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905화 (905/956)

내부자들(5)

-------------- 905/952 --------------

오전 업무를 빠르게 마치고 잠깐 사무실 밖으로 나오니, 재무팀 직원들의 초롱초롱한 시선이 느껴진다. 평소에는 빛이랄 것도 없이 무덤덤하게 서류와 모니터만을 오가는 눈빛들인데, 특정 시간대만 되면 저렇게 눈빛이 초롱초롱 반짝인다. 그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시간이 되면 저런 눈빛을 띄게 된다. 단유도 학교 다닐 때 많이 보았다. 4교시 수업이 마침을 알리는 벨이 울리기 10분 전부터 엉덩이를 들썩거리거나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무언의 신호를 눈으로 주고받던 친구들의 모습들. 생생한 기억속에서 오버랩되는 직원들을 보며 단유는 피식 웃었다. 아마 당시에도 4교시 담당 선생님들은 이런 기분이셨을 것 같다.

“일 마치셨으면 점심 드시러들 가시죠?”

본래 점심시간보다 이르지만, 열심히 공부한, 아니 일한 당신들, 나가라.

허락이 떨어지자 감사하다며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지갑과 핸드폰, 부채와 미니 선풍기 등을 집어든다. 손에 들고 팔에 끼고 목에 걸면서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직원들과 함께 단유도 나섰다.

“같이 식사하실래요?”

직원들이 물었다.

“죄송해요,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아, 네.”

직원들은 엘리베이터로 향하고 단유는 공 이사의 방으로 향했다.

“벌써 왔어요?”

택윤이 목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원들 밥 먹으라고 보내고나니 딱히 사무실에 혼자 있기도 그래서 왔다고 대답했더니 택윤은 잘 했다며 단유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우리도 나가죠.”

12시까지 10분 정도 남았으니 지금 나가는 건 별로 이른 것도 아니라며 단유와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두 사람이 서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으니 다른 사무실 직원들이 나와 인사를 하고는 비상계단 쪽으로 향한다.

“우리 때문에 눈치보여서 그런가?”

“엘리베이터 기다릴 시간에 계단으로 빨리 내려갈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인지도 모르죠.”

“아, 그런가요. 그러고보니 이것도 내가 늙었다는 증거인지 모르겠네. 몇 살만 젊었으면 아무 고민없이 계단으로 갔을 텐데, 요즘은 계단 앞에서면 괜히 무릎이 시큰거리며 아플 것 같단 말이지. 단유 씨는 모르겠죠?”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나이들어봐요. 내 말이 무슨 말인지 금방 와닿을 테니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공 이사님의 말씀은 그저 엄살로만 들리네요.”

“왜요?”

“공 이사님의 나이가 이제 마흔 중반대시잖아요? 그 나이대에 무릎이 벌써 그렇게 되나요?”

“단유 씨처럼 젊었을 적부터 꾸준히 관리한 몸이면 모르겠지만, 제가 운동이란 걸 그만둔지가 벌써 20년이 넘었어요. 5분 이상 걷는 거리면 차를 타고, 일상의 대부분이 모니터 앞 의자에 앉아 있는 거다보니까 몸이 좀··· 그래요. 게다가 나잇살만 이렇게 찌니가 더 악화되는 거고. 우리 와이프가 맨날 하는 소리가 다이어트 좀 하라는 건데, 정말 이러다가 50 되기도 전에 지방간으로 쓰러질 것 같다는 불안감은 있네요.”

“자택에서 가까운 곳에 헬스 클럽이라도 있으면 다니시지 그래요?”

“그럴까봐요. 이제부터라도 관리 안하면, 정말 노년에 힘들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해요.”

“여름에는 보양식이죠.”

두 사람이 차를 타고 향한 곳은 전복돌솥밥으로 유명하다는 식당이었다. 그 집에서 나오는 돌솥밥은 물론이고 전복구이가 일품이라며 택윤은 엄지를 치켜들었다.

건강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식당에 도착할 때까지도 택윤의 입이 쉬지 않았다. 아무래도 최근의 주 관심사였던지 건강관리에 대한 민간요법부터 각종 운동법, 몸에 좋다는 약들에 대한 이야기들과 각종 건강식에 대한 화제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특히 여름에는 땀을 많이 흘리니까, 젊은 사람들은 상관없을지 몰라도 나이든 사람들은 조금만 땀을 흘려도 몸의 기운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거든요. 그래서 여름에는 이렇게 보양식들을 자주 찾게 되요. 먹어봐요. 맛있으니까.”

“이사님 덕분에 또 맛집 하나 알게 되었네요.”

가게는 의자에 앉아 식사를 할 수 있는 입식 테이블과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좌식 테이블이 같이 있었는데, 택윤은 좌식 테이블 쪽을 선호했다. 맛집이라는 말처럼 손님들이 적지 않았는데, 다행히 안쪽에 좌식 테이블 한 자리가 비어있어 두 사람은 그곳으로 향했다.

자리를 잡고 대충 둘러보니 다소 허름해보였던 가게 외관과 달리 내부는 꽤 깔끔하고 정갈한 이미지였다. 메뉴도 몇 개 되지 않아서 단촐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고르는데 선택장애 따위를 일으킬 일은 없어 보였다.

“그동안 제가 알려준 맛집이 좀 많지 않았어요? 제가 이 쪽으로는 많이 압니다. 젊은 사람들이 데이트를 즐기기에 좋은 맛집도 아는 곳이 많으니까 필요하면 물어보세요. 얼마든지 대답해드릴게.”

가게 안을 구경하던 단유가 택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데이트요?”

“단유 씨 나이도 있는데 연애도 할 거 아니예요? 왜요? 생각 없어요?”

“아니, 딱히 없다기보다는···. 그런데 지금 이사님의 분위기가···.”

단유가 말끝을 흐리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는 택윤.

“분위기가 왜요?”

“예전에 저한테 이사 자리를 권하실 때랑 비슷해 보여서요.”

택윤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저는 그저 단유 씨가 잘 됐으면 하는 바람인거죠.”

“그것도 그렇지만, 어쩐지 이사님 뒤에 익숙한 그림자가 느껴지는걸요?”

“···하하하.”

어색한 웃음 뒤에 택윤은 순순히 시인했다.

“얼마 전에 원장님께 전화가 왔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잘 부탁드린다고 하시더라고요.”

“이러다가 나중에 소개팅까지 주선해주시는 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단유는 테이블 옆에 비치된 수저통에서 수저를 집어 택윤의 앞에 놓아주었다. 한참 더운 때라 그런지 택윤은 티슈를 집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다행히 가게 안에 에어컨을 틀어놓아서 조금만 참으면 괜찮을 듯 보였다.

“원하시면 당장이라도 해드리죠. 아시겠지만, 제가 센터장으로 있는동안 인연이 닿은 분들이 많거든요. 그리고 그분들에게도 남부끄럽지 않을 여식들이 계시니까, 요청만 하시면 언제라도 좋은 자리 마련할 수 있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고맙네요. 하지만 정중히 부탁드리는데, 부디 그런 자리는 앞으로도 마련해주지 마세요.”

곧이어 주문한 돌솥밥이 나왔다. 이열치열이라지만, 시원한 에어컨 아래 뜨거운 돌솥밥의 언밸런스는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속으로만 감추며 숟가락을 들었다.

“왜요? 부끄러우세요?”

“그런 것도 있죠.”

“처음에는 다 부끄럽다고 합니다만, 익숙해지면 별 거 아닌 일입니다. 어렵지도 않아요. 비슷한 나이대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데 뭐가 어려워요? 그냥 만나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혹시 모르잖아요? 정말 마음에 맞는 상대를 만날 수도 있는 거고.”

“···말씀하시는 바를 보니 이미 어느 정도 추진이 되던 중이었던 모양입니다?”

단유의 시선에 당황하며 손을 내젓는 택윤.

“아뇨, 아뇨. 그렇진 않아요. 제가 어디 마음대로 그런 일을 합니까?”

‘마음대로’에 강조를 둔 택윤의 변명에 단유는 눈썹을 찡그렸다.

“선생님이랑 협의 중이셨던가요?”

“어, 뭐···, 그건 나중에 따로 시간내서 이야기를 다시 하도록 하죠.”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돌솥밥을 숟가락으로 휘적휘적 저어 김이 빠지도록 했다.

“도대체 선생님은 왜···.”

“다 단유 씨를 걱정해서 하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저랑 통화할 때는 그런 이야기 잘 안 하시는데, 이사님이랑 통화할 때만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이야기가 길어지면 제대로 식사를 하기가 곤란할 것 같아, 택윤에게 먼저 수저를 뜨도록 권했다.

“단유 씨가 이런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걸 아시니까 일부러 피하시는 거겠죠. 나야, 전에도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단유 씨에 대해 걱정과 기대를 하고 있다는 동일한 입장이니까,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는 거고.”

단유는 뜨거우니 조심하라는 경고를 한 후, 돌솥밥을 한 술 떠서 입에 넣었다. 김을 충분히 뺐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뜨겁긴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아도 맛을 잘 모르는 단유였지만, 뜨거운 음식은 더더욱 맛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뜨거운 걸 잘 먹어야 한다며, 택윤은 잘만 먹는데 단유는 다음 숟가락을 뜨기가 쉽지 않다.

물로 입 안을 식히기 위해 물컵을 집던 단유는 문득, 가게로 들어오는 일련의 무리와 눈이 마주쳤다.

“어?”

단유의 시선을 따라간 택윤이 손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상대편도 그 시선을 받고는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사님이 여기는 어떻게?”

앞장 서 다가온 이는 다름아닌 A&R팀의 팀장이었다. 택윤은 허허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어떻게는요. 밥 먹으려고 왔죠. 팀장님들도 식사하러 오신거죠?”

“이 집이 유명하다고 해서 한번 와 봤습니다만,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네요. 벌써 음식을 시켜셨네요. 맛은 괜찮습니까?”

“우리도 이제 막 음식을 받은 참이라 몇 숟갈 뜨지 않았는데, 나쁘진 않은 거 같아요.”

“그렇군요. 그런데 자리가···.”

마침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단유의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일어서고 있었다.

“아, 여기 앉으면 되겠네요. 괜찮지?”

뒤따르던 신인개발팀장과 홍보팀장이 씩씩하게 웃으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여기 자리 좀 치워줘요, 홍보팀장이 점원을 부른 뒤 곧바로 A&R팀장에게 먼저 착석을 권했다.

그렇게 나란히 앉게 된 두 팀. 그렇지만 단유네가 먼저 식사를 시작한 터라 따로 무리하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세 팀장들은 처음엔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곧 업계의 동향이나 부침 따위를 논하고, 방송국에 관한 이야기에서 정계에 관한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단유 쪽이 너무 조용하다 싶었는지 A&R팀장이 슬쩍 말을 걸었다.

“듣기로 공 이사님이 강남에서 꽤 유명한 센터장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유명은 무슨. 그냥저냥 했어요.”

A&R팀장은 자신의 아는 지인에게 들었는데 지나치게 저평가된 물건이 있어 투자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노라 이야기했다. 지방섬유업체인데 그쪽 방면으로는 인지도도 있고 기술도 꽤 튼튼한데다 조만간 큰 수주를 받을 예정인데 이 때문에 공장을 확충하려 한다고, 그런데 당장에 든 돈이 부족해 증자를 할 예정이라고, 그러니 이 참에 투자를 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들어본 회사입니까?”

“들어본 적은 있죠.”

“어떻게, 투자를 해도 괜찮을까요?”

“글쎄요, 최근에는 제가 그쪽으로 알아본 바가 적어서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전문가시니까, 저희같은 일반인들보다는 더 많은 걸 아시지 않을까 해서 여쭤봤습니다. 혹시 좀 알아봐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제가 상담료는 두둑히 챙겨드리겠습니다.”

“흠, 아니 뭐 굳이 상담료까지야···.”

“같은 식구지만 그래도 공과 사는 구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하는 내내 입꼬리가 내려올 틈을 보이지 않는 A&R팀장이었지만, 단유의 눈에는 너무나 사무적인 웃음이라고 느껴졌다. 하긴 직급상 상사이니 사무적일 수밖에 없을지도.

“시간 내서 알아봐 드리죠.”

“감사합니다. 이사님.”

“저희는 이만 식사를 끝내서···.”

“그냥 가십시오. 계산은 제가 해놓겠습니다.”

“아뇨, 저희가 먹은 건 저희가 계산해야죠. 게다가 오늘은 제가 김 이사한테 한턱 쏘기로 한 날이라.”

“다음에 쏘시면 되시죠. 오늘은 제가 두 분께 한 턱 쏘겠습니다.”

A&R팀장의 눈짓에 신인개발팀장이 벌떡 일어나 두 사람을 문까지 배웅했다.

“아니, 뭘 이렇게 나와요. 가서 식사해요.”

“괜찮습니다. 두분, 살펴 가십시오.”

너무 오버하는 것 같아 오히려 불편한 느낌에 택윤은 볼을 쓰다듬으며 돌아섰고, 단유는 그런 팀장을 힐끗 바라본 후 택윤의 뒤를 따라갔다.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오를 때까지 입을 열지 않는 단유의 모습이 의아했던지 택윤은 시동을 걸며 물었다.

“무슨 생각해요?”

별일 아니지만 단유는 그 세 사람에 대해 생각중이었다. 세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 때, 특히 A&R팀장과 시선이 맞닿았을 때 단유는 그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황야에서 사냥감을 찾은 하이에나가 지을법한 눈빛이었다. 즉, 자신이 그의 사냥감이었다는 이야기.

가끔 느끼곤 했다. 어릴 때부터 단유가 자신보다 어리다는 이유로, 그를 자신의 뜻대로 조종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보이던 눈빛.

가볍게 목례로 그들과 인사를 나눈 후, 단유는 단 한 번도 그들에게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A&R팀장이 식사 중간에 단유를 부르려는 게 느껴지면 정확히 그 타이밍에 택윤에게 ‘맛은 어떠세요’나 ‘물 좀 더 드릴까요’ 같은 말을 걸며 팀장의 시도를 무산케했다. 그 교묘한 타이밍을 팀장이 고의라고 생각했을지는 모르나, 단유는 식사하는 내내 그쪽으로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고, 때문에 팀장은 단유 대신 택윤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마치 준비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택윤에게 상담을 의뢰했고, 그것으로 조금의 관심이라도 끌어보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설 때, 인사를 하기 위해 다시 눈을 마주친 것을 제외하곤 일체의 눈맞춤이나 대화를 피했다.

자신을 어떻게 해보려는 A&R팀장의 수작 때문만이 아니라도 그와 이야기를 섞고 싶지 않은 이유는 또 있었다. 원래 있었다기보다는 중간에 생겨버렸다.

‘같은 식구지만 공과 사는 구별’하자는 그의 말에서 이질감을 느낀 탓이다. 그는 택윤을 같은 ‘식구’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택윤이 단유의 요청으로 들어온 외부인사라 하더라도 직급상 상사인데다 함께 한 지가 벌써 1년이다. 물론 택윤의 이력을 고려해 ‘투자 상담’ 정도는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앞에서 ‘상담료’를 언급하며 ‘두둑히 챙겨주겠다’는 등의 발언은 경솔했다고 단유는 생각했다. 그런 경솔함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배경에는 택윤을 ‘같은 식구’ 혹은 ‘같은 편’으로 생각하지 않기에 나오는 말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예민하게 받아들일 필요 없어요.”

택윤은 단유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흔들지만, 표정에 떠오른 씁쓸함은 감추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