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63. 소중한 사람
「노팅엄 원정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2 대 1의 통쾌한 승리! 아일랜드 공격수 리암의 선제골과 데니스 바이올렛의 역전골로…….」
“저거 봐요. 준도 나왔어요.”
리즈 말대로 경기 기록 영상을 편집해서 만든 뉴스 영상에는 준영의 모습도 있었다.
분주하게 오가며 헤딩을 따내고, 상대 공격수를 막아 내고.
그러다 절묘한 돌파로 노팅엄 문전을 파고들어가 건네준 어시스트가 골로 이어지자, 상영관 안에서는 탄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유감스럽게도 이날 역전 골을 거든 5번의 존 Y. 리는 관중들을 조롱하며 물의를 빚었습니다.」
영상에는 관중들을 향해 귀에 손을 댄 준영의 모습이 그대로 나왔다.
분통한 표정을 짓는 노팅엄 팬들과 울먹이는 아이들의 모습도.
그와 대조적으로 준영은 실실 웃고 있었다.
그야말로 소양 없고 예의도 모르는, 교만한 인간처럼 비쳐진 것이다.
‘악마의 편집 쩌는구만.’
준영이 어이없어하고 있을 때, 리즈가 거북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저 사람들이 먼저 준에게 야유를 퍼부어서 그랬던 거 아니에요?”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대응하는 건 신사답지 못한 거래.”
그 때문에 준영은 심판에게 주의를 들었다.
경기가 끝난 다음에 협회 쪽 사람이 와서 잔소리를 늘어놓기도 했고.
“이런 경우에 21세기 때는 어땠어요?”
“내가 했던 제스처 정도는 약과이지만, 상대에 대한 지나친 도발은 무례한 행동으로 취급해.”
아무튼 악명(?)을 날린 덕분에 준영은 다시 한 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준영의 도발 제스처가 썩 나쁘게 여겨지진 않았던 모양이다.
지금 극장 관객들이 보이는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흥, 물의는 개뿔.”
“뉴스 만든 놈, 분명히 노팅엄 출신일 거야.”
“그러게. 별걸 갖고 시비야.”
호의적인 반응에 리즈의 얼굴도 밝아졌다.
“적어도 맨체스터 내에서는 이미지가 나빠진 것 같진 않네요.”
“나쁜 남자가 오히려 인기가 많을 때가 있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레트 버틀러 같은 사람 말이군요.”
사실 맨체스터 사람들이 호의적으로 보는 까닭은 준영이 그만큼 활약을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씹고 뜯고 까대고 있을 터.
‘결론은 앞으로도 잘해야 한다는 거지.’
일전에 만났던 처칠도 그랬다.
대중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고.
잘할 때는 박수 치지만 그것도 잠시뿐, 못할 때는 벌 떼같이 달려들어 비난을 퍼붓곤 한다.
‘그런 점은 21세기와 다를 게 없어.’
그걸 감수하고 꾸준히 이어 나가야 레전드 플레이어로 이름을 남길 수 있으리라.
어쨌거나 당장은 영화 감상에 집중하기로 했다.
21세기에서는 다운받아 볼 수 있는 고전 영화라도, 이렇게 커다란 스크린 앞에서 미소녀와 오붓하게 감상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으니까.
***
2시간가량이 지난 후.
극장에서 나온 준영과 리즈는 방금 봤던 영화에 대해서 감상을 주고받았다.
“명작이라더니 확실히 그러네.”
“네. 처음에는 일본군에 대들며 공사를 거부하던 니콜슨 중령이 다리 건설을 독려하고, 또 폭파를 막으려 들 줄이야…….”
“자긍심에 도취되어 흑화된 거지.”
“흑화?”
“21세기 용어인데 성격이 나쁘게 변하거나 타락하는 걸 의미해.”
또 하나의 미래 지식(?)을 습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리즈.
그녀는 앞쪽으로 눈길을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왜 그래?”
“저길 봐요. 저 애, 앤지 같지 않아요?”
리즈가 가리키는 쪽을 보았던 준영은 건너편 인도를 거니는 소년들 속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진짜 앤지잖아.’
거리의 사내아이들같이 남장을 하고 있었지만, 못 알아볼 정도로 거리가 멀지 않았다.
앤지도 준영과 리즈를 알아봤던지 움찔 놀랐다.
“너 앤지 맞지? 그렇지?”
리즈가 냉큼 차도를 건너오자, 앤지는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큰길 옆 골목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같이 있던 애들도 찔리는 게 있던지 허둥지둥 달아났다.
“거기서! 음악회 감상 간다더니 그런 꼴로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앤지의 너저분한 행색은 세간에서 테디 보이 혹은 테디 걸이라 하던 것과 흡사했다.
테디 보이(Teddy Boy).
상류 사회를 동경해서 그럴듯하게 꾸미고 다니는 서민 청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있는 집 자식인 앤지가 왜 저런 행색을 한 것인지?
‘혹시 불량한 친구들에게 물든 게 아닐까?’
의문과 걱정이 뒤섞인 리즈는 좀 더 속도를 높였다.
치마 차림이지만, 아침마다 준영에게 지도를 받은 덕분에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거기다 앤지 일행도 도중에 건달들에게 잡혔다.
“야 인마, 사람을 치고 그냥 가려고?”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말로 해결될 것 같냐? 내 옷에 묻은 얼룩 어떡할 거야?”
묻지도 않은 얼룩을 가지고 시비를 걸다니!
낯을 찌푸리는 앤지의 팔을 잡은 건달은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척 보니 철부지 아가씨들 같으니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을게. 대신 같이 좀 놀아…….”
“내 동생한테서 손 떼요!”
황급히 달려온 리즈의 외침에 건달들은 조소를 흘리며 다가왔다.
“흐흐, 이거 월척이 연달아 걸리네.”
“그러게. 운수 대통이야.”
건들거리며 접근하던 건달들은 흠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리즈의 등 뒤에 나타난 체격이 큰 동양인을 보았기 때문.
“야, 저 칭크 녀석, 혹시…….”
“맞아. 유나이티드에서 뛰고 있는 노란 원숭이야.”
건달들이 주절대고 있는 사이, 가까이 다가온 준영은 짤막하게 말했다.
“3초 준다.”
“뭐?”
어리둥절해하는 건달들에게 손가락 3개를 내보인 준영은 하나씩 접었다.
그리고 주먹을 움켜쥐기 무섭게 가까이 있는 주근깨 녀석을 냅다 후려갈겼다.
“크억!”
“아, 아니!”
건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으름장이나 더 늘어놓을 줄 알았는데,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다니!
“야 인마, 무슨 짓이야! 죽고 싶냐?”
“다시 3초 준다. 꺼져.”
“뭐라고 주절대는 거야, 원숭이 새끼가!”
“축구 선수면 몸 귀한 줄 알아야지, 앙?”
덩치만 크면 다냐.
쪽수가 많은 자신들이 유리하다 생각한 건달들은 준영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제일 먼저 주먹을 날렸던 녀석은 준영의 돌려 막기에 차단당한 후, 이어지는 발차기에 정강이를 걷어차였다.
그리고 그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준영은 공중에서 방향을 틀면서 또 다른 건달의 복부를 걷어찼다.
“아악! 내 다리!”
“끄어어억!”
‘우와!’
리즈와 앤지, 그리고 앤지의 친구들은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운동선수니까 싸움도 어느 정도 하겠지.
그리 생각했지만, 힘과 덩치로 제압하는 게 아니라 마치 묘기와 같은 펀치와 킥으로 건달들을 때려눕히는 게 아닌가!
“조심해요! 칼을 꺼냈어요.”
리즈의 외침에 돌아선 준영은 아까 주먹을 맞고 쓰러졌던 주근깨가 나이프를 든 것을 보았다.
“죽어라, 원숭이!”
쉬익! 쉭!
파공성이 들릴 정도로 사납게 날아드는 나이프.
황급히 피한 준영은 금세 벽까지 몰렸다.
“하하, 잘난 척 날뛰더니… 어라?”
주근깨의 비릿한 웃음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벽을 차고 뛰어오른 준영이 그대로 돌려 차기로 턱을 후려갈긴 것이다.
찍소리도 못하고 기절해 버린 동료를 본 건달들은 전의가 땅바닥까지 떨어졌다.
쩔쩔매던 건달들을 둘러보던 준영은 앤지의 팔을 잡은 녀석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히익, 죄, 죄송합니다!”
냉큼 앤지에게서 손을 뗀 녀석이 줄행랑을 놓았다.
다른 녀석들도 쓰러진 동료를 부축해서 허둥지둥 도망쳤다.
놈들이 사라지자, 리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요, 준. 혹시 다친 데는 없어요?”
“멀쩡해.”
괜찮다는 듯 양팔을 펼쳐 보인 준영에게 앤지의 친구 하나가 쭈뼛거리며 다가와 말을 건넸다.
“저기요, 방금 그거… 쿵푸예요?”
“아니, 태권도야.”
어릴 때 태권도 유단자인 보육원 선생님에게 한 수 배웠다.
중학교 때까지는 축구를 계속할까, 태권도를 할까 고민하기도 했을 정도.
아무튼 준영이 태권도가 뭔지 설명해 줄 필요는 없었다.
앤지와 그녀의 친구들은 리즈에게 먼저 꾸중을 들어야 했으니까.
“너희들, 앤지랑 같은 반 애들이지? 도대체 그런 차림으로 어디서 뭐 했던 거니?”
“나, 나쁜 짓은 안 했…….”
“나쁜 짓이 아닌데 왜 도망간 거니?”
엄한 리즈의 눈길에 소녀들은 진땀을 뻘뻘 흘렸다.
그때, 가만히 침묵을 지키던 앤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쿼리멘이라는 리버풀의 스키플 밴드가 공연을 한다기에 보러 온 거야.”
“뭐라고? 음악회 감상이라는 게 스키플 밴드 공연 구경이었어?”
리즈가 어이없어하고 있을 때,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준영이 관심을 보였다.
쿼리멘이란 밴드는 예전에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았으니까.
“유명한 밴드인 모양이군.”
“그들은 앞으로 최고로 유명해질 거야!”
눈빛을 반짝이며 확신하는 앤지의 모습에 준영은 혀를 내둘렀다.
‘허, 얘 빠순이였나?’
평소엔 무뚝뚝하고 말수도 적은 아가씨가 이런 쪽으로 열정적인 취미가 있었을 줄이야!
그러고 보니 앤지는 기타도 곧잘 치곤 했었다.
비틀즈의 ‘Imagine’도 금방 듣고 연주할 정도로 제법 실력도 있었고.
“그런데 왜 그런 꼴을 한 거야?”
준영의 물음에 앤지의 친구들이 이야기해 주었다.
“여자인 거 알면 치근대는 놈들이 많아서요.”
“혹시나 Personal Tutor에게 걸릴 수 있어서……. 헤헤헤.”
Personal Tutor는 개인 교사, 학교에서는 시간제 교사를 뜻한다.
하지만 학생들의 진로와 학업뿐만 아니라 생활 지도 단속도 담당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띄었다간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변장을 했다 이거군.”
“저기요, 선배님. 오늘 일, 혹시 말할 건가요?”
앤지의 친구들은 한 번만 봐 달라는 듯 애원 어린 눈길로 리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림도 없다는 듯 리즈의 표정은 냉랭했다.
좌절감을 느끼던 소녀들에게 구원자가 된 건 준영이었다.
“한 번만 봐주지 그래? 얘들도 겪어 봤으니까 다신 위험한 데 얼씬하지 않을 거야.”
준영은 그렇지 않냐는 듯 앤지를 바라보았다.
“어때, 앤지? 다신 모두가 걱정할 만한 일은 하지 않을 거지?”
“응, 약속할게.”
앤지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동생의 모습에 리즈도 오늘 일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약속한다니 믿어 볼게.”
“고마워, 언니.”
“뭘, 솔직히 나도 떳떳한 입장은 못 되는걸.”
입시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외간 남자랑 만나서 영화를 보러 가다니.
학교에 알려지면 경을 치고 말리라.
“집으로 갈 건데 너도 같이 귀가할래?”
“그럴게. 아, 그 전에 옷을 갈아입고 올게.”
앤지 일당은 원래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근처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그곳 물품 보관함에 넣어 두었던 옷을 꺼낸 그들은 역 구내 화장실에서 갈아입고 나왔다.
“와, 동양 무술이란 거 말만 들었지, 눈앞에서 본 건 처음이야.”
“그러게. 평범한 축구 선수는 아닌 것 같은데……. 정체가 뭘까?”
친구들의 수다에 앤지가 대답했다.
“그 사람은 첩보원이야.”
“엥? 진짜?”
“아니, 농담.”
“야, 그런 무덤덤한 얼굴로 농담하지 마! 진짠 줄 알았다고!”
사실은 미래에서 온 사람.
돌아가신 아버지가 가족을 구해 달라며 보내 준 사람.
‘하지만 이건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
그는 이제는 남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으니까.
비밀을 품은 앤지의 입가에 가늘게 미소가 떠올랐다.
***
실제로 축구하고 태권도 같이하다 진로를 고민했던 선수가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입니다. 실제 경기에서도 태권도 킥 같은 아크로바틱한 슛을 하는 걸로 유명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