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2화 (22/400)

Round 22. 하늘색의 팀

‘그러고 보니 데니스 로는 나중에 이탈리아에서 잠시 선수 생활을 하던가?’

그 사실이 떠올랐던 준영은 미리 데니에게 충고를 해 주었다.

“이탈리아는 쳐다보지도 마.”

“왜요?”

“거기 텃세도 쩔고, 카테나치오라고 죽자 사자 수비만 하는 재미없는 축구를 하거든.”

21세기에 있을 때 AC 밀란에게 당한 앙금이 있었기에 이탈리아에 대한 준영의 감정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데니가 세리에 리그에 품고 있는 동경을 미리 지워 주리라 마음먹었다.

상당히 과장해 가면서.

“거기다 이놈들은 엄청 거친데, 이건 무슨 축구를 하는지, 격투기를 하는지…….”

한참 이야기를 이어 가려는 차에 갑자기 펍에 울리던 음악이 뚝 끊겼다.

마침 펍을 찾아온 섕클리 감독이 카운터에 있던 축음기를 끈 것이다.

“갑자기 무슨 일이죠, 감독님?”

“제3차 세계 대전이라도 터졌습니까?”

불만 섞인 선수들의 물음에 에디 감독은 카운터를 두들기며 말했다.

“다들 잘 들어라. 오늘 경기에 집중하라고 미리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월요일에 연습 경기를 하게 되었다.”

“에이,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실전에 대비해서 연습 경기를 하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선수들은 이어지는 섕클리의 말에 깜짝 놀랐다.

“상대는 맨체스터 시티야.”

“예? 스카이블루가 왜 우리랑 연습 경기를……?”

“그쪽에서 먼저 제의했다.”

의아해하던 선수들의 시선이 준영에게로 향했다.

안 그래도 준영을 탐내는 팀들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

아마 시티에서 연습 경기를 제의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그래, 연습 경기를 통해 기량을 확인하고 영입해 가는 일이 종종 있지.’

‘근데 꼭 존만 볼 거라는 법은 없잖아.’

‘잘하면 1부 리그에서 뛸 기회가 올지도……!’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던 선수들은 냉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연습을 해 놔야 결전 당일에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으므로.

남아 있는 사람은 준영뿐.

섕클리는 그에게 다가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른 걱정이라고 했지? 그게 현실이 되어 버렸어.”

“거참, 최소 반년은 지나야 벌어질 일이라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이 시대의 축구에 적응하고, 문화적 편견이 있는 영국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적잖은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봤다.

하지만 정작 리그라는 뚜껑이 열리니 상황이 예상 밖으로 급하게 돌아갔다.

“구단 임원들의 생각은 어때요?”

“어떻긴. 그치들은 야망이 없어. 팀에 기량이 만개한 선수가 있으면 팔고 싶어 하지. 먼 미래보다 당장 눈앞의 수익만 생각할 뿐이야.”

속이 타는지 섕클리는 맥주를 들이켰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준영의 마음도 복잡했다.

‘1부 리그 팀의 오퍼가 나에게 있어 나쁜 일은 아니야. 다만 어떤 사람들을 만날지 그게 문제란 말이야.’

섕클리나 허더스필드의 선수들과는 문제없이 잘 지냈다.

데니스 로나 켄 테일러 등 몇몇 선수들과는 굉장히 친해지기도 했고.

하지만 새로 이적할 팀에서도 그럴 거란 보장이 있을지?

섕클리는 이런 준영의 걱정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말을 이어 나갔다.

“야망이 없는 팀에 있기보다 더 도전할 기회가 있는 팀으로 가는 게 낫지. 그런 점에서 맨체스터 시티는 나쁘지 않아. 레스라면 널 잘 대해 줄 거야.”

“레스라는 분이 현재 맨시티 감독입니까?”

“그래, 레스 맥도웰. 들어 본 적 없나?”

없다.

눈앞에 있는 빌 섕클리나 밥 페이즐리, 맷 버스비나 지미 머피 등은 신부님에게 들어봤다.

그러나 맥도웰이란 감독은 오늘 처음 들었다.

‘그러고 보니 맨체스터 시티에 대해서도 그다지 들어 보지 못했어.’

21세기에서는 맨유랑 지역 라이벌로 유명하건만.

유나이티드의 열성팬인 신부님이 그리 언급을 안 한 걸 보면 이 시절에는 별로 신경 쓸 만한 팀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꽤 잘하는 선수가 하나 있었다고 들었는데… 누구였더라?’

준영이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 섕클리가 다시 말을 건넸다.

“흠, 표정을 보니 맨체스터 시티는 그다지 끌리지 않나 보군.”

“그야 맨체스터 하면 유나이티드라고 들어서요.”

“유나이티드라……. 확실히 멋진 팀이지. 기회가 오면 나도 버스비의 아이들과 같은 드림팀을 만들어 보고 싶어.”

‘그 기회는 옵니다. 감독님은 해내시고요.’

앞으로의 역사를 아는 준영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존, 유나이티드에 들어가고 싶나?”

“최고의 팀에서 멋진 경기를 하는 건 선수로서 누구나 꿈꾸는 일이니까요.”

“그렇지. 선수라면 그런 야망을 꿈꿔야지.”

흐뭇한 미소를 지은 섕클리가 준영의 어깨를 도닥였다.

“아무튼 연습 경기도 최선을 다해 보라고. 너에게 매우 좋은 기회가 될 테니까.”

“예, 충고 감사합니다.”

섕클리의 말대로 전력을 다하리라.

1부 리그 팀을 상대로 뛰어난 활약을 보이면 시티가 아니라 어디든 갈 수 있을 테니까.

***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쾌청한 9월의 첫째 날 오후.

모즐리의 실파크에 사람들이 제법 모여들었다.

55-56시즌 FA컵 우승팀 맨체스터 시티.

이번 시즌 디비전2에서 3연승을 달리고 있는 허더스필드 타운.

이 두 팀이 이곳에서 연습 경기를 치르기로 했기 때문이다.

“중립 지역에서 한다더니 집 근처에서 할 줄이야.”

“그러고 보니 형님은 이 근처 귀족 저택에 산다고 했죠? 한번 놀러…….”

데니의 말이 중간에 뚝 끊겼다.

그의 시선은 하늘색 유니폼을 입고 다가오는 선수들에게 향하고 있었다.

“우와! 형님, 저거 봐요! 바비 존스턴이에요!”

잔뜩 흥분한 데니와 달리 준영은 심드렁했다.

바비 찰튼, 바비 무어라면 모를까 바비 존스턴이란 선수는 몰랐으니까.

“누군데? 유명해?”

“아니, 몰라요? 저랑 같은 스코틀랜드 출신인데 웸블리에서 2년 연속 득점을 기록한 공격수라고요!”

“그러냐.”

“그래요. 지난 월드컵 때도 부상만 아니었으면 아마 굉장한 활약을 했을 텐데…….”

데니가 침을 튀기며 설명을 하는 사이, 맨시티 선수들이 눈앞에 당도했다.

준영의 앞에 문제의 바비 존스턴이 섰다.

21세기에 CF 모델로 활동해도 손색없을 만큼 준수한 그의 얼굴에는 불쾌감이 가득했다.

“좀 유명해지니 눈에 보이는 게 없어진 모양이군.”

바비 존스턴은 걸어오던 중에 준영과 데니의 대화를 들었다.

예전 같으면 ‘외국인이 모를 수도 있지.’라고 너그럽게 이해했을 테지만, 요즘은 달랐다.

신경이 몹시 곤두선 상태라 준영의 언행이 심히 거슬렸다.

“날 무명 취급할 정도로 실력에 자신 있나? 하긴 어느 정도 되니 감독님 눈에 띈 거겠지만.”

“미안해요. 난 정말 몰라서 그랬던 겁니다.”

준영은 존스턴이 화를 내는 이유를 눈치챘다.

그래서 오해를 풀려고 했는데, 오히려 불난 집에 가솔린을 부은 격이 되고 말았다.

“칭크 주제에 덩치만 믿고 까부는군.”

“신문에 몇 번 나오더니 정말 뵈는 게 없나 봐.”

“흥, 눈깔이 저 모양인데 보이는 게 있겠어?”

준영은 빈정대는 소리가 나오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10대 후반 혹은 자신 또래의 젊은 선수들.

놈들은 시선이 마주치고도 입을 다물지 않았다.

“뭘 봐? 눈이나 떠. 경기 중에도 자고 있을 셈이야?”

“개나 소나 원숭이나 막 끌어 쓰는 삼류 팀에서 잘나가니까 우리가 우습게 보이는 모양이지?”

계속되는 불쾌한 발언에 준영은 물론이고 허더스필드 선수들의 얼굴도 구겨졌다.

발언이 지나치다 보니 맨체스터 시티의 고참 선수들도 눈총을 주었지만, 그들의 입은 쉬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정말이지, 어쩌다 필드에서 마늘 냄새가…….”

“축구를 주둥이로 하는구만.”

준영이 쏘아붙인 한마디에 맨시티의 애송이들이 바로 낯빛을 굳혔다.

“너 뭐라고 했어?”

“이런, 사람 말도 못 알아듣다니. 주둥이로 축구하는 견공 자제분들은 귓구멍부터 다르시구만.”

딱딱해져 있던 애송이들의 얼굴이 단풍잎처럼 뻘겋게 변했다.

“이게 미쳤나!”

“죽고 싶냐, 원숭이!”

발끈한 녀석들이 눈을 치켜뜨자, 데니와 허더스필드 선수들도 언성을 높였다.

“이것들이 어디서 시비야!”

“돌아갈 때 메인 로드까지 기어가고 싶냐?”

“나치랑 공 차는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당장이라도 주먹다짐이 일어날 만큼 흉흉한 분위기.

보다 못한 나머지 바비 존스턴이 나섰다.

“그만! 뭐가 잘났다고 떠벌리고 있어!”

철없는 애송이들에게 호통을 날린 그는 바로 준영과 허더스필드 선수들에게 사과했다.

“결례를 범했군.”

“빈 깡통이 요란한 게 그쪽 탓은 아니죠.”

준영의 말을 들은 빈 깡통들의 인상은 와락 찌그러졌다.

존스턴은 가늘게 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쪽 깡통은 묵직한가?”

‘이 양반, 뒤끝이 있구만.’

인종 차별이나 하는 애송이들을 꾸짖기에 괜찮은가 싶었는데, 좀 쪼잔한 구석이 있어 보였다.

“내가 가벼운지, 묵직한지는 직접 알아보시죠. 필드에서 통하는 건 오직 실력뿐이니까.”

“맞는 말이야. 어디 뻥뻥 뚫리고 나서도 큰소리칠 수 있는지 보겠어.”

너야말로 못 뚫고 괜한 짜증 내지 말길.

준영이 존스턴의 엄포에 밀리지 않는 사이, 허더스필드 선수들도 이를 갈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우리가 뭐? 막 끌어 쓰는 삼류 팀?’

‘이런 놈들이 스카이블루 저지를 입고 있으니 팀이 그 모양이지.’

아주 박살을 내 주마.

실전 이상으로 진지해진 허더스필드 선수들의 눈빛이 붉게 달아올랐다.

***

“어이쿠, 분위기 한번 살벌하구만.”

필드 밖에서 선수들의 말다툼을 지켜보고 있었던 섕클리가 혀를 찼다.

그의 곁에 있던 맥도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난 토요일 경기가 너무 안 좋아서 그래.”

“아, 그러고 보니 유나이티드에게 4 대 1로 졌다고 하던가?”

“점수가 그보다 더 벌어질 수도 있었어. 내용에서 완전히 압살을 당했지.”

작년에 우승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달리 맨체스터 시티는 강등을 간신히 모면했다.

그런 만큼 양 팀의 전력 차이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유나이티드가 너무 진지하게 덤벼들더군. 뭔가 맘에 안 드는 구석이 있던 모양이었어.”

“버스비가 탐내는 걸 건드렸기 때문 아닐까?”

섕클리가 턱짓으로 준영을 가리키며 말하자 맥도웰은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좋은 선수들 많이 있으면서 뭐가 부족하다고…….”

“버스비는 꿈이 크거든.”

맷 버스비는 영국 풋볼 리그만이 아닌 더 크고 넓은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이미 지난 시즌에도 도전했던 유러피언 컵.

버스비는 그 대회를 제패하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유럽 최고의 팀으로 우뚝 세우려 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협회가 반대하는데 유러피언 컵에 참가했을 리 없지.”

“유럽 최강이라…….”

“아마 거기서 끝은 아니겠지.”

“어떻게 그리 장담하나?”

맥도웰의 물음에 섕클리는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그와 같은 꿈을 꾸고 있으니까.”

***

바비 존스턴은 2년 연속 FA컵 결승전에서 득점을 한 첫 번째 선수입니다. 상당히 영리한 선수로, 기량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관중들의 이목을 끄는 재주도 탁월해서 많은 사랑을 받은 선수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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