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3. 전설 아닌 레전드
경기가 시작되자 어느 쪽이 우세라고 할 것 없이 대등하게 진행되었다.
양 팀 모두 주요 선수들이 전부 출전했고, 거의 실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플레이가 치열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팀 분위기.
허더스필드 쪽은 지지 않겠다는 의욕으로 뛰고 있는데 반해, 맨체스터 시티는 그보다 더한 중압감이 있었다.
‘마치 막차를 타려는 것처럼 다급하게 구는군.’
준영이 보기에 맨시티의 분위기가 그랬다.
겨우 10분 남짓 지났을 뿐이지만,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뭔가 발도 맞지 않고, 신경이 날카로운 선수들은 자기네끼리 언성을 높이곤 했다.
“제길, 패스 똑바로 하라고!”
“네가 제대로 움직였어야지!”
사실 맨시티가 어수선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지난 시즌의 성적은 참혹했고, 여름에는 주장이자, 고참 수비수인 로이 폴(* 40~50년대 웨일즈 역대급 수비수)마저 은퇴했다.
그 빈자리는 지난 토요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완패를 당하면서 그대로 드러났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 상황을 타개할 전환점이 필요하다!
이에 맥도웰은 2군에서 기량이 늘어난 젊은 선수들을 대거 발탁했다.
한편으로 예전부터 아마추어 리그에서 눈여겨본 유망주 몇몇을 불러 훈련에 동참시켰다.
이렇게 되자 기존의 주전들은 조바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발을 요구하기 위한 의도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동안 나빴던 성적이 켕겼다.
이대로는 안 된다.
신뢰받을 수 있는 성과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허더스필드와의 이 연습 경기가 중요했다.
주전들에게도, 새로 치고 올라가려는 새내기들에게도.
‘확실히 실력은 있구만. 만만치가 않아.’
‘제길, 덩치도 큰 놈이 빈틈이 없군.’
일대일로 맞붙게 된 준영과 존스턴.
둘 다 상대의 실력에 곤란해하고 있었다.
존스턴은 재빠르고 축구 지능이 뛰어났다.
터무니없이 고집을 부리며 공을 끄는 일은 없었다.
주변 동료들과 부지런히 패스를 주고받으며 상대 수비 지역에서 공간을 만들어 내려 애썼다.
‘안 됐지만, 그런 수법은 21세기에선 흔하다고.’
‘큭! 눈치가 빠른 놈이군!’
존스턴이 머리를 굴리는 만큼, 준영도 그만큼 두뇌를 쓰면서 상대 선수들의 움직임을 살피며 대응했다.
그렇다 보니 존스턴은 아직 이렇다 할 기회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뭐 해요, 바비! 노란 원숭이 하나 못 제치는 거예요?”
“입 닥쳐, 아치!”
존스턴이 깐죽대는 애송이 동료에게 눈을 돌린 틈을 타서 준영이 공을 가로채려 했다.
하지만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존스턴은 측면으로 달려가는 동료 맥클레랜드에게 패스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본인은 잽싸게 골대를 향해 달려갔다.
‘이런, 빠르네!’
빠르기도 빠르지만, 힘도 좋다.
거의 20센티미터나 큰 준영과 몸싸움에서도 쉬이 밀리지 않았던 것.
아무튼 존스턴이 준영에게 완전히 마크를 당하자, 맥클레랜드는 크로스가 아닌 직접 슛을 날렸다.
강슛이었지만, 골을 넣기엔 각이 너무 부족했던 그 슛은 옆 그물을 때렸다.
‘방심하다간 큰코다치겠군.’
준영은 투덜대며 물러나는 존스턴을 보며 내심 혀를 내둘렀다.
21세기 선수들에 비하면 테크닉은 단순하지만, 지능이 좋고 판단은 빠르고 정확했다.
‘어설프게 개인기가 뛰어난 공격수보다 저런 유형이 상대하기 더 피곤해.’
데니가 감탄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혹시 터너 신부님이 말씀하신 맨시티의 유명 선수가 존스턴이었던 걸까?
‘아냐. 기억하기론 분명히 공격수는 아니었어.’
혹시 이 경기에도 출전했을까?
아마 그렇다면 분명히 두각을 드러내겠지.
준영은 조바심을 내지 않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
조급한 공격에 비하면 맨체스터 시티의 수비는 아직 흔들림이 없었다.
중앙에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주전 수비수 데이브 유잉이, 양쪽에는 로이 리틀과 빌 리버스가 자리를 잡고 허더스필드의 날카로운 공격을 잘 막아 냈다.
“나 참, 공을 두고 뭔 춤을 추고 있냐?”
“아악! 통하지 않다니!”
준영에게 배운 헛다리 짚기를 시도했던 데니스 로는 노련한 로이 리틀에게 공을 빼앗겨 버렸다.
냉큼 공격으로 전환한 맨시티는 공을 허더스필드 진영으로 밀어 넣었다.
“흥, 선제골은 내가 넣어 주지!”
패스를 받은 아치는 과감하게 문전으로 공을 몰고 갔다.
잽싸게 빈 공간으로 파고든 존스턴이 패스하라고 눈길을 보냈지만, 무시해 버렸다.
‘흥, 당신의 시대는 끝났어, 바비 존스턴!’
이제는 나의 시대!
의기양양하게 슈팅을 날리려던 아치.
강력한 그의 오른발이 허공을 시원하게 갈랐다.
간발의 순간, 존스턴을 마크하던 준영이 치고 나와 인터셉트를 해 간 것이다.
“동작이 쓸데없이 커.”
“이 빌어먹을 원숭이 새끼!”
얼굴이 벌게진 아치가 바로 준영을 쫓았다.
하지만 그의 주력으론 성큼성큼 뛰어가는 준영을 따라잡지 못했다.
“보기보다 빠르잖아!”
“막아. 패스를 못하게 해!”
맨시티 선수들은 미드필드에서 지연을 시키는 한편, 재빨리 패스 길목을 막았다.
그들의 의도는 성공했다.
단, 절반만.
“아니, 직접 치고 올라오잖아!”
“쳇, 까불고 있군!”
“그런 막무가내 동네 축구가 통할 거라 생각하냐!”
준영이 중앙선을 넘어오자, 맨시티 선수들은 바로 인상을 굳혔다.
부진했다지만 자신들은 그래도 FA컵에서 우승하고, 영국 최상위 리그에서 뛰고 있는 일류 선수들이다.
그런데 감히 얕보고 덤벼들다니!
‘흥, 얕보는 건 너희들이지!’
발끈하는 맨시티 선수들에게 조소를 던져 준 준영은 계속 치고 달려 들어갔다.
날카로운 태클은 뛰어넘고, 강력하게 들어온 차징은 간단한 턴 동작으로 흘려 냈다.
이 와중에 유니폼을 잡히기도 했지만, 힘으로 뿌리치고 맨시티 페널티 박스로 달려갔다.
“이런 맙소사!”
준영이 삽시간에 돌파해 들어오자, 맨시티 수비수들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말은 들었지만, 정말 예사 놈이 아니구나!
가장 먼저 달려든 건 로이 리틀.
하지만 그는 준영의 현란한 스텝에 속아 풀썩 넘어져 버렸다.
‘이건 아까 스코틀랜드 꼬마가 했던……!’
헛다리 짚기.
하지만 준영의 테크닉은 아직 여물지 않은 데니의 발놀림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로이가 뚫리고, 데이브 유잉이 황급히 마크를 붙었다.
하지만 준영은 절묘한 드리블로 그마저 제쳐 버렸다.
망했어요.
준영을 놓쳐 버린 데이브의 표정에 떠오른 단어였다.
황급히 따라붙었지만, 그보다 앞서 준영의 왼발 슛이 작렬했다.
뻐엉-
‘좋아, 골… 아니!’
골대에 그대로 박힐 거라 생각했던 슈팅.
하지만 맨시티의 장신 골키퍼가 번개같이 몸을 날리며 펀칭에 성공했다.
‘방금 그걸 막았단 말이야?’
한 박자, 아니 반 박자 빠른 슈팅이었건만!
분명히 반응하지 못할 거라 봤건만, 상대 골키퍼는 정말 멋지게 막아 냈다.
‘보통내기가 아니군.’
몸놀림뿐만 아니라 판단력도 좋다.
얼굴에 진 주름과 자잘한 상처는 수많은 경기를 경험한 백전노장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버트, 잘했어요!”
“끝나고 맥주 한 잔 쏠게요, 트라우트만 씨.”
위기를 모면한 맨시티 수비수들이 골키퍼에게 감사의 미소를 건넸다.
‘버트… 트라우트만?’
분명 들은 적이 있는 이름.
잠시 기억을 더듬던 준영은 이내 놀라 언성을 높였다.
“베르트 트라우트만?”
이제야 알아봤냐는 듯 쓴웃음을 짓는 골키퍼.
그는 독일 스포츠 영웅이자, 맨체스터 시티 최강의 레전드 수문장 베르트 트라우트만이었다!
***
필드 밖에서 지켜보던 섕클리와 맥도웰.
구경하던 관중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탄성을 터트렸다.
멋진 공격에 이은 멋진 선방.
그러나 더 눈길이 갔던 건 이준영이었다.
정말이지 어디서 저런 플레이어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 건지!
“과감한 공격 가담에 현란한 개인기… 완전 매직 마자르 그 자체가 아닌가!”
“흥, 존이 헝가리 놈들보다 한 수 위일걸.”
맥도웰보다 더 많이 준영을 봤던 섕클리는 그리 확신했다.
FA컵을 들어 올렸던 주역들을 상대로 저런 화려한 플레이를 보여 주면서 더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압도적인 체격에 가공할 순발력과 스피드, 화려한 개인기, 거기다 과감한 자신감까지……. 정말이지 비겁할 정도로 모든 걸 갖추고 있군.”
‘그게 전부는 아니지.’
섕클리가 준영에게 감탄한 점은 단지 선수로서 기량만이 아니었다.
녀석이 선수들에게 알려 준 간단하면서도 효율적인 훈련들은 깜짝 놀랄 수준이었다.
‘여기에 철저한 체력 관리와 회복 방안까지 알고 있고, 전술적인 지식도 상당하단 말이야.’
심지어 경영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
A보드 광고판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
그 발명품으로 수익을 얻어 적절히 분배, 이용하자는 발상은 참으로 기발했다.
‘멍청한 구단 회장이나 임원들이 선수 팔이에만 매달리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지.’
선수로서의 능력뿐만 아니라 훈련 지도, 경영 수완까지 가진 인재가 과연 또 있을까?
생각이 있으면 존 Y. 리는 절대 다른 팀에 팔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렇게 강하게 요구하기엔 나는 힘이 없어.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리지도 못했고…….’
섕클리가 씁쓸해하고 있을 때, 맥도웰도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깝군. 아마 백인, 아니 영국 출신이었다면 지금보다 더 유명세를 탔을 텐데…….”
“아니라서 앞으로 더 유명해질지도 모르지. 자네 팀에 있는 베르트, 아니 버트처럼 말이지.”
베르트 트라우트만은 독일인.
그것도 공수부대 출신으로 나치의 훈장까지 받았던 인물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를 탐탁잖게 여기는 이들이 많다.
지난 대전 때 다들 지긋지긋하게 나치의 폭탄을 맞았으니까.
“그건 그렇고, 버트 저 친구도 빨리 제 실력을 되찾아야 할 텐데…….”
“쩝, 누가 아니래.”
버트는 1956년 FA컵 결승전에서 목뼈가 부러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그 바람에 다음 시즌을 거의 통째로 날렸고, 그 와중에 장남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비극도 겪었다.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다시 일어서지 않으면 안 돼.”
그래서 오늘 연습 경기를 하게 된 것이다.
단지 소문난 동양 선수의 실력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베르트의 자신감과 경기 감각을 보다 끌어올리기 위해서.
‘물론 끌어올려야 하는 건 베르트뿐만은 아니지.’
축구는 11명이 다 잘해야 하는 스포츠.
그 점을 잘 아는 맥도웰은 필드에 있는 다른 선수들을 살피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
준영은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연방 수비수들의 위치를 조정하는 맨시티의 골키퍼 버트에게 향하고 있었다.
‘이렇게 베르트 트라우트만을 만날 줄이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키퍼 레프 야신.
800번이 넘는 경기 중에 무실점 기록이 절반이 넘는 이 러시아의 괴물이 유일하게 인정한 골키퍼가 있다.
그가 바로 베르트 트라우트만.
독일과 영국 양국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올라간 명인이다.
21세기에서 준영이 곧잘 하던 온라인 축구 게임에도 레전드 캐릭터로 출시되었을 정도.
‘들은 대로 진짜 잘 막는구나.’
누가 레전드 키퍼 아니랄까 봐 방금 날아온 코너킥도 준영의 머리로 떨어지기 전에 쳐 내 버렸다.
그렇게 페널티 아크 바깥쪽에 떨어진 공을 허더스필드의 주장 윌리엄 맥캐리가 잡았다.
“때려요, 주장!”
맥캐리가 잡은 찬스.
하지만 슈팅하기 직전, 그는 맨시티 선수의 거친 태클을 맞고 쓰러졌다.
바로 심판의 휘슬이 울렸다.
‘좋았어. 프리킥 찬스다!’
정말이지 좋은 찬스였다.
안 그래도 레전드 키퍼와 제대로 겨뤄 볼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니까.
***
베르트 트라우트만은 나치 독일군 공수부대 출신인데, 포로로 잡혀서 영국에 와서 축구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골키퍼도 아니었답니다. 수용소에 있을 때 대타로 맡아 본 게 대박을 터트려 소문이 났고, 아마추어 팀을 거쳐 맨체스터 시티로 입단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레전드 선수라 피파 온라인에서 보신 분도 있을 거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