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202화
봄바람 (2)
“하하하. 좋군.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직접 한 번 보고 싶구만.”
“ 폐하……
포르테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 으로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그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포르테에
게 고개를 돌렸다.
“뭐,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지 말 게. 일단 만나만 보라는 얘기니까. 자네가 반대한다면 나도 억지를 부 리지는 않겠네.”
“아, 아닙니다. 폐하의 뜻이 그렇다 면 전..
포르테는 제이슨의 말에 다급히 고 개를 저었다.
그녀의 가문은 대대로 황실에 충성 을 바쳐왔다. 황제의 뜻이 그렇다면 당연히 그 뜻에 따르는 것이 맞았 다.
“아니, 진심일세. 자네가 원하지 않
는다면 강요할 생각은 없어.”
제이슨은 애초에 이 갈등의 원인을 제공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뻔뻔하게 말했다.
“영식 군과의 혼약이라면 강요할 생 각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제이슨은 말끝을 흘리며 슬쩍 영식 쪽을 바라보았다. 마치 ‘꼬우면 네 가 결혼하든가’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한 눈빛이었다.
속으로 빌어먹을 늙은이, 라는 욕 을 삼킨 영식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우선 두 분께 서 만날 자리를 잡고, 그 이후에 결 정하는 걸로.”
“그렇게 하지.”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영식의 제안에 응했다.
“후우……. 잠시 다른 얘기로 샜습 니다만, 여러분에게 전달 드릴 사항 이 있습니다.”
영식은 갑작스러운 전개에 당황했 지만 이내 정신을 어느 정도 차리고 는 가장 중요한 얘기를 꺼냈다.
단테리온에 대한 얘기와 서부 정벌 에 대한 얘기였다.
물론, 자신이 과거 창조주들을 이 끌던 대장이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 다. 그 말은 너무 지나칠 정도로 큰 혼란을 가져다 줬다.
“?…”허.”
“충격적이군.”
영식의 말을 모두 들은 사람들은 ‘단테리온’이라는 존재가 가진 터무 니없는 힘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식 군의 말은 모두 사실일세. 그는 나조차도 전혀 알 수 없는 종 류의 힘을 사용하고 있었어.”
“올드 원까지 그런 말을 한다면 믿
지 않을 수가 없군요.”
박시아는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올드 원이라고 불리며 서부 최강자 의 자리에 그 이름을 올리고 있는 서강준이 직접 말하니 그 무게가 달 랐다.
‘만약 동부 연합만으로 북방 정벌 에 나섰다면…… 영식이 대륙 연합을 제안하지 않다 면 그녀는 동부의 힘만을 모아서 북 방 정벌에 나섰을 것이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몇 년의 시간 을 창조주들에게 준 채로.
그 결과가 어땠을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마른 침을 삼키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성공시켜야 해.’
어떤 소환자에게도 마찬가지지만, 그녀에게는 지구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번 북방 정 벌은 성공시켜야 했다.
“영식 씨. 그러면 서부 세력만 흡 수하면 바로 북방 정벌을 출발하실 생각이신가요?”
“예. 맞습니다. 더 이상 그들에게 시간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요.”
영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같은 이유에서 이번 서부 세력 흡 수도 다소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할 생각입니다.”
“강압적인 방법?”
“동부 연합을 만들었을 때와…… 비슷한 방법 말씀하시는 건가요?”
박시아의 물음에 영식은 천천히 고 개를 저었다.
“아뇨. 동부에서는 그래도 최대한 회유를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힘을 사용했던 거고요. 그런 방법은 서부 에서는 큰 의미가 없을 겁니다.”
영식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부와 동부의 상황은 달랐다.
서부의 소환자는 소수 집단으로 활 동하는 만큼 권력의 집중도가 높았다.
현재 자신의 권력에 취해 있는 그 들이 대륙 연합에 적극적으로 협력 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압도적인 힘을 보여줘서 그들을 강제로 연합에 합류시킬 생각입니 다.”
사나운 짐승들을 길들이는 최적의 방법.
그들에게 본능적인 공포를 심어줄 만한 압도적인 힘으로 그들을 굴복 시켜야 했다.
인류의 존망을 위해서라거나, 에르 노어 대륙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대 의는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 다.
따르지 않으면 죽는다.
그 사실을 머릿속에 각인시켜 넣어 주는 것.
그것만이 서부의 짐승들을 움직이 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 다.
“……구체적인 방안은?”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제이슨이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영식은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 달칵.
기나긴 회의가 끝난 후, 영식은 길 수의 방으로 찾아갔다.
“오, 회의는 잘 끝났나, 영식 군?”
방패를 수건으로 닦고 있던 길수는 영식을 향해 손을 흔들며 그를 반겼 다.
“예. 준비가 끝나면 바로 서부 정 벌이 시작될 겁니다.”
“끄응. 또 바빠지겠구만.”
길수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 다. 기계몬스터를 발견한 이후 정말 정신없이 연달아서 사건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아, 그리고 아라 양에게 듣자하니 자네가 뭐 주지육림을 만들려고 한 다고 하더구만? 결국 욕망에 충실하 기로 결정한 건가?”
주지육림이라는 지나칠 정도로 노 골적인 표현에 영식은 굳게 입을 다 물었다.
“뭐…… 욕망에 충실하기로 결정한 건 사실입니다. 누구 하나 포기하기 쉽지 않은 사람들이니까요.”
“껄껄. 자네도 연애에 관해서는 젬 병이로군. 그러게 진즉에 결정했으 면 얼마나 편했겠나?”
“……그런 결정을 하기에는 너무 바빴으니까요.”
영식은 쓴웃음을 지으며 길수를 바 라보았다. 그의 말대로 지금까지 영 식은, 아니, 지금 당장에도 그는 정 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서부의 일부터 시작해서 이브에 대
한 일. 그리고 자신의 과거에 대한 일들이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뒤엉키 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 타이밍에 영식이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 자체가 이상할 정도로 복잡하고, 정신없는 상황이 었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타이밍에 이런 결정을 내렸을지도.’
자신의 과거.
인류의 궁극적인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창조주들을 이끌었던 대장이라 는 자신의 과거가 점점 더 밝혀지기 전에 그녀들을 붙잡아두고 싶었다.
앞으로 더욱 자세하게 자신의 과거 가 밝혀졌을 때 ‘지금처럼 있을 수 없을 것’이라는 희미한 불안감이 그 를 조급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자네가 바쁘긴 했지. 하지만 지금 이라도 결정을 내려서 다행이네. 적 극적인 루시아 양은 그렇다 쳐도 길 드장님이랑 아라 양은 보고 있는 쪽 이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으니.”
길수는 영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 기며 뿌듯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 았다.
“뭐…… 아라는 아직 납득하지 못
한 것 같던데요.”
“하하. 머지않아 그녀도 받아들여 줄 걸세. 내가 보증하지.”
길수는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며 그에게 말했다.
영식은 그런 길수를 가만히 바라보 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길수 아저씨.”
“웅?”
“여자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아저 씨는 지금 따로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이 있나요?”
영식은 슬슬 본론(?)을 위한 떡밥
을 깔기 시작했다.
“크흠.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이라. 적어도 길드 내에는 없는 것 같군.”
길수는 갑작스러운 영식의 질문에 살짝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살바토르 길드의 여성진은 하나 같 이 매력적이었지만 그들 중 대부분 이 이미 마음을 정한 상대가 있었기 때문에 길수가 호감을 품을 만한 상 대는 없었다.
“흐음. 설마 이제까지 연애 경험이 없다던가……?”
영식은 길수의 자존심(?)을 건드리 는 말을 입에 담았다. 그의 말에 길 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젊었을 적에는 몇 번 있었네.”
길수는 사람이 너무 좋은 탓에 호 구 취급을 받기 일쑤였지만 기본적 으로는 굉장히 자상하고, 섬세한 남 자였다.
외모 또한 미남 축에 속했기 때문 에 젊었을 적에는 꽤나 인기가 많았 다.
“서른 중반을 넘고 난 이후로는 없 었지만 말이야.”
길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 이도 나이었지만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떠안게 된 빚더미가 문제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10년 가까이 연 애를 해보지 못했다는 새삼스러운 생각에 길수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 졌다.
“길수 아저씨…… 아니, 길수 형님 이라고 앞으로 불러도 되겠습니까?”
“……갑자기 무슨 바람인가.”
길수는 부담스럽다는 표정으로 영 식을 바라보았다.
지난 2년간 변하지 않았던 호칭을 갑작스럽게 바꾸다니.
기쁨에 앞서 의심부터 드는 것이 당연했다.
“하하. 저희는 튜토리얼 때부터 함 께 역경을 헤쳐 온 사이가 아닙니 까? 제가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으 니 사실상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라 고 할 수 있죠.”
M 99
“형님이 없었다면 전 루시아처럼 다른 누군가에게 이용당했을지도 모 르죠. 아뇨, 굳이 그런 걸 생각하지 않아도 형님은 제게 아주 소중한 사 람입니다.”
길수는 영식의 말에 굳게 입을 다 물었다. 그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영식 군..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영식의 어깨 를 움켜쥐었다. 따스한 감동이 그의 가슴 속에 퍼져나갔다.
에르노어 대륙에 오기 전, 지구에 서의 생활이 그의 머릿속에 스쳐지 나갔다.
자신을 이용해 먹기 좋은 호구 이 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 질 릴 정도로 당했던 배신의 경험.
그런 끔찍한 시간들이 이제야 보상 을 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정말 착한 청년이야.’
길수는 자신에게 ‘친형제’라고 말 해주는 영식을 보며 눈물을 삼켰다.
지금 길수는 ‘철벽의 군주’라는 히 든 클래스를 가진 강력한 랭커의 반 열에 올라섰지만 과거에는 정말 별 볼일 없는 소환자였다.
그럴 때도 영식은 그에 대한 지원 을 아끼지 않으며 길수가 성장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세상 어디를 뒤져도 그와 같은 착 한 청년은 찾기 힘들 것이다.
“알았네. 영식 군…… 아니, 영식. 앞으로 나도 자네를 친동생이라고 생각하겠네.”
길수는 북받치는 감정을 가까스로 다스리며 영식의 손을 굳세게 움켜 잡았다.
“감사합니다, 길수 형님.”
영식은 그의 손을 마주잡으며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런 의미에서 형님을 생각하는 동생으로서 꼭 도움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도움?”
길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님도 이제 슬슬 나이가 되었으 니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야 하지 않 겠습니까?”
“새로운 인연이라니, 그게 무슨……
“형님.”
영식은 길수의 두 어깨에 손을 올 리고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 았다.
길수에 대한 절절한 감정이 느껴지 는 눈빛이었다.
“장가갑시다.”
“……뭐라고?”
길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영식 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