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59화 (59/400)

Round 59. 요주의 인물

“당돌하군. 내가 구닥다리라 보는 눈이 없다는 건가? 그러는 네놈은 안목이 있고?”

“제 나라에 대해서는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준영은 자신 있게 큰소리를 칠 수 있었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알고 있으니까.

4.19 혁명, 한강의 기적, 5.18 민주화 운동, 6월 항쟁, 서울 올림픽, IMF 사태, 금 모으기 운동, 2002 월드컵 등등.

이렇게 당당한 준영의 기세에 처칠도 한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 말하니 할 말이 없군. 저 멀리 극동에 있는 나라가 어찌 되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처칠은 시가를 재떨이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에 대해서는 생각을 다시 하도록 하지. 영국 축구에 변화와 혁신을 불러올 자극 정도로.”

동양인이 활개 칠 동안 영국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내심 이렇게 분개한 이들이 축구에 대한 투자와 선수 육성에 나서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발전이 되어 가는 것이고.

“제국이라면 포용의 덕목도 보여야 하는 게 맞을 테니까. 자네가 활약하는 만큼 유나이티드도 이득이 있을 거고.”

“물론입니다. 맨유가 유러피언 컵에서 우승하면 그 영광은 영국의 것이 될 겁니다.”

아울러 자신의 활약에 따라 이 시대의 한국인들도 나름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

21세기에서는 국뽕이라고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하지만, 시궁창보다 더 참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1950년대의 한국인들에겐 절실할 것이다.

절망에서 다시 일어나려면, 어느 정도의 자긍심이 필요하니까.

***

준영은 이후 처칠과 좀 더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옛날이야기나 가족들에 대한 것들이었다.

“파시스트이긴 해도 무솔리니 녀석도 본받을 점은 있지. 예를 들자면, 사위를 총살시켜 버린 거라든가.”

“그런 걸 본받는 건 좀…….”

준영이 정색을 했지만, 처칠은 태연했다.

“존 자네도 나중에 딸을 얻어 봐. 시답잖은 사위 놈은 머리통을 날려 주고 싶을 테니까. 안 그런가, 남작?”

“예, 각하. 저도 동감합니다.”

알버트는 딸이 없지만, 손녀가 셋.

눈에 넣어도 안 아플 혈육이기에 좋은 반려를 만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동감하신다라……. 어째 살짝 오한이 드냐?’

제 발 저린 구석이 있었던 준영이 살짝 알버트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 처칠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즐거운 대화를 계속하고 싶네만, 시간은 너무 늦었고 이 늙은이는 지치는군. 오늘은 이만 가 보겠네.”

“네, 각하.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 알버트. 한동안 맨체스터에 있을 테니 또 보세. 그리고 존, 이번 주에 자네 경기 보러 가겠네.”

“예, 최고의 활약 보여 드리겠습니다.”

처칠은 준영 일행과 악수를 나눈 후, 클럽을 나왔다.

그리고 호텔로 가려고 차를 타려 했을 때, 그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각하.”

“오, 이게 누군가. 번즈 자네가 여긴 웬일이야? 스파이라도 잡고 있는 중인가?”

“스파이만큼이나 주목할 만한 인물이 있습니다.”

처칠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개인적으로 그와 친분이 돈독했던 제이미 번즈는 MI6에서 오래 활동한 요원으로, 지난 전쟁에서도 큰 활약을 펼친 인물이었다.

“누군가? 그거 혹시 내가 아는 인물인가?”

“네, 방금 각하께서 대화를 나누었던 동양인 말입니다.”

“존 Y. 리?”

의아한 표정을 지은 처칠이 물음을 건넸다.

“그 녀석이 무슨 문제가 있나? 빨갱이를 피해 온 망명자가 아니라 빨갱이의 첩자인가?”

“첩자는 아니지만… 세간에 알려진 과거 내력은 전부 거짓입니다. 한국계 홍콩인이라는 신분도 사실이 아니고요.”

“그럼 사기꾼이란 얘기군.”

“처음엔 저희도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좀…….”

“뭐라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니! 그럼 도대체 뭐란 말인가?”

마치 말장난을 하는 듯했기에 처칠은 와락 미간을 찌푸렸다.

번즈는 그냥 처칠에게 말해 버릴까 고민했다.

하지만 말한다고 믿을까?

차라리 단순한 사기꾼이었으면 속이 시원할 텐데, 속속 들어오는 정보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럴듯한 정황도 있고, 진짜 믿을 만한 ‘증거’도 있다는 소문도 있으니까.

“솔직히 저희 내부에서도 존 Y. 리에 대해서 아직 확신하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요주의 인물인 건 틀림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확실히 평범하진 않아 보이더군.”

“그랬을 겁니다. 각하, 그자와 대화를 나누면서 뭔가 이상한 이야기를 들으신 게 없습니까?”

“이상한 점이라…….”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긴 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이 부흥하게 될 거라고 자신 있게 확신하던 태도.

‘제 고국이 폄하당하는 게 싫어 그랬을 수도 있겠지.’

그리 판단한 처칠은 번즈에게 물었다.

“그 친구, 위험 분자인가? 딱히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될 만한 녀석은 아닌 것 같던데?”

“물론 그렇진 않습니다만…….”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 인물일 수도 있다.

번즈는 이 말을 차마 내뱉지 못했다.

아직은 확실하지 않으니까.

“이보게, 번즈, 이 늙은이가 한 가지만 충고하지. 지나친 의심과 오해는 자제하게. 필요 없는 적을 만들게 되니까.”

그리 말하는 처칠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해군 장관 시절에 오스만투르크를 의심하고 그들이 주문한 전함들을 강탈했다가, 완전히 적으로 돌려 버렸던 일이 떠올랐던 것.

그 때문에 나중에 갈리폴리에서 끔찍한 패전을 겪었다.

“할 말은 다 한 것 같으니 이만 가 보겠네.”

“예, 각하.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처칠이 차를 타고 떠난 후, 번즈의 곁으로 그의 부하가 다가왔다.

“허더스필드엔 잘 다녀왔나?”

“예, 정보대로 아주 멋진 자동차가 있더군요.”

번즈의 물음에 대답한 부하는 사진 한 장을 건넸다.

특별히 컬러로 찍힌 사진에는 매우 특이하면서도 날렵한 외형의 빨간 컨버터블이 있었다.

현재의 자동차들과는 사뭇 다른 기가 막힌 디자인.

번즈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이게 정말 미래의…….”

***

빅토리아 시대의 제왕.

이런 타이틀을 가질 정도로 과거 아스톤 빌라 FC는 강하고 유명한 팀이었다.

다섯 번의 리그 우승과 세 번의 FA컵 우승.

하지만 그들의 화려한 영화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 저물고 말았다.

‘Mr.아스톤 빌라’로 불린 구단의 레전드, 윌리엄 에릭 휴튼 감독의 지휘로 1956-1957시즌 FA컵 우승을 차지했지만, 현재 리그 성적은 참혹했다.

1957년 10월 현재 그들의 순위는 18위.

강등권과는 단 1점 차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10월 5일 올드 트래퍼드 원정을 잘 마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지난 시즌 FA컵 결승에서 아스톤 빌라에게 쓴맛을 맛본 버스비의 아이들은 제대로 칼을 갈고 나왔다.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기 무섭게 맨유는 아스톤 빌라를 몰아쳤다.

그 압도적인 흐름은 전반전이 절반 이상 지나는 동안 계속 이어졌다.

「바비 찰튼, 토미 테일러에게 패스를 받고 돌파! 한 명 제치고 슛! …아깝게 골키퍼 나이젤 심즈의 손을 맞고 넘어갑니다.」

라디오 중계 캐스터가 잠시 물을 마시는 사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코너킥 공격을 준비했다.

“다들 안으로 들어와!”

“마크맨을 놓치지 말고!”

“지미! 거기 키 큰 5번 녀석 절대 놓치지 마!”

공격 가담을 하러 왔던 준영은 아스톤 빌라 진영을 보고 혀를 찼다.

“11명이 다 들어와 있잖아.”

역습 같은 건 포기한 모양.

특히 준영을 마크하겠다고 센터백과 포워드 둘이 주변을 둘러쌌다.

“나보다 리암이나 토미에게 마크를 붙는 게 낫지 않냐?”

“시끄러! 적군 주제에 간섭하지 마!”

준영이 상대 선수들과 잠시 떠드는 사이, 공이 날아왔다.

워낙에 문전에 밀집이 되어 그런지, 외곽 쪽으로 짧게 들어온 공을 바비 찰튼이 머리를 대어서 방향을 돌려놓았다.

그렇게 궤적이 틀어진 공은 준영이 있는 쪽으로 날아왔다.

‘나이스 패스… 어엇!’

준영이 뛰어나가려는 순간, 수비에 가담했던 공격수들이 막았다.

한 명은 잽싸게 등을 지고 길을 막았고, 다른 하나는 뒤에서 몰래 유니폼을 잡고 늘어졌다.

“방해하지 마!”

준영은 힘으로 뿌리쳤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그가 받을 공에 아스톤 빌라 수비수가 먼저 다가갔던 것.

‘놓칠 것 같냐! 뺏어서 골대에 처넣어 주마!’

‘제길, 괴물 자식!’

눈 깜짝할 사이 동료 둘을 뿌리치고 달려오는 준영의 모습에 놀란 수비수는 황급히 공을 걷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잘못 건드려 버린 공은 영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어?”

“아, 안 돼!”

골키퍼가 급하게 몸을 날렸지만, 수비수의 발등에 튕긴 공은 골대 우측 상단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순간, 아스톤 빌라 원정 응원단은 말을 잊어버렸고, 맨유 팬들은 행운의 골에 쾌재를 불렀다.

「아, 자책골! 자책골이 나왔습니다! 전반 32분, 지미 더그데일의 치명적인 실수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한 골 앞서 나가기 시작합니다.」

아스톤 빌라의 어처구니없는 실점에 귀빈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처칠은 혀를 찼다.

“저런 멍청한……. 좀 더 침착했어야지.”

“잘해 보려다 그런 건데, 너무 비난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처칠은 방금 자신의 말에 대꾸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프레드로 남작의 첫째 손녀 엘리자베스라고 했던가.

상냥하고 영특해 보이는 그녀의 시선은 필드에서 가장 큰 거인에게 향해 있었다.

처칠 역시 그 거인의 플레이를 눈여겨보고 있는 중이었다.

‘진짜 굉장한 놈이군.’

아스톤 빌라 수비수가 겁을 먹고 실수를 할 만했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체격도 무쇠 같은 놈이 달려들었으니까.

‘리틀 존을 막고 싶으면 탱크라도 끌고 와야 할 겁니다.’

얼마 전 버스비 감독이 맨체스터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 팀 선수에 대한 뿌듯함이 묻어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정말 상대 팀 입장에선 탱크를 끌고 와야 할 판이었다.

수비는 그야말로 철벽.

공격에도 적극적인데, 공격수들에게 밀어 주는 패스는 정교했고, 상대를 제치는 기술도 근사했다.

지금도 빙글 돌면서 2명을 제쳐 냈는데, 공을 자석으로 붙여 놓은 것처럼 끌고 나갔다.

그 광경에 관중들이 일시에 탄성을 내뱉었다.

“오, 나왔다! 스트레인지 룰렛!”

“하하핫, 빌란스(* 아스톤 빌라 FC의 별명) 녀석들, 유니폼만큼 얼굴이 새파래진 것 좀 봐!”

스트레인지 룰렛.

원래는 마르세유 턴이라고 불리는 이 기술은 낯선 이방인인 준영이 썼다고 그리 이름 붙여졌다.

이 기술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선수들 중에서도 따라 하는 이들이 나왔다.

일주일 전에는 2부 리그 허더스필드 타운에서 뛰는 스코틀랜드 소년 데니스 로가 이 기술로 결승 골을 터트리기도 했다.

“하지만 워낙 어려운 기술이라 실패하는 경우가 많대요. 그래서 도박이나 마찬가지라고 룰렛이라 덧붙여진 거고요.”

“과연, 그럴 만하군.”

리즈의 설명에 처칠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박과 마찬가지.

남들에겐 그리 여겨지는 기술을 녀석은 아주 능숙하게 사용했다.

‘확실히 튀는 놈인 건 분명하군.’

그 정체가 첩자인지 사기꾼인지 모르지만, 지켜볼 만한 요주의 인물인 건 틀림없어 보였다.

***

1956-1957시즌 맨유가 FA컵 우승 놓친 게 당시 골키퍼 레이 우드가 경기 도중 부상으로 빠졌기 때문이라는군요. 당시 규정이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레이 우드 대신에 필드 플레이어였던 재키 블란치플라워가 남은 시간 동안 골문을 지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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