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203화
봄바람 (3)
“그럼 서부 정벌 계획에 앞서 편성 된 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르난 제국의 회의실.
동부 연합의 핵심 인력과 제국군의 핵심 인력이 함께 모인 거대한 테이 블 앞에 영식이 서 있었다.
영식은 손에 든 두꺼운 서류 뭉치 를 덤덤한 목소리로 읽어나갔다.
“우선은 저와 루시아, 서강준 씨, 알렉 씨를 중심으로 4개의 조로 나 누겠습니다.”
“에엑! 주인님과 제가 다른 조인 건가요?! 아, 안 돼요!”
루시아는 영식의 말을 듣자마자 자 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리치 고 있는 그녀를 향해 영식은 단호히 말했다.
“파워 밸런스를 위해서야. 너와 내 가 같은 조에 있으면 밸런스를 맞출 수가 없잖아.”
지금 동, 남부 연합에서 가장 강력 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단연코 영식과 루시아, 서강준, 알렉 볼프강 이었다.
“그렇다면 그만큼 다른 조에 인원 편성을 더해주면 되잖아요! 아! 그 래요! 주인님과 저 단 둘이 조를 짜 고 나머지를 모두 한 조에 몰아넣으 면 되잖아요!”
루시아는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 다는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영식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면 한 조에 인원이 너무 쓸데 없이 많아지잖아. 얌전히 있어.”
“우우……. 절 얌전히 있지 못하게 하는 건 주인님이면서.”
뺨을 붉히며 수줍은 소녀처럼 말하 는 그녀의 말에 회의실 공기가 딱딱 하게 굳었다.
며칠 전 밤이 떠올랐는지 티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라는 살짝 표정을 굳힌 채 두 사람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분위
가 회의실 안을 가득 채웠다.
“크흠. 영식 씨, 질문이 하나 있습 니다만.”
화제를 바꿔준 것은 다행히도 박시 아였다.
영식은 그녀를 향해 재빠르게 시선 을 돌렸다.
“예. 말씀하시죠.”
“파워 밸런스에 대해서 말씀하셨는 데…… 영식 씨를 중심으로 조를 구 성한다는 게 살짝 이해되지 않아서.”
그녀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끝 을 흐렸다.
확실히 그녀가 알고 있는 영식의 전력은 루시아, 서강준, 알렉 볼프강 과 비교하면 가소롭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니었다.
그녀는 영식이 이번에 겪은 ‘업그 레이드’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니 까.
“뭐,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다고 말씀드리고 싶네 요.”
영식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 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흐음……. 알겠습니다. 영식 씨가 허언할 사람도 아니니까요.”
“헹, 입만 열면 거짓말만 하는 놈 인데 무슨 소리야, 언니.”
강하린은 코웃음을 치며 영식을 바 라보았다. 농담조에 가까운 말이었지 만 어느 정도 본심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영식의 거짓말에 시원하게 속아 넘어간 경험이 있었으니까.
“……네년은 뭔데 우리 주인님에게 그딴 말을 하는 거야?”
“읏..I”
회의실 안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휘몰아쳤다. 강하린은 숨통을 쥐어 짜내는 듯한 끔찍한 살기에 창백하 게 표정을 굳혔다.
“루시아.”
“……죄송합니다, 주인님.”
영식의 낮은 목소리에 루시아는 바 로 살기를 거두며 허리를 숙였다.
영식은 쯧, 하고 혀를 차며 그녀의 머리를 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럼 각 조의 세부 인원을 계속해 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청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주세요.”
영식은 회의실 안에 사람들을 둘러 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가 파워 밸런스를 생각해서 짜낸 조는 다음과 같았다.
“레비아탄 길드는 저와 같이, 루시 아는 살바토르 길드와, 한울 길드는 서강준 씨와 함께 움직입니다. 알렉 씨는 백강현 씨와 함께 소수 정예병 을 뽑아 운용해 주세요.”
영식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으 며 길수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리고, 길수 형님과 포르테 씨는 성에 잔류해 주세요.”
“그게 무슨……
“갑자기 성에 잔류하라니……
갑작스러운 영식의 말에 길수와 포 르테의 표정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영식은 만면에 활짝 미소를 지으며 길수와 포르테를 향해 말을 이었다.
“서부 정벌을 한다고 해서 언제 적 습이 있을지는 알 수 없잖아요? 제 2의 창세교가 나타난다고 해도 이상 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건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방어에 특화된 형 님과 강력한 전사인 포르테씨가 ‘함 께’ 성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아주셨 으면 합니다.”
이어지는 영식의 말에 포르테와 길 수는 어색한 표정으로 서로를 살폈 다. 포르테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요청 사항이 있다. 나는 사부님을 따라 서부 정벌에 나서고 싶다.”
“기각하겠습니다. 포르테씨까지 빠 지게 되면 황성을 지킬 수비 병력이 부족해집니다. 설마 제이슨 폐하를 위험에 처하게 하고 싶으신 건 아니 겠죠?”
“읏……. 그, 그건 그렇지만.”
제이슨의 이름을 거론하자 포르테 는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그녀에게
있어서 제이슨을 들먹이는 것은 치 트키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건 황제 폐하께서도 동의하신 일입니다. 그렇죠, 제이슨 폐하?”
영식은 고개를 돌려 제이슨에게 눈 짓을 보냈다.
제이슨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고개 를 끄덕였다.
“물론일세. ‘철벽’과 포르테 장군이 함께 짐을 지켜준다면 그 이상 든든 할 수가 없지.”
철벽, 이라는 이명은 동부 전쟁 이 후 길수에게 붙은 별명이었다.
각성을 하고 난 이후 길수는 동부
에서 꽤나 알아주는 소환자의 반열 에 올라섰다.
가진 힘이 충분히 상위 랭커라고 불릴만한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 유는 그의 스킬이 가진 압도적인 비 주얼 때문이었다.
거대한 성벽과도 같은 크기의 마력 벽을 만들어 내어 쏟아지는 포격들 을 일순간에 밀어내버리는 그의 모 습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전율스 러운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끄응?
포르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자리에 앉았다. 길수는 마치 팔려나 가는 강아지(?)와도 같은 애달픈 표 정으로 영식을 바라보았다.
“여, 영식. 아무래도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강압적인 것이……
“길수 형님, 전에도 말씀 드렸죠? 형님에게 새로운 인연을 맺어드리고 싶다고.”
영식은 절절한 눈빛으로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형을 걱정하는 동생의 눈빛이었다.
“설마 포르테 양이 마음에 들지 않 으신가요?”
“그, 그럴 리가 있나. 포르테 양처 럼 아름다운 여인이 마음에 들지 않 을 리가 없지.”
“읏……
길수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 한 말에 포르테는 짧은 침음을 삼키 며 아주 희미하게 얼굴을 붉혔다.
그런 그녀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길수는 영식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게. 내 나이가 벌써 마흔이 넘었어. 아무리 그래도 포르테 양과는 좀…… 안 어울리지 않나.”
“사랑에 나이가 무슨 문제겠습니 까? 나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형 님. 중요한 것은 형님의 마음이죠.”
“ 아니?
영식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 다. 길수는 ‘아니, 마음이 중요하다 는 사람이 이런 짓을 해?’라고 되묻 고 싶었지만 영식의 분위기에 압도 되어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하. 몸이 가까우면 자연스럽게 마음도 가까워지는 법입니다. 두 분 모두 함께 황성 수비라는 중책을 맡 으며 서로의 친목을 다지는 시간을 가져주세요.”
영식은 활짝 미소를 지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포르테와 길수에게 말 했다.
포르테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녀도 길수가 어색하기는 하지만 전혀 마 음에 들지 않는다, 라는 분위기는 아니 었다.
두 사람에 향했던 영식의 시선이 살짝 제이슨에게 옮겨졌다.
제이슨 또한 길수가 꽤나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표정으로 포르테를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
영식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영웅의 유산이 그 의 손에 들어올 확률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무기의 적성자가 있으면 좋겠지 만……
설사 무기의 적성자가 없다고 하더 라도 상관없었다.
영식은 그가 만들어 낸 기계와 무 기를 섞을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무기가 가진 무궁무진한 힘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 올 것이다.
‘믿고 있겠습니다, 형님.’
영식은 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길수와 포르테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길수가 말한 ‘착하고 믿음직스러운 청년’과는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 어 보이는 미소였다.
며칠 후, 서부 정벌 계획이 시작되 었다.
영식은 박시아, 강하린, 천태황 등 의 레비아탄 길드 정예 길드원들과 함께 목적지로 향했다.
-부우우웅.
묵직한 배기음이 울려 퍼졌다. 영
식이 준비 기간 동안 만든 장갑차였 다.
박시아가 마력 방벽까지 설치한 이 장갑차는 어지간한 마법, 물리 공격 에 견딜 수 있는 강력한 내성을 가 지고 있었다.
“여기가 그 악명 높은 적귀 권오진 이 지배하고 있는 도시군요.”
후드를 깊게 눌러 쓴 박시아는 멀 리서 보이는 도시를 바라보며 말했 다.
“으……. 저게 도시야? 그냥 크기 만 큰 폐허 같이 생겼는데.”
강하린은 적귀 권오진이 다스리는
도시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도시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로 낙후한 장소였다.
“하린이 너도 권오진에 대해서는 들어봤잖아?”
“……쓰레기 같은 놈이라는 건 많 이 들었지.”
적귀 권오진에 대한 소문은 서부를 너머 동부에도 생생하게 전해질 정 도로 유명했다.
“적귀라…… 과연 초인이라고 불리 는 서부 소환자들이 얼마나 강력할 지 좀 기대되네요.”
천태황은 눈을 반짝이며 권오진의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보며 강하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태황이 너는 싸우는 것 이외 에 아무런 관심도 없구나.”
“강자와 싸우며 더 높은 경지에 발 을 딛는 것 이상으로 가치 있는 일 은 없으니까요.”
천태황은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 었다.
그는 적귀 권오진이 어떤 인간인지, 그가 얼마나 사악한 일을 저질러 왔 는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적귀가 얼마 나 강하냐는 것뿐이었다.
‘……뇌가 근육으로 되어 있는 건 가?’
영식은 그런 천태황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영식에게도 호승심이라는 것 은 존재했다. 과거 천태황을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성장하는 그를 보며 호승심을 불태 웠던 경험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천태황처럼 순수하게 ‘강해지는 것’ 자체에 모든 가치를 두고 있지는 않 았다.
‘어디 외계의 전투민족이라도 보는
것 같군.’
영식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천태황의 행동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태황 씨.”
“아, 예.”
영식의 부름에 천태황은 고개를 돌 렸다.
둘의 시선이 교차했다.
i, 9
영식은 천태황을 바라보며 묘한 기 분을 느꼈다. 예전에 그를 봤을 때 는 느끼지 못했던 기묘한 감각.
영식은 자기도 모르게 그 감각이 ‘분노’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태황 씨가 받은 영웅의 유산 있지 않습니까.”
“델 라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천태황은 자신의 허리춤에서 황금 빛 검을 살짝 꺼내며 물었다.
“예. 맞습니다. 그 검에 대해서 알 려주실 수 있을까요?”
모종의 거래(?)로 영웅의 유산을 받을 가능성이 생긴 영식은 천태황 이 가진 델 라인에 호기심이 생겼 다.
“저도…… 잘은 모릅니다. 8영웅의 수장이었던 영웅 루시스가 다뤘던 검이라는 것 이외에는 아직 모르는 것 투성이죠.”
“그 검은 자아를 가지고 말을 건네 지는 않던가요?”
“몇 번 대화해 본 적은 있지만 그 리 많은 정보를 얻지는 못했습니 다.”
“흐음. 그럼 델 라인의 힘을 아직 완전히 다루지는 못한다는 말씀이시 군요.”
“예. 그래도 처음 이 검을 얻었을 때에 비해서는 훨씬 많은 힘을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태황은 델 라인의 손잡이를 쓰다 듬으며 말을 이었다.
“언젠가…… 이 검에 담긴 모든 힘 을 다루는 게 제 목표입니다.”
“흠. 지금은 어느 정도 다루실 수 있는 데요?”
“글쎄요. 정확히는 모르나…… 반 이상은 다룰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반 이상?”
천태황의 말에 영식은 놀랍다는 표 정을 지었다.
얼마 전 각성을 이룬 유나도 아직
무기의 힘의 반도 못 다루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8영웅, 그것도 그 중 영웅 들의 수장이라는 루시스의 힘이 담 긴 무기를 벌써 반 이상이나 다룰 수 있다는 것은 쉽게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사실이야. 태황이는 이미 시아 언 니보다 훨씬 강해졌다고. 아바돈 길 드랑 싸웠을 때랑은 전혀 다르단 말 씀!”
강하린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 을 하고 있는 영식에게 자랑하듯 말 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박시아의 반 응을 보아하니 그녀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이런 걸 재능충이라고 부르는 건 가.’
영식은 살짝 질린다는 표정으로 천 태황을 바라보았다. 영식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천태황의 성장 속도는 비정상적일 정도였다.
‘뭐, 나로서는 반길 만한 일이지만.’
지금 그에게 승부욕을 불태울 필요 는 없었다.
아군의 빠른 성장은 창조주라는 경 이로운 괴물과 싸워야 하는 영식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 다.
“그럼 영식 씨. 어떻게 안으로 진 입하실 건가요?”
어느새 가까워진 도시의 입구를 보 며 박시아가 물었다.
“일단 차부터 세워. 이런 무식한 크기를 가진 장갑차를 가지고 더 접 근하면 보초병 눈에 훤히 보일 테니 까.”
“아니, 세울 필요는 없어.”
영식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장갑차 의 엑셀을 밟았다.
-부우우우우웅!
강렬한 배기음과 함께 장갑차가 울 퉁불퉁한 산악 지형을 돌파했다.
“자, 잠깐 너 뭐 하는 짓이야?”
“말했잖아.”
영식은 핸들을 굳게 쥐며 더욱 강 하게 엑셀을 밟았다.
“무식한 방법을 사용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