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906화 (906/956)

내부자들(6)

-------------- 906/952 --------------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택윤의 자조적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전에 말한 적 있죠? 사내 정치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고. 흔히 표현하기로는 사내 정치라고 하지만, 이건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어디서나 벌어지는 일이에요. 제가 운영했던 작은 센터에서도 있었던 일이고, 조직이 커지면 더 심해지죠. 정치적이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정치적 행위 자체는 부정적이지 않아요. 오히려 권장하는 게 더 좋을지도 몰라요.”

정치는 서로 대립되는 의견 혹은 가치를 배분하는 방식이라고 정의된다. 사람이 모두 제각각이라는 뜻은 각각이 주장하는 가치 역시 제각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중구난방인 가치들을 조율하고 통합하여 하나의 가치로 모을 수도 있는 게 정치이며, 때로는 대립되는 가치 속에서 한쪽의 손을 들어주도록 만드는 것도 정치다.

“건전한 토론과 존중, 그리고 양보를 밑에 깐다면 정치는 사회, 혹은 조직의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높을 것입니다. 이 사회가, 인류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했어요. 마찬가지로 회사에서 생기는 정치는 혐오할 것도 아니고, 어쩌면 오히려 권장해야 할 일인지도 몰라요.”

“긍정적으로 본다면 말이죠.”

“네. 긍정적으로, 그리고 낙관적으로 말이죠. 하지만 사람이 어찌 마냥 착하고 순수하기만 할까요. 정치적 행위가 가미되면 자연히 따라오는 게 배제입니다. 편을 나누죠. 견제하고 배척하기도 하죠.”

사거리에 이르러 붉은 신호등 앞에서 택윤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주변의 차들도 서서히 차를 멈추고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신호를 받고 좌우로 달리는 차들을 바라보았다. 신나게 달리는 차들의 아래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는 어느 쪽, 어느 편에도 신호를 받지 못했어요. 누구의 편도 아니라는 뜻이죠. 저는 멈춰야만 했습니다. 만약 멈추지 않고 제 마음대로 신호를 어긴 채 앞으로 나간다면 당연히 사고가 날 테고, 전 사고를 일으킨 당사자로서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전 책임을 질 자신이 없고, 신호를 어길 용기도 없으니 신호가 바뀔 때까지 제 자리에서 기다려야 하는 거죠.”

신호가 바뀌고 택윤은 브레이크를 밟던 발에서 힘을 풀었다. 서서히 차가 앞으로 밀리고, 액셀을 밟자 힘을 얻기 시작한다.

“이건 암묵적인 룰이기도 해요. 신호만 잘 지켜준다면 길을 막지 않겠다는 룰. 주로 회색이라 불리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택권이기도 합니다.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다면 말이죠.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회색인 이상은 가끔은 소외되어도 참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전 그런 회색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조금 씁쓸할 뿐이다. 소속되어 있지만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기에 느끼는 감정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제가 이 회사에 그리 큰 애착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기도 하죠. 언제 떠나도 아쉽지 않은 마음이랄까요. 그러니 그들의 배척 혹은 배제가 달갑지는 않아도 마음 상할 일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가요.”

“솔직히 말해서, 이제 단유 씨도 이 회사에 재무 이사로 자리도 잡았으니 전 다시 예전의 센터로 돌아가도 별 상관은 없습니다. 아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아예 은퇴를 해도 나쁘진 않겠죠. 나이 50이 되기 전에 은퇴하는 건 명퇴자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단유 씨 덕분에 돈도 많이 벌었고 딸의 교육 자금이나 노후 자금도 충분하니 이대로 은퇴한들 후회는 없을 것 같네요. 차라리 그럴까요?”

“공 이사님 선택이시니 제가 왈가왈부할 수 없겠지만, 개인적인 소망이라면 이사님이 계속 제 자산 관리는 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니, 근데요. 제가 별로 하는 일도 없고, 하는 거라곤 단유 씨가 만든 프로그램 들여다보는 거 뿐인데 그게 큰 의미가 있습니까?”

“크게 도움이 됩니다.”

“어떻게요?”

“인간의 신뢰는 디지털화된 효율을 뛰어넘으니까요.”

“뭔가 꼭 기억해둬야만 할 것 같은 명언이네요.”

택윤은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

택윤의 이야기는 단유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했다. 식당에서 단유가 A&R팀장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거나 그와 말을 섞는 걸 의도적으로 기피했던 건 단지 그에 대한 불편한 심정 때문, 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단유 스스로 ‘정치’를 하고 있었던 셈이기도 했다. 요컨대 A&R 팀장을 비롯한 무리는 단유와 ‘같은 편’이 아니라는 신호를 보냈던 것.

의도는 정치가 아니었으나 정치적 의도로 읽힐 수 있는 단유의 태도를 과연 A&R팀장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단유는 고개를 흔들며 차에서 내렸다. 그에 대한 답은 단유가 내릴 사안이 아니었고 단유가 미리 걱정해야 할 문제도 아니었다.

“이사님, 안녕하세요.”

밝게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연습생들이 회사 내부로 들어가다 단유를 발견하고 인사를 하는 중이었다.

“아, 예. 식사하고 오는 길이예요?”

“네.”

“더운데 고생이 많으시네요.”

“연습실 안은 시원하니까 괜찮아요.”

까르르 웃으며 안으로 들어서는 연습생들을 지켜보다가 뒤에서 툭툭치는 손길에 단유는 택윤이겠거니 하고 돌아보았다.

“어, 대표님?”

넥타이를 푼 와이셔츠 차림으로 선 대훈이 단유를 보며 물었다.

“식사하고 왔어요?”

“네, 공 이사님이랑.”

대훈은 주차를 마치고 다가오는 택윤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세 사람은 각자의 사무실로 가기 전에 휴게실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이라 휴게실에는 커피나 음료를 마시기 위해 찾은 직원들로 가득했다.

직원들은 고위 임원인 대훈과 단유, 택윤을 보고 인사를 건네며 자리를 비켜주려 했고, 대훈은 괜찮다며 뒤에서 기다리겠노라 했다. 단유는 그럴 필요 없다며 냉장고에 든 오렌지 주스를 마시자고 권했고, 커피를 마시고 싶었지만 단유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한 대훈은 차가운 음료수병을 손에 든 채 대표실로 돌아왔다.

“이거 마시고 탈 나는 건 아니겠지요?”

“유통기한은 남았어요.”

“그 말이 아니라, 김 이사 건데 뺏어 먹었다고 직원들한테 눈총받는 건 아닌가 해서 말이에요.”

“재밌는 농담이었습니다.”

“재밌으면 웃기라도 하지 그래요?”

“웃음은 나오지 않네요.”

“나 참.”

대훈은 오렌지 주스를 열어서 한 모금 들이켰다.

“맛은 좋네.”

반쯤 남은 음료수를 쳐다보던 대훈은 시선을 돌려 택윤을 바라보았다.

“근데 공 이사님은 무슨 일 있습니까?”

“왜 그러십니까?”

“아니, 그냥 표정이, 뭐랄까 좀 무거워 보이시길래요.”

택윤은 단유를 힐끗 보더니 힘없는 웃음을 지었다.

“별일 아닙니다. 조금 전에 김 이사랑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조금 생각이 많아졌나 봅니다.”

“미래요?”

“그냥 이 나이 들면 저절로 하는 생각 있지 않습니까? 나중에 은퇴하고 나면 뭐 해 먹고 살까, 이런 거요.”

“그런 생각하기엔 너무 이른 거 아닙니까? 아직 한창이신데.”

“제가 말년에 재복이 있는지, 여기 있는 김 이사랑 대표님을 만나서 잔고가 많이 늘었습니다. 여유가 생기다 보니 빨리 은퇴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지금 은퇴해도 충분히 넉넉하신가 봅니다?”

“대표님은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다들 나이 들면 근교의 한적한 곳에 정원 달린 주택을 짓고 전원생활을 즐기는 꿈을 꾸지 않습니까? 젊었을 적부터 보통 사람은 쉬이 갖지 못할 단위의 돈들만 다루다 보니―물론 제 돈은 아니지만―어쩐지 돈에 대한 욕심이 별로 생기질 않더군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인 거고, 결국 자기가 가진 것에서 얼마나 만족하며 사느냐 하는 게 삶의 행복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지금 당장 은퇴를 결심한다 해도 딱히 미련은 남지 않을 것 같고, 이리저리 치이며 스트레스받는 생활보다는 어린 딸 커가는 모습 보면서 여유롭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부럽네요, 이사님.”

대훈이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다 김 이사 덕분이죠.”

“저도 그 덕 좀 볼 수 있을까요?”

“이미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 그렇군요.”

“더 바라면 날강도라 욕먹을지도 모릅니다.”

“아이고, 이런. 자중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단유는 괜히 민망해졌다.

“저, 지금 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만? 없는 사람 취급하지 말아주시죠?”

“하하, 존재감만으로는 이 회사 원탑이신 분을 어찌 없는 셈 칩니까?”

대훈은 기분 좋은 웃음소리로 대표실을 채웠다. 그러다 조금씩 웃음소리가 잦아들더니 희미한 미소를 띤 채, 그러나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공 이사님. 아직은 저희가 이사님을 필요로 하니까 조금이라도 자리를 지켜주세요.”

“헛말이 아니라 요즘은 제가 과연 이 회사에 도움이 되는가 싶습니다.”

“도움이 됩니다.”

대훈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에 택윤은 웃음을 지웠다. 단유를 흘깃 쳐다보는데, 그 시선을 마주한 단유 역시 대훈의 대답이 어떤 의미인지 짐작했다.

단유와 택윤 사이에 오고 가는 무언의 대화를 대훈도 눈치챘는지 몸을 앞으로 쭉 빼며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두 분 다 아시는 것 같지만, 사실 요즘 제가 많이 심란합니다. 단유 씨야 저번에 저한테 넌지시 말씀도 해주셨고, 공 이사님도 보아하니 모르지 않으신 거 같은데, 딱 터놓고 말씀드리자면···.”

대훈은 깍지를 낀 손으로 이마를 잠시 짚었다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최근 간부 회의에서의 동향도 그렇고 지금 제 위치가 조금 불안합니다.”

그렇게 털어놓던 대훈은 단유와 택윤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다고 누가 제 자리를 노린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대신 제가 대표직을 걸고 시험대에 오른 기분입니다.”

정확한 표현이라 하겠다. 대표직이 단지 허울 좋은 직위로 남을지, 아니면 실제로 영향력을 갖는 위치로 남을지가 시험받는 중이다.

“이번 웅녀 프로젝트는 그 결실을 통해 회사를 성장시키고자 하는 프로젝트이며 동시에 제 자신의 시험대이기도 합니다. 과연 이 회사에서 대표로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앞으로 이 회사를 어떻게 이끌 것인지를 구성원들에게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어떻게 성공시키느냐 하는 점입니다.”

택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잘 알고 있습니다. 원래 대표란 자리가 그렇죠. 누구는 단지 쉽게 결정만 내리면 되는 자리가 아니냐 하겠지만, 결정에 대한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으니까요.”

누구도 무능력한 대표 밑에서 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은 아직 상장을 시키지 않은 회사인 데다 대주주가 단유이고, 단유는 대훈에게 신뢰를 보내는 상태이기 때문에 대표직이 흔들릴 위험은 없지만, 향후에도 계속 그러리란 보장은 없다. 회사가 커지면 상장을 하게 될 수 있고, 주주총회가 열렸을 때, 그때에도 무능력한 대표라는 낙인이 찍혀있다면 더는 대표로서 자리를 지킬 수 없게 될 것이다.

“업계에서 구른 경험이 있다지만, 솔직히 고백하면, 그건 그저 그 위치에서나 보고 듣고 경험할 수 있었던 정도의 경험이 전부입니다.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죠.”

“누구나 처음엔 그렇게 시작합니다.”

“네. 하지만 대표라는 위치에서는 이전에 보던 것과 다른 시야로 봐야 한다는 걸 절감하는 중입니다.”

“종종 그런 착각들을 하죠. 얕은 경험으로 다 안다고 착각하는 경우들. 어느 곳에서나 있는 일입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현장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그리고 현장에서 듣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이 바닥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다 파악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대표는 ‘바닥’을 볼 게 아니라 ‘산업’을 봐야하더군요. 산업을 보고 ‘경영’을 해야 하더란 말입니다.”

“그런 고민을 하는 건 대표님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대표님은 젊지 않습니까? 약간의 시행착오, 혹은 실패,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짐을 구성원들에게 나눈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단지 실패를 발판으로 더 큰 성공을 거둬 그 과실을 구성원들에게 나눠줄 수 있도록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공 이사님은 아직 은퇴하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이야기, 충고들을 계속 해 주셔야 하거든요.”

“이런. 제가 은퇴를 생각한다고만 했지, 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분위기가 흐르네요. 어쩐지 더더욱 빨리 은퇴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데요?”

“하하, 그렇게 들으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진심입니다. 이사님이 저희와 오래,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김 이사님도 마찬가지고요. 두 분이 제 편을 들어주셔야 제가 더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유는 남은 오렌지 주스를 들이키며 대훈의 웃음소리를 귀에 담았다. 여전히 여유가 없고 쫓기는 듯한 모습. 하긴 몇 마디 말과 얼마간의 시간이 주어진다고 한순간에 여유를 찾을 리 없다. 그래도 그에 대한 신뢰를 접지는 않을 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