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90화 (90/400)

Round 90. 발칸의 붉은 별

바비 찰튼의 결승 골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원정에서 값진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리즈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왜 그래, 리즈? 리즈(Leeds)를 이기고 와서 거북한 거야?”

“할아버지나 하는 썰렁한 말장난 하지 말아요.”

리즈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건 준영이 또 부상을 입고 돌아왔기 때문.

지난번 루턴 타운과의 경기 때도 눈두덩이가 찢어져서 오더니, 오늘도 이마에 붕대를 감고 돌아왔다.

“괜찮아. 이 정도는 경기하는 데 문제도 없고…….”

“머리를 다친 거잖아요! 그러다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본인이 사고를 겪어 봤기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준영도 그녀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안심해. 귀가하기 전에 병원에서 검사도 받았으니까. 두통이나 어지럼증이 계속 있는 게 아니면 괜찮대.”

“그래도 크게 흉이 질 거잖아요.”

“이런 흉터야 훈장 같은 거지.”

“손에 남은 상흔처럼 말인가요?”

리즈는 준영이 내보인 손을 바라보았다.

손가락에 뚜렷하게 남아 있는 저 상흔은 준영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애쓰다 생긴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깨문 거라고 하지만, 하마터면 그의 손가락을 잘라 버릴 뻔했다.

“이거? 이건 정말 영광의 상처지. 여왕님의 간택을 받은 증거 같기도 하고.”

“낯간지러운 소린 그만해요.”

“혓바닥은 하나도 다치지 않아서 말이지. 그리고 리즈는 정말 나의 여왕님인걸.”

만약에 리즈가 없었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게 훨씬 더 힘겨웠을 것이다.

과거의 어둠을 극복하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외로움도 더 컸을 테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물론이지요, 폐하.”

“알았어요. 그럼 준의 여왕으로서 명령할게요. 앞으로 절대 다치지 마세요.”

“Yes, Your Majesty.”

준영은 예전에 외화에서 봤던 것처럼 무릎을 굽히며 정중히 예를 취했다.

이에 살짝 허리를 굽힌 리즈는 붕대를 두른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부디 얼른 낫기를, 다시는 다치지 않길 기원하면서.

***

1958년 1월 14일 화요일.

유러피언 컵 8강 1차전이 올드 트래퍼드에서 열렸다.

상대는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라고도 불리는 이 팀은 현재 유고슬라비아 리그 2연패 우승 팀이다.

“달려라, 유나이티드!”

“발칸 반도 촌놈들 따위 박살 내 버려!”

6만여 명의 홈 관중들은 열광적인 응원을 보냈다.

그러나 붉은 줄무늬 유니폼을 걸친 츠르베나 즈베즈다, 레드 스타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경기 초반부터 과감하게 공세를 펼쳤다.

선수필승(先手必勝).

선제공격에 성공하면 이길 수 있다고 보았지만, 거인이 지키고 있는 유나이티드 골문은 견고했다.

‘큭, 뿌리치기 쉽지 않구만.’

레드 스타의 주장이자, 주전 공격수인 라이코 미티치는 슛 찬스조차 허락하지 않는 준영의 마크에 치를 떨었다.

몇 차례 페인팅을 시도하며 제치려 했지만, 속아 넘어가기는커녕 이쪽의 슈팅 각도만 더 없어졌다.

결국 미티치는 뒤쪽에 있는 동료에게 공을 돌리고 말았다.

‘방심해선 안 돼. 생각보다 발재간이 좋은 놈들이 많아.’

오늘 로저 바인, 빌 포크스와 함께 3백을 이루고 있는 준영은 상대 선수들의 움직임을 연방 체크했다.

방금 전 라이코 미티치는 물론, 지금 공을 잡고 있는 드라고슬라브 셰쿨라리치도 그랬다.

이 20살의 젊은 미드필더는 상당한 준족에 뛰어난 개인기를 갖추고 있었다.

마크를 붙고 있는 에디 콜먼을 잽싸게 제쳐 내더니, 과감하게 맨유 문전을 향해 쇄도해 들어왔다.

“패스!”

빈 공간으로 파고든 미티치의 요청에 셰쿨라리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돌파를 계속했다.

그러나 빌 포크스의 태클에 막혀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그 광경을 본 미티치는 벌컥 화를 냈다.

“야 이 멍청아! 패스하라고 했잖아!”

“내 쪽이 공격하기 더 유리했다고요.”

유고 말을 알아듣진 못했지만, 준영은 둘의 사이가 꽤 나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셰쿨라리치의 플레이는 지나치게 개인적이었다.

동료에게 패스는 거의 안 해 주고, 자신이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탐욕 쩌는구만, 저놈. 저래서는 자기 능력의 반도 못 쓰지.’

패스라는 수단을 잘 활용해야 수비를 애먹게 만드는 변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자기 개인기나 스피드만 믿고 들입다 돌파만 하려니 제대로 되지 않을 수밖에.

그와 달리, 비슷한 또래인 바비 찰튼이나 던컨 에드워즈는 탐욕에 빠지지 않았다.

바비는 돋보이려고 들기보다 헌신적인 활동력으로 동료들을 뒷받침해 줬고, 던컨 역시 기회가 오면 멋진 패스로 공격의 활로를 열었다.

‘하지만 아직 골이 없군.’

최전방에서 데니스 바이올렛이나 토미 테일러가 찬스가 날 때마다 슛을 날렸지만, 득점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레드 스타의 골키퍼 블라디미르 베아라가 엄청난 반사 신경으로 죄다 선방해 버렸기 때문.

“이 자식, 어디 언제까지 막을 수 있나 보자!”

측면의 알버트 스캔론에게 패스를 주고 상대 골문 앞으로 들어갔던 데니스는 리턴 패스가 들어오기 무섭게 발리슛을 때렸다.

쏜살같이 골대로 날아간 그 슈팅은 베아라의 손에 맞고 튕겨 났다.

그 리바운드 볼을 토미 테일러가 재차 헤딩으로 밀어 넣었지만, 이번에도 껑충 뛰어오르며 선방에 성공했다.

“아니,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공격 지원을 위해 다소 전진해 있었던 준영은 베아라의 연속 선방 쇼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치 온몸이 스프링으로 된 것처럼 탄력 있는 선방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저 정도면 맨체스터 시티의 레전드 버트 트라우트만에 필적할 수준이겠어.’

아니, 트라우트만은 부상을 당한 후 전진하거나 혼전 상황에서 과감함이 줄어들었지만, 베아라는 그런 것도 전혀 없었다.

특히 공중볼을 처리할 때 보이는 점프력은 확실히 트라우트만보다 위였다.

“블라디미르 베아라, 다시 봐도 정말 놀라운 골키퍼로군.”

“유고슬라비아 최고의 수문장이니까 말이죠.”

버스비 감독과 머피 코치는 과거 베아라의 플레이를 본 적이 있었다.

1950년 11월의 일이었는데, 당시 유고슬라비아가 웸블리에서 잉글랜드 대표팀과 친선전을 벌였을 때 출전했다.

그때 베아라는 놀라운 선방을 보여 주며 경기를 무승부로 끝냈다.

“그때 경기처럼 비겨서는 곤란한데…….”

“걱정 마십쇼. 지금 우리 애들은 그때 당시 잉글랜드 대표팀보다 강하니까요.”

머피의 자신만만한 표정에 버스비도 웃음을 지었다.

“그래, 우리 선수들은 절대 약하지 않지.”

고전하고 있지만 어떻게든 저 철벽 수문장을 뚫을 길을 찾아내리라.

그동안 치렀던 수많은 승부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

전반전은 양 팀 모두 비등비등한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레드 스타에겐 운이 좀 따랐다.

전반 35분에 얻은 코너킥, 그리고 그 이후 벌어진 문 앞의 혼전 상황에서 레드 스타의 하프백 라자르 타시치가 마수걸이 골에 성공했던 것.

그야말로 찬물을 확 끼얹은 듯한 기분.

하지만 준영과 유나이티드 선수들은 기가 죽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그 마수걸이 골을 제외하면 레드 스타 녀석들의 공격은 별다른 영양가가 없으니 말이지.’

오히려 선제골로 우쭐해져서일까. 셰쿨라리치의 탐욕은 더욱 심해졌다.

미티치나 다른 공격수들에게 찬스 상황이 일어났음에도 고집스럽게 돌파와 슛을 시도하다 허무하게 기회를 놓쳤다.

“이 빌어먹을 애송이 자식! 그따위로 하려거든 당장 꺼져! 네놈이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나으니까!”

전반전 종료 직후, 주장 미티치는 참다못해 폭언을 퍼부었다.

이기고 있는 팀의 분위기가 서먹해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하긴 무리도 아니지. 제대로 패스만 밀어 줬어도 득점을 2∼3골은 더 넣을 만한 찬스가 만들어졌을 테니까.’

아무튼 상대의 저런 불화는 유나이티드 입장에선 이득.

머피 코치도 냉큼 이 점을 간파하고 하프타임 때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상대 공격진이 분열된 만큼, 우린 수비에 더 여유를 둘 수 있어. 그러니 공격 쪽의 숫자를 더 늘린다.”

선수들도, 코칭스태프도 홈에서 질 생각은 깨알만큼도 없었다.

자존심은 물론 명분도 걸려 있으니까.

유러피언 컵 출전 문제로 협회와 척을 지다시피 했는데, 성적이 나빠서는 곤란했다.

“리틀 존, 후반전에선 보다 전진해서 공격 지원을 하도록.”

“Yes, Sir. 맡겨만 주십쇼.”

하프타임이 끝나고, 양 팀 선수들이 다시 필드로 나왔다.

라커룸에서 감독에게 잔뜩 혼났는지, 셰쿨라리치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단순히 시무룩한 수준이 아니라 불만이 많은 표정이었다.

“저 녀석, 후반엔 외따로 놀겠는걸.”

“본인이 마음을 고쳐먹지 않으면 그렇게 되겠지.”

던컨의 예상에 준영은 동의했다.

사실 교체 규정만 있으면 저런 탐욕쟁이는 바로 강판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축구는 선발로 나간 11명이 끝까지 책임지고 경기하는 방식.

그렇다 보니 레드 스타 감독도 선수를 빼는 강수를 쓰진 못했다.

한 명이 줄어드는 게 얼마나 불리한지 알고 있으니까.

허수아비가 되더라도 필드에 세워 두는 게 낫다고 본 것이다.

물론, 허수아비가 정신 차리고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고.

‘역시 쟤한테는 공을 잘 안 주는구나.’

후반전이 시작되자, 레드 스타는 주로 미티치와 미드필더 포포비치를 중심으로 공격을 펼쳐 나갔다.

셰쿨라리치 쪽으론 거의 패스가 가지 않았다.

이따금 개심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셰쿨라리치가 이를 허망하게 날리며 기대를 저버렸다.

‘좋아, 이렇게 상대 공격이 무뎌졌다면……!’

확인을 마친 준영은 지시받은 대로 전진 플레이에 나섰다.

강한 압박으로 인터셉트를 시도하며 레드 스타의 공격을 끊는 한편, 곧바로 전방에 있는 동료들에게 패스를 찔러 주었다.

그러자 점점 맨유 쪽의 볼 점유율이 높아졌고, 찬스도 그만큼 늘어났다.

당연히 레드 스타의 수비진도 불안하게 흔들렸다.

“일단 한 골만 제대로 넣자!”

“그래, 하나가 들어가면 두 개째는 쉬우니까!”

유나이티드 선수들이 계속 기대와 의욕을 불태우는 가운데, 준영이 후방에서 빼앗아 건넨 공이 에디 콜먼의 발을 거쳐 바비 찰튼에게 연결되었다.

힐끔 문전을 바라보았던 바비는 과감하게 슛을 날렸다.

‘오른쪽……!’

베아라는 바비의 슈팅 자세를 보고 곧장 몸을 날렸다.

하지만 수비수 제코비치의 무릎에 굴절된 슛은 그의 예상과 정반대인 왼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골이다! 골!”

“이제 좀 재미있겠구만!”

후반 20분, 올드 트래퍼드가 크게 들썩였다.

이제나저제나 골을 기다리던 관중들이 일거에 함성을 쏟아 낸 것이다.

“가라, 유나이티드!”

“할 수 있어! 역전할 수 있다고!”

경기장 분위기가 끓어오르면서 전세는 순식간에 유나이티드 쪽으로 기울어졌다.

후반 25분에는 토미 테일러의 헤딩슛이 골대 위로 살짝 넘어갔고, 3분 후에는 데니스 바이올렛이 감아 찬 슛을 베아라가 가까스로 쳐 냈다.

이후에도 맨유는 볼을 계속 소유하며 레드 스타의 골대를 연방 두들겨 댔다.

하지만 레드 스타의 최후의 보루인 베아라가 연속 선방으로 이를 죄다 막아 냈다.

“정신 차리고 집중해! 아직 기회는 남아 있어!”

“침착하게! 패스 하나만 잘 찔러 넣어 보자고!”

베아라의 선방에 레드 스타 수비수들은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그때, 측면에서 공을 끊어 낸 제코비치의 눈에 중앙선 바로 아래에 있던 셰쿨라리치가 보였다.

‘맘에 안 드는 녀석이다만…….’

이 상황에서는 믿을 수밖에!

이미 맨유 진영으로 뛰어갈 준비를 마친 셰쿨라리치에게 제코비치는 곧장 패스를 보냈다.

***

라이코 미티치는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홈구장 이름으로 남았을 정도로 팀에 많은 헌신을 한 선수라고 하네요.

블라디미르 베아라는 야신이 절찬을 했을 만큼 상당한 실력자였고요.

드라고슬라브 셰쿨라리치는 상당히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이기적인 플레이 때문에 평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 나중에 우리나라에 와서 부산 대우 로열스(現 부산 아이파크) 감독을 맡기도 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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