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87화 (87/400)

Round 87. 신부님, 우리 신부님

준영이 아는 터너 신부님은 평화를 사랑하는 인자한 성품이었다.

불쌍한 고아들을 위해 머나먼 한국에 와서 수십여 년을 사역한 훌륭한 박애주의자였다.

그런데 미친개라니?

이 무슨 불경한 칭호란 말인가!

‘어, 근데 인정.’

지금 준영의 눈앞에 있는 신부님, 젊은 시절의 윌리엄 터너는 그야말로 황야의 늑대 그 자체였다.

생각해 보니 신부님의 이런 사나운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축구 경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삽을 푸고 있으면 저렇게 으르렁대곤 하셨다.

그래, 우리 신부님이 분명하다.

“조져!”

터너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부하들이 우르르 앙리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주먹을 휘두르고, 의자를 집어 던지고.

여기에 앙리 일행이 맞대응을 하면서 클럽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뭐야, 도대체?”

“조직 간 패싸움인가 봐.”

휘말릴까 싶었던 유나이티드 선수들은 냉큼 구석으로 물러섰다.

“이봐, 리틀 존! 위험하니까 물러서라고.”

“뭐?”

어리둥절해하던 준영은 갑자기 날아든 주먹에 턱을 후려 맞았다.

“이 자식이!”

발끈함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날린 주먹에 상대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러자 터너의 부하들이 도끼눈을 치켜떴다.

“이 쿨리 녀석은 뭐야?”

“앙리 놈의 새 보디가드인가?”

바로 서넛이 달려들려는 상황.

준영이 곧장 싸울 태세를 취한 순간, 터너가 다가와서는 부하들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머저리 새끼들! 축구 선수한테 시비 걸지 말고 앙리 녀석이나 잡아!”

안 그래도 앙리는 친구들을 방패 삼아 슬쩍 줄행랑을 치는 중이었다.

하지만 클럽을 빠져나가기 직전에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어… 신사답게 말로 하면 안 되겠냐, 아우야?”

“흥! 필요할 때만 동생이지. 개소리하지 말고, 주먹의 대화나 좀 나눠 보자고.”

앙리와 그의 친구들이 터너 일당에게 질질 끌려 나갔다.

그것으로 소란은 일단락되었지만, 준영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어딜 가, 리틀 존?”

“저기 내가 아는 사람이 있어!”

“그만둬! 잘못하면 크게 다친다고!”

던컨은 아까 아는 척을 한 앙리 때문에 준영이 나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류했지만, 준영은 그대로 터너 일당을 쫓아가 버렸다.

간신히 만난 신부님을 여기서 놓칠 수 없었으니까.

***

터너 일당은 멀리 가지 않았다.

근처의 어둑한 뒷골목으로 앙리 일당을 끌고 가서는 소위 말하는 다구리를 치고 있었다.

“내가 경고했지? 또 우리 구역에 들어와서 껄떡대다간 거시기를 확 조져 버린다고.”

“아냐. 그 여자들이 먼저 나한테… 으아악!”

괜히 입을 잘못 놀려서 얻어맞은 앙리.

터너의 부하들이 그의 두 다리를 잡고 가랑이를 쭉 벌렸다.

그리고 터너는 그 가랑이 정중앙에 있는 표적을 향해 사커 킥을 날릴 준비를 했다.

“발정 난 망아지를 다스리는 방법은 딱 하나야. 바로 거세지.”

“안 돼! 아우야, 제발 부탁이다!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Shut up!”

처형을 알리듯,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린 터너가 곧장 사커 킥을 날렸다.

하지만 때마침 나타난 준영이 어깨를 잡아끈 덕분에 그의 발은 허공만 시원하게 갈랐다.

“그만둬요.”

“뭐야, 댁이 뭔데 나서? 앙리 저 자식이랑 진짜 한패야?”

“한패는 아니지만, 모르는 사이도 아니라서요.”

사나운 늑대처럼 인상을 쓴 터너가 준영을 향해 엄포를 놓았다.

“이봐, 5번. 내가 유나이티드 팬인 걸 다행으로 알아. 시티 쪽이었으면 넌 바로 저기 깡통에다 스팸처럼 다져 넣었을 거야.”

살벌한 언행에도 불구하고 준영은 웃음을 지었다.

모르는 사이, 신부님이 계속 자신의 경기를 보고 있었구나 싶었으니까.

“웃어? 지금 날 비웃는 거냐?”

“죄송해요, 신부님. 그런 의미가 아니라…….”

“신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말만 그럴듯하게 늘어놓는 성직자 나부랭이라고.”

말실수를 했는데, 의외로 터너는 거칠게 반응했다.

마치 종교 쪽과 관련해서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는 것처럼.

‘신부님, 젊을 때 이 정도로 불량했었나? 대체 성직자는 어떻게 되신 거야?’

나이를 보면 지금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데, 방황한 시절이 있었던 걸까?

준영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갑자기 청년 하나가 다급하게 달려와서 외쳤다.

“보스, 짭새가 떴어요!”

“쳇! 다들 튀어!”

터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일당들은 한쪽에 세워 둔 스쿠터를 타고 잽싸게 골목을 빠져나갔다.

“운 좋은 줄 알아, 앙리. 다음에 또 걸리면 그땐 국물도 없어.”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터너는 앙리에게 엄포를 놓은 후, 준영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리틀 존 너도 마찬가지야. 선수 생활 오래 하고 싶으면 오지랖은 부리지 말라고.”

“됐으니까 얼른 가요. 경찰한테 잡힌다고.”

“젠장!”

뒤를 돌아본 터너는 순찰차가 나타나자 냅다 액셀을 밟으며 튀었다.

“또 만나요, 신부님.”

준영은 어둠 저편으로 사라지는 터너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원하면서.

***

“와, 어릴 때 키워 주신 분을 만났다고요?”

준영이 어제 터너 신부님과 만난 이야기를 하자, 리즈는 마치 자신의 일인 양 기뻐했다.

“무척 반가웠겠네요.”

“그렇긴 한데, 내가 생각하던 이미지랑 좀 딴판이더군.”

“딴판?”

“그러니까 21세기 용어로 하자면 흑역사를 봤다고 해야 하나?”

준영이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즈음, 밖에서 오토바이의 우렁찬 배기음이 들렸다.

혹시나 싶어 내다봤더니 앙리였다.

시퍼렇게 멍든 눈을 선글라스로 가린 그는 리즈가 나오자 곧장 다가와 꽃과 케이크를 건넸다.

“잘 지냈소, 마드모아젤.”

“어서 오세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듣자 하니 무슨 병에 걸리셨다면서요?”

“후후후, 병 따위가 내 뜨거운 심장을 죽일 수는 없지.”

리즈 앞에서 으스대던 앙리는 준영이 나타나자, 살짝 정색을 하다 이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 무슈 리. 어젯밤엔 정말 고마웠어. 아주 큰 신세를 졌네.”

“뭘, 별것도 아닌걸.”

둘의 대화에 리즈는 고개를 갸웃했다.

준영이 신부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들려줬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았으니까.

“어제 두 사람,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게… 불한당을 만났는데, 무슈 리가 도와줬지.”

“아, 그랬군요.”

“안 그래도 감사의 인사를 하러 온 참이었어. 어제 제대로 예를 표하지 못했으니까 말이야.”

그러고는 앙리는 남자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준영과의 독대를 요청했다.

준영이 쾌히 승낙하면서 둘은 응접실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나누었다.

“리즈에겐 이야기하지 않았던 모양이군. 고마워.”

“딱히 구질구질한 것까지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근데 어제 신부님, 아니 윌리엄 터너랑은 대체 무슨 관계야? 동생이니 어쩌니 하던데?”

짐작 가는 구석은 있지만 확실히 들어 보고 싶다.

이런 마음에 건넨 준영의 물음에 앙리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겨우 말문을 열었다.

“그 녀석은 내 배다른 동생이야. 예전에 아버지께서 영국에 왔을 때 만난 여자에게서 태어났지.”

“그럼 터너라는 성씨는…….”

“맞아. 제 어미에게서 딴 거야. 듣자니 외조부의 이름을 그대로 붙였다던가.”

터너 신부님이나 보그 백작 부자가 닮은 것도 결국 혈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피만 나눴을 뿐, 그들의 사이는 좋지 못했다.

“아버지는 처음에 그들 모자를 외면했지. 그러다 터너 부인이 죽고 나서 돌볼 사람이 없으니 녀석을 기숙학교에 입학시켰어.”

“혹시 미션 스쿨인가?”

“맞아. 가톨릭 재단에서 세운 곳인데 나름 명문으로 유명한 곳이었지.”

“신부님, 아니 윌리엄의 의사는 아니었겠군.”

“당연하지. 어린 녀석에게 무슨 의사를 묻고 말고 하겠어.”

명문 학교라고 하는 곳들치고 학칙이 엄격하지 않은 데는 없다.

더구나 이 시대에 와서 알게 된 거지만, 학교에서 학생들에 대한 체벌도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본인의 의사도 없이, 감옥 같은 곳에 처박혔으니 윌리엄이 반발하게 되는 건 당연했다.

아버지나 배다른 형에 대한 감정도 악화되었을 것이고.

“듣자 하니 학교생활도 원만하지 못했다더군. 툭하면 애들이랑 싸우고, 교사에게 대들고…….”

‘그렇겠지. 명문 학교면 콧대 높은 애들이 수두룩할 거잖아.’

신부님의 학창 생활이 어땠는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결국엔 학교에서 도망쳐서 트래퍼드 파크 부근에서 부랑자처럼 살고 있더군. 나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아주 안달이고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앙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준영에게 말을 건넸다.

“근데 무슈 리, 자넨 윌리엄에 대해서 왜 궁금해하는 거지? 신부님이라고 하는 이유는 또 뭐고?”

“그게…….”

잠시 머뭇하던 준영은 그럴듯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어릴 때 날 돌봐 주신 신부님하고 이름이 같아서. 그래서 관심이 간다고 할까.”

“아, 그래서 그랬던 거군.”

납득하는 앙리는 생각도 못할 것이다.

실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아무튼 아버지는 그 녀석 때문에 걱정이 많아. 안 그래도 말썽을 많이 부렸는데, 언젠가 큰 사고를 쳐서 집안에 누가 되지 않을까 하고 말이야.”

“본인이 저지른 일이니 본인이 감당해야지. 동양에선 그런 걸 업보라고 그래.”

“Upbo?”

“그러니까… 인도식으로 말하자면 Karma겠군. 자신의 말과 행동에 따라 받게 되는 결과를 뜻해.”

“과연…….”

의외로 앙리는 순순히 납득했다.

본인도 부친에 대해 불만이 있는지, 아니면 마음 한편에 동생에 대한 연민이 있는지.

하지만 준영의 눈엔 그런 모습도 좀 아니꼽게 보였다.

“납득만 하지 말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게 어때? 내가 볼 땐 너나 네 부친이나 별 차이는 없어 보이는데?”

“무슨 소리! 난 아버지와 달라. 원치 않는 씨앗이 싹이 트는 일은 없어. 내 스스로를 철저히 단속하고 있으니까.”

다르다는 게 고작 그건가.

저러다 언제 부친처럼 된통 당하는 일이 벌어질 게 틀림없다.

‘그나저나, 신부님이 왜 한국에 오셨는지 이제 알 것 같군.’

준영은 예전부터 궁금했다.

왜 할아버지가, 터너 신부님이 이 머나먼 한국까지 와서 수십여 년 동안 사역하고 있는지.

단지 성직자로서 봉사의 의무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나 이복형과의 마찰이나 반감도 한몫했던 것은 아닌지?

뭐, 그런 건 접어 두더라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근데 지금 저렇게 건달이나 부랑자처럼 살고 있더라도 나중엔 종교에 귀의하신다는 거잖아.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그렇다면 그렇게 마음을 바꾸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앞으로 신부님의 인생을 변하게 만드는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 걸까?

‘설마 뮌헨 비행기 참사 때문인가?’

성직자가 되고도 맨유 팬을 자처했던 신부님.

자신이 동경했던 선수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하다 종교에 귀의하게 된 것일까?

그럼 뮌헨 참사를 막아 내면 신부님은 개심하지 못하는 걸까?

‘그렇다고 사고를 막지 않고 내버려 두는 건 말도 안 되지.’

신부님의 미래 행보에 대한 건 어디까지 가정에 불과하다.

그 가정으로 소중한 동료들의 목숨을 저울질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건 현재에도, 미래에도 유나이티드의 열성적인 팬인 신부님도 바라지 않는 일일 테니까.

***

작중에서 윌리엄 터너는 모드(Mods), 앙리는 로커스(Rockers)로 묘사했습니다. 모드는 겉멋을 부리는 서민 청년들이 주류였고, 로커스는 일탈을 꿈꾸는 부잣집 청년들이었죠. 이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건 60년대부터인데, 서로 엄청나게 싸웠다고 합니다.

모드는 훗날 여러 갈래로 분류되는데, 축구 서포팅이나 음악 등 영국 현대 문화에 꽤 영향을 주었다고 하네요.

&도&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