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62. 하라면 한다
맨체스터 빅토리아역 플랫폼.
기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시선은 젊은 청년들에게 향해 있었다.
“유나이티드잖아.”
“원정 가는 중인가 보군. 근데 뭘 하는 거지?”
노팅엄 포레스트전 원정길에 오른 버스비의 아이들.
그들은 막간을 이용해서 간단한 유흥을 즐기고 있었다.
“받아! 살리라고!”
“야, 어디로 날리는 거야? 세모발이냐?”
던컨을 비롯한 맨유 선수들은 셔틀콕처럼 생긴 것을 차면서 놀고 있었다.
바로 제기차기.
얼마 전 준영이 알려 준 이 한국의 전통 놀이는 시간 죽이기에 딱 좋았다.
혼자 해도 되고, 여럿이서 주고받으며 놀아도 되고.
제기가 없으면 깡통이나 종이컵을 차도 되었다.
하다 보면 발재간도 늘기에 버스비 감독이나 머피 코치도 권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 놀이를 전파한 준영은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했다.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오늘 붙을 팀이 현재 5위의 만만찮은 팀이기 때문은 아니다.
동료들이나 코칭스태프도 무엇 때문인지 눈치는 채고 있었다.
“저 녀석, 괜찮을까?”
“지난번처럼 그러면 경기에도 못 나갈 텐데…….”
노팅엄까지 기차로 약 2시간.
하지만 차량을 타고 도로로 가면 2배의 시간이 걸린다.
선수들의 컨디션 유지를 생각하면 전자를 선택하는 게 맞았다.
준영도 자신의 기차 트라우마 때문에 특별 대우를 받거나 동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이겨 내야 해. 언제까지 이럴 순 없어.’
그렇게 마음을 굳게 먹기로 했지만, 저편에서 기차가 우렁찬 기적을 울리며 진입해 들어오자 심장이 쿵덕쿵덕 뛰었다.
‘괜찮아. 그때완 달라. 똑같지 않다고.’
스스로를 다독인 준영은 멈춰 선 기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심장의 고동은 멈춰지기는커녕, 기차가 움직이자 점점 더 커졌다.
‘진정해. 진정해라, 이준영!’
준영이 눈을 감고 힘껏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고 있을 때, 던컨이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네 왔다.
“어이, 존!”
“어… 왜?”
혹시나 벌써 도착했나 기대했지만, 기차는 여전히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야, 던?”
“심심하니까 노래 한 곡 불러 줘.”
“뭐?”
던컨은 고개를 갸웃하던 준영에게 기타를 건넸다.
“기타는 언제 가져온 거야?”
“바보냐? 아까 역에 도착할 때부터 갖고 있었어.”
긴장하면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
준영은 던컨의 기타를 못 알아볼 정도로 마음이 평온하지 못했다.
“아무튼 노래 한 곡 뽑아 봐. 신나는 걸로.”
“이 와중에 노래라니…….”
“해 봐. 할 수 있어.”
던컨의 진지한 눈빛에 준영은 기타를 건네받았다.
대강 조율을 하고 현을 튕기자 따스한 음률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러자 신기하게 쿵덕이던 심장이 조금씩 가라앉는 게 아닌가.
‘노래란 참 좋은 거란다. 즐거움은 배로 느끼게 해 주고, 힘들 때는 마음을 달래 주니까.’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
문득 터너 신부님의 말이 떠오른 준영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혹시 던컨도 그걸 알고 노래를 부르라고 한 걸까?
“뭐 해? 안 부를 거야?”
“할 거야. 선곡 중이라고.”
무엇을 부르면 좋을까.
머릿속에 있는 악보를 뒤지던 준영은 이 상황에서 제일 적당한 곡을 골라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기타 소리와 노랫소리가 높아지는 만큼 마음은 푸근해지고, 심장의 고동은 가라앉았다.
“힘겨운 날들도 있지만, 새로운 꿈들을 위해~”
던컨은 물론이고, 동료들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어깨를 들썩였다.
가사를 알아듣지 못하지만 아름다운 음률만으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열차 안의 다른 승객들도 휘파람을 부르거나 허밍으로 따라 불렀다.
갑자기 떠들썩해진 객차를 보러 왔던 열차 승무원도 가만히 감상할 정도.
“Wow!”
“Bravo! One more song!”
잠시 후에 노래가 끝나자,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냈다.
“멋진 곡인데? 누구 노래야?”
“우리나라의 유명한 가수가 부른 노래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인 건 비밀.
다들 거기에 대해서 캐묻기보다 준영이 얼른 또 노래를 부르기를 바랐다.
“한 곡 더 불러!”
“이번에도 신나는 걸로!”
갑자기 콘서트홀로 변한 열차의 주인공이 된 준영은 곧장 기타를 치며 전주에 들어갔다.
“Desmond has a barrow in the market place. Molly is the singer in a band~”
자메이카풍의 신나는 연주와 흥겨운 가사.
바로 옆 객차의 승객들도 홀린 것처럼 찾아와서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그중에는 풋풋한 인상의 소년도 있었다.
“제임스, 제임스 폴 매카트니! 거기서 뭐 하는 거니?”
늙은 인솔자의 외침에 소년 폴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근사한 노래가 들려서요. 첨 듣는데도 신기하게 귀에 쏙쏙 들어오더라고요.”
“오블라디 어쩌구 하는 저 괴상한 노래가 말이냐? 하여튼 요즘 애들은…….”
인솔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폴은 지금 몸담은 교회 합창단의 딱딱한 음악보다 통속적인 노래를 더 좋아했다.
그래서 방금 들은 곡이 머릿속에서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누가 부르고 있는지 알고 싶은데…….’
호기심에도 불구하고 인솔자의 성화에 그는 아쉽게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
노팅엄은 영국의 시인 바이런에게 영감을 준 곳.
그리고 로빈 후드의 전설이 시작된 셔우드 숲이 있는 고장이다.
이 고장을 대표하는 팀이 노팅엄 포레스트.
준영도 알고 있을 정도로 왕년에 잘나갔던 팀이다.
‘70~80년대 브라이언 클러프가 감독으로 있을 때 유러피언 컵을 2연속으로 제패했었지.’
하지만 그들이 그 영광을 이루자면 20년은 더 있어야 했다.
명장 브라이언 클러프도 현재는 미들즈브러의 간판 스트라이커로 활약 중이고.
그래도 현재 5위라는 순위가 말해 주듯, 그들은 상당히 단단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
맨유는 전반 3분 만에 리암 휄란의 골로 앞서갔다.
하지만 후반전이 시작하기 무섭게 노팅엄의 공격수 스튜어트 임라흐에게 실점을 내주고 말았다.
기습적인 중거리 슛이 레이 우드의 손을 맞고 그대로 들어가 버렸던 것.
그 상황을 본 준영은 혀를 찼다.
‘키퍼 장갑을 꼈으면 막았을지 모르는데.’
맨손으론 한계가 있다.
준영은 나중에 조셉에게 키퍼 장갑을 주문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이 경기에 집중해야 돼.’
동점 골이 터지자, 노팅엄 포레스트는 기세 좋게 밀어붙였다.
홈팬들의 성원을 업고 역전까지 노릴 심산이었던 것.
맨유는 고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기 전에 비가 와서 필드 상태도 좋지 않았던 데다, 노팅엄 선수들은 거칠면서도 집요하게 맨유 선수들을 괴롭혔다.
가장 집중 견제를 받은 건 하프백인 던컨과 준영.
공만 잡았다 싶으면 냉큼 서너 명이 몰려와 발을 걸고 유니폼을 잡아끌었다.
‘아오, 빌어먹을 50년대 같으니라고!’
방금 전에도 역습 전개 직전에 상대방의 노골적인 홀딩에 방해를 받았다.
충분히 옐로카드감이지만, 카드 누적이라는 개념이 없는 시기.
그래서 노팅엄 선수들은 퇴장당할 수준만 아니면 온갖 반칙을 다 했다.
‘거기다 심판은 몸싸움에 관대한 인간이니…….’
공격할 때도 파울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얻은 프리킥도 질척이는 필드 때문에 제대로 된 슈팅을 날리지 못했다.
“하하하, 어떻게 된 거냐, 원숭아!”
“동양의 마법사라며? 어디 마법을 써 보라고!”
“우ㅋ 우ㅋ 우끼끼~”
노팅엄 관중들의 야유가 상당히 시끄럽게 들렸다.
아마 에릭 칸토나라면 펜스도 없는 저 관중석에 난입해서 이단 옆차기를 날렸으리라.
“존, 신경 쓰지 마.”
“저놈들, 네가 어지간히 거슬리니까 저러는 거라고.”
동료들은 혹시나 준영이 돌발 행동을 할까 싶어 다독였다.
하지만 준영은 돌발 행동을 해 볼 생각이었다.
“마법을 써 보라는데 한번 써 봐야지.”
던컨에게서 패스를 받은 준영은 곧장 드리블 돌파를 시도했다.
“미친놈.”
“이 진창에서 드리블이 될 것 같냐?”
노팅엄 선수들은 비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발재간이 좋아도 거의 갯벌이 된 이 필드에선 공을 제대로 굴릴 수 있을 리 만무하니까.
물론 그건 준영도 알고 있었다.
“공이 굴러가지 않으면 튕기면 되지!”
“아니, 저런!”
양 팀 선수들은 물론, 관중들까지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준영이 발끝으로 공을 살짝 띄워 올린다 싶더니, 무릎과 발등으로 공을 통통 튕기며 전진해 나갔기 때문.
엄청나게 절묘한 볼 컨트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엉뚱한 곳으로 튕겨 나갈 수 있음에도, 준영은 과감하고 집중력 있게 치고 나갔다.
“이놈이 어디서 서커스 쇼를 하는 거야!”
“우리가 우습게 보이냐!”
노팅엄 수비수들이 달려들었지만, 준영은 그들의 차징과 태클을 절묘하게 피해 냈다.
마지막에 간격을 좁히고 나온 골키퍼도 제쳐 버렸다.
‘이런, 너무 깊이 들어왔네.’
슈팅 각이 나오지 않았다.
자칫하면 라인 아웃될 상황.
이에 준영은 잽싸게 중앙으로 공을 올려 주었다.
허리 높이로 날아온 그 패스는 때마침 쇄도하던 데니스 바이올렛의 무릎을 맞고 골대 안으로 떨어졌다.
“들어갔다!”
“역시 백발백중 데니스!”
“그보다 리틀 존의 돌파가 기가 막혔어!”
신나게 골 세리머니를 즐기는 맨유 선수들.
데니스와 하이파이브를 나눈 준영은 동그랗게 입을 벌리고 있는 노팅엄 팬들 앞으로 다가가 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방금 전의 야유는 어디 갔냐는 듯이.
“저, 저, 저 개자식!”
“크악, 진짜 죽여 버리고 싶다!”
울분에 찬 원성이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원성은 2 대 1의 스코어를 뒤집지는 못했다.
***
노팅엄 원정을 다녀온 다음 날.
준영은 리즈와 함께 맨체스터 시내로 나왔다.
미래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보게 해 준 보답으로 리즈가 1957년 신작 영화를 보여 주겠다고 했기 때문.
“혹시 1957년에 개봉한 영화를 본 적 있어요?”
“글쎄, 고전 영화라고 봤던 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랑 로마의 휴일… 아, 크리스마스 때 봤던 십계랑 벤허도 있네.”
“아, 십계는 나도 작년에 앤지랑 봤어요. 앤지는 영화가 너무 길다며 투덜댔었죠.”
“하하, 그 영화가 많이 길긴 하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극장 앞에 당도했다.
준영은 상영 중인 신작 영화의 포스터를 보았다.
“콰이강의 다리라……. 확실히 들어 본 적이 있어.”
“그래요? 본 사람들이 그러는데 상당히 명작이래요.”
“나도 그렇게 들었어. 근데 리즈는 전쟁 영화도 좋아하는 거야?”
“역사적인 내용을 담은 영화들이 재밌어서요.”
“훗, 역덕 기질이 좀 있구나.”
“역덕?”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얼른 상영관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어.”
준영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을 보며 쑥덕이는 것을 눈치챘다.
아무래도 알아본 것 같았다.
‘야인 시대 패션을 해도 소용이 없구만.’
눈에 안 띄려고 이 시대 사람들처럼 정장에 중절모까지 눌러써도 소용이 없었다.
장신의 동양인은 흔치 않으니까.
컴컴한 상영관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불이 꺼지며 스크린에 영상이 들어왔다.
‘이 시대 극장에도 상영 전에 광고 영상이 나오는 건가?’
하지만 그건 광고가 아니라 뉴스 영상.
흑백 필름에 굵은 활자를 입힌 영상에는 경쾌한 음악과 함께 성우가 최근의 소식을 소개했다.
‘이게 말로만 들었던 대한 늬우스랑 비슷한 거로군.’
TV가 없거나 보급이 늦었던 시대에 이렇게 극장에서 뉴스를 내보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런데 지금 방송되는 뉴스 중에는 바로 어제 경기와 관련한 보도도 있었다.
***
제임스 폴 매카트니. 모르시는 분은 없을 거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