나가 서점에서 미리 알아둔 책은 다행스럽게도 도서관에 들어와 있었다.

“『소꿉친구를 잃는 열한 가지 방법』, 이거였지.”

알렉사는 입술을 감쳐물며 웃음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조심했다. 그리고 두 권의 책을 더 꺼내어 들고는 다시 사서에게로 향했다. 역시나 사서는 기계적으로 대출을 해주었다.

세 권의 책을 안고 나오는 그녀의 걸음은 아까 들어갈 때와 다르게 한껏 가벼웠다.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가 어려있었고,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직하게 콧노래까지 부르는 중이었다.

방으로 금방 돌아온 알렉사는 책을 자신의 책상에 잘 두었다. 위에 수업용 교재를 두고, 책등 쪽으로 다른 물건을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굳이 비앙카에게도 자신의 취미를 알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어, 왔어?”

씻은 건지 비앙카의 머리카락은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알렉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이어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알렉사까지 씻고 나온 뒤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얼굴을 맞대자마자 알렉사는 비앙카에게 연무장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했다.

“대체 자기가 뭐라고 나한테 ‘다니엘 폰 슈베린이랑 만나지 마’ 같은 소리를 하냐고! 아니, 자기가 내 아빠야, 뭐야?”

“그러게에…….”

“게다가 격이 어쩌고저쩌고… 아니,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내가 뭐… 그렇게 모자라?”

알렉사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기까지 했다. 비앙카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심약한 구석이 있는 제 룸메이트가 라인하르트의 말에 상처받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응응, 걔가 잘못했다. 그러게. 비앙카는 알렉사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라인하르트가 말하는 싸가지가 좀 없잖아.”

“웬일로 같이 대련을 하자고 먼저 그러기에 사람이 좀 달라졌나 했는데, 그런 소리 하려고 일부러 접근한 거였어.”

“음…….”

비앙카는 애매한 얼굴이 되었지만 굳이 알렉사의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그렇게 싹수없는 소리를 지껄이려고 라인하르트가 일부러 알렉사가 연습하는 데 찾아가서 같이 대련도 하고, 그랬다? 비앙카가 아는 라인하르트는 그런 인간은 아니었다. 비록 제 집안에 대한 자부심이 크고, 쓸데없이 바르고, 말 돌려 하는 걸 잘하지 못해서 사람 속 터지게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서 알렉사에게 ‘라인하르트가 네 생각만큼 쓰레기는 아니란다.’라고 변호해 줄 필요는 없을 듯했다. 어쨌든 이번 일은 라인하르트 쪽에서 선을 넘었고, 듣기에 따라서는 분명 알렉사가 기분 나쁠 만한 내용이기도 하니까.

다만 과도한 오해를 받는 라인하르트가 조금 불쌍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뭐, 잊어버려. 어차피 오덴발트 소공작이랑 친해질 것도 아닌데.”

“…그러려구.”

그렇게 말하는 알렉사의 얼굴이 조금 시무룩해졌다. 비앙카는 흐흥, 하고 코를 울리며 웃고는 알렉사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아까 낮에 사 온 거나 먹자. 너랑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다고.”

“아, 맞다. 미안해!”

“미안해할 것까진 없고. 오늘 지나면 눅눅해져서 맛없어질 과자니까, 아끼지 말고 먹어버리자!”

두 사람은 언제 라인하르트에 대해서 씹어댔냐는 듯 깔깔 웃으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어느새 알렉사의 머릿속에서 라인하르트는 깨끗하게 지워진 뒤였다.

다만 자기 전, 불 끄고 누웠을 때 잠깐 그의 싫은 얼굴이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그는 상상 속에서도 재수 없는 얼굴이었다.

*

땀이 줄줄 흐르고 끈적해서 불쾌했던 여름이 지나갔다. 언제 여름이었냐는 듯 녹색 나뭇잎은 갈색으로 물들고, 낙엽이 지자 금세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사이에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렉사는 라인하르트와 더는 부딪치지 않았다. 다만 수업 시간에 대련은 두 번 했는데, 두 번 모두 지고 말았다. 그래도 비앙카와 로맨스 소설이 그녀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어서 괜찮았다.

알렉사는 모직 재킷을 어깨에 걸친 채로 교양 수업이 진행될 마법부 건물로 향했다. 그녀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수업을 같이 듣는 검술부 동기들이야 당연히 있었지만, 알렉사는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홀로 여자에, 거기에 평민 신분. 차라리 검이라도 남들보다 잘 다루지 못했다면 모르겠지만 차석 입학이라는 타이틀은 거저 얻은 게 아니었다. 주머니 속 송곳처럼 두각을 드러내는 그녀를 남자 귀족 동기들은 꺼렸고, 남자 평민 동기들은 질투했다.

애초에 알렉사가 넉살이 좋은 편도 아니라 적당한 선과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교류할 뿐이었다. 여자 선배들이 있다곤 하지만 같은 수업을 들을 일도 없었고…….

그런 이유로 알렉사는 아카데미의 유명 인사이면서도 고독한 늑대처럼 홀로 돌아다녔다. 그나마 비앙카와, 교양 수업에서 친해진 마법부와 학술부의 몇몇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정말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번 겨울 수도에서 연말 연회를 크게 여신다고 하던데.”

“라인하르트도 거기 가는 거야?”

“글쎄, 아직 안 정했는데.”

알렉사는 등 뒤에서 들리는 와글와글한 목소리를 모른 척하고 걸음을 빨리했다. 라인하르트의 이름이 들린 걸 보면 그도 무리 안에 있는 모양이었다.

참 짜증 나는 것이, 라인하르트는 무시하려고 해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의 존재감은 짜증 날 정도로 컸다. 그가 같이 있지 않아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녀석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동경과 질투의 대상인 데다 먼 훗날에는 손 닿기 어려운 자리에 갈 사람이라 그런지, 그에 대해 흘러 다니는 이야기는 발에 차였다.

“하지만 비스마르 백작가의 라리사 양을 에스코트해서 참석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나는 모르는 일이야.”

라인하르트의 목소리가 좀 더 크게 들렸지만, 알렉사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수도에서 국왕이 여는 연말 연회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거기에 누가 누구와 참석하든, 그녀가 알 바 아니었다. 알렉사는 조금 더 빨리 걸었다. 그리고 학술부 건물 앞에 서있는 얼굴을 보고 배시시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러자 상대방도 마주 손을 들어 화답했다. 알렉사는 가볍게 뛰어 그의 앞에 다다랐다.

“헨드릭 선배.”

“내가 늦지 않았네.”

“늦기는요. 빨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으면서요.”

학술부 친구의 친분으로 건너 건너 알게 된 헨드릭 엔스헤더는 손에 들고 있던 책 한 권을 건네며 씩 웃었다.

“이거 절판된 책이라 도서관 말고는 구할 데도 없어.”

“진짜 고마워요, 선배.”

“고마우면 말이야, 휴일에 같이 시내에 가지 않을래? 알렉산드라.”

그 순간, 옆을 스쳐 지나가는 라인하르트가 눈에 들어왔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알렉사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이, 눈빛이 왜 그렇게 거슬렸을까. 알렉사는 그의 짙은 초록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생긋 웃었다. 순간 그의 눈이 좀 흔들린 듯도 싶었다. 알렉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헨드릭에게 눈길을 돌리고는 답했다.

“난 좋아요. 같이 나가요.”

그 모습을 본 동기들이 수군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놈들은 그녀가 신경 쓸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슬쩍 눈을 돌려 라인하르트를 살폈다. 왜 그랬는지, 스스로도 이유를 절대 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의 매끈한 얼굴에 조금이라도 금이 갔다면 기분이 정말 좋을 것만 같았다.

‘아……?’

라인하르트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선 채로 알렉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일행들도 알렉사를 보고 수군대느라 라인하르트가 그녀를 쳐다보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리고 그의 고고한 얼굴에, 그 반듯한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어있었다.

그의 녹색 눈동자는 알 수 없는 빛을 품은 채 일렁이고 있었다. 그건 기분이 나빠 보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속상한 듯 보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알렉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솔직히, 그녀가 다른 부의 선배와 같이 휴일 외출을 한다고 해서 라인하르트의 심기에 거스를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하물며 헨드릭은 그가 말한 ‘격’에도 어긋나지 않는, 행정가 집안의 사람이었다. 귀족과 일은 하지만 귀족은 아닌 집단의 일원이란 뜻이었다.

어찌 됐든 그의 기분이 나쁜 듯 보이자 알렉사는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선배, 난 수업 들어갈 테니까 나중에 얘기해요.”

“어, 어? 그래.”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고요!”

“알았어. 수업 잘 들어.”

헨드릭에게 받은 책을 보란 듯 꼭 끌어안고 알렉사는 동기들 무리 앞을, 정확히는 라인하르트 앞을 지나갔다. 그를 등 뒤에 둔 후에야, 알렉사는 피식 웃었다.

ㅅㅌ 1412 only

GOOFY

그로부터 사흘 뒤, 알렉사는 헨드릭과 함께 시내로 나왔다. 그녀 스스로도 이게 데이트의 일종이라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신경 쓰고 나왔다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평소보다 조금 단정하게 입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헨드릭은 해죽해죽 웃는 걸 멈추지 못했다.

“오늘 되게 보기 좋은데, 알렉산드라.”

“고마워요. 선배도 멋져요.”

“하하. 이것 참, 좀 쑥스럽네. 내가 미리 알아둔 식당이 있는데 거기부터 갈까?”

“좋아요.”

색 짙은 검은 머리카락에 옅은 갈색 눈동자의 헨드릭은 상냥하게 생긴 만큼 매너도 좋았다. 시내를 돌아다니는 동안 그의 소소한 배려에 알렉사는 솔직히 조금 가슴이 뛰기도 했다. 연애라고는 해본 적 없는 알렉사에게는 제법 로맨틱한 사건이었다.

“조심, 안쪽으로 와. 마차들이 험하게 다니네.”

“아, 고마워요.”

“별말씀을.”

부드럽게 웃는 헨드릭의 얼굴을 보며 알렉사는 조금 심장이 쿵, 했다.

라인하르트를 보았을 때와 비교한다면 글쎄,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쿵’ 소리가 들린 듯했다.

헨드릭은 제법 능숙하게 알렉사를 이끌었다. 그가 고른 식당은 적당히 시끄러워서 서로의 이야기가 잘 들릴 정도였다. 식사는 맛있었고, 분위기도 제법 좋았다. 그다음으로 간 곳은 근처의 작은 공원이었다. 작은 온실이 조성된 그곳에는 남쪽에서 데려왔다는 희귀한 새들도 있었다.

“아, 손에 올라왔어요!”

“가만히 있어 봐. 아마 더 모일걸?”

“안 돼, 더 이상은… 아야! 아! 얘, 부리로 너무 세게 쪼는데요?”

“하하, 내 손으로 옮겨 올게. 자, 손 내밀어 봐.”

은근히 손끝이 맞닿고 서로 바라보며 웃는 그 순간이 너무나도 보드라워서, 알렉사는 괜히 귀 끝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온실과 공원을 나와서 카페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어느새 두 사람이 마주 앉아있는 게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내려놓은 알렉사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슬쩍 간질이던 헨드릭이 그녀의 검지를 살짝 붙잡았다.

찻잔을 내려놓은 알렉사가 헨드릭을 바라보자 그가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알렉산드라, 혹시 지금 사귀는 사람 있어?”

“있으면 여기서 선배랑 이러고 못 있지 않을까요?”

“그러게……. 그럼 나랑 사귀지 않을래?”

그 말에 알렉사는 눈을 깜빡이며 헨드릭을 바라보았다.

헨드릭을 연애 상대로 본 적이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가 학술부 내에서 인기가 많은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뿐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성격이 좋고, 다른 학부의 후배까지 잘 챙겨주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같이 수도 시내에 나가기로 약속하고, 같이 돌아다니는 동안 ‘이 사람이 나에게 호감이 있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게 사실이라는 데 알렉사는 조금 놀랐다.

대체 나의 어떤 점에 끌렸던 걸까? 사실 헨드릭과 알렉사 두 사람 사이에 접점이 그렇게 많은 편도 아니었고, 같이 보낸 시간도 적었으니 서로에 대해서 많이 알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사귀자’는 말을 한 거라면 뭔가 그녀에게 특별히 끌리는 바가 있다는 뜻 아닐까?

“그…….”

나를 왜 좋아해요? 그렇게 물으려던 알렉사는 문득 며칠 전을 떠올렸다. 헨드릭과 약속을 잡는 저를 보고 수군대던 검술부 동기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못마땅한 얼굴로 자신을 쏘아보던 라인하르트.

나도 누군가가 좋아해 주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경시하는 너희들과 다르게, 라인하르트 너와 다르게. 헨드릭은 나를 알아보고 좋아한다잖아.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거 아닐까. 나를 왜 좋아하는지, 그리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차차 알아가도 되는 게 아닐까? 알렉사는 금방 마음을 먹었다.

그녀의 얼굴에 예쁜 미소가 걸렸다. 검술부 안에서는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그런 얼굴이었다.

“좋아요, 선배.”

우리 사귀어요.

그렇게 알렉사에게 첫 남자 친구가 생겼다.

…다만 그 남자 친구가 고작 일주일 만에 이별을 고했다는 게 문제지만.

학술동 뒤편에서 헨드릭을 만난 알렉사는 어처구니가 없으면 말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 중이었다. 제 앞에서 허옇게 뜬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며 말하는 남자가, 한 주 전에 달콤한 미소를 띠고 연애하자고 제안했던 그 사람이 맞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미안. 미안해. 내, 내가… 음… 너무 섣부르게 행동을, 음, 그래. 그랬던 거 같아.”

“…그래서, 물리자?”

“진짜, 내가, 진짜 미안해. 알렉산드라, 그… 너를 내가, 어,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러니까…….”

뭐에 쫓기기라도 하는 건지, 자꾸만 흘끔거리며 사방을 둘러보는 헨드릭의 태도는 아주 꼴 보기 싫었다. 그는 두 손을 깍지 끼었다가, 맞대고 비볐다가, 한 손으로 목덜미를 쓸었다가 마른세수를 하는 등 아주 부산스러웠다.

그 꼴을 보며 알렉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길게 한숨을 내뱉자, 헨드릭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알렉사는 손끝으로 미간을 문지르다가 헨드릭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선배, 내 얼굴 바로 보고 말해요. 그러니까 사귀는 거 취소하자는 말이죠?”

“…미안. 내가 진짜 미안. 근데 진짜… 안 될 거 같아.”

“됐어요. 알았으니까 그만 가요.”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느냐고 묻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물어서 뭐 할 건가? 어차피 제대로 연인다운 시간을 보내보지도 못했다. 일주일 전에 고백받은 뒤로 주중 내내 수업을 듣느라 둘이 얼굴 맞대고 담소라도 나눌 시간조차 없었다.

그저 가슴속에 크게 부풀었던 커다란 풍선이 푸시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이유조차 묻지 않는 알렉사에게 헨드릭은 끝까지 ‘미안해.’라는 말만 연신 해대다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버렸다.

혼자 학술동 뒤편에 남은 알렉사는 또 한숨을 내뱉으며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하늘을 바라보며 푸, 푸, 숨을 뱉다가 뒷머리로 콩 하고 벽을 받았다.

없던 일인 셈 치면 된다. 주변 누구도 모르는 연애의 시작과 끝이니, 그녀도 모르는 걸로 치면 그만이었다. 비앙카에게도 아직 말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괜히 속이 쓰렸다.

대체 왜 마음이 바뀐 걸까. 좋은 사람과 좋은 인연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렉사는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로맨스는 개뿔…….”

검을 잡은 순간부터 그녀의 인생에서 로맨스는 삭제되어 버린 걸까? 레이디가 아니면, 그녀가 보았던 소설 속의 여자들처럼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부드러운 그런 사랑은 하기 어려운 걸까?

하긴 남자들과 함께 흙바닥을 구르며 검을 휘두르는, 어찌 보면 우악스럽기도 한 그녀에게 솜털 같은 사랑이라는 건 사치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기사라는 직업은 누군가에게 애정을 받고 보호를 받는 편보다 누군가를 지키는 쪽에 가까웠으니까.

코끝이 매워서 알렉사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괜히 나약해지지 말자. 아카데미에서 앞으로 4년 넘게 더 있어야 한다. 고작 연애 못 한다고 나약해져서는 버티기 힘들었다.

알렉사는 두 손으로 뺨을 세게 짝 쳤다.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수업이나 가자.”

그녀는 애써 기운 나는 척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고작 일주일짜리 연애의 실연으로 축 처져있기엔 스스로가 너무 안쓰러웠다.

건물을 돌아서 나온 순간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나타난 인영에 놀라 멈춰 섰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큰 그를 올려다보자마자 알렉사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아.”

“…알렉산드라.”

라인하르트는 알렉사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는 좀처럼 비켜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알렉사는 조금 짜증스러웠지만, 굳이 시비를 걸 생각이 없어 옆으로 비켜 지나가려 걸음을 뗐다. 그때 라인하르트가 물었다.

“헨드릭 엔스헤더와는, 잘 안 된 모양이지?”

“뭐?”

이번에야말로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알렉사는 짜증스럽게 라인하르트를 돌아보았다. 순간 그의 얼굴에 미소가 스친 듯도 했지만, 아마도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오만하고 재수 없는,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 선배가 안 좋은 얼굴로 이쪽에서 나오는 걸 봐서. 둘이… 시내에 다녀온 걸로 아는데.”

“소공작님이 상관할 바 아니거든!”

바락 짜증 섞인 소리를 내지른 알렉사는 그에게서 홱 등을 돌렸다. 겨우 잠잠해지던 가슴이 다시 술렁거렸다. 대체 자기가 뭐라고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사람 속을 긁는 걸까. 알렉사는 씩씩대며 거칠게 걸음을 옮겼다.

정말이지 라인하르트는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인간이었다.

화가 나서 쌩하게 가버리느라, 그녀는 라인하르트가 아까 그 자리에 남아 입가를 가린 채 한참 서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