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27. 결실을 이루기 위하여
“세상에, 어쩌다…….”
준영이 부상을 입고 돌아오자 프레드로 저택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준영이 자잘한 부상을 당한 건 봤다.
하지만 몇 주나 쉬어야 할 정도로 크게 다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빠야, 많이 아파?”
준영은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카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지금은 좀 괜찮아. 근데 의사 선생님이 함부로 움직이지 말래.”
“그럼 오른팔 못 쓰는 거야?”
“그래, 한동안은.”
누구보다 염려하는 사람은 리즈였다.
그녀는 어깨 탈골이 얼마나 심한 부상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재작년에 졸업한 선배도 한번 어깨를 다친 뒤로 계속 팔이 빠져서 결국 테니스부에서 은퇴하고 말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충분히 안정을 취하면 낫는다고 하니까.”
“그래도…….”
방으로 가는 준영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리즈가 물었다.
“뭐 필요한 건 없어요? 아니면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든가.”
“어디 보자, 얼음찜질을 할 건데 준비해 주지 않겠어?”
“얼음찜질이요? 알았어요.”
얼음으로 하루 서너 번 냉찜질을 하면 통증도 줄일 수 있고, 염증 확산을 막을 수 있다.
그래서 부상을 당한 선수들이 곧잘 하곤 했다.
“얼음은 냉장고에 있고… 저기, 비닐 팩은 어디 있죠?”
“여기 있습니다, 아가씨.”
주방으로 온 리즈는 고용인의 도움을 받아 필요한 물건들을 챙겼다.
“아 참, 위생 랩도 주세요.”
리즈의 말에 고용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가씨, 그건 음식을 쌀 때나 쓰는 건데요?”
“맞아요. 하지만 찜질할 때 쓰면 편리해요.”
리즈는 작년에 테니스 연습을 하다 발목을 좀 삔 적이 있었다.
그때 준영이 일러 준 대로 얼음찜질을 하면서 위생 랩을 붕대처럼 감아서 썼더니 꽤 편리했다.
“근데 왜 얼음찜질이죠? 뜨거운 수건으로 찜질을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만?”
“그건 관절염 같은 만성 질환에 좋은 거래요. 운동하다 다친 거면 냉찜질이 낫다고 해요.”
주방에서 얼음과 비닐봉지, 위생 랩을 챙겨 온 리즈는 준영의 방으로 찾아갔다.
“준, 필요한 거 가져왔어요.”
“고마워.”
의자에 앉은 준영은 조심스럽게 상의를 벗어 어깨에 얼음 팩을 댔다.
그리고 위생 랩을 감아 고정시키려 했지만, 아무래도 혼자서 하기가 쉽지 않았다.
“도와줄까요?”
“응, 좀 부탁할게.”
리즈는 지난번에 준영에게 배운 대로 위생 랩으로 얼음 팩을 감아 고정시켰다.
‘근데 좀…….’
잔뜩 상기된 리즈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준영과 사귀고는 있다지만 그의 맨몸을 바로 코앞에서 보는 건 처음이니까.
그래도 우락부락한 몸이 무섭다거나 징그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듬직하게 느껴지고 폭 안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 참, 무슨 망측한 생각을…….’
“미안.”
리즈는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준영의 사과에 움찔 놀랐다.
“미안하다니요?”
“지난번에 다치지 말라고 했었잖아. 근데 이렇게 다치고, 또 걱정하게 만들어 버렸네.”
“그건…….”
준영이 지난번 리즈 유나이티드전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렇게 당부했었다.
다시는 다치지 말라고.
그게 마음대로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명령이라 들먹이며 그렇게 말했었다.
진짜 다치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알았으면 얼른 나아요. 그럼 용서해 줄게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여왕 폐하.”
슬쩍 리즈의 손을 끌어당긴 준영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발그레하게 미소 짓는 리즈.
자신의 마음을 가져간 이에게 시선을 빼앗긴 그녀는 동생들이 히죽이며 몰래 훔쳐보는 줄도 몰랐다.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훈련장.
보호대를 차고 나온 준영은 어제 경기를 뛴 선수들의 회복 훈련을 거들었다.
그리고 가벼운 러닝과 맨손 체조로 땀을 흘린 선수들에게 직접 만든 음료를 건넸다.
“수고했어. 다들 이거 마셔.”
“이게 뭐죠, 주장?”
준영이 건넨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신 알렉스 퍼거슨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캑! 맛없잖아요! 먹다 남긴 주스에 물을 탄 것 같아!”
평가가 예전에 알버트가 말한 것과 비슷했다.
그럴 만한 게 이 음료수는 준영이 직접 만든 이온 음료였으니까.
“투정하지 말고 먹어 둬라, 꼬마야. 존이 하라는 대로 해서 손해 보는 건 없으니까.”
이렇게 일러 주며 이온 음료를 들이켠 이는 데니스 바이올렛.
최근에 퇴원한 그는 케니 모건스와 함께 팀에 합류해서 한창 몸을 만들고 있었다.
“근데 진짜 맛이 없구만. 위스키나 럼을 섞으면 좀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술은 안 돼요. 회복에 도움이 안 된다고.”
“왜? 몸은 몰라도 마음의 회복에는 도움이 된다고.”
살짝 깐죽대던 데니스는 가만히 준영을 바라보다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거참, 우리가 퇴원했더니 이번엔 네가 다치다니. 참 짓궂은 운명이로구만.”
“그러게요. 웸블리로 가는 대가가 만만찮았더라고요.”
“웸블리……. 기대는 했지만, 막상 이뤄지니 흥분이 된단 말이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FA컵 결승 진출 소식은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사고로 대다수 주전을 잃고, 감독까지 부상으로 이탈한 가운데 간신히 재건한 팀.
그들이 놀랄 만한 결과를 거둔 데에 수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감동했다.
‘저들은 당당하게 증명했습니다. 불굴의 정신으로 지난 대전에 승리한 우리 연합 왕국의 진정한 대표라는 것을 말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맨유의 결승 진출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당연히 대중들 사이에서 맨유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너도 알겠지만, 지난 시즌에도 우리가 FA컵 결승에 올랐지. 아스톤 빌라에게 아깝게 패배했지만 말이야.”
그런 아쉬움이 있기에, 데니스는 다시 찾아온 이번 기회가 너무나 소중했다.
그렇다 보니 오랜만에 훈련에 참가했는데도 힘들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올해는 반드시 우승컵을 들고 싶어. 모두를 위해서라도 말이야.”
“그래요. 반드시 우승해야죠.”
병상에 누워서도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고 있는 감독님과 친구들.
준영은 그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결실을 이뤄 내리라 다짐했다.
***
웸블리로 진출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그들과 달리 미스터리 푸드 컴퍼니는 뜻밖의 암초를 만났다.
그레이트 맨체스터를 비롯한 북부 지역을 평정하고 남쪽으로, 런던 시장을 공략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경쟁 업체가 나타났다고요?”
“그렇습니다. 양심도 없고, 수치도 모르는 도둑놈들 같으니라고!”
굉장히 분했던지 헨리 케일 상무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폭발적인 매출과 수익을 기록하던 미스터리 푸드의 라면 사업.
런던 공략도 시간문제라고 보고 진행해 나갔는데, 예상보다 판매 계약이 저조했다.
그래서 조사해 보니 웬 이상한 놈들이 라면을 만들어 팔고 있는 게 아닌가!
“맛은 있던가요? 그쪽 업체에서 만든 라면 말입니다.”
“면이 좀 조악하긴 해도 그럭저럭 먹을 만했습니다. 완전히 우리 제품을 베낀 거더라고요!”
같은 라면이라도 다른 제품이었다면 헨리도 이 정도로 화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놈들은 치킨 누들을 그대로 베꼈다!
거기다 포장지와 상품명까지 비슷하게 했다고.
“그건 선 넘었네. 고소해야겠군요.”
“예. 이미 런던에 있는 사장님의 변호사, 미세스 대처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잘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날 것 같진 않군요.”
다들 라면이라는 인스턴트식품이 대박을 터트리는 것을 보았다.
당연히 나름 생산 기술을 갖고 있다는 업체들은 너도나도 뛰어들 것이다.
베껴서 만들거나, 이를 참고로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내거나.
“쩝,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원래 이 바닥이 뭔가 하나 히트 치면 우르르 따라 하는 성향이 있으니까요.”
“그거야 어디에서나 그렇죠. 중요한 건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입니다.”
다행히 현재 미스터리 푸드 컴퍼니는 쓸 만한 카드가 있었다.
바로 이억관이 개발했던 신제품들.
토마토 스파게티 맛, 자장 맛, 불닭 맛.
공장 시설 확충과 인력 확보도 되었으니, 이전에 계획한 대로 토마토 스파게티 맛을 출시하면 되었다.
“물론 신제품만으로는 안 되고, 홍보와 마케팅에서 더 신경을 써야겠죠.”
“그렇지 않아도 신문 광고를 낼까 합니다. 그리고 신설한 홍보 부서에서 제안하기로, 극장이나 TV 광고도…….”
헨리 상무는 광고 쪽 기획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나갔다.
준영이 보기에도 극장이나 TV를 이용하는 건 썩 괜찮아 보였다.
밋밋하고 정적인 신문 광고보다 영상을 활용한 CF가 더 효과가 좋을 테니까.
“라면은 됐고, 제과 쪽은 어때요?”
“빼빼Ro라면 불티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앤 공주를 모델로 한 게 효과가 엄청났지요. 애들보다 성인 여성들에게 더 많이 판매될 정도로요.”
“후후후, 역시…….”
만족의 미소를 짓는 준영에게 헨리는 난감한 표정을 하고서 물었다.
“그런데 사장님, 오드리 헵번 씨와 계약을 하시면서 모델료로 지불할 금액과 수익 일부를 전쟁 난민과 기아 결식아동 구제에 쓴다고 하셨죠?”
“네, 그랬죠.”
“어느 나라 난민들을 지원할지 생각해 놓으셨습니까?”
“물론이죠.”
준영은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그 계약을 오드리에게 제시했을 때, 어느 나라 난민들을 구제할지 결심해 두었으니까.
“적십자를 통해서 한국에 지원할 겁니다.”
“South Korea요? 거긴 분명 사장님 고국이죠?”
“맞아요. 문제 있습니까?”
문제 있을 리가.
휴전 협정이 체결된 지 이제 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지방에는 아직도 전쟁 복구가 되지 않은 곳들이 많다.
전쟁 난민, 피난민과 실향민의 생계는 말할 필요도 없고, 보릿고개 시즌이 아니더라도 굶주리는 아이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도움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한 나라인 게 틀림없다.
결코 오드리를 속이는 게 아니다.
“바로 진행하세요. 최대한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한국 국민들에게 호감을 얻는 만큼 한국 지사 운영도 한결 수월할 테니까.”
“아, 그래서 부사장님을 한국으로…….”
“쉿! 그 이야기는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준영이 정색을 하고 주의를 주자 헨리도 자신이 말실수한 것을 알고 황급히 입을 닫았다.
이억관이 몰래 풀려나서 한국으로 간 것은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될 기밀이니까.
“아무튼 난민 지원은 한국 지사를 맡은 이활 지사장에게 부탁하면 될 겁니다.”
“이활이 누구……? 아, 그분 말이군요. 알겠습니다. 곧장 그쪽으로 연락하겠습니다.”
헨리는 냉큼 이활의 정체에 대해 눈치를 채고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사장님, 한국에서 전보가 왔습니다.”
헨리와 대화를 끝냈을 무렵, 서기가 집무실로 들어와 전보 한 장을 건네고 갔다.
발신자는 이억관, 아니 이활이었다.
“거참, 이 아저씨, 양반은 못 되실 분이네. 언급하니 바로 연락이 오다니.”
준영은 곧장 전보를 읽었다.
반갑게 내용을 읽다가 바로 진지한 기색을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혹시 뭔가 나쁜 소식이라도?”
헨리의 물음에 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좋은 소식이었으니까.
‘독사의 비자금이 확인되었단 말이지?’
준영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어깨가 멀쩡했다면 정말 어깨춤을 추었을 정도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
한국 전쟁 당시 유엔을 통해 여러 나라들이 우리나라에 구호물자를 보냈습니다.
적십자, 세이브더칠드런, 유니세프, 월드비전 등등 지금도 활동 중인 국제 구호 단체들도 많은 모금과 봉사 활동을 했고요.
그랬던 우리가 반세기가 지난 후에 다른 나라들을 돕고 있으니, 상전벽해라는 게 이런 걸 말하는 거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