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58. 역사적인 만남
‘펠레라. 언젠가 맞붙을 기회가 왔으면 좋겠는데.’
마주치는 것도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펠레는 브라질에서 국보급 선수로 애지중지해서 해외 이적을 금지시켰다고 하니까.
그러니 월드컵이 아니면 그와 맞붙을 기회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준영은 이 시대 최강자와 겨뤄 볼 흥미진진한 기회가 반드시 오기를 기대했다.
자신의 활약으로 인해 축구의 역사가 바뀌면, 펠레와 맞붙을 날이 오지 않을까 하고.
‘물론 그렇게 바라는 건 나밖에 없나.’
준영이 충격과 공포라고 했지만, 다들 그리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럴 만한 게 유럽인들 입장에선 생소한 선수였으니까.
보그 백작도 예외는 아니었다.
준영의 말을 냉큼 흘려버린 그는 젊은 여성들과 귀부인들을 상대로 미사여구를 쏟아 내는 데 열심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자작 부인. 여전히 부인의 시간은 1930년에서 멈춰 있군요.”
“호호호, 실없는 농담을 하시긴.”
“이쪽은 따님인가요? 오, 작은 새싹이 어느새 이렇게 화사한 꽃으로…….”
한동안 꽃밭에서 작업(?)에 몰두하던 보그 백작.
준영은 그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말을 건넸다.
“백작님, 실례가 안 된다면 여쭐 것이 있습니다만?”
“음, 뭔데 그러나?”
흔쾌히 수락하자, 준영은 처음 그를 보았을 때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건넸다.
“혹시 말인데 윌리엄 터너라는 사람을…….”
쨍그랑-
단숨에 낯빛이 굳어진 보그 백작은 손에 든 찻잔을 떨어트렸다.
“…혹시 아십니까? 백작님과 많이 닮았던데요.”
준영이 마저 말을 이었다.
돌이 된 것처럼 한동안 굳어 있던 보그 백작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글쎄, 처음 듣는 이름이구먼.”
설득력이 없는 대답이다.
지금 백작의 눈길만 봐도 ‘이 녀석이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지?’라고 외치고 있으니까.
‘뭔가 있구만.’
아무래도 터너 신부님은 보그 백작과 엮여 있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
‘여기서 더 캐물어 볼까?’
‘젠장, 누가 이 녀석 좀 데려가 줘!’
준영과 보그 백작이 웃는 낯으로 마음의 소리를 내뱉고 있을 때였다.
단정한 차림새의 30대 여성이 준영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미스터 리. 이런 곳에서 다 뵙는군요.”
“앗! 오랜만이네요, 변호사님.”
본의 아니게 보그의 구세주가 되어 준 여자 변호사.
그녀는 지난번에 준영의 신분 발급을 도와줬던 런던의 변호사 마거릿 대처였다.
미래의 총리이시다 보니 그녀를 대하는 준영의 태도는 더없이 깍듯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맨체스터엔 어쩐 일이세요?”
“법률 사무소 업무가 있어서 왔는데, 도중에 아주 대단한 분과 동행을 하게 되었죠.”
“대단한 분요?”
마거릿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그분이 미스터 리를 한번 보고 싶어 하더군요.”
‘아니, 대체 누군데?’
대처와 동행했다면 분명히 런던에서 온 사람일 것이다.
아주 대단한 분이라니,
미래의 총리님이 그리 말할 정도라면 어느 정도의 거물이란 말인가?
준영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보그 백작이 황급히 재촉했다.
“뭘 하고 있나, 무슈 리. 귀한 분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서둘러 가 보지 않고!”
준영이 빨리 꺼져 줬으면 했던 보그의 입장에선 절호의 기회였다.
아쉽긴 했지만, 준영은 마거릿을 따라 홀을 나왔다.
그리고 귀하신 분이 있다는 방에 당도했는데, 방문 너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그럼 정계로 돌아올 마음은 없는 건가?”
“작위를 받고 뒷방 늙은이가 된 지 오래입니다. 이 나이에 또 무엇을 하겠습니까.”
“허허, 내 앞에서 나이를 들먹이다니 가소롭구먼.”
“각하야 배포나 능력이 남다르시니까요. 말씀하신 대로 저는 가소로운 수준입니다.”
낯선 노인의 목소리와 함께 들려온 목소리는 분명히 알버트의 것이었다.
아까 잠시 자리를 뜬다 싶었는데, 알버트가 먼저 귀하신 분을 만나고 있는 걸까.
“각하, 미스터 리를 데려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사자처럼 으르렁대는 목소리가 들린 후, 마거릿은 방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간 준영은 알버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뿌연 담배 연기를 구름처럼 두르고 있는 풍채 당당한 동그란 얼굴의 노인.
분명히 교과서에서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윈스턴 처칠!’
2차 대전에서 영국을 승전으로 이끌었던 늙은 사자.
아직 팔팔하게 살아 있단 이야기는 들었지만, 왜 이 사람이 날 찾는단 말인가?
***
“네놈이 스탠리 매튜스를 쓰러트린 녀석이군.”
시가를 물고 으르렁대는 처칠을 향해 준영이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존 Y. 리입니다.”
“앉게.”
뭔가 못마땅한 기색의 처칠이 빈 의자를 가리키자, 준영은 그 의자에 앉았다.
그럼에도 처칠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앉은 상태에서도 준영을 내려다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그 프랑스의 꺽다리 녀석만큼이나 크구만.”
“드골 장군 말씀이시군요.”
드골은 꽤 유명 인사에다가 연합군 수뇌들 중에 가장 키가 컸다.
그렇다 보니 준영도 드골과 비교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개구리 장군만큼이나 뻔뻔해 보이는군. 남의 집에 얹혀사는 것도 닮았고.”
‘칭찬인지, 욕인지…….’
드골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 전까지 자유 프랑스군과 함께 영국에 있었다.
준영이 알버트의 집에 머물고 있는 것을 그에 빗대고 있는 것이다.
“뻔뻔한 꺽다리 녀석을 구경하려고 부르신 겁니까?”
“대영제국의 자존심을 밟아 놓고 있는 게 어떤 놈인가 궁금해서 불렀지.”
축구 종가에서 동양인이 활약하는 게 마땅치 않은 모양.
준영도 처칠이 그리 선량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학교 수업에서나 터너 신부님에게도 들었다.
그냥 제국주의 시대 정치인.
현대 용어로 더 함축하자면 꼰대, 혹은 보수.
아마 2차 대전 때 영국을 승리로 이끌지 못했다면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으리라.
“대영제국의 자존심이 고작 동양인 선수 한 명 때문에 손상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만?”
“그럼?”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거죠. 가령 일개 동양인 선수보다 뛰어난 선수를 키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든가.”
현재 영국 축구의 환경은 1950년대임을 감안하더라도 그리 좋다고 할 수 없는 형편이다.
비가 오면 갯벌이 되는 필드를 빼놓더라도 이런저런 문제들이 잔뜩 있었다.
“유소년 육성은 이제 걸음마 단계인 데다, 주급 제한까지 걸려 있으니 선수들의 의욕이 크지 않죠. 10년 안팎의 프로 생활을 하다가 새로운 직업을 준비하는 게 현실입니다.”
그건 주전으로 뛴 경험 많은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은퇴하면 노하우를 후학에게 전수하지 못한 채, 목수나 배관공으로 일하는 실정이었다.
감독이나 코치 같은 지도자 자리는 한도가 있었으니까.
“가장 치명적이었던 건 축구 종가라는 오만에 젖어 다른 나라 축구가 얼마나 발전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는 겁니다.”
월드컵이 시작할 무렵에 영국은 분명 최강이었다.
그래서 대회 수준이 형편없다고 참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사이 다른 나라들은 부단하게 경쟁하며 새로운 전술을 받아들이고 기술을 개발해 왔다.
그러면서 격차를 줄인 것은 물론, 추월하는 수준에 이르렀던 것이다.
“월드컵에서 미국에게 졌던 것도, 헝가리에게 참패를 당했던 것도 다 그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영국 축구협회는 깨달은 게 없는지, 프로팀들의 유러피언 컵 참가를 반대했다.
“이건 비단 축구뿐만이 아닙니다. 역사를 보면, 자만과 오만에 빠진 나라치고 망하지 않은 나라는 없습니다. 그건 각하께서 더 잘 알고 계실 겁니다.”
“확실히 지난 전쟁 때 독일과 일본이 그랬지.”
순식간에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 독일.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과신하여 소련을 공격하며 전선을 2개로 늘려 버렸다.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며 미국과 전쟁을 시작했고.
두 제국의 자만과 오만은 결국 패망으로 끝났다.
“각하도 아시겠지만, 로마 제국은 2,000여 년을 존속했죠. 유용하다면 이방인들은 물론 그들이 가진 문물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허허, 공만 차는 녀석인 줄 알았더니 제법 공부를 했군.”
처칠의 칭찬에 준영은 학창 시절 역사 시간에 졸지 않은 것에 보람을 느꼈다.
복잡한 수학이나 물리에 비하면 역사 과목은 재밌는 이야기들이 많았으니까.
“존의 말이 맞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에 황혼이 온 것은 우리 스스로 과거의 영광에 취해 변화하는 세상에 대처하는 데 게을리한 원인이 큽니다.”
준영이 이야기할 동안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알버트가 거들고 나섰다.
제대로 뼈를 때린 발언이었기에 처칠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렇다고 다가오는 황혼을 지켜만 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물론입니다. 하지만 과거의 낡은 패권을 붙잡고 있는다고 황혼이 물러나진 않겠지요.”
2차 대전이 끝나고 영국은 인도를 잃었고, 얼마 전에는 수에즈 운하까지 상실했다.
그동안 알버트가 준영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앞으로 아프리카의 식민지도 독립할 것이다.
또 현재의 호황이 끝나고 60년대부터는 불황이 시작되며 본격적인 암흑기가 찾아온다.
“변화는 혼란스럽고 쇄신은 고통스러울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전진해 나가면 새로운 여명을 볼 수 있겠죠.”
“받아들이기 힘들구만.”
답답한 표정을 지은 처칠은 시가 연기를 뿜어내며 말을 이었다.
“아이들에게 좀 더 부강한 나라를 남겨 주고 싶은 욕심이 있지만, 이 늙은이의 시대는 끝났지.”
처칠은 준영을 데려왔던 마거릿을 바라보았다.
옥스퍼드 출신의 이 여성 변호사는 정계로 나갈 뜻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 같은 구닥다리 늙은이는 저치의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지만 자네 같은 젊은 친구들은 귀담아들었으면 좋겠군.”
“네. 명심하겠습니다, 각하.”
마거릿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마거릿 대처.
그녀는 훗날 권좌에 올라 고통스러운 쇄신과 혼란한 변화를 시도하는 인물이다.
이런저런 비판을 듣지만, 그래도 쇠락하는 제국을 소생시키고, 영국의 자존심을 세워 놓은 철의 여인(Iron Lady)으로 이름을 날렸다.
‘과거 제국의 총리와 미래 영국의 총리와의 만남이라……. 그야말로 역사적인 순간이군.’
내심 감탄하고 있던 준영에게 처칠이 다시 말을 건네 왔다.
“자네, 한국인이라지?”
“맞습니다.”
“그 쓰레기통 같은 나라에도 나름 인재는 있었군.”
준영의 눈썹이 휘어졌다.
애국자라고 자처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시당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지금 한국이 처칠이 말한 대로 쓰레기통이라 하더라도.
“지금 보면 쓰레기통일지 몰라도, 나중엔 장미꽃이 필 겁니다.”
준영의 말에 처칠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훗, 내가 보기엔 어림도 없어 보이는데?”
“그러시겠지요. 받아들이기 힘드실 테니까요.”
처칠의 볼 살이 꿈틀했다.
방금 전 대답은 아까 자신의 발언을 빗대어 반박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므로.
***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터미네이터 같은 유명한 블록버스터 시리즈에 한국 배우가 나오거나, BTS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죠.
상전벽해라는 말이 우리 현대사에 가장 걸맞은 사자성어가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