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49화 (49/400)

Round 49. 늑대와 거인

‘딱히 역사에 영향을 끼칠 생각도 없지만……. 조금씩 영향을 주고 있긴 한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풋볼 리그의 한국인 선수.

사실 그것만 해도 스포츠 역사에 한 장을 남긴 셈이다.

더구나 레전드가 되겠다는 목표를 이루게 되면 새로운 역사가 추가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달라질 것도 있을 터.

안 그래도 뮌헨 참사라는 불행한 역사를 막으려 궁리 중인 상태이고.

‘거기다 라면 같은 것만 해도 그래. 원래는 일본에서 대중화되어 인스턴트 음식이 되는 요리잖아.’

그런데 유럽, 영국에서도 나왔다.

더구나 그걸 차이나타운의 중국인들보다 영국인들이 더 좋아하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아마도 그건 사람들이 지금 한창 맛있고 색다른 요리를 많이 찾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찾는 이유가 있어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식량을 배급했을 정도로 힘들었으니까요.”

영국은 전후에도 10년 가까이 배급제를 유지했을 정도로 경제가 힘들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막대한 원조와 투자를 하면서 경기는 회복되었고, 50년대 중후반부터는 호황기에 들어섰다.

당연히 주머니가 두둑해진 사람들은 여러 가지 새로운 요리를 즐기기 시작했다.

감자나 전쟁 때부터 질리도록 먹은 스팸은 이제 지긋지긋하니까.

마침 미국에서 햄버거와 밀크셰이크가 건너오고, 차이나타운에서는 중화요리들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엔 이탈리아나 인도 요리점들도 나타나고 있어요. 아직 대중적이진 않지만.”

“그렇다면 지금이 매우 좋은 찬스로군요.”

라면 이외에도 일전에 생각해 둔 것들, 21세기의 소스나 과자는 이 시대 사람들의 식도락을 충족시켜 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런 건 미래를 아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사업이지.’

식품 회사 쪽 인맥이 있는지 알버트 남작이나 찰리 사장에게 물어봐야겠다.

그리 마음먹은 준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즈가 말했다.

“이참에 크게 벌어 볼 생각인가 보네요.”

“나는 선수거든요. 눈앞에 온 기회를 놓치진 않아요.”

준영의 대답에 리즈는 갑자기 샐쭉한 기색을 보였다.

“응? 왜 그래요?”

“그럴듯한 말인데, 그리 와닿지는 않아서요.”

토라져 버린 리즈는 손 놓고 있었던 과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에 맘이 상한 걸까.

준영은 잠시 어리둥절하다 이내 눈치를 챘다.

‘그런 의미였나.’

선수라면서 정작 눈앞에 온 기회는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리즈를 바라보는 준영의 눈길은 좀 더 부드럽게 변했다.

***

9월 27일.

막 훈련을 마친 준영은 구단 직원에게서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나이 많으신 분인가요? 아님 나랑 같은 동양인?”

“아뇨. 젊은 신사분이었어요. 볼턴에서 왔다던데…….”

“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서둘러 밖으로 나간 준영은 낯익은 젊은 사업가를 볼 수 있었다.

미래에 Ree복을 창업하는 조셉 포스터.

그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셨습니까, 미스터 리.”

“네, 안녕하세요.”

갑자기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일까.

준영은 일단 이야기를 나누기 좋은 곳, 지난번에 포스터 형제와 만났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훈련은 잘됩니까?”

“예, 내일이 울버햄프턴 원정 경기라 마무리 훈련을 했죠.”

“만만찮은 상대와 시합을 하게 되었군요. 건투를 빌기 딱 좋을 때 선물을 가지고 와서 다행입니다.”

“선물이요?”

조셉은 가지고 온 가방에서 커다란 축구화 한 켤레를 꺼냈다.

투박하고 무거운 구형 축구화와 다른 신식 축구화.

기존의 아D다스 제품보다 훨씬 가볍고 날렵하게 만들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건 준영의 21세기 축구화를 카피한 제품이었으니까.

“우와, 벌써 만든 겁니까? 이거 정말 잘 만들었군요.”

“좋은 견본을 받았으니까요. 만드는 데 저도 한몫했죠.”

“직접 만드셨다고요?”

“그야 제화 업자니까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손을 내저은 조셉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궁금한 점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작업에 동참했는데, 아쉽게도 완전히 소재나 기술 분석을 하진 못했습니다.”

‘완벽하게 카피하긴 힘들지.’

소재나 기술이 21세기에 미치지 못하기에 준영도 애초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셉이 만든 이 축구화는 상당히 맘에 들었다.

미래의 장비에 미치진 못하지만, 착용감은 기존의 1950년대 축구화보다 훨씬 좋았기에.

“고맙게 쓰겠습니다. 다만 울버햄프턴 전에 쓰진 못하겠네요.”

“하긴 길이 들어야 쓸 만할 테죠.”

“잘 아시는군요.”

“할아버지께서 항상 말씀하셨죠. 고객의 입장을 이해해야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아마 스포츠맨인 조셉의 할아버지는 그 점을 더 잘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요, 미스터 리. 제가 기술적인 부분과 관련해서 묻고 싶어 그러는데…….”

“일전에도 말했지만, 전 사용자일 뿐이라 기술은 잘 몰라요.”

“아뇨. 그리 전문적인 질문은 아니고요.”

잠시 뜸을 들였던 조셉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이어 갔다.

“미스터 리가 주신 견본 말인데, 굉장히 기술이 발전한 나라의 물건 같아 보이더군요.”

“그건…….”

“신문 기사를 봤습니다. 리 선수는 돌아갈 수 없는 곳에서 왔다면서요?”

살짝 긴장했던 준영은 내심 안도하며 대답했다.

“예, 사정이 있어 자세하게 밝힐 순 없어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아무튼 이건 공산권에서도 기술이 꽤 뛰어난 나라에서 만들었을 것 같습니다. 동독 아니면 체코슬로바키아 아닐까 싶은데…….”

두 나라 모두 전쟁 전부터 공업 국가로 유명했다.

더구나 체코슬로바키아는 1934년 월드컵 준우승을 했을 정도로 축구 강국이다. 매직 마자르의 헝가리와 이웃이기도 하고.

‘미스터 리도 체코슬로바키아 아니면 헝가리에서 축구를 배우면서 그곳의 신형 축구화를 입수했을 거야.’

이런 조셉의 짐작은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것이었다.

‘그거 미래에 너님 회사에서 만든 거라고.’

로고만 있지 않고 Ree복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으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으려나.

아니, 이 시점엔 아직 Ree복이라는 브랜드명을 생각해 내지 못했을까.

“아무튼 공산권에선 경공업 기술이 뒤떨어졌다고 들었는데, 소문과는 다른 모양이군요.”

“네, 저도 잘 모르지만… 서방 진영에서 공산권의 기술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건 사실이죠.”

이건 실제로도 그랬다.

준영이 알기로 그와 관련해서 이쯤에 매우 큰 사건이 터진다.

“아마 인공위성 같은 건 소련이 세계 최초로 쏘아 올릴지도 몰라요.”

“네? 설마요. 소련은 뒤떨어진 농업 국가잖아요.”

조셉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실소를 지었다.

사정을 밝힐 수 없는 공산권의 망명자라 하더라도, 최첨단의 우주 개발 기술과 관련한 정보를 알고 있을까.

하지만 준영은 너무나 자신만만했다.

“나랑 내기해 볼래요? 내가 틀리면 내 비밀을 가르쳐 주죠. 대신 내가 맞으면 날 형님으로 모시는 겁니다.”

“좋습니다. 해 보죠.”

조셉은 냉큼 승낙했다.

지든 이기든 딱히 손해 볼 게 없다고 여겼으니까.

그래서 약 일주일 후, 정말 놀랄 만한 우주 쇼가 벌어질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

맨체스터에서 남쪽 120킬로미터 떨어진 도시 울버햄프턴.

금속 세공으로 번영을 누린 이 도시는 1957년 현재 자전거 제조 산업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달려라, 울프스!”

“5연승 가즈아~!”

공립 대학 길 건너편에 자리한 몰리뉴 스타디움에 모인 5만 관중들의 함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 열띤 함성은 출전 대기 중이던 선수들에게도 전해졌다.

“올 시즌 첫 출전 상대가 늑대 군단이라…….”

바비 찰튼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만만찮은 상대인 데다, 오늘 유나이티드의 출전 선수들은 베스트 일레븐도 아니었으니까.

울버햄프턴 선수들도 이를 두고 아쉬움과 승리의 기대감이 뒤섞인 반응을 보였다.

“더블린 여행이 꽤 피곤했던 건가? 아니면 우릴 얕보고 있는 거야?”

유달리 아쉬움을 드러내는 곱슬머리 선수.

남다른 기백을 드러내고 있는 이 남자, 그가 바로 늑대 군단의 핵심이자 잉글랜드 대표팀의 주장인 빌리 라이트였다.

“마치 퀸과 룩을 뺀 상대와 체스를 두는 느낌이군.”

“그럼 그쪽도 퀸과 룩을 빼지 그래요?”

오늘 로저 바인 대신 주장 완장을 찬 던컨이 태연히 대꾸했다.

빌리 라이트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아쉬움을 보였다.

“나야 그러고 싶지만, 우리 감독님은 꼭 이기고 싶은 모양이더군.”

“이기고 싶은 건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빌리는 방금 대꾸한 녀석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고개를 올려다봐야 하는 월등한 키와 체격, 그리고 독특한 외모.

하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점은 자신감 넘치는 눈빛이었다.

‘이 녀석이 존 Y. 리인가.’

빌리가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가운데, 준영이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 팀엔 패기만만한 녀석들이 많거든요. 오늘 저녁은 늑대 요리로 하겠다고 난리였어요.”

그 말에 빌리는 코웃음을 쳤다.

“까불다간 늑대에게 잡아먹히게 될걸? 너희 유니폼처럼 빨간색의 두건을 쓴 계집애처럼 말이야.”

“동화에 나온 그 늑대는 결국 죽었죠. 그리고 우릴 잡아먹을 만큼 이빨이 튼튼하신지 모르겠네.”

너희가 날 뚫을 수 있을까?

마치 이렇게 묻는 듯한 준영의 태도에 빌리 라이트뿐만 아니라 울버햄프턴의 선수들도 발끈했다.

“그래,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지켜보도록 하지.”

“저도 매직 마자르에 용감히 맞섰던 축구 종가 캡틴의 실력이 기대됩니다.”

빠드득!

순식간에 벌겋게 달궈진 빌리 라이트의 입술 사이에서 살벌한 소음이 들려왔다.

매직 마자르.

웸블리에서 그들에게 농락당하고, 부다페스트에서 참패를 당한 그에게 있어 금기어나 마찬가지였다.

싱글벙글 언쟁을 지켜보던 던컨도 정색을 할 정도.

그만큼 준영은 선을 넘었다.

“이 마늘 냄새 나는 원숭이 새끼가!”

“해도 되는 말이 있고, 안 되는 말이 있는 걸 모르는 거냐!”

“당장 사과해, 얼른!”

울버햄프턴 선수들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준영은 태연하게 일관했다.

마치 내가 뭘 잘못 말했냐는 듯.

그런 태도는 울버햄프턴 선수들을 더욱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만! 다들 정숙하지 못하겠나!”

한바탕 치고받을 듯하던 흉흉한 분위기는 캡틴의 호통에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물론 가라앉았을 뿐, 식어 버린 건 아니다.

당사자인 캡틴, 빌리 라이트도 여전히 성난 표정이었으니까.

“매튜스 씨를 험하게 대했다더니, 정말 가차 없는 녀석이군.”

“스탠리 매튜스? 그분은 정말 대단했어요. 그렇게 안 하면 못 막을 정도였으니까.”

“…그래, 그랬을 테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빌리 라이트는 여전히 태연한 준영을 쏘아보았다.

“이거 하나만 알고 있어라. 난 매튜스 씨처럼 부드럽지 않아.”

“하하, 뻣뻣하게 수비해 주시면 우리야 고맙죠.”

전설이 된 남자와 전설이 되려는 남자.

둘 사이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완전 격전이 되겠구나.’

부디 하이버러 전투 수준은 되지 않기를!

또 다른 전설의 플레이어 바비 찰튼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

하이버러 전투는 1934년 잉글랜드와 그해 월드컵 우승팀인 이탈리아 간의 경기였는데, 이탈리아 주전 수비수 루이스 몬티가 전반 2분 만에 다리가 부러지자, 이후 보복 플레이가 줄줄이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잉글랜드 주장 에디 햅굿은 코가 부러졌고, 레이 보덴은 발목이 꺾였으며, 테드 드레이크는 상대가 휘두른 주먹에 맞고, 에릭 브룩은 팔이 부러졌습니다.

정말이지 이 정도로 역대급 살벌한 경기는 전무후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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