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47. 임시 심리 상담사
“고속도로 건설이요? 그거 국가에서 진행하는 사업 아닙니까?”
“공사는 민간 업체들이 하지. 현재 그쪽 일을 맡은 몇몇 업체들을 알고 있네.”
영국은 운하와 철도가 발달되어 있었지만, 고속도로 건설은 독일보다 늦었다.
물론 계획은 있었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미뤄지고 말았다.
그래서 고속도로 건설은 전후 복구가 끝난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이 근방에서 주목할 만한 공사가 2개 있지. 맨체스터 외곽 순환 도로, 그리고 북부 잉글랜드 횡단 도로야.”
후자의 경우 서쪽의 리버풀에서 시작해 맨체스터, 허더스필드, 브래드포드, 리즈를 경유해 동쪽의 헐까지 이어진다고 했다.
구릉과 습지가 많은 페나인 산맥을 관통하기 때문에 최신의 기술과 많은 자본이 투입되는 대공사라고.
“그러니까 결론은 고속도로 공사를 맡은 토목 업체에 투자를 해 보라는 거군요.”
“그래. 수익도 올릴 수 있지만, 무엇보다 토목 기술을 가진 업체들과 친분을 쌓을 기회도 되겠지.”
“과연!”
석유 시추나 개발은 토목 공학 전문가들이 한다.
그쪽 업계 사람들과 미리 친분을 쌓아 두면 나중에 유전 사업을 할 때도 훨씬 원활할 터!
“그리고 도중에 화제가 바뀌긴 했네만, 뮌헨에서 일어날 거라고 한 그 사고 말인데, 잘하면 돈으로 해결 가능할 수도 있다고 보네.”
“그렇군요. 전용기를 임대해서 쓴다면 굳이 뮌헨을 경유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그런 방법도 있지만, 협회에 로비를 해서 일정을 조정받아도 되겠지.”
그 끔찍한 사고를 피할 방법이, 역사를 바꾸는 난제가 돈으로 해결될 수 있다니!
“자본의 마력은 대단하군요.”
“그 마력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사람의 운명이 바뀌고, 세상이 변하지. 그것은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네.”
돈이라는 요물을 다루는 데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알버트의 말뜻을 이해한 준영은 그 점을 마음에 새겨 넣었다.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훈련장.
더블린 원정을 다녀온 주전들이 회복 훈련을 하는 사이, 후보 선수들은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울버햄프턴전 출전 명단에 서너 명 정도 변동이 있을 거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
이 기회를 잡자!
모두가 이런 마음으로 훈련에 열을 올렸다.
그중 머피 코치의 눈에 들어온 선수는 바비 찰튼, 그리고 토마스 숀 코너리.
바비는 공수에서 부지런한 움직임으로 동료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었고, 숀은 헤딩과 패스에 능숙했으므로.
다만 그들에게도 수정할 부분은 있었다.
“바비, 판단을 빨리하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너무 성급하게 처리하려 들지 마.”
“명심할게요.”
“토마스 자넨 아직도 결정력이 부족해. 슈팅할 때 제대로 집중하라고.”
“알겠습니다. 노력해 보죠.”
지켜보던 준영도 머피의 지적에 동의했다.
바비 찰튼은 명성을 얻었던 시기에 비하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선수였다.
또 숀은 주전 공격수들에 비하면 득점 능력은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런데 둘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같았다.
‘바비 찰튼 경도 그렇지만, 본드 형도 조바심이 문제야.’
반드시 해내야 해! 이번엔 뭔가 보여 줘야 해!
이런 마음 때문에 성급한 플레이가 나오고, 냉정하지 못한 마무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심리 상담사랑 한번 이야기 해 보면 좋을 테지만… 지금은 아직 그런 게 없나.’
21세기 스포츠 업계에서는 선수들의 심리적인 문제 해결에도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심리 치료만 전문적으로 하는 심리 상담사가 따로 있을 정도.
그러나 1957년 현재는 심리 상담 및 치료가 민간에서도 이제 겨우 자리를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것도 2차 대전을 경험한 퇴역 군인들의 사회 적응과 정신 치료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중이다.
‘그나마 우리 팀은 나은 편이지. 인격적으로 훌륭한 감독님이 계시니까.’
이에 준영은 곧장 버스비 감독을 찾아갔다.
“무슨 일인가, 존?”
“바비랑 숀 말인데요. 제가 볼 때 그 두 사람은 아무래도…….”
준영의 이야기를 들은 버스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수들을 제 자식처럼 보살피는 덕망 있는 감독.
그런 인격자이기에 바비와 숀의 문제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을 다독여 주고 안정을 줘야 한다는 게로군.”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르지만, 안 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서요.”
“그럼 해 주게.”
“예, 그럼… 어? 감독님이 조언해 주시는 게 아니고요?”
당황하는 준영에게 버스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장자의 충고보다 비슷한 세대끼리 터놓고 대화할 때가 나은 경우가 있으니 말이야.”
가능성이 있는 선수는 어떻게든 발전시켜 주고 싶다.
당장 선수에게도 도움이 될 테고, 리그 제패와 유러피언 컵 우승이라는 2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팀에도 득이 될 테니까.
“그러니까 둘을 잘 보살펴 줬으면 하네.”
“예, 잘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해 보죠.”
남의 혹 떼어 주려다 되레 혹을 붙이고 말았다.
해 본 적도 없는 심리 상담사를 맡게 된 준영은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
훈련이 끝난 후.
준영은 바비 찰튼과 숀 코너리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괜찮은 맛집이 있는데, 거기서 같이 저녁 먹는 게 어때요?”
“존 씨가 쏘는 건가요?”
“당연히 내가 쏘지!”
“그럼 갈게요.”
냉큼 수락한 바비와 달리 숀은 고개를 저었다.
“고맙지만 사양할게. 저녁엔 연극 연습을 할 거라서 말이야.”
“에이, 그러지 말고요. 그리 멀지도 않다고요.”
잠시 망설이던 숀은 준영의 거듭된 요청에 결국 승낙했다.
이에 준영은 둘을 차에 태우고 목적지로 향했다.
“이 차 라곤다죠? 나도 스타플레이어가 되면 이런 거 몰아 보고 싶은데.”
바비의 선망에 숀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건 여왕의 남편이나 타고 다니는 최고급 쿠페야. 어지간한 갑부가 아니면 힘들지.”
“어, 그럼 존 씨는…….”
“너 아직 몰랐구나. 이 녀석, 왕족이야. 그래서 남작가의 손님으로 지내는 거라고.”
숀은 준영에 대한 가십거리가 적힌 신문들을 보았다.
대부분이 그럴듯하지만,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채워진 것이었다.
“이 녀석 조상이 코리아의 황제였는데, 일본에게 나라가 망하기 전에 해외로 금괴를 빼돌려 두었대.”
“아, 그래서 존 씨가 부자인 거군요.”
준영은 기가 막혔다.
어째서 고종의 후손이란 소문이 난 건지!
도대체 그 소문을 꾸며 낸 녀석은 누구란 말인가!
“일설에는 숨겨진 금괴 때문에 공산당에게 쫓겨 다녔다고 하던데……. 이봐, 리틀 존, 도대체 뭐가 진실이야?”
“그거 다 거짓말이라고요. 난 금괴 구경도 못해 봤어요.”
준영의 말에 바비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 그럼 왕족이라는 것도 거짓말인가요?”
“조상이 왕이었던 건 맞아. 좀 오래되긴 했지만.”
“언제 적 왕이었는데요?”
“그게, 보자… 영국 역사로 치면 백 년 전쟁 때쯤인가?”
“맙소사, 500년은 족히 넘잖아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차이나타운 외곽에 있는 작은 식당.
태극기가 걸려 있는 이곳은 맨체스터의 한국인 이억관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여기가 그 맛집인가요?”
바비는 약간 실망스러운 기색이었다.
부자 선수가 비싼 차에 태워 주기에 근사하고 으리으리한 프랑스식 레스토랑에 데려가 줄 거라 기대했기 때문.
준영은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세상에 없는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지.”
“그 맛이 괴상하다면 굳이 느껴 보고 싶지 않은걸.”
숀의 떨떠름한 기색에 준영은 염려 말라는 투로 팔을 툭 쳤다.
“염려 마요. 장어 젤리보다 훨씬 나을 테니.”
“비교를 해도 왜 그딴 거랑 비교를 해? 맛있는 것도 많구만.”
아무튼 준영이 장담하기에 두 사람은 그를 따라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준영 형님.”
“잘 있었냐, 필립아.”
서빙을 하던 이억관의 아들 필립이 제일 먼저 준영을 반겼다.
“억관 아저씨는?”
“주방에서 요리하느라 바쁘세요.”
“확실히 바쁠 만하겠군.”
식당은 빈 테이블 없이 꽉 차 있었다.
중국인뿐만 아니라 영국인들도 있었는데, 그중엔 낯익은 얼굴도 있었다.
“앗, 형님! 오랜만이에요!”
“데니잖아. 와! 반갑다, 인마.”
허더스필드의 데니스 로.
미래 맨체스터의 제왕이 되는 풋내기 공격수가 활짝 웃음을 지었다.
“근데 네가 여긴 웬일이냐?”
“지난번에 저택에서 먹었던 닭고기 파스타 수프가 너무 맛있어서요. 요리사 아저씨가 맨체스터 차이나타운에서 장사하신다고 들어서 찾아왔죠.”
“그래? 아무튼 잘됐네. 자리가 없는데 합석 좀 하자.”
준영 일행이 자리를 잡자, 주방에 있던 이억관이 필립의 말을 듣고 얼굴을 내밀었다.
“훈련 마치고 온 건가?”
“예, 배고파서 그런데 군만두랑 차슈 넉넉하게 주시고 탕면도 부탁드려요.”
“알았어. 여기 차를 마시면서 잠시만 기다려 보라고.”
억관이 팔을 걷어붙이고 주방으로 돌아간 뒤, 준영은 데니에게 말을 건넸다.
“요즘 좀 어때? 팀 성적이 안 좋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형님 가고 나서 한 경기도 못 이겼어요.”
준영이 떠난 후에 허더스필드는 2무 2패를 기록하며 초반의 기세를 잃어버렸다.
덕분에 섕클리 감독은 다시 팀을 재편하느라 바쁘다고.
“많이 힘들겠구나.”
“예, 정신없어요. 그런데 같이 온 분들은 유나이티드 선수들인가요?”
“맞아. 이쪽은 바비 찰튼, 그리고 네 옆에 있는 사람은 토마스 숀 코너리지.”
데니스 로는 훗날 바비 찰튼과 맨유에서 같이 뛰게 된다.
둘 다 발롱도르 수상자에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올라간 레전드들.
이들이 이렇게 작은 식당에서 대면하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바비도 그렇지만, 여기 숀 아재도 나중에 굉장히 유명해질 테니까 이참에 친해 두라고.”
“이봐, 리틀 존. 쓸데없이 치켜세우지 마.”
손을 내저은 숀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차를 홀짝였다.
“유명해지긴 하겠군. 골도 못 넣는 공격수라고 말이야.”
“숀, 그건…….”
“변명해 주지 않아도 돼. 머피 코치도 결정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는걸.”
목이 타는지 연거푸 차를 마신 숀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솔직히 내가 왜 아직 유나이티드에 있는지 모르겠어. 다른 팀이라면 방출되고도 남았을 텐데.”
“…….”
“슛도 못 넣는 엉터리 공격수에 연기도 어설픈 배우. 하나라도 제대로 해내고 싶은데, 마음먹은 대로 되지가 않는군.”
준영과 처음 대면했을 때도 숀은 같은 고민을 안고 있었다.
당시에 대기만성 이야기를 듣고 위로를 받았지만, 이후에도 딱히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마음이 조급해지는 건 당연했다.
“어때, 존? 지금 봐도 내가 나중에 성공할 사람으로 보여?”
“물론이죠. 애S턴 마틴을 몰고 다니면서 미녀들과 로맨스도 즐길 텐데.”
숀은 낯빛을 굳혔다.
준영은 훗날에 있을 일을 말한 것이었지만, 그는 진실이라 받아들이지 못했다.
***
요즘은 유소년 선수들도 스포츠 심리 상담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아직도 다소 부족할 실정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것도 없이 그냥 정신력을 부르짖던 시대에서 벗어난 건 정말 다행이다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