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4. 최강 골키퍼
준영은 바로 킥을 찰 준비를 했다.
그의 실력을 아는 허더스필드 선수들은 순순히 기회를 양보했다.
상대 수비벽을 살펴보던 준영은 시합 전 자신에게 비아냥댔던 아치와 애송이들에게 경고를 보냈다.
“조심해라. 영 안 좋은 데로 날아갈 수 있으니까.”
“큭, 이 자식……!”
겁이 났던지, 아치 일당은 냉큼 두 손으로 중요 부위를 가렸다.
준영은 잔뜩 주눅이 든 그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수비벽을 조정하면서 매서운 눈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버트를 노려볼 뿐.
‘어디 한번 제대로 겨뤄 봅시다, 레전드 양반.’
준영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발을 굴렀다.
그러다 쏜살같이 몸을 던지며 슈팅을 날렸다.
뻐엉-
활처럼 휘어진 전신의 파워가 힘껏 내지르는 발끝에서 터졌다.
무시무시한 스피드로 날아간 공은 수비벽을 살짝 넘어 골대 우측으로 뚝 떨어졌다.
“오… 아아아!”
고개를 빼고 지켜보던 관중들의 환호성이 아쉬움의 탄식으로 바뀌었다.
그대로 골대에 꽂혀 버릴 것 같던 강슛이 버트의 펀칭에 맞고 라인 밖으로 나간 것이다.
‘허, 레전드 타이틀을 그냥 딴 게 아니네.’
‘엄청난 슛이다!’
준영도 혀를 내둘렀지만, 버트 역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방금 날아왔던 슈팅은 그가 그동안 막았던 슈팅들 중 열 손가락, 아니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수준이었으므로.
거기다 위력도 엄청났다.
주먹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쳐 냈다면 손이 꺾였을지 모른다.
얼얼한 손을 털어 낸 버트는 연이어 날아온 코너킥도 껑충 뛰어 잡아냈다.
헤딩을 시도하다 실패했던 준영은 재빨리 수비 진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발보다 맨체스터 시티의 역습 전개가 훨씬 더 빨랐다.
버트는 미리 중앙선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던 바비 존스턴에게 길게 패스를 보냈다.
그 공을 잡아챈 존스턴은 동료 빌리 맥아담스와 패스를 주고받으며 허더스필드 골대로 달려갔다.
후방에 남아 있던 켄 테일러나 다른 수비수들이 마크에 나섰지만, 존스턴은 그들을 간단히 제쳐 버리곤 슛을 성공시켰다.
“젠장!”
“방심했군. 날 놔두지 말았어야지.”
뒤늦게 돌아온 준영에게 존스턴이 으스댔다.
하지만 그의 맘도 그리 후련하지 않았다.
준영과의 일대일에서 승리해서 얻은 골이 아니었으므로.
“다음엔 널 제치고 넣어 주지.”
“흥, 그런 기회는 없을걸.”
물러나는 존스턴과 잠시 말싸움을 하는 사이, 주장 맥캐리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존, 슛은 멋지게 차면서 헤딩은 왜 망설이는 거야?”
“망설이다뇨?”
수비 가담이 늦었다고 핀잔을 들을 줄 알았는데, 엉뚱한 소리를 들었다.
“저 크라우트(* 독일인에 대한 멸칭) 녀석, 예전에 다쳤다고 봐주지 마. 덩치 뒀다 뭐 해? 몸통으로 그냥 들이받으라고!”
“그거 골키퍼 차징 아닙니까? 반칙일 텐데요.”
혹시 이 시대에선 골키퍼 차징은 아직 반칙이 아닌 걸까.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저 덜 엄격할 뿐.
“누가 반칙을 하래? 공을 잡기 전에 적당히 부딪쳐 주라고. 겁이 나서 기어 나오지 못하게 말이야.”
“쫄게 하라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실점했지만, 허더스필드 선수들은 그리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더 적극적이고 거칠게 상대를 밀어붙였다.
‘데니나 다른 공격수들까지 견제를 해 주는군. 그런 식으로 계속 압박을 가해 주라고! 그게 미래의 축구니까!’
상대를 거칠게 견제해서 주눅 들게 만드는 건 21세기 축구에서 흔한 플레이다.
여기서 더 나가면 소위 ‘담그기’가 나온다.
하지만 이런 플레이는 판정의 선을 넘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도 맞대응하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죽어, 원숭이!”
“컥!”
경기가 재개되고 준영이 공을 갖고 있을 때, 아치가 백태클을 날렸다.
정말 위험했다.
미리 감지해서 피하지 않았다면 큰 부상을 당했을지 모른다.
‘젠장, 이건 퇴장감인데!’
그러나 이 시대에는 그저 파울에 구두 경고 정도에서 끝났다.
‘개X끼, 기억해 두마.’
비웃음을 짓는 아치를 째려봤던 준영은 프리킥을 측면으로 달려가는 데니스 로에게 맞춰 찔러 주었다.
정확하게 들어온 스루 패스를 받은 데니는 중앙에서 쇄도하는 동료들에게 맞춰 크로스를 올렸다.
곧바로 잡아채려 움직이던 버트는 도중에 멈칫했다.
바람 때문에 공이 페널티 박스 밖으로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
거기다 허더스필드 공격수와 수비수들과 뒤섞여서 달려 들어오는 중이었다.
우물쭈물하는 버트를 대신해, 수비수 빌 리버스가 공을 잡아채 멀리 걷어 냈다.
“고마워, 빌.”
“뭘요. 힘내요.”
살짝 전진해 올라갔던 준영은 방금 전 버트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았다.
‘충분히 뛰어 나와 걷어 낼 수 있었을 텐데.’
버트 정도의 실력자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들소처럼 달려오는 선수들을 보고 망설이고 말았다.
‘다친 적이 있다고 했지? 그럼 부상 때문에 몸을 사리는 거구나.’
큰 부상 후에 소심해지는 선수들이 있다.
부상의 끔찍한 고통과 기나긴 재활의 나날에서 느끼는 불안감 때문이다.
‘레전드도 사람일 테니까.’
아마 그래서 맥캐리도 봐주지 말고 받아 버리라고 했으리라.
하지만 준영은 그렇게 매정한 플레이는 하고 싶지 않았다.
‘선수는 몸이 보물이잖아.’
서로 보호해 주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놈에게는 따끔한 교육이 필요했다.
***
허더스필드의 코너킥 공격 찬스.
버트는 분주하게 상대 선수의 위치를 파악하고, 수비수들의 위치를 조정했다.
“명심해! 절대 상대를 놓쳐선 안 돼!”
버트가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페널티 박스 안에 있는 맨시티 선수들은 한 명씩 맡아서 마크하고 있었다.
준영을 마크하고 나선 건 아치였다.
왕년에 럭비를 했던 그는 몸싸움에 자신이 있었다.
더구나 앞서 코너킥에서도 준영을 잘 막아 냈기에 이번에도 문제없을 거라 확신했다.
‘흥, 어디 한번 뛰어올라 보라고. X구멍을 찍어 줄 테니까.’
비웃음을 지으며 점프했던 아치의 눈앞으로 준영의 굵고 억센 팔이 날아들었다.
“아악!”
아치의 몸이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경기가 중단되었고, 심판과 주변의 선수들은 아치를 살펴보았다.
코를 움켜쥔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괜찮아, 아치?”
“맙소사! 코뼈가 나간 거 아니야?”
아치와 친한 애송이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자 선수들과 주심의 시선이 준영에게 향했다.
준영은 몹시 미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점프하면서 팔을 좀 뻗었는데, 그만 저 친구가 맞았더라고요.”
“거짓말하지 마!”
“일부러 친 거잖아!”
애송이들의 비난에도 준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 인마들아. 고의로 친 게 맞다. 어쩔래?’
아까 백태클을 날렸던 녀석이 뒤에서 무릎을 들이밀기에 냅다 팔꿈치를 휘둘러 쳤다.
한번 호되게 처맞아 보라면서.
‘팔꿈치 가격 퇴장은 2006년 독일 월드컵부터였으니까.’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 대표팀이 너무 팔꿈치를 마구 휘둘러서 개정된 규칙이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안심해서는 안 된다.
이 시대에 심판의 권위는 강하니까.
“당장 퇴장시켜요! 신사답지도 못한 저런 원숭이 따윈…….”
“신사답게 징징대지 않았으면 좋겠군.”
가만히 상황을 보고 있던 버트 트라우트만이 핀잔을 날렸다.
“경기하다 보면 서로 부딪칠 수도 있는 거지. 코피 좀 터진 거 갖고 소란 피우지 마!”
“버트, 왜 더러운 칭크를 편들어요?”
“우리랑 같은 편 맞아요?”
애송이들의 항변에 버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누군가를 차별하고 증오하라고 부추기던 무리들이 생각났으므로.
어린 시절 생각 없이 그들의 목소리에 열광하며,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전쟁에서 방아쇠를 당기며 죄업을 쌓았다.
그리고 그 결과, 바로 자신이 타인에게 증오받고 미움받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 증오를 씻어 내는 덴 정말 긴 시간이 걸렸다.
“날 너희랑 같은 부류로 엮지 말아 줘. 멍청한 시절로 돌아가기 싫으니까.”
“그게 무슨…….”
“닥치고 경기에나 집중해! 스카이블루를 걸쳤으면 그에 어울리는 선수가 되란 말이야!”
버트의 호통에 애송이들은 더 이상 찍소리도 못하고 물러났다.
심판도 준영의 파울만 인정하고 시합을 다시 진행시켰다.
‘근데 치료는 안 해 주나?’
21세기에서는 부상 선수는 일단 내보냈다가 지혈이 끝난 뒤에 불러들이는 게 원칙.
하지만 지금은 심판도, 선수들도 아치에게 딱히 눈길을 주지 않았다.
마치 코피 정도는 사나이답게 극복하라는 듯.
“젠장, 아파 죽겠네…….”
연방 투덜대며 울먹이던 아치.
쉽게 지혈되지 않는 코피 때문에 하늘색 유니폼이 붉게 얼룩졌다.
***
실점을 허용했던 허더스필드는 이후 활발한 공격을 펼쳤다.
전반 28분 준영의 중거리 슛이 골대를 살짝 넘어갔고, 5분 후에는 빅터 맷칼프의 슛이 버트의 선방에 막혔다.
이어진 코너킥 공격에 준영이 가담했지만, 공이 너무 높이 날아오는 바람에 머리를 댈 수 없었다.
‘너무 힘이 들어갔잖아.’
방금 코너킥을 찼던 레스 마시를 살짝 노려봤던 준영은 주변으로 눈길을 돌렸다.
저만치 떨어져 있던 아치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하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코피는 멎었지만, 아직 얼얼한 통증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후후, 저 녀석, 다시는 깝치지 않겠군.’
말 안 통하는 놈은 매가 약.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동점 골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너무 만회만 하려다간 선제골 때처럼 역습을 당할 수 있었기에 준영은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렇게 공수로 부지런히 넘나드는 준영의 모습에 바비 존스턴이 충고하듯 쓴소리를 내뱉었다.
“정말 쉴 새 없이 뛰는구만. 그러다 염통 터지겠어.”
“그쪽이 너무 안 뛰는 거지.”
사실 21세기 선수들의 활동량에 비하면 이 시대 선수들은 그리 많이 뛰는 편이 아니다.
레이 윌슨 같은 예외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많이 뛰기보다는 뭔가 만들어 보려는 방식의 플레이를 선호했다.
그렇다 보니 활동량은 적었고 경기 템포도 그렇게 빠르지 않았다.
‘교체도 규정도 없고, 체력 관리도 미비하니 그럴 수밖에.’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허더스필드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생겼다.
맨시티 페널티 박스를 돌파하던 데니스 로가 태클에 걸려 쓰러졌던 것.
‘찍었다!’
준영의 확신대로 주심이 페널티킥 판정을 내렸다.
키커로 나선 건 고참인 빅터.
그는 우측 상단을 노리고 강슛을 날렸다.
하지만 미리 방향을 읽었던 버트는 빅터의 슛을 펀칭해 냈다.
‘젠장, 페널티킥도 막다니!’
뒤이어 쇄도한 데니가 리바운드 볼을 잡았다.
하지만 급하게 날린 슈팅은 그만 골대를 넘어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주심의 휘슬이 울렸다.
허더스필드는 맨시티의 골문을 뚫지 못한 채 전반전을 끝냈다.
“제길, 한 점은 넣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독일 놈, 소문대로 귀신이더라고.”
아쉬움을 토로하는 허더스필드 선수들 앞에 선 섕클리 감독은 작은 칠판을 꺼내 들며 후반전 전술을 이야기했다.
“아직 1골 차이다. 너무 조바심 낼 필요 없어. 역습에 주의하면서 플랜B로 진행하도록.”
“어, 플랜B면…….”
선수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훈련 때 플랜B 전술을 연습해 봤지만, 실전에서는 아직 써먹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준영도 확신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
그의 시선은 섕클리가 칠판에 그려 놓은 포메이션에 꽂혀 있었다.
‘4-3-3, 아니 4-1-2-3.’
상당히 공격적이고 점유율을 높이기 좋은 포메이션이다.
하지만 과연 이 시대에서 제대로 효과를 볼 수 있을까?
***
이미 언급했다시피 저 시절 정규 경기에는 교체 규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잘하는 선수에게 일부러 파울을 해서 부상을 입혀 내보내는 아주 더러운 작전도 종종 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부상당한 선수가 자신에게 부상을 입힌 선수를 고소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고소에서 패하게 되면 피고는 원고에게 치료비는 물론이고, 원고가 부상당한 동안 못 뛰어서 못 받은 급료도 물어 줘야 했다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