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89. 난형난제
선제골을 내준 리즈 유나이티드는 동점을 만들기 위해 공격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과정에서 호레이쇼 감독은 과감한 수를 썼다.
“잭, 전진해서 공격을 지원해!”
잭 찰튼의 전진 배치.
단순히 미드필드 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다.
리즈 쪽이 공을 확보하면 재빨리 공격 지역으로 달려 들어갔다.
‘오버래핑이로군.’
맨유 진영 바깥쪽의 빈 공간을 파고드는 잭의 움직임. 21세기에는 흔한 오버래핑이다.
1958년 시점에도 없지는 않고, 유나이티드도 곧잘 써먹곤 했다.
문제는 잭이 안목도 뛰어나고 움직임도 빠르다는 점.
그에게 패스가 넘어가자, 아주 섬찟한 상황이 펼쳐졌다.
측면에서 막아서던 마크 존스의 차징을 이겨 내고 페널티 박스 안으로 과감히 침투해 들어온 것.
“저런!”
준영과 던컨이 부리나케 수비 라인으로 내려왔다.
슛? 아니면 패스?
잭의 선택은 슈팅이었다.
뻐엉-!
벼락같이 날아온 슈팅을 해리 그렉이 몸을 날려 쳐 냈다.
공중으로 둥실 날아오른 공을 두고, 양 팀 수비수와 공격수들이 뒤엉켜 뛰어올랐다.
“잡아!”
“밖으로 걷어 내야 해!”
준영이 낙하지점을 확보하고 뛰어오른 순간, 리즈의 공격수 샘 또한 몸을 날렸다.
‘아니, 이 폭탄 머리가……!’
준영의 어깨를 손으로 짚은 샘이 먼저 공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하지만 다소 성급했던 그 슈팅은 골대를 훌쩍 넘어갔다.
아찔한 위기를 넘긴 맨유 선수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준영은 안도하고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방금 저 자식, 반칙했다고요! 내가 못 뛰게 팔로 눌렀단 말입니다!”
“어쨌거나 안 들어갔으니 된 거 아닌가.”
준영의 항의를 심판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따로 샘에게 구두 경고를 하거나 그런 것은 없었다.
‘쳇, 홈 어드밴티지냐.’
어느 정도는 감수할 수 있지만, 볼턴전에서처럼 터무니없게 판정하지 않기를.
경기는 맨유의 골킥으로 재개되었다.
해리 그렉이 멀리 내찬 공을 토미 테일러가 받아 내려는 순간, 뒤에서 강하게 부딪친 잭 찰튼이 공을 곧장 라인 밖으로 내보냈다.
“이 자식, 아프잖아!”
“그래서? 집에 가서 엄마한테 이를 거냐?”
잭은 거칠지만 적극적인 마크로 유나이티드의 공격을 끊어 냈다.
그 사나운 마크는 동생인 바비 찰튼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잔재주론 어림도 없어!”
“떠들지만 말고 어디 뺏어 보라고!”
잭의 차징에 밀렸던 바비는 연거푸 가해지는 압박을 드래그 백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이건 그 동양인이 썼던 헝가리 테크닉이잖아!’
동생도 한 수 배웠던 걸까.
움찔해서 살짝 중심이 무너졌던 잭은 길게 다리를 뻗어 발끝으로 공을 걷어 냈다.
그리고 그 공이 라인을 넘어가자마자 전반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길게 울렸다.
“일단 1 대 0인가.”
스코어보드를 힐끔 바라봤던 준영은 라커룸으로 발길을 돌렸다.
리드한 상태로 전반을 끝냈지만, 이 점수가 끝까지 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리즈 쪽의 기세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으므로.
***
준영의 예상대로 후반전이 시작하자마자, 리즈 쪽에서 과감한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공만 잡으면 끈덕지게 양 측면의 빈 공간과 최전방의 닐스를 향해 롱 패스를 날렸던 것.
그런 단순한 공격은 대부분 끊어 낼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엔 꽤 위험한 상황이 일어나곤 했다.
“또 롱 패스다!”
“젠장, 지긋지긋하군!”
샘을 마크하는 빌 포크스는 재빨리 낙하지점을 선점한 다음, 자세를 낮추며 접근하는 샘을 밀어냈다.
몸을 낮추면 그만큼 무게 중심이 낮아지기 때문에 버티기 쉽다.
이는 팀 자체 연습 경기에서 준영과 부딪쳐 보면서 알게 된 노하우였다.
“좋아, 공을 잡아 냈… 앗!”
가슴으로 떨어지는 볼을 받아 내던 빌이 뒤로 벌렁 자빠져 버렸다.
등 뒤에서 밀치던 샘이 갑자기 물러서면서 중심을 잃어버렸던 것!
그 과정에서 흘린 공은 리즈의 휴 베어드가 잽싸게 낚아챘다.
“잘했어, 샘!”
“이런 맙소사!”
준영이 황급히 수비에 가세하려 내려왔다.
그런데 휴 베어드를 따라 달려가고 있던 샘이 힐끔 돌아보다 준영의 진로를 슬쩍 막았다.
‘어쭈, 이놈 봐라?’
대놓고 붙잡거나 막아서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영리하게 준영의 앞을 막으며 수비 가세를 지연시켰다.
그사이 단독 찬스를 잡은 휴 베어드는 그대로 유나이티드의 골문에 슛을 박아 넣었다.
“오, 들어갔다!”
“으하하! 동점 골이다!”
후반 10분, 리즈의 동점 골이 터지며 앨런드 로드가 크게 들썩였다.
마치 화산이 터진 듯한 요란한 환호성과 뜨거운 열기, 그리고 실점의 충격은 맨유 선수들의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제길, 거기서 하필 그런 실수를 하다니……!”
빌 포크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준영이나 다른 동료 선수들이 괜찮다며 잊어버리라고 했지만, 마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자신의 실수로 경기가 더 힘들게 되어 버렸으니까.
‘오판이군. 그냥 덩치만 좋은 놈이 아니었어.’
준영은 중앙선 부근으로 이동하는 샘을 노려보았다.
분명히 녀석은 프로 선수로 뛰기에 서툴고 단순한 플레이밖에 못한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플레이해야 팀에 유리한지 잘 생각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에 허를 찔린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좋아, 이제 분위기는 우리 쪽으로 넘어왔다!”
동점 골이 터졌음에도 잭 찰튼은 수비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계속 미드필드 지역에 전진한 상태로 맨유의 예공을 끊어 내고 역습 찬스를 노렸다.
분위기가 바뀐 이참에 아예 역전 골까지 노릴 마음이었던 것.
“이번에도 롱 패스인가?”
“오른쪽 측면 쪽이야!”
공격 패턴은 여전히 단조롭다.
하지만 일단 제대로 걸리기만 하면 묵직한 위력이 있었고, 이미 한 방 제대로 맞아 봤기에 맨유 선수들도 절대 얕볼 수 없었다.
다행히 이번 리즈의 공격은 위험 상황까지 벌어지기 전에 잘 끊어 냈다.
중원에서 공을 넘겨받은 던컨은 차분하게 동료들의 위치를 살피며 조금씩 리즈 진영으로 전진해 나갔다.
‘서두를 필요는 없지. 지고 있는 게 아니니까.’
강등권 팀을 상대로 대승을 못하면 그것대로 쓴소리를 듣겠지만, 그래도 중요한 건 패하지 않는 것이다.
승점 1점이라도 차곡차곡 모아야 선두 경쟁에서 유리하니까.
‘다들 숨 좀 돌렸겠지?’
맹렬히 타올랐던 리즈의 기세도 약간 가라앉은 상태.
필드를 세심하게 살피던 던컨은 측면으로 파고드는 동료 케니 모건스에게로 패스를 건넸다.
마치 자로 잰 듯, 정확하게 전달된 패스를 건네받은 케니는 중앙으로 쇄도하는 준영을 향해 크로스를 올렸다.
“제대로 택배로군!”
배송은 완벽했지만, 문제는 수령.
준영이 뛰어오르는 순간, 잭 찰튼도 득달같이 달려와 함께 뛰어올랐다.
하지만 공을 이마에 대는 데 성공한 건 준영.
바닥에 한 번 바운드가 된 공은 골키퍼의 손을 피해 골대로 들어갔다.
“골이이이이인-!”
“역시 리틀 존! 중요할 때 한 건 해 주는구만!”
방금 전까지 사막을 걷는 듯 바싹 타들어 가는 기분을 느끼던 맨유 팬들.
준영의 골은 그런 그들의 마음에 시원한 청량감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어, 뭐야? 골이 아니라고?”
“아니, 뭘 잘못했다는 거야!”
“우- 우우!”
야유가 쏟아지는 가운데 심판은 어처구니없어하는 준영에게 노골인 이유를 설명했다.
“잭이 뛰지 못하게 손을 썼더군.”
“나 이거야 원! 저 폭탄 머리가 손으로 날 짓눌렀을 땐 놔두다가 왜 나한테만 그래요?”
“글쎄, 그 상황은 내가 자세히 보지 못해서 모르겠군. 어차피 그땐 안 들어갔었고 말이야.”
뻔뻔한 심판의 발언에 준영은 깊은 빡침이 어떤 것인지 똑똑히 경험했다.
하지만 깊은 빡침을 느낀 건 비단 그만이 아니었다.
“Holy shit! 뭐 이따위 판정이 다 있어!”
“이따위든 저따위든 심판이 결정했으면 따라야지.”
“뭐? 허, 이거 순위만 강등권이 아니라 정신 상태도 강등권이군!”
“너 인마, 말 다 했냐?”
양 팀 팬들이 만난 경계 지대에서는 욕설과 비난이 난무했다.
아예 랩 배틀(?)에 그치지 않고 주먹질과 드잡이까지 하는 이들도 나왔다.
여기에 판정에 불만을 품은 관중 하나가 심판에게 달려드는 소란까지.
그 바람에 경찰과 경기장 용역들이 쫓아가서 진압하는 소동이 벌어졌고, 경기도 잠시 중단되었다.
“존, 화가 나겠지만 참아야 해.”
“알고 있어. 안 그래도 참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준영은 경기가 중단된 게 다행이라 여겼다.
안 그러면 릴렉스할 틈도 없이 뇌가 달궈진 상태로 뛰어야 했을 테니까.
***
소란이 수습된 후, 경기가 재개되었다.
골키퍼로부터 공을 건네받은 잭 찰튼은 직접 맨유 진영으로 공을 몰고 들어갔다.
도중에 마크를 당했지만, 빠른 발을 이용한 치달로 뿌리치고 페널티 아크 앞까지 당도했다.
‘뭐 하냐, 중국인. 얼른 막지 않으면 위험해진다?’
‘흥, 내가 낚일 것 같냐?’
준영은 살짝 거리를 둔 상태에서 잭을 견제했다.
리즈 쪽 공격수인 샘 미첼과 휴 베어드 쪽에 동료들이 확실히 마크를 맡고 있는지 확인하면서.
‘찔끔찔끔 물러나지 말고 덤벼 보라고. 재깍 제쳐 줄 테니까.’
‘안 낚인다니까! 널 상대할 사람은 따로 있어.’
잭이 이대로 치고 들어갈까 하던 그 순간, 조용히 접근해 온 바비 찰튼이 잭의 발치에 있던 공을 가로챘다.
“한눈팔지 말라고, 형!”
“너 이 자식!”
잭 찰튼은 부리나케 동생을 쫓아갔다.
하지만 바비 찰튼이 반대편 쪽으로 공을 넘기면서 곧장 맨유의 역습 찬스로 이어졌다.
“때려라, 케니!”
문전에서 상대 수비수들을 유인하던 데니스 바이올렛이 중앙으로 뛰어들던 케니 모건스에게 패스를 밀어 주었다.
골대 정면에 수비수 마크도 없는 상황.
하지만 골키퍼를 의식해 구석을 노렸던 케니의 슈팅은 골대 옆을 스치고 지나가 버렸다.
“악! 저 좋은 기회를……!”
“저런 건 넣었어야지!”
맨유 팬들이 아쉬운 한숨을 토하는 가운데, 리즈 골키퍼가 곧장 공을 길게 차 보냈다.
맨유 진영 중앙에 뚝 떨어진 그 공을 잡기 위해 준영과 샘이 동시에 뛰어올랐다.
빡-!
눈앞에 번쩍 불이 들어왔다.
샘이 뛰어오르며 뻗은 팔꿈치에 준영이 이마를 얻어맞은 것.
아무래도 이건 좀 심하다 싶었던지 심판이 휘슬을 울렸다.
“미, 미안.”
이마를 움켜잡은 준영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뚝뚝 떨어지자, 샘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정말 고의가 아니었으므로.
‘젠장, 어지러워 죽겠네.’
흘러내리는 피를 대충 닦아 낸 준영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초점을 잡았다.
그러곤 서둘러 공을 놓고 리즈 진영 쪽으로 길게 차 보냈다.
“어? 왜 저리 빨리 처리하지?”
“앗! 저길 봐!”
공이 떨어지는 곳, 거기엔 바비 찰튼이 뛰어가고 있었다.
공의 낙하지점으로 이동하던 잭 찰튼은 동생이 배후에서 돌아 들어오자, 깜짝 놀라 손을 뻗었다.
그 손을 뿌리친 바비 찰튼은 떨어지는 공을 가볍게 터치해서 지면에 살포시 내려놓은 후, 곧장 슈팅을 날렸다.
파앙-
지면을 날카롭게 가른 슈팅은 황급히 나오던 골키퍼의 다리 사이를 통과하며 리즈 골대 중앙에 꽂혀 들어갔다.
“우와아아아!”
정확한 롱 패스에 멋진 터치, 그리고 깔끔한 슛.
리즈 팬들도 탄성을 토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완벽한 기습이었다.
스코어는 다시 맨유가 2 대 1로 앞서갔다.
“형, 오늘은 내가 이긴 것 같은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는 동생을 노려보던 잭이 입을 삐죽하게 내밀었다.
“애송이 주제에 잘난 척은.”
“애송이에게 당한 주제에!”
으르렁대는 형제의 모습이 기자들의 카메라에 그대로 담겼다.
당사자들은 생각지 못한 역사의 한 장면으로.
***
형제이지만 바비 찰튼과 잭 찰튼은 사이가 썩 좋지는 않았다고 하네요.
일찍 프로 선수로 자리 잡은 형과 영국 최고의 팀에 입단한 동생. 서로를 부러워하는 한편으로 라이벌 의식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집안일로 크게 다투기도 했고, 노년이 되고서야 화해를 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저 형제의 다툼이 장미 전쟁이란 더비를 격화시키는 데 한몫했다고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