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92화 (892/956)

낙서(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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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지금 되게 불안해. 드라마나 영화에서 섭외가 들어오는 것도 없고, 오디션을 보고 싶어도 회사에서 제대로 컨펌을 해주지 않으니까 마음대로 하지도 못 하고. 이러다가 정말로 대중들에게 잊혀지는 건 아닌지 불안하고.”

입술을 잘근 씹는 유진을 보니 하루 이틀 고민한 게 아니란 것은 분명해보였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당장에 회사를 나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

“왜?”

“계약 때문에.”

“계약은 해지하면 된다던데?”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냐. 어느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해지를 요구해도 상대가 들어주지 않으면 법정 싸움으로 가야 하는데, 그 결과를 장담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 싸움으로 인해 내가 손해를 볼 가능성도 크단 말이야. 어쩌면 향후에 연예계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을지도 모르고. 만약 연예계를 완전히 떠날 마음이라면 모를까.”

“대표님께 듣기로는 법적인 문제는 우리 회사에서 처리해 줄 수 있다고 하던데.”

“대훈 오빠나 너나 잘 몰라서 그래. 우리 회사 의외로 이런 소송에서 쎈 편이야. 이전에도 이런 일들 몇 번 있었지만 거의 90% 이상의 확률로 회사가 이겨. 그런 모습을 계속 지켜봐왔으니까, 쉽게 선택할 수 없는 거야. 게다가 나만 문제가 아니고 어쩌면 소송을 대리해주는 회사에도 불이익이 갈 수 있어. 대훈 오빠나 너한테 피해주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야.”

바닥을 향해 고개를 떨군 유진을 가만히 지켜보던 단유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깍지 낀 두 손을 배 아래로 두고 말없이 지켜보고 있으니 유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단유를 바라보았다. 달리 대꾸가 없는 단유의 모습이 의아했던지 유진이 ‘왜’라고 물었다.

“불안하다는 말은 진실. 대표님께 피해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진실. 하지만 연예계를 떠나고 싶지 않다는 말은 불확실.”

단유의 말이 이어질수록 유진의 눈이 점점 커져갔다.

“무엇보다 회사를 나오고 싶어하는지가 불분명. 모호한 진실이 뒤섞여 갈등 중. 이렇게 보이는데?”

“······.”

“널 만나러 오기 전에 대표님께도 말했어. 널 설득하러 가긴 해도, 만약 네가 진심으로 회사를 떠날 마음이 없다거나 한다면 너를 설득하지 않겠다고.”

“······.”

“진심을 말해줘. 그래야 정말로 도울 수 있는지, 만약 돕는다면 어떻게 도울 지를 결정하지. 만약 도움이 필요없다고 한다면, 뭐 그래도 가능한 수준에서 돕긴 할 거야. 친구니까.”

“······.”

단유는 유진이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주겠다는 듯 입을 닫았다. 두 사람이 입을 다물자 괜히 카페 내에 흐르던 노랫소리가 커진 기분이었다. 예영이 일부러 단유를 위해서 튼 것인지, 아니면 최근에 나온 노래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침 시은이 부른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아가 작사를 맡고, 창모와 그의 팀이 작곡 및 편곡을 담당하여 나온 노래. 꽤나 성적이 좋았다고 들었는데, 부끄럽게도 단유는 소속 아티스트의 노래 임에도 자주 듣지 않았다. 가끔 사내 부서들을 돌다가 우연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긴 했지만 부분부분 들을 뿐이어서 이렇게 집중하여 듣는 건 최초 곡이 나왔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시은의 목소리는 청아한 미성과 원숙한 탁음의 중간 쯤이었다. 오락가락하기 보단 자연스럽게 곡의 흐름을 주도하는 악기로서의 역할이 커 듣는 이들에게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 묘한 음색과 타고난 리듬감이 어우러져 노래의 맛을 살린다는 평을 듣는다던데, 과연 이렇게 가만히 듣고 있으니 템포가 다소 빠른 곡임에도 듣기 부담스럽지가 않다.

‘지금보다 내일이 더 빛날’ 가수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는데, 확실히 좋은 가수라는 느낌은 들었다. 노래를 열심히 찾아 듣는 편이 아닌 단유임에도 시은이 과거에 불렀던 노래들을 한 번 찾아볼까, 생각하게끔 만든다.

다시 말해, 단유는 지금 유진에 대한 평가를 보류하는 중이었다. 유진이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스스로 입을 열어 말하기 전까지, 그녀에 대한 단유의 평가는 스스로 자제하려 했다. 때문에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노래에 더 집중하고 있던 단유였다.

그런 단유의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유를 힐끔거리는 유진의 입은 쉽게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거친 숨소리를 주고받다 보면 굳이 말을 섞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12라운드까지 주먹을 섞은 복서들이 헐떡이며 서로를 바라볼 때, 그들은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고들 한다. 살을 맞대고 샅바를 잡은 채로 모래 경기장 위에 선 씨름 선수들 역시 말을 섞거나 얼굴을 마주 보지 않아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단다.

“너무 만화적인 표현 아닌가요?”

지윤이 뼈 부러진 사람마냥 고개를 모로 떨구고 몸을 흔들며 지쳐있음을 온 몸으로 표현하는 중이다.

“지금도 난 니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있거든? 당장 아무데나 누워서 자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건 저만 아니라 다른 애들도 다 똑같을 걸요?”

레슨을 담당하던 강사는 오른쪽 입꼬리를 삐죽 올리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너 옆에 있는 보민이 봐라. 더 배우려는 열정이 활활 타오르잖아?”

“얘는 원래 에너지가 넘치는 애라고요. 게다가 전에 병원에 있는 동안 쌓인 에너지가 얼마나 넘쳐나는지 지금은 써도써도 남아돌 지경이라고요.”

“에휴, 언니씩이나 돼서 동생들 보기 부끄럽지 않니?”

“동생들아, 내가 부끄러워?”

시화와 경빈이 어깨를 맞댄채로 지윤에게서 멀어지자 지윤이 오리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며 눈을 흘겼다.

“반대로, 지윤아. 내가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알겠니?”

“모르겠는데요, 아니, 알겠어요.”

“뭔데?”

“이 거 어떻게 잡도리해야 할까 궁리중이시죠?”

“잘 아네. 그럼 널 어떻게 잡아야 네가 정신 차릴까?”

“내일하면 안 될까요? 정말 오늘은 너무 지쳐서 더는 못 움직일 거 같아요.”

“지윤이 너 가수 지망이지?”

“···네.”

“그럼 나중에 뮤지션 클래스로 옮겨도 나랑 계속 만나겠지?”

“네.”

“그때도 이러면 내가 너한테 어떤 점수를 줄 거 같니?”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지만 강사는 지윤이 일부러 저런 행동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연습실 내에서 지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강사도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몇 번이고 같은 동작을 보여주면서 지쳐 있는 판국인데, 하물며 강사보다 몇 배로 격하게 움직이며 동작을 반복하는 아이들이 지치지 않을 리가 있나.

그럴 때면 늘 지윤이 나섰다. 동생들이 쉽게 지친 티를 내지 못하고있을 때 적절한 타이밍에 튀어 나와 스스로 욕을 먹는 걸 자처하면서 동료들이 쉴 틈을 주는 것이다.

그런 마음 씀씀이를 티내지 않고 실천하는 지윤이 강사는 싫지 않았다. 오히려 적당히 맞춰주면서 자신도 쉬고 아이들에게도 숨 돌릴 틈을 준다.

하지만 언제까지 쉬기만 할 텐가. 속된 말로 돈값은 해야지 않겠나?

“자, 다시 자세 취하고.”

“아이고, 나 죽겠네.”

지윤의 엄살에,

“포인 제대로 안 하면 한 시간 연장한다?”

곰살맞은 성격이 아니라 강사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고 수업을 진행한다.

‘돈값?’

물론 돈도 중요하다. 돈을 벌 수 없다면,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목이 쉬도록 박자를 카운트하고 다음날 몸살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안무를 가르치는 일은 하기 힘들다.

그러나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눈앞의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돕는 일이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아이들과 하루하루를 함께 하며 그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을 즐거웠고, 그들이 데뷔하여 스타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간절함으로 따지면 본인들의 그것과 비교도 할 수 없겠지만,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그녀들과 숨소리를 주고받으며 지내다보니 그녀들의 각오와 간절함에 감정이입이 되는 강사였다. 그래서 그녀들이 성공하여 기뻐하면 곧 자신의 기쁨이 될 것만 같았다.

엄마들이 자식들을 보는 기분이랄까? 어쩌면 오래전, 방황하던 그녀를 상담실에 앉혀두고 손을 붙잡던 선생님이 이런 기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강사는 머리를 잘게 흔들었다. 지금은 감상에 젖어 추억을 되새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오롯이 아이들에게 집중하고 그녀들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성장하도록 도와야 한다.

“시율아! 손 내려가잖아! 아름이 너, 무릎 안 굽힐래?”

목이 쉬고 눈이 빠질 정도로 피곤하더라도 지금은 게으름 피우지 말고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모두 눈에 담아야 할 때였다.

****

단유는 유진을 눈에 담은 채로 계속 침묵을 지켰다. 시은의 노래가 끝나고도 몇 곡의 노래가 더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그 침묵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는지 유진이 결국 입을 열었다.

“말 못해.”

“왜?”

“너한테는 못해.”

“그러니까 왜?”

“말하기 부끄러워.”

“죄 지었어?”

“그런 건 아니지만···.”

유진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신이 입을 여는 순간, 그 사실로 인해 단유가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지 두려웠다.

그리고 단유는 그녀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그 감정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떤 가정법을 머릿속에 세워보아도 그녀가 단유를 두려워할 이유는 찾을 수 없었던 탓이다.

설령 그녀가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단유는 먼저 경찰에 신고한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와의 우정이, 명수와의 우정에 버금가는 정도는 아닐지라도, 결코 가볍지 않기에 단유는 그녀를 지켜줄 용의가 있었다.

자신의 입술이 헤지도록 오물거리던 유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그냥, 나는, 갈 수 없어.”

“불안하다며.”

“불안해도, 그래도 여태껏 회사에서 받은 것도 많고, 언제까지 지금 상태가 지속되지는 않을 거야.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그렇다고 지금 내가 해지를 해버리면 배신이 되는 거니까, 배신자의 이미지가 씌어지면 앞으로가 더 힘들어질거야. 그러니까, 일단은 참아볼게. 전에도 나 힘들 때 있었지만, 참고 견디니까 좋은 기회가 왔었어. 이번에도 그럴거야.”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무작정 참는 게 다는 아니라고 본다.”

“알아, 나도. 그래도 참아 볼게.”

그렇다면 여태 말했던 건 다 뭐란 말인가? 불평 불만을 가슴에 쌓아둔 채로, 언젠가는 좋아질 테니 참아 보겠다고? 그 언제가 언제일지는 스스로도 확신이 없으면서? 유진은 자기가 말하고서도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하면, 이기적인 걸까?

“그래도 너한테 털어놨더니 속은 시원하네.”

그때, 단유는 몸을 앞으로 굽히며 깍지 낀 손으로 탁자를 가볍게 쳤다. 탁, 하는 소리에 유진이 움찔하며 단유를 바라보자,

“지금 한 말은 완벽하게 거짓.”

“···야, 네가 무슨 거짓말 탐지기라도 되니?”

“스무고개라도 해야 하나?”

단유의 중얼거림을 제대로 듣지 못한 유진이 뭐? 라고 되물었으나, 단유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지금 회사를 옮기고 싶은 마음은 정말 있어?”

“뭐, 그게···사실 그런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 불만 없는 사람이 어딨겠어.”

눈동자의 움직임, 단어를 이어 문장을 만드는 유진의 목소리의 떨림.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머리에 담는다.

“좋아, 혹시 네가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단지 계약 때문이야?”

“그, 그런 셈이지.”

더듬거리는 모습. 몇 가지 단어들을 좀 더 주의해서 조합해보면 되려나? 단유는 빠르게 생각을 마치고 질문을 던졌다.

“흐음. 회사에 혹시 빚 같은 거 있어?”

“빚은 무슨. 그런 거 없어.”

유진을 직시하는 단유의 눈동자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나올 때는 좀 더 빠르게 질문을 던져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금전적인 빚 말고 다른 빚은 없어?”

“···없어, 그런거.”

진실과 거짓, 혹은 거짓 속에 감춰진 2%의 진실을 헤아려본다.

“배우 활동은 계속 할 거야?”

“해야지. 어릴적부터 가졌던 꿈인데. 얼마나 힘들게 이룬 꿈인지, 너도 알잖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평상심을 가장하려해도, 굳어버린 얼굴의 표정과 긴장으로 굳은 목의 근육이 단유의 시야에 포착된다.

“만약 회사를 이전한다면 우리 회사로 올 생각은 있고?”

“당연하지? 대훈 오빠랑 네가 있는 회산데, 안 가고 싶겠어? 정말이야.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같이 일하고 싶어. 그럼 얼마나 편하고 좋겠어.”

하아. 단유는 굽혔던 몸을 펴며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 변화에 유진의 얼굴이 또 굳어지고 눈빛에 두려움이 깃든다.

단유는 머릿속으로 몇 가지 사실들을 조합해보고, 추론할 수 있는 몇 가지 가정들을 나열해 본다.

그리고 그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는 틈에 유진은 긴장으로 목이 매이는지 헛기침을 하고, 탁자 위에 놓아둔 물을 찾는 손이 컵을 더듬는다.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일 때, 단유의 눈이 다시 뜨이며 유진과 눈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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