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48화 (48/400)

Round 48.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이봐, 난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라고.”

“나도 농담하는 거 아닙니다. 축구는 그렇다 치고, 대체 무슨 역을 어떻게 연기했기에 어설프다는 겁니까?”

준영의 물음에 숀은 살짝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햄릿 알지? 셰익스피어 비극. 나중에 햄릿 왕자와 결투를 하는 레어티스 역이야.”

“비중 있는 역할이군요.”

“그만큼 대사도 많지. 햄릿에게 쓰러지고 왕비가 독을 마신 장면을 연출해 보자면 말이지…….”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목을 가다듬었던 숀은 레어티스를 연기하기 시작했다.

“범인은 여기 있습니다, 전하. 당신도 이제 죽을 목숨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해독제도 소용없이, 당신의 목숨은 30분을 넘기지 못할 겁니다…….”

난데없는 연기에 식당 안의 사람들이 모두 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숀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비통한 표정으로 대사를 읊어 나갔다.

“아아, 이제 말할 기운도 없군요. 이 모든 건 저 간악한 왕, 클로디어스가 저지른 일입니다.”

제법 그럴듯한 연기.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무언가 와닿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어때?”

숀의 물음에 바비 찰튼과 데니스로가 먼저 감상평을 밝혔다.

“뭔가 어색한 느낌이에요.”

“몰입한 건 좋은데 뭔가 부족한 느낌이랄까.”

무어라 말하면 좋을까 머릿속을 정리하던 준영도 입을 열었다.

“마치 옷을 입었는데, 사이즈가 안 맞아 보이는 것 같아요.”

“허, 극장 연출가와 똑같은 소릴 하는군.”

길게 한숨을 내쉬었던 숀은 타는 목을 차로 달래며 말을 이어 갔다.

“그래, 바로 그게 문제야. 아무리 대사를 외우고 연습을 해도 마찬가지더라고.”

선배 배우들의 연기 시범을 참조해도 마찬가지였다.

연기를 하면 해당 캐릭터가 아닌, 그 비슷한 녀석 정도의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정말 배우로서 소질이 없는 걸까? 확실히 난 정식 연기 수업을 받지 않긴 했지만…….”

‘그랬으면 본드 형은 미래에 대배우로 성공하지도 않았을걸.’

플레이와 마찬가지로 연기도 조급함이 문제인지 모른다.

숀은 이제 20대 중반.

배우로 농익은 연기를 보여 주기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본인이 말한 대로 정식 연기 수업을 받지도 않았다니까.

‘계속 선배들의 시범을 보며 연기 내공을 쌓는 수밖… 아니, 잠깐!’

뭔가 번쩍 떠오른 준영.

그는 자신이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왜 그래? 뭔가 다른 문제라도 있어?”

“숀, 선배들의 시범을 보는 건 좋은데, 너무 따라 하려고 애쓴 거 아니에요?”

“따라 하려고 했다?”

“참조만 해야 하는데 좀 지나쳤다거나……. 솔직히 아까 연기할 때 평소에 내가 아는 숀의 모습은 하나도 볼 수 없었다고요.”

“그야 레어티스라는 역을 연기해야 하니 그렇지.”

“그렇다고 배우의 개성을 죽일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요.”

“개성? 개성이라……!”

숀의 눈빛이 달라졌다.

준영의 말이 힌트처럼 와닿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바비가 거들고 나섰다.

“나도 예전에 들었는데, 어떤 역이든 잘 맞춰 가는 팔방미인들도 있지만, 해당 역할을 자기 연기 스타일에 맞춰 재탄생시키는 배우들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맞아. 오히려 그런 경우를 신선하게 받아들이곤 하더라고!”

답을 얻었다는 듯 숀은 반색을 했다.

마치 답답한 체증이 쑥 내려간 듯한 표정이었다.

“바비 말대로 숀도 셰익스피어 원작의 캐릭터를 재현하려고만 하지 말고 개성을 살려서 새로 만들어 보는 것도 괜찮다고 봐요.”

“그래, 그렇게 한번 해 봐야겠어!”

“그리고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게 있어요.”

“응? 그게 뭔데?”

뜸 들이지 말고 빨리 이야기해 줘!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한 숀에게 준영은 미소를 지었다.

“이게 연극뿐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축구도 마찬가지예요. 코치님이 지적한 문제를 개선하는 건 좋지만, 굳이 개성을 버릴 필요가 없다는 거죠.”

“개성? 내가 할 수 있는 플레이 말인가?”

“예. 득점력은 떨어질지 몰라도 헤딩과 패스는 잘하잖아요.”

득점은 떨어지지만 2선과 연계 플레이로 득점에 기여하는 공격수들이 있다.

수비형 스트라이커라는 비아냥거림도 듣지만, 뛰어난 피지컬과 활동량, 연계 능력으로 팀의 공격력을 높이는 선수들이다.

그래서 21세기 감독들은 단순한 골게터보다 다양하게 팀에 기여하는 이런 공격수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주고 있었다.

“내가 축구를 배운 곳에선 숀과 같은 공격수들을 타깃맨이라 해요.”

“타깃맨?”

“직접 득점은 못하더라도 수비를 유인하고, 동료들에게 득점 기회를 만들어 줘요.”

아마 버스비 감독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별다른 활약도 보이지 않은 선수를 몇 년간 데리고 있을 리 만무하니까.

하지만 아직 어린 데니스 로는 준영의 설명이 이해하기 어려운 듯했다.

“형님, 공격수라면 당연히 득점력이 있어야죠. 동료에게 미루는 건 비겁하지 않아요?”

“야 인마, 탐욕이나 부리다가 멍청하게 공을 뺏기느니, 동료에게라도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게 훨씬 나아. 중요한 건 골을 만드는 거라고!”

중요한 건 골을 만드는 것!

준영의 말이 데니의 머릿속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한 귀로 흘려버릴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준영이 나가고 지난 4경기에서 승리가 없었던 건 공격수들의 부진도 한몫했으니까.

자신만 해도 주전 자리를 공고히 하려고 골 욕심을 많이 냈다.

하지만 골을 넣기 위한 플레이는 골을 만들어 내지 못할 때가 훨씬 많았다.

상대에게 공을 뺏기고, 그게 역습에 실점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바비도 마찬가지야. 자기 개성은 버리면 안 돼. 지도자의 말은 어디까지나 조언이지, 강요는 아니니까.”

“경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보여 주면 되는 거군요.”

“맞아. 블랙풀전 때 버스비 감독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 내 존재를 드러내라고 말이야.”

다시 말해 개성 있는 플레이를 보이라는 뜻이다.

‘필드에서 네가 제일 잘하는 걸 해. 단점이야 차츰차츰 메우면 되는 거야.’

이 말은 준영에게 축구를 가르쳐 준 감독님이 해 준 말이었다.

‘그때도 조바심이 들어서 뭔가 그럴듯하게 해내려고만 했지.’

당연하지만 성급하게 의욕만 불태운다고 해서 좋은 플레이는 나오지 않았다.

몇 번 낭패를 보고 감독님 말대로 장신 플레이어라는 개성을 살려 차근차근 실력을 키워 나갔다.

그러니 자연히 팀의 주전 선수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존 씨가 축구를 배운 나라에 가 보고 싶어요.”

“가게 될 거야. 미래에.”

전설이 될 이 남자도 나중에 보게 되겠지.

지금은 가난한 개발도상국에 축구 변방인 한국.

그 나라가 OECD 선진국이 되고, 월드컵 끝판왕인 독일도 때려잡는 도깨비 팀이 되는 광경을.

아직은 먼 미래를 기약하며 준영은 미소를 지었다.

***

‘휴, 어쨌거나 상담은 잘된 것 같군.’

착잡하던 숀의 표정이 한결 밝아져 있었다. 바비 역시 여유를 찾은 듯했고.

데니도 뭔가를 깨달았던지, 두 사람과 활발하게 축구 플레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잘돼서 다행이야. 근데 적성에 안 맞는 일은 정말 힘들군.’

그래서 그런지 기운이 쏙 빠지는 느낌이었고, 동시에 허기가 밀려들었다.

“주문하신 요리 나왔습니다!”

반갑게도 때맞춰 필립이 음식을 가져왔다.

바삭바삭한 군만두와 담백한 차슈, 여기에 푸짐한 탕면은 모두를 미소 짓게 하기에 충분했다.

젓가락을 든 준영과 포크를 든 셋은 바로 식도락을 즐겼다.

“이 초승달 같은 고기 파이 굉장히 맛있네요.”

“만두는 항상 옳지.”

입에서 부드럽게 씹히는 차슈도 일품.

하지만 모두를 놀라게 한 건 탕면이었다.

매콤하고 따끈한 닭고기 국물에 담긴 쫄깃한 면은 몸을 데워 주고 힘을 불끈 북돋아 주었으므로.

“이런 건 정말 처음 먹어 봐!”

“세상에 없는 맛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맛있죠? 내가 괜히 찾아다닌 게 아니라고요!”

숀과 바비, 데니뿐만 아니라 준영도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거 진짜 라면이잖아!’

지난번에 억관에게 라면에 대해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다.

그가 만들어 보겠다고 하자 봉지에 적힌 재료나 성분도 알려 주고, 라면 사리 모양도 보여 주었다.

그렇다 해도 재현하는 건 힘들 거라고 생각했건만, 이억관은 거의 원형에 가까운 수준으로 만들어 냈다.

심지어 꼬불꼬불한 면까지!

그래도 21세기 인스턴트 라면과 다른 점은 있었다.

여러 가지 고명이 많고, 영국인들 입맛에 맞춰 매운맛보다 담백함이 더하다는 정도.

어찌 보면 인스턴트 라면의 원형이었던 일본식 중화 요리 라멘에 더 가까워 보였다.

‘이 아저씨, 요리 천재인가?’

이 정도 실력이면 21세기 요리 예능에 나와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자리 없는 거야?”

“아이고, 더 일찍 왔어야 하는 건데!”

어느새 식당 밖에는 제법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래서 필립이 식당 밖에 임시로 테이블을 놓고 자리를 만들어야 할 정도.

“필립아, 너희 집 이렇게 장사 잘되는 맛집이었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버지가 새로운 탕면 만드시고 많이 늘었어요.”

“헐…….”

“어쩔 땐 동네 중국인들보다 영국 사람들이 더 많이 와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던 준영에게 억관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다 먹었으면 자리 좀 비켜 주지 않겠나? 밖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아, 예. 그러죠.”

바쁜 것 같은데 장사를 방해해선 안 되지.

준영은 라면 재현의 비결이 궁금하긴 했지만, 일단 조금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

“지인의 장사가 잘된다고요? 기뻐할 만한 일이네요.”

귀가한 준영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리즈는 이억관이 만들었다는 미래의 음식에 흥미를 보였다.

“그 라면이란 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요리가 되는 건가요?”

“매우 대중적인 인스턴트식품이 되죠. 냄비에 끓여서 5분, 아니 컵에 담아 뜨거운 물만 부어도 2~3분 만에 먹을 수 있으니까.”

“정말 간단하네요.”

리즈는 예전에 할아버지가 들려주었던 1차 세계 대전 이야기가 떠올랐다.

좁고 물이 차오르던 참호에서 식사를 할 수 없었다고.

적의 포격 때문에 함부로 불을 피울 수도 없고, 후방에서 날라 주는 음식도 시원찮았다고 한다.

“할아버지 같은 장교들은 좀 나았지만, 병사들은 항상 차갑거나 설익은 음식을 먹어야 했대요.”

“심했군요.”

괜히 의식주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입고, 먹고, 사는 문제들이 해결이 되어야 사람은 안정을 누릴 수 있다.

그건 군인이나, 운동선수나, 일반인이나 다들 마찬가지다.

“그걸 보고 다시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셨대요. 하지만 또 큰 전쟁이 터져 버렸고, 그게 끝나고도…….”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던지 잠시 우울해하던 리즈는 가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미래에 3차 대전이 터지지 않는다니 다행이에요.”

“전쟁이 아주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미소 냉전은 앞으로 30년은 더 지속될 거예요.”

혹시 나 때문에 냉전에 나비 효과를 일으키게 되는 건 아닐까?

잘못해서 핵전쟁 같은 게 일어나는 건 아닌지?

‘에이, 설마 그러려고.’

미래인이라도 자신은 그저 일개 축구 선수.

준영은 냉전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자신이 영향을 줄 수 있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

이제는 과거 일이 되었지만, 2018년 카잔의 기적은 지금 다시 봐도 믿기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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