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88. 피지 않은 백장미
“와! 와아아아!”
4만에 육박하는 관중들이 모인 앨런드 로드의 필드 위로 양 팀 선수들이 입장했다.
군청색에 노란 줄무늬가 있는 유니폼을 걸친 쪽이 홈팀인 리즈 유나이티드.
그리고 깔끔한 붉은색 저지는 원정 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리즈 시절이 아닌 리즈와 맞붙으려니 좀 맥이 빠지네.”
새해 첫 경기를 치르게 된 준영은 아쉬운 표정으로 상대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리즈 유나이티드는 1960년대와 1990년대 두 번의 전성기가 있었다.
그때 리즈는 영국 리그를 대표하는 강팀.
하지만 1958년 현재 그들은 리그 19위에 불과했다.
승점도 19점으로 레스터, 선더랜드 등과 강등권에 속한 형편이다.
그렇다고 만만히 볼 수는 없다.
이곳은 리즈 유나이티드의 홈인 데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물어뜯곤 하니까.
‘거기다 나름 필승의 카드라고 내놓은 것도 있으니까.’
준영은 리즈 공격의 선봉으로 나선 공격수들을 보았다.
윌버 쿠시, 휴 베어드, 그리고 중앙에 있는 샘 미첼.
이 중에 눈에 확 띄는 건 샘이었다.
일단 외모부터가 상당히 튀는 흑인인 데다, 준영보다 더 큰 2미터대의 장신 선수였다.
더구나 머리가 북실북실한 아프로 스타일이라 그런지 더 커 보였다.
“거참, 저런 괴물딱지를 어디서 데려온 거지?”
“카리브나 남아프리카가 아닐까 싶은데……. 아마 리틀 존의 대응용이 아닐까?”
“깜둥이를 쓰다니,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군.”
“흥! 칭크를 쓰는 놈들이 할 말은 아니지.”
샘의 압도적인 체격에 관중들만 시선을 뺏긴 건 아니다.
맨유 선수들도 경기장에 나오기 전부터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저 폭탄 머리, 덩치만 보고 쫄 필요 없어. 축구는 덩치만 믿고 하는 게 아니니까.”
동료들에게 그리 말하는 준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방금 한 말은 학창 시절에 상대 팀 감독이나 주장들이 자신을 두고 했던 말이었으니까.
삐익-!
심판의 휘슬을 시작으로 26라운드 경기가 시작되었다.
초반부터 경기 주도권은 유나이티드에게 기울어졌다.
이준영과 던컨 에드워즈, 바비 찰튼으로 구성된 삼총사는 미드필드 싸움에서 완전히 상대를 압도했다.
그들은 양쪽 측면과 중앙으로 침투하는 동료 공격수들에게 부지런히 기회를 만들어 주고 패스를 찔러 주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골은 터지지 않았다.
“아, 크로스가 또 끊겼다!”
“리즈의 장신 수비수 탓이야.”
리즈의 최후방에서 번번이 맨유의 공격 기회를 무산시키는 수호자.
그의 이름은 잭 찰튼, 바로 바비 찰튼의 친형이었다!
“그런 어설픈 돌파로는 이 형을 뚫을 수 없다, 바비!”
“젠장……!”
동생의 과감한 돌파를 저지한 잭은 곧장 최전방으로 롱 패스를 보냈다.
높이 날아온 그 패스를 받은 건 트리니다드 출신의 괴물 장신 공격수 샘.
그는 마크에 나선 빌 포크스를 슬쩍 밀어내며 헤딩을 따낸 뒤, 측면으로 달려가는 휴 베어드에게 패스를 밀어 주었다.
그 패스를 받아 오른쪽 측면 깊숙이 파고든 베어드는 골문 앞으로 뛰어드는 샘에게 맞춰 크로스를 올렸다.
퉁-!
“오오오- 아아아!”
펄쩍 뛰어오른 샘의 헤딩슛이 골대 위로 날아갔다.
홈팬들의 아쉬운 탄성이 울리는 가운데, 준영과 유나이티드 선수들은 간담을 쓸어내렸다.
‘저 폭탄 머리, 제법 하잖아.’
그냥 덩치만 좋은 게 아니었다!
비록 헤딩슛은 빗나갔지만 앞서 보여 준 포스트 플레이나, 배후에서 문전으로 쇄도하는 움직임이 꽤 쓸 만하지 않은가.
준영이 감탄한 만큼이나, 리즈 감독 호레이쇼 S. 카터도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휘트비(Whitby)까지 돌아다닌 보람이 있구만.”
지금의 달달함은 그냥 얻어진 건 아니다.
호레이쇼는 지나간 시즌 전반기의 쓰디쓴 행보를 떠올렸다.
***
1956년 1부로 승격한 리즈는 지난 1956-1957시즌에는 15승 14무 13패로 8위에 올랐다.
리즈의 상승을 주도한 것은 팀의 주장이자, 간판 공격수 윌리엄 존 찰스.
지난 시즌 38골로 리그 득점왕에 오른 그는 유벤투스 FC로부터 열렬한 구애를 받았다.
결국 존 찰스는 이적료 65,000파운드를 구단에 안겨 주며 1957년 8월에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런 거금을 얻고도 구단 윗대가리들은 전력 보강에 전혀 신경을 안 썼지!’
이렇게 전력 보강에 소홀히 한 결과는 금방 나타났다.
올 시즌 시작부터 2연패를 당한 리즈는 9월에 3연패, 10월 중순부터 12월 초까지 무려 8경기 무승을 기록하며 강등권까지 내려앉았다.
물론 이렇게 팀이 내려앉는 동안 호레이쇼 감독도 그저 가만히 손톱만 물어뜯고 있지는 않았다.
존 Y. 리만 해도 바로 이웃한 허더즈필드에 있을 때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영입을 진행해 보기도 전에 버스비의 손아귀로 들어가 버렸지.’
아쉬움을 뒤로하고 호레이쇼는 쓸 만한 선수를 찾아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리버풀, 요크, 에딘버러, 뉴캐슬, 미들스브로…….
여러 곳에서 많은 선수들을 봤지만, 영입에 성공한 이들은 없었다.
쓸 만한 선수들은 너무 비쌌고, 무명 선수들은 그저 그런 실력이었으니까.
‘근데 포기할까 싶을 즈음에 딱 나타났단 말이지.’
미들스브러 남동쪽의 어촌 마을 휘트비.
지나가다 들른 그 마을에서 엄청난 체격을 가진 흑인 선수 샘 미첼을 보았다.
카리브의 트리니다드 출신인 샘은 비록 테크닉은 부족했지만, 2미터의 장신을 활용해서 상대 수비진을 흔들어 놓는 데 탁월했다.
거기에 꽂혀 버린 호레이쇼는 곧장 입단을 제의했다.
흑인이면 어떤가. 황인종도 뛰고 있는데.
샘 역시 쾌히 받아들였다.
대구잡이 배의 선원으로 일하는 것보다 프로 축구 선수 쪽이 훨씬 나았으니까.
그렇게 한 달간 맹렬한 특훈을 거치고, 마침내 오늘 경기에 출전하게 되었다.
***
리즈의 공격은 단순했다.
공을 잡으면 일단 최전방으로 길게 보냈다.
그걸 샘이 따내서 좌우 측면의 공격수들에게 보내거나, 2선에서 달려오는 동료들에게 밀어 주었다.
그렇게 기회를 만들어 준 다음 곧장 유나이티드 문전으로 쇄도, 크로스가 날아오면 헤딩을 하고, 동료 공격수가 슛을 하려 들면 수비수를 끌어냈다.
아주 단순한 패턴의 연속.
하지만 무시하지 못할 만큼 묵직했다.
“또 측면 크로스다!”
“흑인 녀석을 놓치지 마!”
말은 쉽지만, 행동은 어려운 법.
빌 포크스와 로저 바인이 함께 마크를 했음에도 샘이 공중볼을 차지했다.
헤딩으로 인해 골문 쪽으로 방향이 꺾인 공은 유나이티드에겐 다행스럽게도 골키퍼 해리 그렉의 정면으로 날아갔다.
“아깝네. 또 기회를 놓쳤어!”
“괜찮아, 샘! 그렇게 계속 공중볼만 잘 따내면 돼!”
아쉬워하며 물러나는 샘을 휴 베어드를 비롯한 리즈 선수들이 격려해 주었다.
분명히 프로 무대에 설 만한 발재간은 안 되지만, 높이라는 장점 하나는 확실히 쓸 만했다.
현재 리그 1위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수비를 마구 흔들어 놓고 있으니까.
호레이쇼 감독도 만족한 건 마찬가지.
그는 연방 박수를 치며 샘의 플레이를 칭찬했다.
‘이렇게 되면 존 Y. 리를 내릴 수밖에 없을 거다.’
공수 양면에 뛰어난 존 Y. 리.
지금 녀석은 수비보다 공격 지원에 더 치중하고 있다.
하지만 계속 유나이티드의 뒤가 불안해지면 내려올 수밖에 없을 터.
그럼 리즈의 수비 부담을 한결 덜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겠지만, 계획대론 안 될걸.”
준영은 리즈 쪽의 의도를 눈치챘다.
그건 버스비 감독 역시 마찬가지인지, 준영에게 수비보다 공격에 치중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저 폭탄 머리가 포스트 플레이를 잘하는 건 사실이지만,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지.’
높이는 몰라도 발 기술이나 슈팅 정확도는 떨어지는 편이다.
무엇보다 움직임도 단조롭다.
이 점을 파고들어 대응하고, 상대 2선 공격을 대비하면 유나이티드 수비수들이 잘 막아 낼 수 있다.
‘문제는 공격이야.’
전반전이 벌써 30분이 지나가고 있는데, 최전방의 데니스 바이올렛이나 토미 테일러는 별다른 기회를 잡지 못했다.
잭 찰튼이 리즈 수비를 진두지휘하며 맨유의 공격을 잘 끊어 내고 있었기 때문.
‘저 녀석이 문제야. 저놈을 쓰러트리지 않으면 득점은 불가능해.’
그리 확신한 준영은 패스를 건네받자마자 직접 리즈 문전을 향해 치고 들어갔다.
***
잭 찰튼.
동생 바비 찰튼의 명성에 가려져 있지만, 잉글랜드 대표팀 주전 수비수로 뛰었고, 1966년 월드컵 우승에 공헌했을 정도의 레전드 선수다.
187센티미터의 장신으로 공중볼도 잘 따내고, 스피드도 빨랐다.
하지만 수비수로 뛰어난 점은 적극성, 그리고 두려움을 모르는 투지였다.
“어서 와라, 중국인!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다!”
잭의 환영(?) 인사에 준영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난 한국인이다, 말 대가리야.”
“뭐? 일본인이라고? 오, 스시마생, 곤니치와.”
이 녀석, 일부러 이러는군.
불쾌했지만, 시답잖은 도발에 넘어가서 공을 뺏길 만큼 준영은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잭 찰튼은 거칠게 어깨를 들이밀며 차징을 시도했다.
“어쭈, 제법 힘 좀 쓰는데?”
“말 대가리 주제에 제법이군!”
힘은 비등.
하지만 불리해진 건 준영이었다. 잭의 과감하고 거친 마크에 페널티 박스 외곽으로 밀려났으니까.
“하하핫, 뭐야? 마법사라면서? 마법 하나 부려 보시지.”
“내가 하란다고 하는 바보인 줄 아냐?”
준영이 공을 잡은 상태에서 둘은 움직이지 않고 대치를 이어 갔다.
길지 않지만, 둘에게는 꽤 길게 느껴진 시간.
준영이 가까이 접근하는 동료 알버트 스캔론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잡았다!’
빈틈을 노린 잭이 인터셉트를 시도했다.
하지만 드래그 백으로 공을 잽싸게 뒤로 뺀 준영은 잭의 중심이 무너진 틈을 타서 중앙으로 들어온 던컨 쪽으로 공을 건넸다.
“나이스 패스!”
던컨은 굴러오는 공을 살짝 방향만 틀어 뒤로 흘렸다.
그가 슈팅을 할 줄 알고 각을 좁히던 리즈의 골키퍼는 허겁지겁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이미 데니스 바이올렛의 발에 맞은 공은 손쓸 틈도 없이 골대 안으로 떨어졌다.
“드디어 들어갔구나!”
“기다렸다고!”
초조하게 경기를 지켜보던 맨유 원정 팬들에게서 일제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쉽사리 골이 터지지 않기에 혹시 경기가 꼬이는 게 아닌가 걱정하던 차에 간판 공격수 데니스가 해결을 지어 주었다.
‘젠장, 잡았다 싶었는데 내가 되레 당했군!’
체면을 구긴 잭은 준영을 노려보았다.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있던 준영은 그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모습에 잭의 속이 더욱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정말 화가 났다.
제대로 막지 못한 자신도, 연패를 거듭하는 팀도.
‘여기서 이대로 주저앉을 순 없어!’
동생은 이미 영국을 대표하는 최강팀의 주전으로 뛰고 있다.
그런데 형이 되어서 당당한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빌빌대다 팀을 강등시켜서야 되겠는가.
“다들 기죽지 마! 한 골 정도는 충분히 뒤집을 수 있어!”
“맞아. 연패는 이제 지겹다고.”
“오늘도 승리 수당을 날리긴 싫다고!”
다행히 팀원들은 실점에 낙담하지 않았다.
연패와 강등을 겪고 싶지 않은 건 모두가 마찬가지였으니까.
“해 보자. 상대가 버스비의 아이들이든, 악마 새끼들이든!”
“박살을 내는 거야!”
기운차게 외치는 리즈 선수들을 보며 준영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재미없게 맥 빠진 모습을 보이는 건 아닌가 했는데, 투지와 의욕이 충만해 보였다.
‘아직 리즈 시절은 아니지만, 리즈 시절로 나가고는 있군.’
장미 전쟁.
훗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즈 유나이티드의 더비를 일컫는 말이다.
아직 장미는 하얗게 꽃피지 않았지만, 가시는 날카롭게 자라나 있었다.
***
리즈 유나이티드 엠블럼에 장미가 나오는 건 70년대부터입니다. 본격적인 장미 전쟁은 그들의 리즈 시대 1기인 60년대 말부터 시작되지요.
실제 리즈 시절 드립은 리즈에서 뛰었던 앨런 스미스가 리즈의 전성기에 뛰었던 걸 말하는 거지만, 리즈 팀 자체가 흥망성쇠가 있다 보니 팀을 예로 들더라도 이상하지 않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