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50. 혁신가
토요일 오후 3시.
잠시 후 열리는 맨유와 레스터 시티의 경기를 보기 위해 올드 트래퍼드로 관중들이 몰려들었다.
“저게 뭐지?”
“무슨 사진 전시회 같은 거라도 하는가 본데.”
호기심에 사진이 붙은 패널이 늘어선 곳으로 찾아간 사람들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이게 태풍이 쓸고 간 마을이라고?”
“맙소사, 배가 육지로 떠밀려 와 있어.”
“몇 년 전에 선교하러 Korea에 가 본 적이 있어.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나라인데, 저런 천재지변까지 터지다니…….”
한국이 처한 상황에 다들 안타까워했다.
만약 중국이나 일본 등 다른 아시아 국가였다면 큰 관심과 동정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맨유에 영광을 안겨 준 캡틴 리의 고향.
그렇다 보니 그리 먼 나라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다들 조금이나마 돕자는 생각에 주머니에 있던 잔돈을 성금함에 집어넣었다.
“근데 저 사람들은 뭘 하는 거야?”
“뭔가 만들고 있어.”
사진 전시회 근처에는 낯선 동양인들이 자리를 깔아 놓고 공예품과 액세서리를 만들고 있었다.
합죽선과 노리개, 자개와 칠기 장식 등등.
그리 정교하거나 거창한 도구를 쓰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물건들을 만드는 게 참으로 볼만했다.
“이것 봐. 접는 부채에 우리 유나이티드의 엠블럼이 그려져 있어.”
“오, 그러고 보니…….”
다른 공예품들도 맨유의 엠블럼이나 ‘Glory United’라는 응원 구호 등이 적혀 있었다.
꽤 그럴듯한 물건이다 보니, 지르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다.
특히 여성들은 노리개나 자개 장식에 제대로 꽂혔다.
“어머, 이건 사야 해!”
“이봐요, 이 알록달록한 거 얼마죠?”
다들 완성품이 진열된 카운터로 모여들었다.
즉석에서 구매에 성공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재고가 떨어져 살 수 없게 된 이들은 다음번 홈경기 때 상품을 받기 위해 주문 요청서를 작성했다.
하드먼 회장은 이렇게 성황을 이루는 광경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다만 이사 중의 일부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수재민을 돕는 거야 성금으로 충분할 텐데, 굳이 저렇게 시장통처럼 물건을 팔아 돈을 벌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군요.”
“한국은 가난한 나라라고 하잖나. 성금은 그저 일시적인 도움이 될 뿐이지만, 저런 상품 판매는 장기적인 수익이 될 수 있지. 한국은 물론 우리 구단에도.”
준영은 수재민 돕기의 일환으로 한국 공예품들을 팔아 수익을 내자는 의견을 냈다.
그러면서 이참에 다양한 구단 용품을 만들어 판매해 보자는 제의도 했다.
맨유 엠블럼이 붙은 맥주잔이나 커피 머그 컵, 모자와 펜, 열쇠고리, 저금통, 가방 등등.
‘팀에 애정이 깊은 팬들이라면 기꺼이 매입할 겁니다. 같은 상품이라도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물건이 더 끌리기 마련이니까요.’
준영의 이 말에 하드먼 회장이 동의했고, 이사들도 찬성의 뜻을 보였다.
다만 이사들은 이런 상품 판매가 그리 큰 수익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구단 상품 판매야 용돈 벌이 정도로 좋겠지요.”
“그럴지도. 하지만 잔돈도 모이다 보면 거금이 되는 법이야.”
티끌 모아 태산.
실제로 홈경기 때 올드 트래퍼드에서 판매하는 군것질거리만 해도 적잖은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수익을 낼 수 있는 것도 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상품성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지.”
유럽 챔피언, 영국을 대표하는 명문 구단.
라이벌 팀에선 애써 부정할지 몰라도, 국내외에서는 이미 유나이티드를 이렇게 보고 있었다.
당연히 팬들의 자부심도 높아졌고, 팀에 대한 애정도 더 깊어졌다.
“그런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꾸준히 성적을 내는 게 중요하겠군요.”
“물론이지. 그래서 팀을 관리하는 데 소홀히 해선 안 돼.”
항상 우승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꾸준히 상위권 성적을 유지한다면 팬들은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팀의 가치는 빛을 잃지 않으리라.
“다음 시즌부터는 풋볼 리그 경기들이 TV에 중계될 거라고 해. 지금보다 팀이 노출되는 일이 많을 테니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겠지.”
“내년부터 정말 많은 게 달라지겠군요.”
“맞아. 그러니 미리 대비를 해야지.”
하드먼은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일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티끌을 모아 태산을 만드는 일을 게을리할 수 없었다.
***
브라이언 클러프의 해트트릭을 앞세워 레스터 시티를 4 대 1로 대파한 맨유는 일주일 후 아스날을 만났다.
현재 11라운드까지 진행한 가운데, 아스날이 패한 경기는 두 번뿐이었다.
개막전에서 리버풀에게 진 것, 그리고 일주일 전 에버튼 원정에서 3 대 1로 진 것이다.
패배가 적은 건 나쁘지 않았지만, 문제는 무승부를 거둔 경기도 많다는 것.
그렇다 보니 많은 승점을 쌓지 못했고, 순위도 중위권에 머물러 있었다.
“오늘 경기는 분명히 힘들 거다. 그래도 반드시 이겨야 한다! 더 이상 유나이티드 놈들이 설치게 두면 안 돼!”
아스날의 감독 조지 스윈딘의 독려에 선수들도 진지한 눈빛을 하고서 필드로 나갔다.
런던을 연고로 한 아스날.
그들은 여왕의 팀이라 불릴 정도로 왕실의 성원을 받아 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 성원이 예전 같지 않았다.
컵 대회에서도, 리그에서도 아스날의 성적이 시원찮았기 때문.
그런 상황에서 맨체스터의 붉은 악마 놈들은 유럽 챔피언을 차지하고, 지난 시즌에는 최초로 트레블을 일궈 내며 여왕의 주목을 받았다.
전대 국왕 시절부터 왕실의 성원을 받았던 아스날 입장에서는 부아가 치미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올 시즌도 리그 우승은 안 될 거야, 아마……. 하지만 절대 혼자 내려앉을 순 없어! 유나이티드 놈들도 끌어내리고 말 테다!’
물귀신 작전을 펼치리라 작정한 아스날은 지금까지 맨유를 상대한 팀들이 그랬듯, 최후방에 숫자를 늘린 밀집 수비를 펼쳤다.
그 광경을 본 준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아… 이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카테나치오구만.”
“카테나치오? 그게 뭐죠?”
빌리 맥닐의 물음에 준영은 간단하게 알려 주었다.
“이탈리아 놈들이 쓰는 빗장 수비 전술이야. 토 나올 정도로 뚫기가 힘들어.”
21세기 북미 월드컵에서는 직접 그 빗장을 뚫어 보긴 했지만, 그런 전술은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아스날 녀석들도 꽤 수비적으로 플레이하는데, 빌드업을 나가야 하나?’
하지만 섣불리 전진해서도 곤란하다.
지금 아스날은 후방에서 공을 돌리며 맨유 선수들이 전진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최대한 끌어낸 다음, 뒷공간을 노려 역습을 시도하려 들 터.
지금까지 다른 팀들이 이렇게 해 왔으니 아스날이라고 딱히 다를 것 같지 않았지만…….
「아스날의 토미 도허티, 동료 윌리엄 도긴 쪽으로 패스합니다. 데니스 로가 달려들자 골키퍼 쪽으로 패스… 아, 이게 뭔가요!」
도긴이 골키퍼에게 차 준 공이 좀 강했다.
거기다 골키퍼 짐 스탠든은 자신에게 패스가 올 줄은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상태.
제대로 엇박자가 나 버린 플레이는 대형 사고로 이어지고 말았다.
“푸하핫! 자책골이다!”
“저 녀석, 왜 자기네 골대로 공을 집어넣지?”
“쟤 정말 프로 맞냐?”
망연자실한 골 셀레브레이션(?)을 보여 주던 윌리엄 도긴.
그의 멘탈과 함께 아스날의 선수비 전술도 와장창 부서져 버렸다.
그 딱한 모습을 본 준영은 혀를 찼다.
“공을 더 안전하게 처리했어야지. 차라리 터치라인 밖으로 내보내는 게 나았어.”
“너무 허둥댄 건가요?”
맥닐의 물음에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유도하는 게 공격수의 압박이지. 그러니 항상 침착하게 플레이해야 돼. 동료 수비수나 골키퍼와 대화도 자주 하면서.”
마치 강의를 듣는 학생인 양 맥닐은 준영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는 훈련할 때도 작은 수첩과 연필을 가지고 다니며 준영의 말을 필기하곤 했다.
‘꼼꼼히 배워야 주장 같은 초특급 수비수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맥닐이 버스비의 스카우트 제안을 수락한 것은 준영의 존재 때문이었다.
월드컵과 유러피언 컵을 제패한 스타 선수의 플레이를 곁에서 보고 배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충분히 기대했던 만큼의 소득을 얻고 있었다.
“아무튼 이제 정신 바짝 차려라. 아스날 녀석들이 동점 골 넣겠다고 달려들 테니까.”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바빠질 시간.
준영의 말대로 저돌적인 기세로 맨유 진영으로 넘어오는 아스날 선수들을 막기 위해 맥닐은 바쁘게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
윌리엄 도긴의 자책골 이후, 아스날이 공세를 펼쳤지만 준영이 이끄는 맨유 수비진을 뚫진 못했다.
그사이 전반 30분에 알렉스 퍼거슨이 측면 돌파로 추가 골을 넣고, 후반전에는 데니스 로의 어시스트를 받은 바비 찰튼이 세 번째 골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아스날의 추격도 만만치 않았다.
후반 14분, 데이비드 허드가 날린 강슛이 해리 그렉의 선방에 튕겨 나가자 재키 헨더슨이 몸을 날려 추격 골을 욱여넣었다.
그리고 20여 분 후, 빌리 맥닐의 마크를 뿌리친 허드가 좌측면에서 날아온 크로스를 번개같이 잘 쳐 내며 두 번째 골.
점수가 3 대 2로 좁혀지자, 경기 흐름은 아스날 쪽으로 넘어왔다.
이러다 정말 덜미를 잡히거나 역전당하는 건 아닌지?
맨유 팬들의 염통이 쫄깃해지려는 찰나, 종료 직전 데니스 로가 던컨의 크로스를 받아 아스날의 골문을 갈랐다.
그렇게 최종 스코어 4 대 2로 맨유가 승리했다.
***
“그 허드라는 녀석, 꽤 하던걸? 후반전 아스날의 공격을 주도하더군.”
“재키 헨더슨의 골도 사실상 그놈이 만든 거니…….”
단골 클럽에 뒤풀이를 온 맨유 선수들은 오늘 상대 팀 선수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장 많이 언급이 된 건 후반전에 대활약을 펼친 데이비드 허드였다.
“뛰어난 공격수지. 체격도 좋고, 맹수처럼 기회를 놓치지 않더라고.”
“퍼기가 보고 배워야 하겠더라.”
“내가 뭘요? 나 오늘 한 골 넣었다고요!”
준영은 가만히 동료들의 대화를 들으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데이비드 허드는 나중에 맨유에 와서 7시즌 동안 활약을 한다.
1962-63 시즌 FA컵 우승, 리그 2회 우승, 1967-68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에 기여했던 것.
‘터너 신부님도 말했지. 화려하진 않지만, 기회가 있을 땐 확실히 해결 짓는 선수라고.’
역사가 틀어져 버린 현재의 세계에서도 데이비드 허드는 맨유에 올 수 있을까?
준영이 미래의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클럽 종업원이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캡틴 리를 찾는 손님이 있습니다.”
“손님? 누군데요?”
“잘 모르지만, 축구 선수 같아 보였습니다.”
혹시 지역 라이벌인 맨시티 쪽 선수일까, 아니면 오늘 경기했던 아스날 선수일까.
일단 누군지 확인하고 싶었던 준영은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자신을 찾는 손님이 있는 자리로 향했다.
클럽 한쪽 구석에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던 손님은 준영이 다가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리 선수. 지미 힐이라고 합니다.”
“아, 풀럼에서 조니 헤인스랑 뛰고 있는 분이시죠?”
“하하, 맞아요. 내 주걱턱이 꽤 인상적이었나 보군요.”
“아니, 그것 때문만은 아닌데…….”
지미 힐.
그는 스탠리 매튜스와 더불어 남아공의 인종 차별 정책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선수들 중 한 명이었다.
즉, 이 시대에 깨어 있는 사고를 가진 인물이었던 것.
‘근데 이 사람이 왜 날 찾아온 거지?’
궁금해졌던 준영은 이어지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지미 힐은 1960년대 이후 프로 축구의 현대화와 TV 중계 시스템 구축에 힘썼던 혁신가입니다.
한편으로 공격 축구를 권장하기 위한 승점 제도 개선에도 한몫했는데, 승리할 때 승점 3점을 주자고 처음 제안한 게 이 사람입니다.
그 전에는 승리는 승점 2점, 무승부는 1점이었죠.
단지 1점만 더 늘었을 뿐이지만, 그것으로 훨씬 더 뜨거운 순위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