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49. 일어나
다음 날.
준영은 하드먼 회장과 버스비 감독을 찾아가 현재 한국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해 놓은 계획을 밝혔다.
“그러니까 이재민을 돕기 위해 자선 경기를 추진하고 싶다 이거군.”
“네, 저 때문에 한국에도 유나이티드 팬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동대문에서 유나이티드와 한국 대표팀과의 시합을 한번 해 보는 거죠.”
그 자선 경기 수익을 이재민 구호 성금으로 기부한다.
천재지변을 겪은 가난한 나라를 도왔다는 게 알려지면 유나이티드의 국제적인 명성도 높아지리라.
“분명히 좋은 일이긴 해. 하지만…….”
“존, 유감스럽지만 그건 힘들 것 같네.”
하드먼 회장은 물론 버스비 감독도 반대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딱 잘라 거절하니 준영은 맥이 좀 빠졌다.
“역시 어려울까요? 아무래도 일정도 빡빡하니까…….”
“정 강행한다면 2군 선수들을 쓸 수 있겠지. 하지만 기대하던 선수들이 나오지 않으면 관중들의 반응이 어떻겠나?”
버스비 감독의 말에 준영은 21세기에 있었던 날강두 사건을 떠올렸다.
출전하기로 해 놓고 단 1분도 뛰지 않아 팬들을 기만한 사건.
그 때문에 해당 선수와 그 소속 팀의 한국 내 인기는 시궁창까지 추락했다.
“만약 한다면 자넨 분명히 출전해야 할 거야. 하지만 시즌 중에 그리했다간 우리 팀 전력에도 손실이 커.”
“거기다 가까운 유럽도 아니라 극동 아시아라니……. 통행료와 체류비는 둘째 치고, 제대로 된 컨디션이 나오지 않을 거야.”
듣고 보니 확실히 진행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았다.
지난 1월 한국을 다녀왔을 때 비행시간을 떠올린 준영은 두 사람의 우려와 회의감이 이해가 되었다.
“거기다 입장료 단가를 맞추는 일도 생각해야지. 자네 고국은 가난하다며? 고가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생각해 봤나?”
“그럼 한국 대표팀을 맨체스터로 부른다면…….”
“흥행을 생각해야지. 유럽이나 남미의 유명한 강팀이면 모를까, 아시아 팀과의 경기를 보러 올 사람은 얼마 없을걸.”
아직 한국은 월드컵이나 올림픽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러니 영국 축구팬들 입장에선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틀린 말은 아니야. 내가 생각해도 무리수가 많이 있었는걸.’
그래도 회장과 감독이 동의해 주면 어떻게 해 볼 만하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다들 반대하니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그리고 존, 일전에 나에게도 그랬잖나. 지금 자네 나라는 독재 정권이 군림하고 있다고.”
“예, 한국에 다녀온 뒤에 그리 말했었죠.”
하드먼 회장은 정치적인 문제와 관련해서 터질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지적했다.
“자넨 좋은 뜻에서 하는 일이겠지만, 그들은 얼마든지 악용할 수 있어. 자신들의 치부나 무능을 감추거나 치적을 부풀리는 용도로 말이야.”
“그것도 그렇겠군요.”
과거에 이탈리아의 두체 무솔리니가 그랬고, 현재는 스페인의 총통 프랑코가 축구를 정치 선전의 목적으로 악용하고 있었다.
이승만과 자유당이라고 다르진 않을 것이다.
1월에 있었던 일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너무 시무룩한 표정은 짓지 말게. 꼭 자선 경기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
“도와주시는 겁니까?”
“자네 말대로 우리 팀의 국제적인 명성이 높아질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그러니 노력은 해 봐야지.”
원하는 방법은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이라도 써 봐야 한다.
그렇기에 준영은 하드먼 회장이 제의하는 방법에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돈도 좋지만, 정신적으로 이재민들을 도울 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봐.”
“정신적으로… 좌절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줘야 한다는 겁니까?”
“그래, 자네가 당장 잘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면 된다고 봐. 지금까지 그랬듯이 말이야.”
“그렇군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준영은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현재 제일 빠르고 손쉬운 방법을 두고 복잡한 선택을 하려고 했으니까.
‘그래, 나는 선수니까 내가 제일 잘하는 것으로 모두에게 용기를 줘야지.’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준영은 바로 훈련장으로 향했다.
곧 있을 맨체스터 시티 원정 경기에서 승리하자면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어 둬야 하니까.
***
9월의 셋째 토요일.
맨체스터 시티의 홈 메인 로드에 모인 6만여 관중들은 치열한 응원전을 펼쳤다.
9라운드 경기는 맨체스터 더비전이 되다 보니 다른 경기들보다 훨씬 더 응원전 열기가 뜨거웠다.
“The City Wins! United run away~”
“Glory, Glory United!”
양쪽 골대 뒤쪽에 진을 친 하늘색 레플리카를 걸친 맨시티 응원단과 붉은 레플리카의 맨유 서포터들.
서로 자존심을 걸고 싸우는 그들은 목이 터져라 구호와 응원가를 불러 댔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나팔을 불어 대고 북까지 두들겼다.
심지어 맨유 서포터들은 준영을 응원하는 한국인들의 꽹과리를 흉내 내어 깡통이나 냄비를 두들겨 대기도 했다.
“아, 저놈의 깡통 소리 시끄러워 죽겠네.”
오늘 맨시티 전방 공격수로 출전한 조 헤이즈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 깡통 소리 때문에 경기에 집중하기 어렵다고 심판에게 투덜댔지만, 소용이 없었다.
‘유나이티드 선수들이라고 깡통 소리가 안 들리는 건 아니잖아. 골을 넣어. 그럼 저쪽도 기가 죽어서 설치지 못할 테지.’
네가 실력으로 해결해라.
심판의 매정한 말을 떠올리던 헤이즈의 발 앞으로 패스가 전달되었다.
그가 공을 잡자, 맨유 서포터들은 야유와 함께 더 시끄럽게 깡통을 두들겨 댔다.
깡! 깡! 깡!
‘고만해, 이 미친놈들아!’
홧김에 헤이즈는 그대로 슛을 갈겨 버렸다.
중거리 슛을 시도하기에도 좀 먼 거리.
그런데 무회전으로 날아간 슈팅은 기가 막힌 포물선을 그리며 맨유 골대 구석에 박혔다!
「골! 골입니다! 조 헤이즈가 터트린 엄청난 골로 홈팀 맨체스터 시티가 앞서 나갑니다!」
쏘고도 들어갈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조 헤이즈는 뒤늦게 펄쩍펄쩍 뛰며 기뻐했다.
이건 그야말로 선수 생활 역대급 골이었으니까.
예상 밖의 일격을 당한 맨유 선수들은 얼이 빠진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존, 혹시 시티 놈들한테 무회전 차는 거 가르쳐 줬어?”
“아니, 그런 적 없는데.”
“양심도 없는 퍼랭이 놈들. 사용료는 지불하고 갈기라고.”
전열을 정비한 맨유 선수들은 반격에 나섰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다른 팀들처럼 맨시티도 수비할 땐 죄다 문전으로 내려와 밀집 수비를 펼쳤다.
거기다 골문을 지키는 건 백전노장 버트 트라우트만.
레프 야신도 인정한 이 레전드 골키퍼는 맨시티 페널티 박스 안으로 날아드는 공은 죄다 쳐 내거나 잡아챘다.
“아, 저 망할 크라우트 시키!”
“캡틴 리, 보고 있지만 말고 공격 좀 해 줘!”
“그래, 당장 출동하라고!”
맨유 서포터들의 외침을 듣기라도 한 건지, 준영이 직접 공을 치고 빌드업을 시도했다.
그가 올라오자 체격이 좋은 전담 마크맨이 곧장 달라붙었다.
“Du kannst nicht weiter!”
‘이 녀석, 독일에서 왔나?’
아무튼 일단 따돌리자는 생각에 뒤꿈치로 슬쩍 방향을 돌리는 백숏으로 녀석의 마크를 뿌리쳤다.
그리고 바비 찰튼에게 패스를 찔러 준 후, 그대로 페널티 박스로 쇄도했다.
‘리턴 패스!’
바비가 뒤꿈치로 슬쩍 방향만 돌려서 준영이 들어가는 쪽으로 패스를 건넸다.
맨시티 선수들도 리턴 패스가 될 걸 알았지만, 대응하기엔 공격이 너무 빨랐다.
트라우트만이 황급히 가로막았지만, 준영이 찬 공은 그의 옆구리로 빠져나가며 그대로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동점 골! 캡틴 리가 경기를 다시 원점으로 돌려놓습니다!」
득점에 성공한 준영은 곧장 웃통을 벗고 기자들의 카메라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손으로 러닝셔츠에 적힌 글자를 가리켰다.
“저거 어느 나라 글자야?”
“존 Y. 리의 고국의 문자겠지.”
“캡틴 리, 그거 무슨 뜻입니까?”
어느 기자의 물음에 준영은 곧장 알려 주었다.
“이건 ‘Keep your chin up.’이란 뜻입니다.”
힘내세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동포들에게 보내는 네 글자가 기자들의 카메라에 선명하게 담겼다.
***
태풍이 지나간 후의 하늘은 맑았다.
그 맑고 푸른 하늘 위에 떠 있는 태양은 상처 입은 대지에 따사로운 햇볕을 내리쬐었다.
그러나 농토를 복구하고 있는 장병들에게 그 햇살은 무자비하기 짝이 없었다.
나라에서 가장 만만한 일꾼인 군인들은 이번에 태풍 피해를 입은 남부 지방 복구에 대거 동원되었다.
“이렇게 삽질을 하려고 특무대에 들어온 건 아닌데…….”
“어쩌겠냐. 일손이 부족한걸.”
최정민과 함흥철이 열심히 흙을 퍼 나르고 있을 때, 깡통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점심때인가?”
“안 그래도 출출하더니만.”
잠시 작업을 중지한 특무대 장병들은 삽에서 손을 놓고 무쇠솥을 걸어 놓은 야전 취사장으로 향했다.
“국 대신 라면인가?”
“야, 더 줘. 이것만 먹고 어떻게 힘을 쓰냐?”
“그게 정량이지 말입니다!”
반합에 주먹밥과 라면을 담아 온 최정민과 함흥철은 한쪽에 자리 잡고 식사를 했다.
“쳇, 라면에 면은 다 어디로 가고 멀건 국물뿐이야?”
“그러게 말이다. 라면이 아니고 라면국이구만.”
그나마 밥이라도 많으면 모를까, 보리가 잔뜩 섞인 주먹밥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운동선수인 그들은 물론, 일반 장병들에게도 부족한 수준이었다.
“부산 쪽에서는 구호품을 삥땅하던 놈들이 걸렸다던데, 우리도 조사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조사하면 줄줄이 사탕일 거다.”
이리저리 떼먹는 놈들이 이 나라에 어디 한둘이랴.
그래도 구호품에 손을 대다니, 진짜 인두겁을 쓴 마귀 새끼들이 아닐 수 없다.
「검은 밤의 가운데 서 있어. 한 치 앞도 보이질 않아~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에 있을까. 둘러봐도 소용없었지~」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장교가 켜 놓은 라디오에서 마침 노래 한 곡이 흘러나왔다.
미국 포크송 풍의 흥겨운 가락을 듣고 있으면 절로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최정민과 함흥철은 물론, 다른 장병들도 발을 구르며 흥얼흥얼 따라 불렀다.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번 해 보는 거야~”
참 듣기 좋은 노래.
이미 가사까지 외울 정도로 몇 번을 들었지만, 질리지 않았다.
거기다 노래를 부른 가수는 두 사람에게 낯익은 사람이었다.
“준영 동생도 참, 노래 한번 기막히게 잘 부르는군.”
맨체스터 시티전에서 골을 넣은 후 선보인 골 셀레브레이션으로 국민들에게 힘을 준 이준영.
며칠 후 그는 쿼리멘이라는 밴드와 부른 노래가 든 음반 하나를 한국으로 보냈다.
음반에 든 노래는 ‘일어나’.
그 노래는 태풍이라는 대재난을 겪은 국민들을 위로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게 기운을 북돋아 주고 있었다.
“자, 우리도 일어나자. 또 열심히 일해야지.”
“그래, 얼른 끝내고 가야지.”
힘들고 배고프지만, 그래도 다들 일어나 다시 삽을 들었다.
오늘보다 좀 더 나은 내일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
어렸을 땐 느끼지 못했는데, 김광석 씨 노래는 정말 마음에 스며드는 것 같더군요. 제가 늙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
참고로 광복군 제2지대에서 활동하신 독립운동가 김광석 선생도 있습니다. 1995년 건국 훈장을 받으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