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91. 사고방식의 차이
‘Chance!’
공이 오는 순간, 셰쿨라리치의 머리에 딱 떠오른 영어 단어.
지금 맨유 진영에 남아 있는 수비수는 둘뿐이다.
그나마 상당히 전진해 있었기에, 공만 제대로 오면 골문까지는 무인지경.
‘할 수 있어! 이 경기의 승리는 내가 결정한다!’
그럼 콧대 높은 주장이나 감독도 큰소리를 못 치겠지.
잔뜩 기대와 의지를 부풀리며 날아오는 공을 바라보던 셰쿨라리치.
그의 앞으로 갑자기 커다란 덩치가 떡 막아섰다.
‘이, 이놈은…….’
등 번호 5번.
버스비의 이단아로 불리는 장신의 동양인 선수.
오늘 숱하게 주장과 동료 공격수들을 막았던 녀석이 순식간에 달려와서는 헤딩으로 공을 끊어 냈다.
“야 이 자식아, 그 공은 내 거라고!”
셰쿨라리치는 황급히 공을 빼앗으려 했다.
성급한 마음에 달려든 그는 준영을 밀쳐 내려다 되레 부딪쳐 나동그라졌다.
“크엑!”
바위에 부딪친 느낌이 이럴까.
힐끔 뒤를 돌아봤던 준영은 아무렇지 않은 투로 레드 스타 골대를 향해 공을 몰고 갔다.
“큰 원숭이가 오는데?”
“멀뚱히 보고 있지 말고 앞으로 나가서 막아!”
당황했는지, 수비수 셋이 동시에 접근해 왔다.
하지만 준영은 신경 쓰지 않고 골대를 향해 그대로 중거리 슛을 날렸다.
뻐엉-
무시무시한 소음이 뛰어나오던 수비수들의 고막을 흔들었다.
그들에게 섬뜩한 기분을 안겨 주고 지나친 무회전 슛은 순식간에 골키퍼 베아라를 향해 날아갔다.
‘정면? 아니, 왼쪽!’
베아라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쭉 뻗은 왼손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마치 몽둥이로 손바닥을 세게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막아 냈…….’
안도하던 베아라의 표정이 구겨지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의 얼어붙은 시야에 리바운드 볼을 향해 몸을 던지는 에디 콜먼의 모습이 비쳤다.
한동안 주전 경쟁에 밀려나 있다 다시 기용된 그는 이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드디어 들어갔다!”
“그래, 이래야 유나이티드지!”
후반 36분, 에디 콜먼의 다이빙 헤딩 역전 골.
종료까지 10분여 남은 상태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경기를 뒤집어 놓았다.
하늘까지 날아오를 듯이 방방 뛰는 유나이티드 선수들과 달리, 레드 스타는 거친 숨을 토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피로가 그들을 무겁게 짓눌렀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만회할 시간은 아직 있다!”
주장 미티치가 선수들의 기운을 북돋았지만, 그의 말은 꺼져 가는 불씨를 되살리기엔 부족했다.
미티치도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유일한 방법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것뿐!’
이에 그는 킥오프가 되자 남은 힘을 짜내 맨유 진영으로 달려갔다.
골을, 아니 골을 기대할 만한 기회라도 만들어 내자!
그러면 꺼져 가는 붉은 별의 투지도 다시 불타오를 테니까.
하지만 이런 의욕에 제대로 호응하는 동료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 이를 악물고 뛰는 녀석이 한 놈 있었다.
드라고슬라브 셰쿨라리치.
제멋대로 날뛰며 수없이 기회를 날려 먹은 애송이 녀석은 맨유 선수가 가로챈 공을 재차 뺏어 내며 반격을 시도했다.
‘멍청한 녀석, 혼자서는 무모하다니까!’
내심 질책하던 미티치는 셰쿨라리치와 눈빛이 마주쳤다.
뭔가 통하는 느낌.
그가 빈 공간으로 파고들자, 셰쿨라리치의 송곳 같은 패스가 정확히 전달되었다.
‘이 녀석, 하려고 들면 할 수 있잖아!’
‘동점 골은 양보하지. 하지만 역전 골은 내가 넣을 거야!’
셰쿨라리치도 이대로 무력하게 패해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만들어 준 절호의 찬스.
미티치는 슈팅 각을 좁히는 해리 그렉 골키퍼를 상대로 오른발 칩슛을 날렸다.
‘들어갔… 아니!’
골키퍼의 키를 넘기며 골대 안으로 떨어지던 칩슛을 비호같이 달려든 동양인이 헤딩으로 걷어 냈다.
깜짝 놀란 셰쿨라리치가 리바운드 볼을 잡으려 했지만, 던컨 에드워즈가 그를 막아서서 공을 차지했다.
“가자, 존! 추가 골 넣자고!”
“오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준영은 공을 몰고 가는 던컨의 뒤를 쫓았다.
레드 스타의 마크를 피해 전방의 데니스, 토미 테일러와 패스를 주고받은 던컨은 수비수들을 끌고 가다 중앙으로 슬쩍 볼을 흘렸다.
그리고 그 볼을 준영이 벼락같이 때렸다.
“우와아아아-!”
광선처럼 좍 뻗어 간 준영의 슈팅이 골대 왼쪽 구석에 정확하게 꽂혔다.
베아라가 힘껏 몸을 날려 봤지만, 이번엔 그의 손이 닿지도 못했다.
“최고다, 존 Y. 리!”
“저 녀석 슈팅은 진짜 가슴을 후련하게 만든다니까!”
준영의 통쾌한 추가 골은 올드 트래퍼드를 용광로처럼 뜨겁게 끓어 올렸다.
야심 차게 축구 종가 원정에 나섰던 발칸의 붉은 별은 그 뜨거운 열기 앞에 빛을 잃었다.
***
“버스비 감독님, 오늘 경기 소감을 말해 주시죠!”
“오늘 경기 역전의 발판에 대해서…….”
“2차전 베오그라드 원정은 어떻게 계획하고 계십니까?”
유러피언 컵 8강 1차전을 통쾌한 역전승으로 끝낸 후, 버스비 감독과 오늘 경기 수훈 선수들은 인터뷰를 하며 소감을 밝혔다.
실점을 막고, 추가 골을 넣은 준영도 몇 마디 소감을 이야기하고 나왔다가 구단 직원의 부름을 받았다.
“무슨 일입니까?”
“리 선수 앞으로 전화가 왔어요. 애S턴 마틴의 브라운 회장님이라는데요?”
준영은 황급히 전화기 앞으로 달려가 브라운과 통화했다.
“예, 회장님. 접니다. 오늘 경기요? 이겼죠. 골도 넣었고요.”
(그래? 축하하네. 마침 소식을 전하기도 딱 좋게 되었군.)
“소식이라면 혹시 지난번에 말씀하신 그건가요?”
(맞아, 전용기 건이야.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통과를 허락했네.)
‘나이스!’
반가운 소식에 준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이제 불길한 뮌헨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
(비행 스케줄은 로마를 경유할 계획인데 괜찮지?)
“네, 뮌헨만 아니면 됩니다.”
(알았어. 그럼 준비할 테니, 이제 걱정 말고 훈련이나 열심히 하라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회장님!”
나중에 찾아가서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 자동차 쪽과 관련해서 미래의 정보를 선물로 주는 것도 괜찮겠지.
통화를 마친 준영은 곧장 버스비 감독을 찾아갔다.
안 그래도 좀 전에 베오그라드 원정과 관련해 기자의 질문이 있었다.
그때 버스비는 협회나 구단 관계자들과 상의해서 원정 경기를 무리 없이 치르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직 정확히 계획이 잡힌 건 아니다.
더구나 웨일즈 대표팀 감독을 겸하고 있는 지미 머피 코치는 2월 일정이 빡빡해서 원정에 참여할 수 없는 등의 난제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 준영은 이 소식을 들으면 버스비 감독도 기뻐할 것이라 보았다.
“전용기를 빌렸다고?”
“예, 애S턴 마틴의 데이비드 브라운 회장님이 무상으로 빌려 주신답니다.”
“호의가 고맙긴 하네만, 그 사람이 왜……?”
“제가 그분과 친분이 있어서 요청했죠.”
분명히 기쁘긴 하다.
하지만 버스비는 의구심이 가시지 않았다.
아무리 친분이 있다곤 하지만 비행기를, 그것도 선수단이 탈 수 있는 대형 항공기를 선뜻 빌려 준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
더구나 무상이라니?
그것도 그렇지만, 준영이 요청했다는 점도 그랬다.
다른 선수들과 달리 그가 유러피언 컵 원정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설 줄이야!
“존, 자네가 이렇게 신경을 쓰는 이유가 뭔가?”
“그야 컨디션 조절하기 좋으니까요. 중간에 환승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데다 시간도 단축되죠.”
“겨우 그것 때문에……?”
“겨우라뇨! 협회가 일정 변경 안 해 준다면서요? 어떻게든 손을 쓰는 게 맞잖아요.”
“그래, 그렇지만… 그래도 좀 지나친 것 같네.”
버스비의 말에 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부족한 것보다 지나친 게 낫습니다. 감독님도 선수들이 경기에만 전념할 수 있는 걸 바라시잖아요.”
“그래, 그렇지.”
“부담 가지실 필요 전혀 없어요. 혹시 일개 선수인 제가 멋대로 나서서 거북하신 건가요? 그럼 사과하겠습니다.”
“아냐, 아니야. 거북하다니.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선수가 경기나 훈련이 아닌 이런 일로 신경 쓰게 만들다니!
지도자와 행정가들의 잘못이 크다.
그런 생각 때문에 버스비는 준영의 호의를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
“맙소사, 전용기를 빌렸다고?”
버스비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하드먼 회장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경기에 전념할 수 있게, 컨디션을 최고로 유지할 수 있게 무엇이든 한다는 생각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동차 회사 회장에게 부탁해서 비행기를 빌렸다고?”
“무상으로 빌렸다고 하는데, 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존이 따로 대가를 지불했을 것 같더군요.”
“승리와 우승을 위해서 말이지? 거참, 사고방식 자체가 우리와는 다른 것 같군.”
“우리가 구식일지 모르죠.”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같은 나라들은 축구단 지원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선수들의 급료 제한 같은 것도 없고, 뛰어난 선수는 거금을 들여서라도 영입했다.
그 점은 공산 국가들조차도 마찬가지다.
선수들이 최상으로 전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정부와 당에서 아낌없이 지원을 한다고 들었다.
“어쩌면 그렇게 사고방식이 다르니 녀석이 사업도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르지.”
“하긴, 회장님도 존 덕분에 한몫 챙기셨지요?”
“허허허, 후회하고 있네. 그 녀석이 라면인지 뭔지 사업 시작할 때 더 투자하는 건데…….”
최근에 준영은 음식 사업으로 엄청난 돈을 쓸어 담고 있었다.
그레이트 맨체스터 인근에서 치킨 누들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고, 올드 트래퍼드 경기 때 튀긴 닭, 치킨을 먹는 건 불문율로 되어 있다.
오늘 경기에는 경기장 스낵바에서 호떡과 회오리 감자라는 신상품을 내놨는데, 이 역시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치킨보다 값이 훨씬 저렴하면서도 맛있었으니까.
“그뿐만 아니라 몇몇 상품이나 광고 특허권으로도 꽤 많은 수익을 얻고 있단 얘기가 있더군.”
“광고라면 그 경기장에 세워진 간판 말입니까?”
“맞아. A보드 광고판 그거 말일세.”
“저도 섕클리에게 들었는데, 허더스필드에 있을 때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존 Y. 리의 수완이 남다르다 보니, 신문에 스포츠 선수가 아니라 사업가로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그렇게 벌어들이는 만큼 씀씀이도 큰 모양이더군.”
“딱히 사치를 부리거나 쓸데없이 탕진하진 않던데요? 뭐, 비싼 차를 타고 다니긴 하지만요.”
선수들에게 곧잘 한턱 쏘는 건 물론, 유소년 선수들의 장비 지원을 하는 데도 후했다.
심지어 가정환경이 어려우면 생활비도 지원해 줬다.
입단할 때 약조했던 그대로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기술 학교 장학금도 지원한단 얘기도 있고, 성당을 통해서 부랑자들에게 식사도 제공해 준다고 하더군요.”
“그게 완전 선의는 아니라고 하더군. 그 라면이란 상품을 홍보할 목적이라니까.”
“어쨌든 좋은 일을 하는 건 사실이죠. 덕분에 평판도 좋고요.”
그래서 입단 때만 해도 노란 원숭이를 데려왔다고 불만을 토로하던 여론도 많이 사라졌다.
실력이 뛰어나기도 하지만, 이렇게 이웃에 친절을 베푸는 선수를 어떻게 배척하겠는가.
***
최인호 작가님의 소설 ‘상도’에 나오는 말이 있죠.
장사란 이득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남기기 위한 거라고.
사람을 남겨야, 민심을 얻어야 사업이 번창한다는 건 실제 허쉬 초콜릿의 초대 회장인 밀튼 스네이블리 허쉬나 우리나라 유한양행의 유일한 회장님이 증명하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