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50. 마법사와 검투사
잠시 후, 양 팀 선수들이 경기장으로 입장했다.
자기네 팀 선수들에게 환호와 갈채를 보내던 울버햄프턴 관중들은 갑자기 크게 노래를 불러 댔다.
Land of Hope and Glory~
Mother of the Free~
How shall we extol thee~
Who are born of thee~
‘어? 이거 위풍당당 행진곡이잖아. 영화 킹스맨 OST로 쓰였던.’
영국의 유명한 클래식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의 대표곡.
그 합창 부분을 울버햄프턴에선 응원가로 쓰고 있는 걸까?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중요한 건 필드에 있는 늑대들.
아까 대기할 때 늑대 두목을 건드린 덕분에 늑대들의 약이 바싹 올라 있었다.
아마 휘슬이 울리면 미친 듯이 달려들리라.
그리 생각하는 건 준영만이 아니었다.
“야 인마, 리틀 존. 왜 벌집을 쑤셔 놔?”
“상대를 흥분시키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너무 지나쳤다고.”
우려하는 동료들에게 준영은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허, 다들 벌써 늑대들에게 겁먹으셨나?”
“겁먹긴. 그냥 좀 염려스러운 거지.”
오늘 공격수로 출전한 숀 코너리의 대답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기도 전에 지레 겁먹을 정도로 겁쟁이라면 유나이티드의 저지를 벗어 던져야 한다.
그런 그들의 표정을 본 준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정도가 딱 좋아. 겁먹지 말고 경계를 늦추지도 말고, 자기가 제일 잘하는 플레이만 하면 돼.”
“쳇, 당연한 걸 말하지 마. 더구나 주장은 나라고!”
던컨이 불만스러운 듯 언성을 높였다.
돌발 사태를 벌인 준영에 대한 불만도 있지만, 부끄러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주장 완장을 차고 나왔으면서 주장답게 행동하지 못했으니까.
“자, 늑대 사냥 시작이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Aye Aye Sir!”
기운차게 외친 선수들이 흩어져 자리를 잡았다.
삐이익-!
양 팀의 포진이 완성되자 시합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길게 울렸다.
“존, 지미 머레이를 조심해! 울버햄프턴에서 제일 위험한 공격수니까!”
“알고 있어. 체크해 놓았다고.”
준영은 지미 머레이가 요주의 대상임을 이미 전해 들었다.
맨유의 분석관인 샌디 버스비는 머레이 외에도 노먼 딜리나 D. 윌쇼도 경계를 늦춰선 안 되는 선수임을 알려 주었다.
‘그나저나 이 늑대 놈들, 무척 냉정하게 공격을 전개하는군.’
아까 대기할 때 한바탕했던 걸 생각하면 꽤 빠르고 사납게 달려들 거라 생각했건만.
정작 경기가 시작되니 울버햄프턴 선수들은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전진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늑대들 같군.’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았다.
1선과 2선 선수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수비를 유인하고 공간을 만들어 내 기회를 잡으려 애썼다.
‘공간 창출이나 침투가 세련되진 않군. 훈련이 아닌 경험으로 플레이하고 있는 거야.’
그래도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훈련해서 공격하는 전형적인, 교과서적인 플레이라면 미리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경험과 개인의 본능적인 감각에 따른 플레이라면 쉽게 대처할 수 없다.
갑자기 어디에서 어떻게 튀어나올지 알 수 없으니까.
그래서 준영은 눈을 부릅뜨고 부지런히 사방을 살폈다.
특히 오늘 수비진에 주전 멤버는 빌 포크스와 자신뿐이었기에 각별히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애송이들이 만만치가 않군.’
‘예상과 다른 선수들이 나와서 대처하기도 영…….’
울버햄프턴 입장에서도 주의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
유나이티드의 젊은 선수들 중에는 뛰어난 인재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후보라 하더라도 만만하게 볼 수 없다.
오늘 던컨과 중원을 맡고 있는 바비 찰튼만 해도 그렇다.
그는 지난 시즌 후반에 리그와 유러피언 컵에서 꽤 뛰어난 활약을 보인 플레이어였다.
바비는 경기 시작할 때만 해도 다소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정작 경기가 시작되자 매우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울버햄프턴의 공격을 견제했다.
‘하지만 아직은 덜 여물었군.’
공을 잡고 있던 울버햄프턴의 하프백 에디 클램프는 살짝 바비를 따돌렸다.
그러곤 살짝 측면으로 우회하는 지미 머레이 쪽으로 패스를 찔러 넣었다.
하지만 그때 준영이 송곳같이 튀어나와 공을 가로챘다.
“자, 지금부터 역습 시작이다.”
***
“와아아!”
준영이 공을 잡자, 원정 응원을 온 맨유 팬들에게서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존 Y. 리가 공을 잡았다!”
“달려, 리틀 존!”
준영이 치고 올라갈 기미를 보이자, 가까이 있던 울버햄프턴 선수들이 바로 견제에 나섰다.
이 키 큰 동양인의 기량이 어떤지는 이미 충분히 들었다.
수비수면서도 공격 능력도 매우 뛰어난 녀석.
유나이티드의 에이스 던컨 에드워즈만큼이나 경계해야 할 요주의 대상!
“이 자식아, 그건 내가 받을 공이었어!”
지미 머레이가 뒤쪽에서 태클을 걸어왔다.
하지만 그의 태클이 닿기도 전에 준영은 앞쪽에서 달려든 에디 클램프를 제쳐 내고 전진해 나갔다.
“그 정도 압박으론 어림도 없어!”
코웃음을 날려 준 준영은 바로 전방을 향해 길게 공을 올렸다.
오늘 맨유 최전방 공격을 맡은 선수는 숀 코너리.
188센티미터의 장신인 그는 준영이 올려 준 높고 긴 패스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헤딩으로 떨어트린 공은 간판 공격수 토미 테일러의 발 앞으로 정확히 떨어졌다.
“나이스 패스!”
“얕보지 마라!”
토미가 공을 잡은 순간, 늑대 군단의 수호신이 강력한 태클로 공을 걷어 냈다.
역습에 가슴을 졸였던 울버햄프턴 관중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밋밋한 공격으로 이 빌리 라이트를 뚫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쳇, 은퇴나 할 것이지…….”
투덜대던 토미 테일러는 내심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방금 전 빌리의 태클은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자신이 거기서 슈팅을 날릴 거라 확신하고 벼락같이 달려든 것이다.
‘실력이 전혀 녹슬지 않았다 이건가.’
빌리 라이트가 걷어 낸 공은 측면에 있던 맨유의 윙어 데이비드 펙이 잡아챘다.
잠시 거리를 가늠하던 그는 문전으로 들어가는 숀 코너리의 머리를 노리고 크로스를 올렸다.
“말했을 텐데! 밋밋한 공격으론 안 된다고!”
“큭!”
미리 낙하지점을 딱 잡은 빌리 라이트는 쇄도하는 숀을 되레 밀어 내고는 공을 따냈다.
뒤쪽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준영은 혀를 내둘렀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냐?’
빌리 라이트의 신장은 170센티미터 초반.
현 시대 선수들 기준으로는 평균 수준이지만, 상대는 거의 190센티미터에 가까운 숀이다.
더구나 왕년에 보디빌딩을 했던 숀은 지금도 웨이트 트레이닝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떡 벌어진 어깨와 무쇠 같은 상체가 바로 그 증거.
그렇게 피지컬이 좋은 숀을 상대로 나이도 많고 체격도 작은 빌리 라이트는 밀리기는커녕 되레 밀어냈다!
“천근추라도 연마했나…….”
아무튼 맨유의 공격은 거기서 무산.
준영은 황급히 내려가 울버햄프턴의 역습에 대비했다.
측면 공간을 이용해서 치고 내려왔던 울버햄프턴은 빌 포크스의 등 뒤로 달려 들어가는 노먼 딜리를 맞춰 패스를 밀어 넣었다.
“좋았어! 골키퍼와 일대일이다!”
“슛! 고오올!”
노먼의 슈팅이 맨유 골대를 흔들자, 관중들이 펄쩍 뛰며 박수를 쳤다.
기다리고 있던 선제골!
하지만 기쁨의 환호는 부심이 치켜든 깃발에 맥없이 가라앉았다.
“뭐? 오프사이드였어?”
“어쩐지 너무 쉽게 넣더라니.”
“쳇, 모른 척 넘어가 주면 덧나나.”
빌 포크스보다 살짝 아래에 있던 준영은 울버햄프턴의 침투 패스가 들어오기 전에 전진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오프사이드 트랩에 노먼 딜리는 제대로 걸려들었다.
“어쭈, 꽤 약은 수를 쓰는데?”
선수들의 움직임을 체크하고 있던 빌리 라이트도 방금 전 오프사이드 트랩을 목격했다.
마치 마법을 쓰는 것과 같은 움직임.
노먼은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잡아먹을 만큼 이빨이 튼튼하신지 모르겠네.’
경기 시작 전에 준영이 했던 말을 떠올린 빌리 라이트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큰소리를 칠 만하군. 씹어 먹을 보람이 있겠어.”
마법사를 본 그라운드의 검투사는 활활 타오르는 투지를 더욱 뜨겁게 끌어 올렸다.
***
전반 30분이 지날 때까지 0 대 0의 상황이 팽팽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골이 나오지 않는 경기라고 해서 결코 지루하지는 않았다.
양 팀 모두 적극적으로 공격에 임하면서 공방이 매우 치열했으므로.
이럼에도 득점이 나오지 않은 건 양 팀 수비수들, 특히 핵심 플레이어들의 활약 덕분이었다.
울버햄프턴의 빌리 라이트는 능숙하게 상대 공격수들의 움직임을 읽으며 강한 태클과 차징으로 맨유의 공격을 막아 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이준영은 폭넓은 활동과 적극적인 마크, 하프백들과의 협력을 통해 번번이 울버햄프턴의 기회를 무산시켰다.
그야말로 방패와 방패의 대결.
과연 어느 쪽 방패가 먼저 깨질지 모두들 경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찬스다!”
“때려라, 윌쇼!”
공격 상황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던 울버햄프턴 팬들의 입이 갈라지며 탄식이 새어 나왔다.
윌쇼의 슈팅이 준영의 몸을 맞고 밖으로 나가 버렸기 때문.
“젠장, 저 덩치 큰 원숭이 놈이 또…….”
“저 자식, 뒷짐 지고 수비해서 더 짜증 나.”
“그만큼 만만하다 이건가?”
“우우- 우키키, 우키~”
몇 번이고 낭패를 본 관중들은 야유와 조롱 섞인 울음을 쏟아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준영은 이후에 날아온 코너킥을 헤딩으로 깔끔하게 걷어 냈다.
페널티 박스 밖에서 그 공을 잡아챈 건 바비 찰튼.
오늘 부지런히 쏘다니며 수비진의 부담을 덜어 준 바비는 상대 선수를 연달아 제치며 울버햄프턴 진영으로 달려갔다.
‘잘하네! 역시 레전드 값을 하는군!’
준영이 감탄하는 순간, 바비는 아주 기가 막힌 패스를 쇄도하던 토미 테일러에게 밀어 주었다.
“어디 막아 보시죠, 캡틴!”
얼마든지 슈팅이 가능한 거리.
빌리 라이트가 황급히 뛰쳐나왔지만, 토미는 주저 없이 슈팅을 날렸다.
터엉-!
미소 짓는 암살자가 날린 회심의 슈팅은 크로스바를 맞고 튕겨 나왔다.
길게 고개를 뺐던 맨유 팬들은 아쉬운 탄식을 토했다.
“흐흐흐, 간발의 차이였구나, 토미!”
“쳇! 끈덕지군요, 진짜!”
방금 전 슈팅은 빌리 라이트의 발에 살짝 맞고 굴절되었다.
골대에 맞고 나온 건 그 때문.
그래도 아직 공격 찬스는 남아 있었다.
튕겨 나간 공을 숀이 쫓아가서 잡았으니까.
잠시 동료들의 움직임을 살피던 숀은 패스하는 척하다가 과감하게 돌파를 시도했다.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상대는 빌리 라이트가 아니니까!’
나도 유나이티드의 저지를 입을 만한 공격수다!
숀의 과감한 움직임은 이를 증명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남은 것은 마무리.
그런데 그가 슈팅 자세를 취한 순간, 상대 수비수는 비겁하게 발목을 걷어찼다.
삐익-!
“우아아아아!”
비명과 환호가 뒤섞인 함성이 몰리뉴 스타디움을 들썩여 놓았다.
숀이 넘어진 곳은 페널티 박스였으니까.
“페널티킥이지? 페널티킥일 거야, 분명!”
“아냐. 발에 걸린 건 박스 밖이었던 것 같은데?”
프리킥이냐, 페널티킥이냐.
선수와 관중 모두 숨을 멈춘 채 심판의 판정을 기다렸다.
이 판정에 오늘 경기의 향방이 걸려 있을 테니까.
***
위풍당당 행진곡의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는 영국이 자랑하는 음악가이지요.
그는 축구를 즐겼고, 울버햄프턴 원더러스 FC를 열성적으로 후원했다고 합니다. 울버햄프턴 응원가도 직접 작곡했을 정도라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