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28. 멀리 보는 눈
독사의 비자금.
준영은 일전에 김창룡에게서 그가 숨겨 놓은 재산 내역과 관련한 정보 일체를 자백받았다.
그래서 이억관이 한국으로 갈 때 이 정보를 알려 주고 조사해 보라고 일렀다.
그런데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낼 줄이야!
“뒷마당에 금괴가 묻혀 있었다고요?”
(그렇더라니까. 거기 김창룡의 친척 명의로 된 왜정 때 적산가옥인데, 귀신이 나온다고 소문이 나서 아무도…….)
억관은 자신의 보물찾기 모험에 대해서 늘어놓았다.
(금괴뿐만 아니야. 홍콩은행 가명 계좌에 땅문서와 패물… 거참, 도대체 얼마나 해 처먹은 건지!)
“한 군데서 그 정도면 다른 곳도 어마어마하겠군요.”
(그러게. 진짜 그자가 실토한 대로라면 믿어지지 않을 수준이잖아. 국가 예산의 3퍼센트나 되는 거금을 개인이 치부했다니 말이야!)
잠시 분개하던 억관이 준영에게 말했다.
(근데 말이야. 이거 원칙적으론 국가에 신고해서 환원하는 게 맞을 것 같은데…….)
“어휴! 아저씨, 자유당 놈들이 어떤 놈들인데요. 그거 다 쥐도 새도 모르게 자기들끼리 갈라 먹을 겁니다.”
(그렇지? 안 그래도 귀국해서 알아봤는데 진짜 몹쓸 놈들이더군. 깡패들 동원해서 야당 의원들을 두들겨 패고 말이지.)
이억관도 영 내키지 않았던 모양.
다행이다 싶었던 준영이 곧장 그에게 말했다.
“그냥 우리가 관리해서 좋은 데 쓰죠.”
(그러는 게 좋겠어. 안 그래도 지금 대다수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가난하게 살던데, 도와주면 좋을 게 아닌가 말이야.)
“예. 생활비 지원도 좋지만, 학비 지원을 해 주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가난이 대물림되는 까닭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의 하나는 무지(無知).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은 가족들도 고초를 겪고, 그만큼 고생하다 보니 자녀들의 학업도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교육 지원을 해 주면 그들의 자립은 물론 사회적인 입지도 튼튼히 쌓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렴! 배우는 게 중요하지. 말 나온 김에 장학 재단 설립도 추진해 봐야겠어.)
“예. 아저씨가 알아서 하시겠지만, 라면 공장 세우면 독립운동가 후손들이나 상이용사들 우선으로 고용해 주세요.”
21세기에서 본 드라마가 고증 파괴를 한 게 아니라면 자유당 독재 정권 말기엔 경제 불황 시기였다.
농촌에서는 아사자들이 속출하고, 도시에는 실업자들이 즐비했다.
그런 실정이다 보니, 가난한 독립운동가 후손이나 몸이 불편한 상이용사들이 가장 먼저 고통받고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공장뿐만 아니라 학교 건립도 생각해 봐야겠군. 아, 장학생들 중에 성적이 좋은 학생들은 영국에 유학시켜 주는 건 어때?)
“좋죠. 앞으로 우리나라는 인재가 많이 필요할 테니까요.”
인재는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준영에게도 필요했다.
앞으로 석유왕이 되자면 과학자와 기술자, 그리고 경영인들이 많이 필요했다.
물론 그런 인재들은 영국에서도 충분히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한국인, 그것도 어릴 때부터 직접 키운 인재라면 의리나 충성심이 남다를 게 틀림없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할 일이 정말 많을 것 같군. 그래도 버겁다기보다 얼른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아저씨라면 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 해내고 말겠어. 준영이 자네도 힘내게. 부상당한 몸 잘 추스르고.)
“예, 다음에 또 연락하겠습니다.”
이억관과의 국제전화를 마친 준영은 스마트폰 메모 어플을 켜서 방금 나눈 대화 내용들을 조목조목 기록했다.
한국에서 진행할 일이라지만, 여기서 지원하고 알아봐 줄 일들도 있었으니까.
특히 마지막에 언급한 유학 건이 그랬다.
‘이 시대 해외 유학이면 일본이나 미국이겠지만, 영국도 결코 나쁘지 않아.’
특히 현재 준영이 있는 맨체스터 지역은 산업과 과학이 발전한 곳.
인재를 육성함에 있어 더없이 좋았다.
‘앞으로 한국은 산업화, 고도성장을 해 나갈 거잖아. 그에 필요한 인재들을 내 손으로 키워 내면? 후후후!’
먼 훗날, 한국 경제 발전에 공헌한 공로자로 인정받게 될지 모른다.
그럼 재계 인사들뿐만 아니라 정계의 높으신 분들도 자신에게 굽실대지 않을지?
따르릉!
히죽거리고 있던 준영은 집무실에 울리는 내선 전화를 받았다.
“네, 무슨 일입니까?”
(사장님, 볼턴에서 조셉 포스터 씨가 찾아오셨습니다.)
보고를 받은 준영은 곧장 스마트폰을 품속에 집어넣고 조셉을 맞았다.
“오, 형님, 부상은 좀 어떠세요?”
“통증은 많이 줄었어. 하지만 심심하면 팔이 빠지고 싶지 않거든 한동안 안정하고 있으래.”
“그렇군요. 아무튼 좋아지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잠시 차를 마시며 준영과 담소를 나누던 조셉은 해외 공장 건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해외 공장이라……. 인건비 때문에 그런 거야?”
“네, 아무래도 단가를 맞춰 경쟁력을 키우려면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생각하고 있는 지역이라도 있어?”
준영의 물음에 조셉은 곧장 대답했다.
“일본으로 할까 해요 인구도 많아서 시장 규모도 있고, 한창 경제 부흥 중이라 쓸 만한 노동력도 많다고 들었거든요.”
거기다 거점을 만들면 가까운 동남아 시장으로 진출하기도 용이하다.
하지만 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일본 말고 한국은 어때?”
“한국이요? 거기 전쟁 나서 잿더미가 되었다고…….”
“휴전하고 5년은 지났어. 복구는 어느 정도 되었고, 노동력도 많지. 그것도 일본보다 값싼.”
준영은 이게 좀 무리수라는 건 알고 있었다.
21세기에 남수단이나 아프가니스탄 같은 나라에 공장을 지어 보라고 제의하는 거랑 마찬가지였으니까.
“형님, 인건비가 싸다고 해도 어느 정도 숙련도와 기술력은 있어야 해요. 일본제 운동화의 경우엔 값도 싸지만 품질도 좋다고 평가받고 있어요.”
“한국 사람들도 손재주는 좋아.”
짝퉁 브랜드를 한참 찍어 낼 때도 진퉁 브랜드 관계자가 한국판 짝퉁의 품질은 진퉁이랑 다르지 않다고 감탄했을 정도다.
“그리고 너 일본에 인맥 있냐? 아시아에서는 그런 거 엄청 따지는데?”
“그건…….”
“일본제 운동화 벌써 평가 좋다며? 그만한 역량을 가진 놈들이 외국 업체가 자기 나라에 들어와서 사업하는 걸 과연 곱게 볼까?”
그에 반해 현재 산업의 황무지인 한국은 해외에서 투자나 사업을 하겠다고 오면 쌍수를 들고 반길 상황이다.
거기다 회사 대표 중의 한 사람이 현재 한국인들이 열광하는 스포츠 스타 이준영이라면?
“숙련도와 기술력만 있으면 되지? 내가 한국 쪽에 만족할 만한 인재나 협력 업체를 찾아서 추천해 줄게. 없으면 네 뜻대로 하고.”
“알겠습니다. 그럼 형님을 믿고 기다려 보겠습니다.”
조셉은 준영과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누고 돌아갔다.
그가 떠난 후, 준영은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한국에 있는 이억관에게 연락해서 조셉이 만족할 만한 인재와 업체를 찾아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쩝, 아직 제화나 의류 쪽은 한국에 진출시킬 생각은 없었는데…….”
사실 ‘일해라, 핫산!’ 아니 ‘일해라, 혼다!’ 식으로 착취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지만, 섬나라에게 좋은 일을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영국의 자본과 기술 수혜를 얻을 기회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부디 잘 풀렸으면 좋겠군.’
자기 자신도, 그리고 덩달아서 한국도.
준영은 모두 만족할 만큼 잘 풀리기를 기원했다.
***
1958년 4월 7일 로커 파크.
5만 관중들의 함성이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필드에서 양 팀이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홈팀인 선더랜드, 그리고 원정 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여전히 오른팔 보호대를 벗지 못한 준영은 지미 머피 코치의 곁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느긋하게 감상할 만한 상황이 못 되었다.
“생각보다 경기가 꼬여 버렸어.”
후반전 30분을 넘긴 가운데 양 팀의 스코어는 1 대 1.
맨유는 전반 17분에 선제골을 내줬다.
혼전 상황에서 공격수들만 쫓다가 미드필더 암브로스 포가티의 슛을 막지 못했던 것.
이후 맨유는 반격을 펼쳤지만, 골 운이 따르지 않았다.
바비 찰튼의 중거리 슛이 크로스바를 맞고 나오질 않나, 일대일 상황에서 골키퍼의 선방에 막혀 버리질 않나.
아쉽고 답답한 양상이 전반전 내내 이어졌다.
그러다 전반 41분, 마침내 동점 골이 터졌다.
부상에서 복귀한 케니 모건스가 측면에서 날카롭게 올려 준 크로스를 콜린 웹스터가 멋진 다이빙 헤딩슛으로 선더랜드의 골망을 흔들었다.
그렇게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리고 후반전에도 여세를 몰아 선더랜드 골대를 두들기고 있지만, 역전 골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거참, 강등권 팀인데 왜 이리 고전하는지…….”
“강등권이니까 그렇지. 순순히 2부로 떨어질 맘이 없을 테니까.”
벌써 4월 초.
리그 일정이 막바지로 치닫는 가운데, 선두권과 강등권의 다툼은 무척 치열해졌다.
전자는 우승을, 후자는 잔존을 위하여.
강등권인 선더랜드는 이틀 전 버밍엄 시티와의 경기에서 1 대 6의 참패를 당했다.
이전에도 이 정도의 참패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건 전부 원정 경기였다.
홈에서 여섯 골을 내주며 참패를 하자, 팬들의 울화통은 히로시마 원폭처럼 폭발해 버렸다.
“저 녀석들, 오늘 경기까지 지면 진짜 위태로워.”
“딱하긴 하지만, 우리도 승리가 고픈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준영의 말대로 지금 맨유는 승리에 굶주린 상태였다.
그가 부상으로 이탈한 후, 맨유는 수비 중량감이 눈에 띄게 떨어져 버렸다.
동양의 거인이 사라졌다는 것에 고무된 상대 팀은 거침없이 공격해 들어왔다.
그 바람에 앞선 네 경기에서 2무 2패.
결국 위태롭게 지키던 1위 자리는 울버햄프턴에게 빼앗겨 버렸다.
‘결과야 어떻든 경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
3월 마지막 날 아스톤 빌라와의 경기가 정말 아쉬웠다.
콜린의 선제골로 잘 나간다 싶더니 전반 35분, 후반 20분에 연달아 골을 내주며 2 대 1로 끌려갔다.
그러다 알렉산더 도슨의 골로 동점.
거기서 무를 캐고 돌아갈 줄 알았는데, 추가 시간에 통한의 실점을 해 버렸다.
‘현재 2위인 프레스턴 노스 엔드를 상대로도 잘 싸웠지.’
프레스턴의 공격수 톰 피니.
영국 축구계에서 전설적인 선수인 그를 상대로 실점하지 않고 잘 버텼다.
문제는 이쪽도 골을 넣지 못했다는 점.
결국 그 경기는 0 대 0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다.
“리그 우승은 어렵게 되었다지만, 그래도 무승은 좋지 않아요. 승리를 거둬야 자신감이… 야, 달려! 빨리 달려가, 케니!”
준영은 머피와 대화하다 말고 필드를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흥분이 안 될 수가 없다.
역전의 기회가 왔으니까.
방금 전 빌이 헤딩으로 끊어 낸 공을 프레디 굿윈이 선더랜드 진영으로 잽싸게 달려가는 케니에게 패스로 찔러 주었다.
준영은 처음에 그게 오프사이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선심이 기를 들지 않았고, 심판도 휘슬을 불지 않았다.
선더랜드 쪽만 낯빛이 파리하게 질렸다.
‘이건 절대 놓치면 안 돼!’
이러한 준영의 마음을 대변해 주기라도 하듯, 케니는 순식간에 상대 페널티 박스로 달려 들어갔다.
***
벼랑까지 몰리면 없던 힘도 생기게 마련인데, 강등권에서 끈덕지게 버티다 살아남는 팀들이 있습니다.
결국 2부로 떨어져 버렸지만 끈질기게 버텼던 분데스리가의 함부르크, 한때 생존왕으로 명성을 날린 EFL의 위건 애슬레틱이 대표적이지요.
우리나라 K리그에서는 인천 유나이티드가 있습니다. 뭐, 올해는 생존왕답지 않게 초반부터 잘나가고 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